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 전혜린 에세이 2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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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도서관에 가면서 내가 계획하여 빌리려던 서적들을 찾으러 갔으나, 아쉽게도 다른 사람이 이미 대출한 상태였다. 아쉬운 마음으로 그 책이 꽂혀있던 자리를 서성이면 그 책이 본래 꽂힌 자리의 옆과 위아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내가 은연중에 집어들은 책이 있었다. 그것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그리고 장 자크 루소의 <식물사랑>,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이 작가의 책을 읽고 또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서적이 있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었다. 왜 나는 이 책을 빌려 읽으려 했는가?

 

어제 퇴근 후 방에 홀로 이불속을 누비며, 전혜린 교수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은 후에 갑자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단순히 이 책을 빌릴 것이란 의도는 없었다. 단지 내가 찾으려고 한 책이 없었고 그 옆에 카뮈의 책이 있었던 것이다. 카뮈를 책을 보니 당연히 니체의 서적을 다시 보기로 했다. 예전에도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을 읽어보았지만 니체의 필력을 수용하기에는 나의 세계가 좁았다. 물론 지금도 좁고 좁아 일상적으로 신경질도 잘 내기도 혹은 아무 말도 없이 있기도 한다. 보통사람들도 이런 나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각각의 심정의 표출기복이 다를 것이다.

 

도서관에서 바로 카뮈와 니체의 서적을 빌리게 한 전혜린 교수의 또 다른 책인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를 읽었다. 같은 저자의 책을 이틀 연속으로 읽으면서 책의 내용은 어제 읽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쪽이 좋은 것 같았다. 중복된 내용도 있던 점과 전에 나온 도서가 전혜린 교수의 깊은 정신력을 훨씬 더 잘 묘사했기 때문이다. 후자의 편도 그러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자만큼 깊기보단 순간적 기록들이 많았다. 어떻게 보면 전혜린 교수의 진짜 심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전자에 비해 후자에는 전자에 가려진 남편의 이야기가 잠시 나온다. 그의 이름은 철수였다가 어느새 T가 되었고, 뒤에는 정화 부(父)가 되었다. 남편의 존재가 정화로 통해 철수라는 이름을 가진 실존적인 존재에서 정화의 소유물적인 이름으로 변해갔다. 아니라면 T, 이것은 마치 주변에 지나가는 이름 하나에 불과한 것인가? 서로 사랑한 대상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함이 크게 보인다. 전혜린에게 유학시절 동생인 채린, 남편이었던 철수, 그리고 친구 주혜, 이 세상에 3명의 친구만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던 전혜린의 심정이 이렇게 변해가는구나 느꼈다.

 

임신과 더불어 그 임신에서 죽음의 두려움은 상당히 깊은 고뇌로 풀어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놀란 부분은 그녀의 죽음과 생의 공포였다. 죽음의 공포보단 삶에 대한 공포가 더 무섭다. 이 모든 허무와 어지러이 보이는 세상 속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그녀의 욕망은 자살이 결국 모든 것이 해방인가? 너무 극단적일 수밖에 없는가에서 오늘 <이방인>으로 통해 읽어본 후에 그녀에게 실존주의자로서 죽음이 직면해야 그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죽음이야 말로 삶의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느낌이다.

 

모르겠다. 예전에 오타쿠들의 성지라고 불리는 가이낙스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에 나오는 매우 섹시하고 글래머 여자박사인 포트만이 회의에 가득한 대사가 생각난다. “나도 어렸을 적에는 정말 겁쟁이이었어. 어른이 되기 전에 세계가 멸망하는 게 아닌지 매일 걱정이었어. 그래서 어른이 되어 다른 의미로 겁이 났어. 이 세계는 추하게 썩어가며 그런 주제에 영원히 이어진다고 깨달았기에...” 대사를 보면 왠지 모르게 전혜린 교수의 심정을 다시 보는 기분이다.

 

삶에 대한 공포 그것은 아무런 정신과 영혼도 없이 그저 그런 흘러가는 세속에 젖어 권태에 사로잡혀 살아야 한다는 공포, 그래서 그 공포에 의해 억압감을 받는 자는 허무함에 자신을 빠져들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 것일까?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라는 애니메이션은 현재의 추한 문명 속에 억압된 에로스를 보존하느냐? 아니면 타나토스라는 모든 죽음으로 통해 새로운 에로스로 꽃을 피우는가? 선택은 자신의 고뇌를 안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모두 자아를 잃고 가느냐이다.

 

그런 비극적인 상황은 연속은 아마 교육이란 집단적 사회의식인 모양이다. 교육은 필요하나 그 교육의 의미에서 무엇이 맞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내가 가장 어른들이 새롭게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착하게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 세상의 빛이 되어라.”로 꼽는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착하게 바르게 빛이 된다는 말인가? 자신들의 고정된 사회권위에 대한 종속인가? 물론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 오이디푸스의 미래다. 하지만 그 오이디푸스에게 자연으로 돌아갈 길을 막는다.

 

전혜린 교수의 아이에 대한 가치관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학교 점수는 아이의 장래에 대해 말해 주지 않는다. 그것은 부모들의 우스꽝스러운 허영이다. 그것을 나는 증오한다. 나도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부모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왔다. 공부가 나에겐 맘에 들었고 좋은 점수를 받는 건 우선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에서 지금 얻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차라리 성경이나 요가를 공부했어야만 옳았다. 혹은, 재능이 있다면 그림을 공부했어야 했다. 난 내 아이에게 좋은 점수를 받으라고 결코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비열한 짓이다. 대부분 가장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부모들이 특히 그런 짓을 한다.”

 

공부라, 나는 우선 공부에 대해 애증의 관계가 있다. 지금 막무가내로 책을 읽어가면서 나의 인생에 크게 도움도 되는지 안 되는지 알 수 없다. 적어도 내 밥벌이엔 당장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라면 먼 미래 좀 더 높은 곳에 오르면 더 먼 곳을 바라보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다고 당장은 내 일상생활에 도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기매체와 유행이란 spectacle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물론 인간은 그 사회의 흐름에 당장 거슬릴 수 없다. 하지만 거기에 떠내려가기 싫기에 나는 나만의 세계에 갇히는가? 아니면 남들과 똑같은 것만 보고 비슷한 생각에 이분법의 논리로서 그 속에서 자유를 봐야 하는지 아이러니하다.

 

나는 책을 막무가내로 읽지만, 사실 나는 아주 형편없는 학교생활을 보냈다. 덩치는 멀쩡하나 운동도 젬병이고, 싸움은 겁을 냈다.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아 보인다. 다른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공부를 너무 못했다. 공부 못한 이유로 무시를 받고 경멸을 받던 나였다. 그런 나도 가끔 이름 없는 대학에 다니는 자에 대해 무시하는 나를 발견할 때도 있다. 물론 남들 노력할 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불량한 짓을 한 것에 대한 대가이고, 그 대가로서 그는 다니나, 거기서 다시 기사회생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공부 못해 집에서는 꾸중과 다른 학생에 대한 비교, 교실 내에서는 왠지 모르는 따돌림과 무시, 교사들에겐 비인간적 모욕과 대우들이 내 자신을 기형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괴물을 잡겠다고 내가 괴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괴물을 잡으려고 내가 괴물이 되어도 세상은 잡을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린 것처럼 자기만의 영역을 과시한다. 오늘날 아이들에게 당신들의 미래와 꿈은 무엇이니 물어보면 대부분 대기업과 공무원이라고 한다. 심지어 생명을 다루는 의사와 간호사에 대해 직장에 대한 부분이다. 우리 삶이 이렇게도 각박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를 차지하면 마치 신성한 자리에 앉아 미사어구만 늘어뜨리는 가식을 보여준다.

 

단지 자리에 고수하는 것으로 모든 이데아적인 가치를 무시하는 것인가?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진실로 남을 위해 사는 분이 있으니 그런 분들의 노고를 부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진실함에서 나는 진실하다보단 차라리 나는 진실한가? 아니면 나는 진실한 것에 대해 의문에서 그 의문조차도 진실하다고 여기는 것조차도 진실한가? 라는 부정과 부정에 또 다른 부정이 탄생할 수 있다. 다시 글을 적어도 지식에 대한 억압과 권위에 지식으로서 대항하여 대항하는 나와 그 모든 글들이 웃긴다. 아니라면 속물적인 글로서만 적어가야 하는 것인가? 실존적 존재에서 나와 타인의 경계는 생각하면 결국 spectacle의 열렬한 관객인지 아닌지의 차이인가 싶다.

 

그런다고 하여 전혜린 교수처럼 죽음이란 타나토스에 들어가기도 그렇다. 삶에 대한 공포와 죽음에 대한 공포, 둘 다 공포다. 삶과 죽음이 같이 붙어있기에 삶이 곧 죽음이란 말은 너무 관념화처럼 들리는 말이다. 아니면 루소처럼 “청춘기는 예지를 배우는 시기다. 노년기는 그 예지를 실행에 옮기는 시기다. 경험은 언제나 교훈을 준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각자 자신 앞에 남은 생의 기간에 대해서만 유익할 뿐이다. 죽어야 할 바로 그때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할 때는 아니잖은가?”처럼 말이다.

 

전혜린 교수의 글을 보면 자신의 일상적인 부분에서 끝없이 고뇌하고 방황한다. 그냥 보기에 자신의 주변만 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서 자리 잡은 억압이 왜인지 아는 것 같다. 1961년 5월 16일에 대한 글은 너무 식상한 것처럼 보이나, 사회의 일방적인 요구사항과 그것이 결국 국가적인 흐름과 지역과 사회의 연계성을 아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독일 뮌헨의 슈바빙의 거리는 자신의 고향인 한국보다 더 고향처럼 느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숨을 쉬는 자유, 뭔가 얽매이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그 신선함, 이방인도 이방인이 아닌 집처럼 여길 수 있는 곳 슈바빙을 전혜린 교수는 그리워한 것이다. 표현이 살아있고, 꽃들이 만발한 곳, 자연이 숨 쉬는 곳을 말이다. 자신의 동생 채린에게 보내며 그런 자연의 미와 책에서 찾는 즐거움을 편지를 보낸 전혜린 교수는 작은 것에 매우 기뻐하던 소녀와 같은 마음을 가진 것 같았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 대해서나 혹은 2장 헤세로부터의 편지에서 그림을 보면 더욱 그렇다. 긴 생머리에 줄무늬 스웨터, 무릎 아래까지 오는 치마를 입은 소녀에서 말이다. 그것은 전혜린 교수이기보단 그녀의 동생 채린이를 생각한 그림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책 제목처럼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와 같이 이 모든 즐거움도 또 다시 조우할 수 없게 되었다. 끝없는 죽음에 대한 향기를 추구하는 전혜린의 모습은 자연에 돌아가고 싶다는 그 진정한 열의만 전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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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 전2권 (한글판 + 영문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 영문판) 9
알베르 카뮈 지음, 최헵시바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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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의 의지로 살아가는가? 나는 나의 의지로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라면 나의 존재에 대해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가? 혹은 지금 이 순간 나는 살아있음을 내 스스로 인정하고 있을까? 이런 무한의 의문이 개인적으로 경제적인 발전도 주지 못하나, 우리는 이런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과 동시에 죽음이 같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과 삶의 순간이 교차하는 것에서 우리는 슬픔과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으나 그 순간마저 반드시 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던진다.

 

이번에 읽어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특히 그러하다. 카뮈는 본래 프랑스인이 맞는 것 같기도 하나, 그의 어린 시절은 알제리의 배경이었다. 알제리와 프랑스, 참으로 뭔가 이치가 맞지 않은 나라다. 왜냐하면 프랑스혁명의 의미는 자유, 평등, 박애라고 하나, 그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남의 자유를 주자던 루소, 당동, 로베스피에르와의 의지를 꺾은 것이 아닌가? 한 때 프랑스 지식인들은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했다. 그들은 진정한 자유를 위해 국가주의 안의 자유를 비판한 것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그런 카뮈가 살던 시절의 모습을 많이 반영한 것 같다. 타들어갈 것 같은 더위에 알제리의 아랍인들을 죽이면 뫼르소에서 다소 프랑스와 알제리의 모순을 여기서 느꼈다. 왜냐하면 같은 나라이라고 하면서 서로 다른 것을 토대로 차별을 가한 점이 여지없다. 혹은 롤랑 바르트가 기호학에서 시니피앙 내의 시니피에를 해석함에서 그 시니피에가 다시 시니피앙으로 되어 또 다른 시니피에를 설명할 때 어느 흑인 어린아이가 프랑스깃발을 보고 경례를 한다. 알제리 소년이 프랑스국기에 경례하는 것은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에 대한 정책과 거기에 대한 지식인들의 저항심이다.

 

자신이 살아감에 있어서 뫼르소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선택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것에 대한 의문과 원인에 대해 생각지도 않아 결국 벽에 갇히는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뫼르소는 그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떨지 않고 그저 자신이 없어짐에서 구토가 날 것 같은 지겨움이 없어질 것이란 점이다. 오히려 자신이 기요틴 아래 목이 나갈 때 그것을 보러오는 사람들이 가진 증오의 시선들을 갈망했다. 자신의 죽음으로 이들에게 삶의 영위가 다시 오리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방인>에서 과연 이방인이 누군가?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과 마리와의 성행위를 연속적으로 이루어낸다. 어머니에 대한 죽음에 대해 무감각하던 것처럼 마리와의 성행위는 사랑보단 그저 무의식의 욕구였다. 그 이상도 있지도 않았다. 마리가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는 그저 그래?”내지 특별한 대답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서 사람들을 대하지 않았다. 피상적으로 거의 있는데도 왜 있는지 알 수 없다. 늙은 개를 잃은 노인, 창고지기 건달, 심지어 건달의 친구까지도 말이다.

 

그의 유일한 삶의 의지는 해변에서 뜨거운 태양이 작렬 하던 순간이다. 아랍인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 뭔가 어지러워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으나 그의 손에 나이프가 있다는 점은 분명히 본 것 같다. 그러나 그에게 총을 겨눈 것은 그가 위험인자보단 태양의 뜨거운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랍인에게 총 1발을 발사하고, 쓰러진 그의 몸에 다시 4발의 총을 발사한다. 1발만 충족하나 왜 4발이나 발사하는가? 타인의 죽음과 그 죽음의 확인으로서 자신의 살아있음을 확인하려 했는가?

 

도대체 알 수 없는 심정으로 그는 결국 살인죄로 체포된다. 그 감옥이란 지겹고 따분한 시간이 그에겐 견딜 수 없는 공간이 아니라 그 공간마저 적응해버린다. 담배에 집착하던 그가 이제 담배도 필요 없고, 잠이 오지 않은 그가 잠을 하루에 18시간이나 잔 후에 나머지 시간은 밥을 먹고 배설을 한다. 마치 사육장 내에 한 마리 짐승처럼 말이다. 그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이제 그가 아무런 생각 없이 남의 처지에 멋대로 어울린 게 그의 목을 노린다. 그런데 오히려 그는 그의 목이 없어지는데도 막연한 자세다.

 

신을 믿지 않고, 어머니의 죽음에 울지 않고, 다음날 매혹적인 글래머인 마리와 성행위, 포주와의 편지와 조언, 노인과 개, 해변의 태양...이것들이 다시 재판장에 올 때 뫼르소에게 모두 불리했다. 우연이란 설정에 그의 우연은 마치 고의적인 행동으로 보였다. 검사의 취조, 무기력한 뫼르소의 모습, 뫼르소는 재판장안의 모든 것이 낯설고 괴이했다. 심지어 자신이 재판장에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자신이 사건의 발원지인데도 그 발원지인 자신은 그것에 대해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주변에서 스쳐 지나가는 바람같이 보았다. 그는 자신의 일인데도 자기 스스로를 이방인처럼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이방인 뫼르소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임을 그는 밝히려 한다. 우리의 인생이 마치 우리의 선택이 타인들의 선택에 의해 조작되고, 그 순간조차도 타인들 역시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조작되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뫼르소는 죽음의 순간이 오자 자신을 구원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사제가 와서 나의 아들이여 하는 말과 그를 구원하기를 바라는 사제의 기도에 욕과 짜증만 내세웠다. 신을 믿지 않으며, 오히려 사제의 말이 더 자신의 심정을 괴롭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어딘가에 몰리거나 막다른 골목에 접하면 순간 비과학적이고 미신의 세계에 의탁한다. 뫼르소는 그런 것도 없었다. 아니 삶의 활력에 대한 의미를 찾지 않으니 죽음에 대한 공포심은 있으되, 그 공포심에 자신을 위로하지 않으려 했다.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없기에 자신의 존재적인 것에서 의미가 없어 항상 피로한 모습이다. 차라리 죽음이 온다는 생각에 자신의 어머니가 죽기 전 양로원에서 왜 약혼자를 두는지 이해하겠다는 뫼르소의 독백은 죽음의 순간이 와야 진정한 자신의 삶을 발견할지 모른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그 기분을 독백한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모든 고통을 씻어 주고 희망을 없애 버리거나 한 듯 온갖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가 가진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이 열린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 마치 형제 같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내게 남은 소원은 오직 하나, 그 모든 것이 완성되고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질 수 있도록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 그날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와 증오에 가득 찬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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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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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서 나는 어느 가수의 이름과 그 가수의 노래가사가 생각났다. 가수 이름은 김현식이고, 그의 앨범 5집에 수록된 넋두리란 곡이다. 김현식 5집의 넋두리를 듣고 있는 순간 오로지 절규와 비명, 탄식과 한숨, 허무와 절망으로 메워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김현식은 그 길을 가겠다고 한다. 절망 안에서 외치다가 정말 그는 간경화로 1990111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죽음은 이미 그 5집의 가사에서도 나와 있다. 그 노래는 김현식 자신이 작곡과 작사를 했다. (앨범 표지 후면에 보인 완전 떨어진 운동화가 인상적이다),

 

 

 

쓸쓸한 거리에서 나 홀로 앉아 있어 바람에 떨리는 소리를 들었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설레이는 이내 마음이여

꺼질듯 타오는 거리의 네온을 내 품에 안고서 헤매고 있었지

멀리로 떠나는 내님의 뒷모습 깨어진 꿈이었나

힘없는 내 발길에 다가선 님의 모습 인생을 몰랐던 나의 길고 긴 세월

갈테면 가라지 그렇게 힘이들면 가다가 지치면 또 일어나겠지...

꺼질듯 타오는 거리의 네온을 내 품에 안고서 헤매고 있었지

멀리로 떠나는 내님의 뒷모습 깨어진 꿈이었나

힘없는 내 발길에 다가선 님의 모습 인생을 몰랐던 나의 길고 긴 세월

갈 태면 가라지 그렇게 힘이 들면 가다가 지치면 또 일어나겠지...

 

 

 

절망 속에서 걸어가는 모습에서 왜 나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로 통해 보는 것일까? 전혜린 교수에 대해 잘은 몰랐다. 단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문구는 들어보았다. 아주 어렴풋이 어디서인지 몰라도 말이다. 이 책을 읽는 순간 마치 니체의 서적들이 생각났다. <비극의 탄생>으로 아폴론적인 예술과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을 논하는 것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이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 그 사회적인 통념과 한계를 넘어 보려는 의지를 전혜린의 글을 무섭게도 흘러갔다.

 

책을 보면서 그분의 독일 유학생활이 인상 깊었다. 이때까지 착한 딸로 아버지 말을 잘 따르던 엘렉트라적인 자신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일 뭔휀대학으로 간 것은 엄청난 도발적인 그녀의 도전이었다. 그런 모습은 후에 잘 나온다. 그녀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태어난 지식인의 딸이고, 그들은 러시아인과 중국인들이 보이는 한반도 북쪽에 있다가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대피한 것이다. 특히 부산으로 그것도 영도라는 애환이 담긴 곳에 온점은 매우 인상이 깊다. 왜냐하면 내가 부산 영도에 살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영도, 그분은 부모님이 전쟁을 피해 왔지만, 나는 부모님이 가난에 의해 왔었다.

 

그분은 거기서 서울대학 법대에 입학했고,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았다. 그분은 문학과 예술을 좋아했고, 특히 니체와 니체에 빠진 작가를 좋아했다. 특히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지와 사랑>에서 그분의 진실한 니체에 대한 사랑을 인상 깊다. 하물며 부록에 나오는 아포리아는 니체의 <선악의 피안>에 나오는 점을 많이 닮아 있었다. 그리고 독일유학과 자신의 사랑하는 딸 정화가 보일 때면 허무한 심정에서 벗어나 인생의 가치를 찾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마치 발터 벤야민이 러시아혁명 이후 아직 트로츠키가 추방되기 이전에 모스크바로 가서 그가 사랑하던 여성 아샤 라시스와의 만남이 생각난다. 처음에 벤야민은 기대감과 희망으로 갔으나 그녀와의 관계에서 좋지 않게 흘러가고, 권태와 허무 속에서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모스크바 시장에 돌면서 러시아인형과 각종 민속공예품에 대한 벤야민의 관심과 애정에서 상당한 관찰력이 인상 깊었다. 전혜린 교수의 글을 보면 니체와 벤야민의 조합인 것 같았다. 보통 니체와 벤야민은 우리의 손에 잡히기 전에 번역가의 손에 거치나, 이 책은 이미 본인의 손에 창조되었기에 그 문체의 감각이 직접적으로 느꼈다. 그분은 자유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는 미아와 같았다. 어린 시절 정해진 공부 착한 아이로 산 그분에게 자유라는 것은 무엇인가? 법학에서 독문학자로 변신하면서 그분이 추구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분의 출산에서 정화의 탄생은 그녀에게 죽음의 의지인 타나토스의 맛을 보면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심정과 동시에 그 고비 후에 정화를 손에 직접 만졌을 때 새로운 삶의 의지인 에로스를 맛보았다. 글에서도 마치 정화가 자신의 분신인지 아니면 자신이 정화의 분신인지 그래서 정화로 통해 자신은 영원할 것이라 하는 기대감, 하지만 그분은 자살을 했다. 왜 자살할 수밖에 없었는가? 천재라는 명칭에서? 아니라면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것처럼 박제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절망에 저주했는가?

 

뮌헨대학에서 어려운 유학을 선택한 그분의 글에선 처음에 불안과 위기라는 심정에서 오히려 자유와 편안한 세상을 본 것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제일 부러운 사실은 그 당시 젊은이들이 동경하고 되고 싶은 존재가 루이 암스트롱이란 사실이다. 재즈음악을 하던 흑인 뮤지션, 거리에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고, 모두 이방인이어도 마치 그 속에 다 녹아들어가 자유분방함이 왠지 매력적이다. 집시와 같은 존재로서 보헤미안 세상을 떠나는 그 삶을 보는 것만으로 왠지 모르게 그녀는 자신의 고향이 한국보단 오히려 독일 슈바빙의 거리가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거친 삶을 사는 부산이 이성을 추구하는 서울보다 좋다고 한 점에서 말이다. 아니 어떻게 말하면 인간의 언어는 결국 사회적이면서도 하나의 권력을 지닌 억압이다. 그 억압에서 전혜린은 억압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서 표출한다. 이성의 세계인 서울의 생활에서 자본주의 가속화로 인해 그 언어의 가치는 물질의 가치로 대변된다.

 

유일의 진실하고 엄숙한 문제는 회피하고 자그마한 일들, 물질, 사치스러운 생활, 남자에게 의존 또는 기계와 같은 나날의 틀 속에 안면하는 의식, 이러한 것들 속에 자기를 소외해 버리는 생활은 허위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생과 사에 자기를 똑바로 응시하고 산다는 것은 무서운 용기와 신경력을 요한다. 특히 이 사회의 구조와 한국적 풍토 속에서 너무나 신경이 긴장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전생의 의의가 무로 화하는 것이니깐 그것을 회피하는 것은 일회적으로 주어진 우리 삶에의 죄인 것이다.”

 

이 문장은 마치 지금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 전혜린 교수의 남편을 보는 눈에서 단순히 아내는 남편만의 종속인가라는 의문에서 남성 역시 사회의 종속물이다. “10년 개근, 5시 퇴근, 석간, 취침왠지 모르게 톱니바퀴라는 굴레에 돌아가는 것은 정말 누구로 보이는 것인가? 그래서인지 전혜린 교수의 에세이는 단순히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혜린 교수가 보는 이 세상에 대한 의문이다. 자신이 광기에 빠져 니체처럼 글을 적는지 아니면 세상이 미쳤는지 모르고 돌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속박된 어린 시절, 거기에 대한 저항, 정화로 통한 삶의 의지, 그리고 자살로의 마감들.

 

왜 처음부터 작고한 김현식과 그의 노래 넋두리가 생각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의 인생이 마치 죽음에 대한 강한 충동에 자리 잡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허무로 채운 자신의 그 공백을 허무로서 되돌리는 타나토스의 열망은 글에서 끝까지 보여준 내용이었다. 아마 자신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죽음이란 극단적 선택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증거를 자신 스스로 끝맺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너무 철저하다 자신의 딸에게 자신의 삶에서 금단현상을 일으키는 딸을 뒤로 한 채 죽음을 택한 전혜린, 죽음에서 진실한 삶을 찾아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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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 고문기술자 이근안!! 그는 누구인가?
김근태 지음 / 중원문화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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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영화 <남영동 1985>만 보고 주인공 김종태, 그의 본래 존재인 김근태의 고통을 알았다면 오산일 것이다. 여기 그가 적은 옥중 수기인 <남영동>은 더욱 모질고 잔혹했다. 단순히 영화로 보여주던 고문의 한 자락에서 모든 것을 판단해서는 안 될 정도였다. 나는 이 책을 보고 마지막에 혼자 공포에 떨어야 했다. 사람을 죽이고 파괴하고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 그 지옥과 같은 상황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울분과 분노의 19805월 광주, 예전에 TV에서는 북한의 공작이라고 하더니 어느 순간 북한군이 내려와서 광주시민을 학살했다고 한다. 이런 non-sense 같은 이야기가 아직도 흘러나오는 것이 지금의 우리 사회다. 내가 왜 충격을 받았는가? 이 문구가 너무 잔인하게 들렸다. “광주항쟁은 또 소수의 매판군부독점세력이 민중의 요구를 적대적으로 짓밟고 자신들의 이익실현구조를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잔인성을 보여주었다. 위험을 느낀 전두환 친위 세력은 평화적인 시위를 추적, 학살했으며 또 예방진압을 목적으로 집집마다 뒤지며 청년을 붙잡아 구타연행학살했고 심지어 여학생의 유방을 도려내고, 임산부의 배까지 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정말 그들이 폭도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어느 편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응징의 폭력을 가해야 하는 대상이 단순히 건장한 남성이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여학생들 그 아직 어리고 몸도 가늘고 꿈 많은 소녀들의 가슴에 총검을 들이대는 것도 모자라 그 아이들의 유방을 도려냈다니 말이다. 게다가 임산부의 배를 가르다니 말이다. 이것은 과거 일본 731부대에서 인체실험 대상인 마루타에게 하는 행동과 거의 다름없는 학살극이다. 전쟁이었더라도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분명 불법이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폭력은 악마의 짓거리다.

 

우리의 폭력의 시기에 <남영동>의 수기는 단순히 김근태만의 이야기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최근 검찰의 비리와 정치, 기업, 권력에 결타하여 언론에 문제되든 일들이 보인다. 이들은 불과 20년 전만 해도 폭력으로 죄 없는 사람들을 패고 때리고 짓밟고 마지막에 사형 내지 평생을 정신병원에서 광기에 빠져 살도록 하였다. 법이란 무엇인가? 법은 인간이 인간됨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제도적인 방어선이다. 하지만 그 방어선은 어떤 인간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권력이 있는가? 없는가?

 

고문으로 자백 받은 증거는 분명히 불법이고, 법적 효력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검찰과 판사는 그 거짓 증거를 받아 자신들의 정의를 실현했다.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이 단어에서 정의란 단지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권력이 하나의 도덕적인 교조주의로 통용되는 것이 정의일 뿐이다. 그래서 정의란 윤리가 없는 하나의 위선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정의 아래 김근태를 고문을 받는다.

 

물고문, 전기고문, 굶주림, 추위, 수면의 박탈, 외로움 등으로 그의 고문의 이야기는 마치 소설과 같다. 정말 이것이 소설이라면 좋겠다. 이런 일들이 어느 고문서에서 등장할 만한 중세유럽의 마녀사냥 이야기로 끝냈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개인의 이야기고 사실이고 그 당시 존재했던 사람 모두 실존인물이다. 살이 타들어가고 입술이 바짝 말라가며, 추운 가을밤에 추위에 벌벌 떠는데 거기에 물을 뿌려 고문하여 땀이 베여 나올 정도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문제는 그런 고문을 하는 존재조차 하나의 인간이었다.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아이히만이란 소장에 대해 당시 연합군은 악마의 탈을 쓴 인간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평범했고, 가족에게 다정하고 이웃과 잘 지내던 남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끔찍하고 잔인한 일을 할까? 물론 아우슈비치 수용소처럼 독가스를 날리지 않으나, 차라리 독가스가 낳을지도 몰랐다. 인간의 죽음으로 그 고통을 모두 끝낼 수 있다며, 그 충격으로 죽을 때까지 두려움에 고통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그런 억지로 끌려온 사람이 죄가 없음을 알고, 알리바이가 있음을 알아도 소설로 만들어 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설의 창작력은 지독한 고문이고, 그 고문의 성과품은 새로운 소설이다. 이것은 재판의 증거이고, 그 재판과 소설은 사회에서 방송과 신문으로 다시 재생산되어 간다. 진실은 아득한 저 안개 너머로 사라지고, 어둠의 거짓이 우리의 마음을 불안과 증오 그리고 불신으로 이어지게 한다.

 

김근태의 고뇌는 여기서 보인다. 우리 인간은 겉으로는 언제나 바른 말 옳은 말하면서 다른 상대를 비판이 아닌 비난을 한다. 정작 그 상황이 되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김근태의 고문에 대한 공포와 절망에서 더 큰 공포와 절망은 바로 우리 인간 자신의 이중성이었다. 자신을 고문하는 사람들이 세상만사에 대해 고민한다. 월급이 적거나, 자식이 공부가 잘되는지, 자기가 좋아하는 많은 것들에 대해 말이다. 김근태가 민주주의를 위해 활동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고문하던 사람들처럼 일상적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도리어 그것이 자신을 폭행하고 억압하던 수단이 되었다. 김근태를 고문하는 자도 어쩔 수 없이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관료주의의 인형이었다. 그들의 이중적인 가치관에 김근태도 나도 흔들린다. 자신에게 고문을 가하는 경관에게 이제는 고문 받는 것이 습관화되었다라고 할 정도로 고문은 받는 자와 가한 자 모두 정신을 파괴했다. 영화 <남영동 1985>에서 나온 말이 이 책에서 나온다.

 

고문을 전담하던 한 경관이 김근태의 손을 잡고 말한다. “고문을 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빨리 나가라. 허위라도 다 인정해라, 여기 있으면 당신은 죽는다라고 그는 눈물을 흘리며 사정했다. 인간의 인간성이 파괴되는 것이 여기서 드러난다. 만약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고문기술자가 김근태에게 한 말이 인상적이다.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 철을 만났다. 이재문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서 서 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

 

상당히 비웃음이 섞인 얼굴로 김근태의 면전에 날렸을 연설이었다. 복수의 날도 네가 이길 날도 오지 않는다는 디스토피아의 세계관, 우리에게 유토피아란 없다. 단지 그것을 위해서 끊임 이 나갈 뿐이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고문을 듣고, 그의 고문 후에 감옥살이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못 본채 갇혀 있음에 인간의 권리는 어디 있는가? 라고 반문한다. 온 몸이 망신창이가 되어도 밥 한술 제대로 못 먹고, 추워도 움직일 수 없어 그대로 주저해야 하며, 억울한 자신의 처지에 호소하느냐 까지 말이다.

 

더 분노하게 만든 것은 그에 대한 검찰과 재판의 행동이다. 그들은 법조인의 양심을 버린 채 그저 시대의 흐름 즉 권력의 흐름에 충실했다. 그리고 계속 그 자리를 유지하며, 변호사로 개업하여 지금도 성공한 사람처럼 우리 주변에 숨 쉬고 있을 것이다. 바른 말을 하고 옳은 행동을 하는 게 진실한 삶을 살아온 것일까? 이런 책들을 보면 내 인생 가치관에서 혼란이 온다. 내가 바라는 것은 맑은 공기 아래 산책을 하며, 예술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간의 이야기로 통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폭력이 아니라 미덕으로서 세상에 고통 받는 사람 없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그런 세상을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것이 비웃음을 받고 폭력과 억압으로 다스릴 대상이라면 무엇이 인간에게 진실한 가치라 호도될 수 있는가? 인간이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서로 간의 차이가 없이 균형을 맞추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적에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에게 말 잘 못하면 끌려간다. 병신이 된다. 인생 망친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그런 이야기를 은연 중에 들었다. 철없는 어린 녀석이 무엇을 이해할까? 싶겠지만 생각하면 이가 떨릴 정도로 무섭다.

 

이런 무서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남영동>은 다시 나오면 안 될 서적이나, 항상 우리가 봐야할 서적일 것이다. 다시는 이런 일들이 오지 않게 폭력과 고문이 마치 정당한 관례로 되지 않기 위해서다. 이 수기를 적은 자는 고문 후유증으로 결국 201112월에 눈을 감았다. 최근에 그가 고문을 당하지 않았고 이근안이 옳았다는 미친 소리에 망자를 2번 죽이는 일들이 생긴다. 고문을 하지 않았다면 이근안이 왜 옳았는가? 라는 논리적인 이야기를 해도 소통과 대화를 거부한 이들에겐 그저 부정하고 싶은 일들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순간 그들 역시 삶을 부정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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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 : 덕치와 공포정치 레볼루션 시리즈 2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지음, 슬라보예 지젝 서문, 배기현 옮김 / 프레시안북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로베스피에르, 그의 이름은 프랑스혁명 이후 폭력적이고 냉혹한 공포정치의 선두주자였다. 특히 그의 곁에는 생 쥐스트라는 과격한 혁명사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는 잔인하고 냉정한 혁명의 공포정치가이었는가? <당통의 죽음>에서 당통이란 인물은 같은 자코뱅당 소속이고 프랑스혁명에 따른 혁명정부의 위원이었다. 그는 라이벌과 같은 로베스피에르와 친분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결국 서로 간의 뜻을 달리했다. 당통은 자신이 죽으면서 언젠가 프랑스혁명의 위대한 자유는 무너지고, 자신에게 단두대의 키스를 주던 자 역시 죽음의 신과 마주보리라고 한다. 과연 그의 예언대로 로베스피에르는 테르미도르 반동과 함께 단두대 아래에서 하데스의 궁전에 초청받았다.

 

그렇게 악명 높은 로베스피에르라고 해도, 그는 분명 프랑스혁명의 위대한 영웅이었다. 사실 영웅과 반역자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의 사이다. 어떤 상황과 분위기가 조성되느냐에 따라 다르다. 로베스피에르가 과연 처음부터 공포정치가 목적이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조금 유달리 판단해야 한다. 그는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원했고, 공화주의 이념을 실천하려고 했으며, 각종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문제는 그것은 개인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로베스피에르가 혁명정부 초기에 그의 연설을 본다면 지금 대통령선거가 보이는 2012년의 한국과 아니 본래 로베스피에르가 태어나고 죽은 예술도시 파리가 있는 프랑스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심지어 그 어떤 국가에서 열리는 선거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을 얼마나 따라갈 수 있을까?

 

프랑스혁명에 대해 알아보고, 루소에 대해 알아보면서 루소의 사상이 그대로 직결된 프랑스혁명에서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는 반드시 한 번은 보고가야 할 사람이다. 모두 단두대 아래 죽음의 여신과 키스를 나누었으나,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생각해야 한다. 이 책의 후면에 이런 문구가 인상 깊다. “개혁 없는 혁명은 곧 어리석음이다! 공포 없는 덕의 무력함을 연설한 혁명의 산증인, 로베스피에르”, 그의 연설문이 뒤에 나와 있다. “평상시에 인문정부를 움직이는 동인이 미덕이라면, 혁명의 시기에 그 동인은 미덕과 공포 모두입니다.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합니다.”

 

민주주의사회에서 공포의 테러리즘은 그 혁명의 근원이고 종점이다. 덕이 있는 공포라는 것은 결국 폭력이란 수단이 정치적 발전과 동시에 퇴락을 일으킨다. 로베스피에르가 루이왕정 붕괴 후에 루이의 목을 효수하려한 이유는 그의 사회계약에 대한 믿음이다. 루소는 그 나라의 사람이라면 사회계약적으로 합의해야 하며, 거기에 대하여 거부하거나 위협할 존재는 그 사회의 일원으로 여기지 않았다. 루이는 앙시앵레짐이란 구체제의 산물이고, 로베스피에르는 구체제가 아니라 신체제 혁명 이후 공화정의 프랑스사람이다.

 

루이는 공화정의 사회계약적인 인간이 아니고, 그 공화정의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존재로서 낙인찍혔다. 그의 절대적이고 강력한 믿음은 루이를 기요틴 아래 보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이 과연 옳았는지 지금도 제기된다. 적어도 미국독립을 선구해온 토마스 페인은 루이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 재판 없는 사형선고는 인간이 누리는 인권에 대해 모순적이었다. 인권을 위해 일어난 프랑스혁명, 그리고 그 인권의 탄압의 근본이 되던 군주정, 정의의 기준은 결국 그 시대적 흐름과 가치에 요동칠 수밖에 없다.

 

루이의 경우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 마음이 연약하고, 상대방을 헤치기 싫어한 군주였다. 그런 심약한 군주가 백성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으려 했으나 당시 관료들의 반대와 귀족들의 득세, 신흥세력 부르주아는 이권과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그들은 단두대의 세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런 제도적 문제를 해결하려한 로베스피에르는 결국 그 제도에 대한 반역에서 자신도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연설은 장문이다. 그의 진실함은 자기만의 진심에서 모두에게 공감과 부담이 되었다. 테르미도르 반동이 시작하던 그 전날까지 연설하고, 그 당일에 붙잡혀, 다음 날에 몸에서 목이 분리되었다.

 

자기 동료들마저도 불화로 같은 무덤을 가게 된 로베스피에르를 연설로 통해 만나보니, 그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위대하다고 다 옳은 것이 아니다. 옳은 행동에 대한 의지에서 그 역시 많이 앞을 막혔다. 자유를 원하려면 자신의 자유보다 남의 자유가 중요한 것처럼, 로베스피에르는 자국민의 자유뿐만 아니라 세계민들의 자유를 원했다. 만약 우리가 자유가 있고, 상대국가에서 없다면 다른 국가에서 자유국가를 침범하려기 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적 부분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부르주아 신흥세력들이 성장할 시기고, 프랑스혁명의 실패는 부르주아 혁명이란 이유도 있었다.

 

로베스피에르의 강연에서 그는 이미 복지국가의 틀을 원했다. 프랑스혁명 자체에 인권의 중요성은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자의 인간적 생활 부여다. 천부인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배고픔과 추위에 쓰러지는 사람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792122일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 파리에서 연설한 내용은 220년이 지난 우리나라에서도 정말 잘 통용되는 내용이다. 그 내용을 보면

 

사회의 으뜸가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바로 인간의 불가침 권리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권리 중 으뜸가는 권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생존할 수 있는 권리겠지요.

그러므로 사회법의 으뜸이라면 사회 구성원 전부에게 생존의 수단을 보장하는 것일 테지요. 이 법은 다른 모든 법 위에 존재합니다. 재산도 사실 이법을 견고히 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것입니다. , 사람이 재산을 소요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라는 거죠. 재산이 인간의 생존권에 위배된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사라에게 필요한 식량은 사람의 생존 저채만큼이나 신성한 것입니다.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들은 모두 전체 사회의 공유 재산입니다. 영여분만이 개인의 재산이 될 수 있으며, 상인이 장사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가 동료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상업적인 투기를 감행한다면, 그건 결코 거래가 아닙니다. 그것은 약탈이고, 형제들에 대한 살해입니다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 인간의 의식주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적 신체기관을 가지므로 먹지 않으면 죽는다. 굶어죽는 자들이 넘치고, 가난으로 고통 받는 사회는 이미 잘못된 사회다. 로베스피에르는 루소의 사상 중에서 시민들이 옳지 않은 정치를 하는 정치가들은 시민들에 의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혁명 이전에 프랑스에서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판매 금지된 불온도서였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에서 사회계약이란 단어가 자주 나오며, 어떤 어른이란 말이 나온다. 당연히 루소일 것이다.

 

평화적으로 살기 위해 평화롭지 못한 수단이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평화롭지 못한 방법이 수단이 되어버린 로베스피에르의 모순 속에 우리는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면서 한편으로 국가적 합의도 중시했다. 그런 점에서 루소가 생각한 민주주의 개념에서 국민의 성숙도에 따라 그 사회의 민주주의적 성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루소의 자서전 중에서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읽으면 루소가 얼마나 프랑스인에게 조롱받고, 파리에서 그는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서적에 프랑스인들은 지적이거나 윤리적인 사람보다, 오히려 감정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비추어진다. 그런 자들이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에서 대단히 이성적이고 옳은 사람들로 표현된다. 그런 상황에서 이 책의 서문을 적은 신영복 교수와 세계적 지식인인 슬라보에 지젝의 글을 보면 다시금 우리는 로베스피에르를 생각해봐야 한다. 신영복 교수 역시 지난 세월 파시즘의 시대에서 고생했고, 지젝의 경우도 냉전의 시대에 큰 역사의 순간을 맞이한 인물이다. 특히 지젝의 서문에서 나는 이 책이 로베스피에르가 연설한 것을 모운 도서인지 아니면 지젝의 프랑스혁명과 정치적 판단을 제시한 도서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젝의 긴 서문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는 폭력과 희생 아래 이루어진 산물이란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단지 프랑스혁명은 주로 지도층과 유명 인사들의 죽음이 토대라면, 우리나라는 일반 국민들이 많이 희생된 점에서 아쉬울 뿐이다. 우리 인간은 이성을 중시한다. 그러나 나는 인간에게 이성이 주어질 뿐, 결코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젝이 칸트의 윤리학을 언급하면서 이성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고, 직관 없는 이성은 공허하다는 왠지 모르게 공감이 없는 소통은 의미 없는 행동인 것처럼 느낀다. 공감은 상대방에 대한 입장과 표현을 충분히 이해하고 느끼는 점이다. 레비나스가 추구하는 타자의 윤리학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지 의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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