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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친화력 - 신화, 구원, 희망 ㅣ 새로운 질서 1
발터 벤야민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괴테의 친화력> 이 서적을 읽는 순간,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은 발터 벤야민이란 문학평론가 혹은 철학사상가의 괴테에 대한 친화력으로 오판했다는 사실이다. 부제처럼 “신화, 구원, 희망”이란 3가지 단어로서 벤야민이 괴테라는 독일의 위대한 문학가에 대해 어떤 식으로 풀어가고, 그의 작품들이 지금 살아가는 자신에게 어떤 방식으로 돌아오는가를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괴테의 친화력은 괴테가 문학도로서 우리에게 친화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괴테의 작품 중에서 <친화력>이란 작품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면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등과 같은 괴테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은 독자로선 이 책의 서평을 적어가는 것은 말 그대로 모험이 아닌가 싶다. 아니라 차라리 번역자가 발터 벤야민의 문필을 번역하는 것에 치중하기보단 번역자가 발터 벤야민의 사상으로 통해 보는 한국사회에 대한 고찰이 훨씬 나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었다. 벤야민이란 사람은 기본적으로 문예이론에 대한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프랑크푸르트대학교의 사회문제연구소의 학자들과 빼놓을 수 없는 관계였다.
오죽했으면 최근에 내가 읽어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에서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하버트 마르쿠제 등과 같은 철학자 이름 위에 발터 벤야민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사상가와 철학자로서 벤야민을 추구하던 프랑크푸르트학파보단 여기서는 오히려 문학비평가 발터 벤야민을 읽는 점에서 번역자의 초반서문에 내가 더 집중했다는 사실만으로 주객전도(主客顚倒)도 일어난 점이다.
그런다고 하여 이 책을 보는 것에서 비록 <친화력>이란 소설을 읽지 않음에도 낯선 느낌을 받지 않음은 그 이전에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이란 도서를 봤기 때문이다. 문예이론에 대한 연구도서에서 근대문학가인 프란츠 카프카, 마르셀 프루스트 등의 작품을 소개하고 거기에 대한 비평을 했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비평은 상당히 깊숙하게 사물을 바라보고, 소설이란 문자텍스트를 마치 살아있는 그림처럼 생생하게 글로서 나타낸다. 그의 비평가로서 역할을 단순히 작품을 신격화 내지 깔아뭉개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자체를 살아있는 화산으로 발휘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벤야민의 글을 적는 습성이 당연히 <괴테의 친화력>에서 빠져 나올 리가 없다.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문예이론의 경우 작품에 대한 비평은 전체적인 장에서 1가지의 장일뿐이나 괴테의 친화력은 오히려 그 작품에 대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벤야민의 문학비평에 대한 부분을 여기서 잘 드러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단지 아쉬운 점은 <독일비애극의 원천>까지 읽어봤다면 그의 문학적 세계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벤야민에 관하여 저술한 기존의 도서들은 그를 문학비평가보다 오히려 철학자와 사상가로 보았다. 물론 문학비평에서 철학이나 사상이 배제될 수 없겠지만, 중심점은 분명히 문학보다 사상이란 점이다. 그런 점에서 괴테의 친화력은 벤야민의 관점에서 괴테의 작품뿐만 아니라 괴테의 인생과 주변 인물간의 관계까지 고려하여 그의 작품이 어떻게 변해 가고 있는지 고찰한 점이다. 잊을 수 없는 점은 벤야민의 친구 여동생과 나눈 편지에서 그 편지내용으로 통해 괴테의 문학적 방향까지 잡아나가는 부분은 왠지 모르게 놀라운 부분이었다.
대개 어느 인물이 다른 사람들과의 편지로 통해 그의 인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지만, 그 편지로 통해 그의 변화까지 보려고 한 점에서 세세한 관찰력이 돋보인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작품 속에서 인물의 동작과 행위, 어떤 사물과 그 배경, 건물까지 완벽한 하나의 서사를 이룬다고 보았다. 작은 행동이 후에 미칠 영향을 보고, 그것이 하나의 상징성으로 떠오른 점이란 점에서 벤야민의 주제설정은 독특했다. 단지 아쉬운 점은 이 소설과 괴테의 다른 작품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상세한 의미를 발견하기가 곤란했다.
단지 알 수 있는 점은 벤야민이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 정도를 아주 조금 알아갔다는 정도만 만족해야할 점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주객전도가 되어버린 이 서적에 담긴 벤야민의 문학적 감각보다 벤야민이 바라보는 정치, 문화, 사회에 대한 감각이 더 이끌린다는 점이다. 옮긴이의 서문을 찾아보면,
“결단 없는 선택은 인간을 희생의 제물로 만들지만 ‘죽음에의 도약’에 의해 매개된 사랑의 구원은 우주를 바꾸어 놓는다..(중략), ‘결단 없는 선택은 인간의 희생으로 이어진다.’는 명제는 실제로는 현대의 대의 민주주의 맹점을 가장 잘 지적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에 벤야민의 이 명제가 가진 의미는 단순히 사랑에 대한 해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결단 없는 선택’은 결국 결단을 위험 하는 ‘독재정치’와 지근거리에 있게 되는데, 그것은 이미 나치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난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대중 민주주의의 핵심적 비밀을 가리킨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현대 민주주의는 헤겔의 말을 빌리자면 ‘죽음에의 도약’이라는 결단을 포기하고 대신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환상을 먹고사는 희생제의의 체제인 셈이다.”
번역자의 벤야민으로 통해 보는 현대사회의 전체주의적인 민주주의 맹점은 다시 나온다. 인터넷으로 우리는 id를 입력하라고 한다. id란 즉 아이디라고 하여 우리의 이름이기도 하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으로 보면 이드라는 것이다. 욕망으로 가득한 인터넷 세대에서 우리는 정작 민주주의라는 대의에서 민주주의가 아니라 언어폭력과 구분짓기 그리고 이원화의 갈등으로 통해 보는 테러리즘이 오히려 민주주의가 되지 않은가 싶다. 독재자가 죽을 때 결단 을 내리기만 한 민주화 시대인물들은 오히려 그 민주주화란 유령에 얽매이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퇴보했는지 모른다.
이 책에서 서거한 故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추모보다 그의 죽음으로 통해 보는 우리 사회의 폭력 속에 가려우진 민주주의, 혹은 주인이 없는 노예라는 정치적 투쟁가를 비판한다. 물론 그것이 벤야민이 파시즘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그런 관점이 다소 문학비평 속에 녹아있다고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괴테의 친화력을 돌아보는 점은 뭔가 모르게 멀지 않은가 싶다. 물론 역자 역시 너무 멀리 나가지 않았는가? 라는 의문을 보내나, 적어도 벤야민의 서적으로 벤야민에 대해 알려면 그의 사상을 조금 염두할 필요가 있다. 벤야민 역시 파시즘을 비판한 지식인이면서 독일의 나치즘을 피해기 위해 국경을 넘어가던 도중 그 꿈이 좌절되어 스스로 자살한 인물이다.
그런다고 <괴테의 친화력>을 읽으면서 너무 괴테만은 생각하지 말자. 첫 장부터 시작하자 조금 후에 매우 익숙한 인물과 그의 서적이 나온다.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력 비판>부터 하여 다른 도서가 소개된다. 칸트의 입장에서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기에 남녀 간의 성적 행위를 두고 동물적인 요소가 강하게 보는 모양이었다. 기본적으로 괴테의 친화력은 괴테 서적만 보고 해결될 도서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