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 전혜린 에세이 2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2년 1월
평점 :
품절


오늘 나는 도서관에 가면서 내가 계획하여 빌리려던 서적들을 찾으러 갔으나, 아쉽게도 다른 사람이 이미 대출한 상태였다. 아쉬운 마음으로 그 책이 꽂혀있던 자리를 서성이면 그 책이 본래 꽂힌 자리의 옆과 위아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내가 은연중에 집어들은 책이 있었다. 그것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그리고 장 자크 루소의 <식물사랑>,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이 작가의 책을 읽고 또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서적이 있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었다. 왜 나는 이 책을 빌려 읽으려 했는가?

 

어제 퇴근 후 방에 홀로 이불속을 누비며, 전혜린 교수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은 후에 갑자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단순히 이 책을 빌릴 것이란 의도는 없었다. 단지 내가 찾으려고 한 책이 없었고 그 옆에 카뮈의 책이 있었던 것이다. 카뮈를 책을 보니 당연히 니체의 서적을 다시 보기로 했다. 예전에도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을 읽어보았지만 니체의 필력을 수용하기에는 나의 세계가 좁았다. 물론 지금도 좁고 좁아 일상적으로 신경질도 잘 내기도 혹은 아무 말도 없이 있기도 한다. 보통사람들도 이런 나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각각의 심정의 표출기복이 다를 것이다.

 

도서관에서 바로 카뮈와 니체의 서적을 빌리게 한 전혜린 교수의 또 다른 책인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를 읽었다. 같은 저자의 책을 이틀 연속으로 읽으면서 책의 내용은 어제 읽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쪽이 좋은 것 같았다. 중복된 내용도 있던 점과 전에 나온 도서가 전혜린 교수의 깊은 정신력을 훨씬 더 잘 묘사했기 때문이다. 후자의 편도 그러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자만큼 깊기보단 순간적 기록들이 많았다. 어떻게 보면 전혜린 교수의 진짜 심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전자에 비해 후자에는 전자에 가려진 남편의 이야기가 잠시 나온다. 그의 이름은 철수였다가 어느새 T가 되었고, 뒤에는 정화 부(父)가 되었다. 남편의 존재가 정화로 통해 철수라는 이름을 가진 실존적인 존재에서 정화의 소유물적인 이름으로 변해갔다. 아니라면 T, 이것은 마치 주변에 지나가는 이름 하나에 불과한 것인가? 서로 사랑한 대상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함이 크게 보인다. 전혜린에게 유학시절 동생인 채린, 남편이었던 철수, 그리고 친구 주혜, 이 세상에 3명의 친구만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던 전혜린의 심정이 이렇게 변해가는구나 느꼈다.

 

임신과 더불어 그 임신에서 죽음의 두려움은 상당히 깊은 고뇌로 풀어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놀란 부분은 그녀의 죽음과 생의 공포였다. 죽음의 공포보단 삶에 대한 공포가 더 무섭다. 이 모든 허무와 어지러이 보이는 세상 속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그녀의 욕망은 자살이 결국 모든 것이 해방인가? 너무 극단적일 수밖에 없는가에서 오늘 <이방인>으로 통해 읽어본 후에 그녀에게 실존주의자로서 죽음이 직면해야 그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죽음이야 말로 삶의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느낌이다.

 

모르겠다. 예전에 오타쿠들의 성지라고 불리는 가이낙스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에 나오는 매우 섹시하고 글래머 여자박사인 포트만이 회의에 가득한 대사가 생각난다. “나도 어렸을 적에는 정말 겁쟁이이었어. 어른이 되기 전에 세계가 멸망하는 게 아닌지 매일 걱정이었어. 그래서 어른이 되어 다른 의미로 겁이 났어. 이 세계는 추하게 썩어가며 그런 주제에 영원히 이어진다고 깨달았기에...” 대사를 보면 왠지 모르게 전혜린 교수의 심정을 다시 보는 기분이다.

 

삶에 대한 공포 그것은 아무런 정신과 영혼도 없이 그저 그런 흘러가는 세속에 젖어 권태에 사로잡혀 살아야 한다는 공포, 그래서 그 공포에 의해 억압감을 받는 자는 허무함에 자신을 빠져들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 것일까?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라는 애니메이션은 현재의 추한 문명 속에 억압된 에로스를 보존하느냐? 아니면 타나토스라는 모든 죽음으로 통해 새로운 에로스로 꽃을 피우는가? 선택은 자신의 고뇌를 안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모두 자아를 잃고 가느냐이다.

 

그런 비극적인 상황은 연속은 아마 교육이란 집단적 사회의식인 모양이다. 교육은 필요하나 그 교육의 의미에서 무엇이 맞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내가 가장 어른들이 새롭게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착하게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 세상의 빛이 되어라.”로 꼽는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착하게 바르게 빛이 된다는 말인가? 자신들의 고정된 사회권위에 대한 종속인가? 물론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 오이디푸스의 미래다. 하지만 그 오이디푸스에게 자연으로 돌아갈 길을 막는다.

 

전혜린 교수의 아이에 대한 가치관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학교 점수는 아이의 장래에 대해 말해 주지 않는다. 그것은 부모들의 우스꽝스러운 허영이다. 그것을 나는 증오한다. 나도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부모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왔다. 공부가 나에겐 맘에 들었고 좋은 점수를 받는 건 우선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에서 지금 얻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차라리 성경이나 요가를 공부했어야만 옳았다. 혹은, 재능이 있다면 그림을 공부했어야 했다. 난 내 아이에게 좋은 점수를 받으라고 결코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비열한 짓이다. 대부분 가장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부모들이 특히 그런 짓을 한다.”

 

공부라, 나는 우선 공부에 대해 애증의 관계가 있다. 지금 막무가내로 책을 읽어가면서 나의 인생에 크게 도움도 되는지 안 되는지 알 수 없다. 적어도 내 밥벌이엔 당장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라면 먼 미래 좀 더 높은 곳에 오르면 더 먼 곳을 바라보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다고 당장은 내 일상생활에 도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기매체와 유행이란 spectacle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물론 인간은 그 사회의 흐름에 당장 거슬릴 수 없다. 하지만 거기에 떠내려가기 싫기에 나는 나만의 세계에 갇히는가? 아니면 남들과 똑같은 것만 보고 비슷한 생각에 이분법의 논리로서 그 속에서 자유를 봐야 하는지 아이러니하다.

 

나는 책을 막무가내로 읽지만, 사실 나는 아주 형편없는 학교생활을 보냈다. 덩치는 멀쩡하나 운동도 젬병이고, 싸움은 겁을 냈다.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아 보인다. 다른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공부를 너무 못했다. 공부 못한 이유로 무시를 받고 경멸을 받던 나였다. 그런 나도 가끔 이름 없는 대학에 다니는 자에 대해 무시하는 나를 발견할 때도 있다. 물론 남들 노력할 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불량한 짓을 한 것에 대한 대가이고, 그 대가로서 그는 다니나, 거기서 다시 기사회생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공부 못해 집에서는 꾸중과 다른 학생에 대한 비교, 교실 내에서는 왠지 모르는 따돌림과 무시, 교사들에겐 비인간적 모욕과 대우들이 내 자신을 기형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괴물을 잡겠다고 내가 괴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괴물을 잡으려고 내가 괴물이 되어도 세상은 잡을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린 것처럼 자기만의 영역을 과시한다. 오늘날 아이들에게 당신들의 미래와 꿈은 무엇이니 물어보면 대부분 대기업과 공무원이라고 한다. 심지어 생명을 다루는 의사와 간호사에 대해 직장에 대한 부분이다. 우리 삶이 이렇게도 각박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를 차지하면 마치 신성한 자리에 앉아 미사어구만 늘어뜨리는 가식을 보여준다.

 

단지 자리에 고수하는 것으로 모든 이데아적인 가치를 무시하는 것인가?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진실로 남을 위해 사는 분이 있으니 그런 분들의 노고를 부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진실함에서 나는 진실하다보단 차라리 나는 진실한가? 아니면 나는 진실한 것에 대해 의문에서 그 의문조차도 진실하다고 여기는 것조차도 진실한가? 라는 부정과 부정에 또 다른 부정이 탄생할 수 있다. 다시 글을 적어도 지식에 대한 억압과 권위에 지식으로서 대항하여 대항하는 나와 그 모든 글들이 웃긴다. 아니라면 속물적인 글로서만 적어가야 하는 것인가? 실존적 존재에서 나와 타인의 경계는 생각하면 결국 spectacle의 열렬한 관객인지 아닌지의 차이인가 싶다.

 

그런다고 하여 전혜린 교수처럼 죽음이란 타나토스에 들어가기도 그렇다. 삶에 대한 공포와 죽음에 대한 공포, 둘 다 공포다. 삶과 죽음이 같이 붙어있기에 삶이 곧 죽음이란 말은 너무 관념화처럼 들리는 말이다. 아니면 루소처럼 “청춘기는 예지를 배우는 시기다. 노년기는 그 예지를 실행에 옮기는 시기다. 경험은 언제나 교훈을 준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각자 자신 앞에 남은 생의 기간에 대해서만 유익할 뿐이다. 죽어야 할 바로 그때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할 때는 아니잖은가?”처럼 말이다.

 

전혜린 교수의 글을 보면 자신의 일상적인 부분에서 끝없이 고뇌하고 방황한다. 그냥 보기에 자신의 주변만 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서 자리 잡은 억압이 왜인지 아는 것 같다. 1961년 5월 16일에 대한 글은 너무 식상한 것처럼 보이나, 사회의 일방적인 요구사항과 그것이 결국 국가적인 흐름과 지역과 사회의 연계성을 아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독일 뮌헨의 슈바빙의 거리는 자신의 고향인 한국보다 더 고향처럼 느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숨을 쉬는 자유, 뭔가 얽매이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그 신선함, 이방인도 이방인이 아닌 집처럼 여길 수 있는 곳 슈바빙을 전혜린 교수는 그리워한 것이다. 표현이 살아있고, 꽃들이 만발한 곳, 자연이 숨 쉬는 곳을 말이다. 자신의 동생 채린에게 보내며 그런 자연의 미와 책에서 찾는 즐거움을 편지를 보낸 전혜린 교수는 작은 것에 매우 기뻐하던 소녀와 같은 마음을 가진 것 같았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 대해서나 혹은 2장 헤세로부터의 편지에서 그림을 보면 더욱 그렇다. 긴 생머리에 줄무늬 스웨터, 무릎 아래까지 오는 치마를 입은 소녀에서 말이다. 그것은 전혜린 교수이기보단 그녀의 동생 채린이를 생각한 그림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책 제목처럼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와 같이 이 모든 즐거움도 또 다시 조우할 수 없게 되었다. 끝없는 죽음에 대한 향기를 추구하는 전혜린의 모습은 자연에 돌아가고 싶다는 그 진정한 열의만 전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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