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전2권 (한글판 + 영문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 영문판) 9
알베르 카뮈 지음, 최헵시바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누구의 의지로 살아가는가? 나는 나의 의지로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라면 나의 존재에 대해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가? 혹은 지금 이 순간 나는 살아있음을 내 스스로 인정하고 있을까? 이런 무한의 의문이 개인적으로 경제적인 발전도 주지 못하나, 우리는 이런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과 동시에 죽음이 같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과 삶의 순간이 교차하는 것에서 우리는 슬픔과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으나 그 순간마저 반드시 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던진다.

 

이번에 읽어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특히 그러하다. 카뮈는 본래 프랑스인이 맞는 것 같기도 하나, 그의 어린 시절은 알제리의 배경이었다. 알제리와 프랑스, 참으로 뭔가 이치가 맞지 않은 나라다. 왜냐하면 프랑스혁명의 의미는 자유, 평등, 박애라고 하나, 그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남의 자유를 주자던 루소, 당동, 로베스피에르와의 의지를 꺾은 것이 아닌가? 한 때 프랑스 지식인들은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했다. 그들은 진정한 자유를 위해 국가주의 안의 자유를 비판한 것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그런 카뮈가 살던 시절의 모습을 많이 반영한 것 같다. 타들어갈 것 같은 더위에 알제리의 아랍인들을 죽이면 뫼르소에서 다소 프랑스와 알제리의 모순을 여기서 느꼈다. 왜냐하면 같은 나라이라고 하면서 서로 다른 것을 토대로 차별을 가한 점이 여지없다. 혹은 롤랑 바르트가 기호학에서 시니피앙 내의 시니피에를 해석함에서 그 시니피에가 다시 시니피앙으로 되어 또 다른 시니피에를 설명할 때 어느 흑인 어린아이가 프랑스깃발을 보고 경례를 한다. 알제리 소년이 프랑스국기에 경례하는 것은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에 대한 정책과 거기에 대한 지식인들의 저항심이다.

 

자신이 살아감에 있어서 뫼르소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선택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것에 대한 의문과 원인에 대해 생각지도 않아 결국 벽에 갇히는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뫼르소는 그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떨지 않고 그저 자신이 없어짐에서 구토가 날 것 같은 지겨움이 없어질 것이란 점이다. 오히려 자신이 기요틴 아래 목이 나갈 때 그것을 보러오는 사람들이 가진 증오의 시선들을 갈망했다. 자신의 죽음으로 이들에게 삶의 영위가 다시 오리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방인>에서 과연 이방인이 누군가?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과 마리와의 성행위를 연속적으로 이루어낸다. 어머니에 대한 죽음에 대해 무감각하던 것처럼 마리와의 성행위는 사랑보단 그저 무의식의 욕구였다. 그 이상도 있지도 않았다. 마리가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는 그저 그래?”내지 특별한 대답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서 사람들을 대하지 않았다. 피상적으로 거의 있는데도 왜 있는지 알 수 없다. 늙은 개를 잃은 노인, 창고지기 건달, 심지어 건달의 친구까지도 말이다.

 

그의 유일한 삶의 의지는 해변에서 뜨거운 태양이 작렬 하던 순간이다. 아랍인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 뭔가 어지러워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으나 그의 손에 나이프가 있다는 점은 분명히 본 것 같다. 그러나 그에게 총을 겨눈 것은 그가 위험인자보단 태양의 뜨거운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랍인에게 총 1발을 발사하고, 쓰러진 그의 몸에 다시 4발의 총을 발사한다. 1발만 충족하나 왜 4발이나 발사하는가? 타인의 죽음과 그 죽음의 확인으로서 자신의 살아있음을 확인하려 했는가?

 

도대체 알 수 없는 심정으로 그는 결국 살인죄로 체포된다. 그 감옥이란 지겹고 따분한 시간이 그에겐 견딜 수 없는 공간이 아니라 그 공간마저 적응해버린다. 담배에 집착하던 그가 이제 담배도 필요 없고, 잠이 오지 않은 그가 잠을 하루에 18시간이나 잔 후에 나머지 시간은 밥을 먹고 배설을 한다. 마치 사육장 내에 한 마리 짐승처럼 말이다. 그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이제 그가 아무런 생각 없이 남의 처지에 멋대로 어울린 게 그의 목을 노린다. 그런데 오히려 그는 그의 목이 없어지는데도 막연한 자세다.

 

신을 믿지 않고, 어머니의 죽음에 울지 않고, 다음날 매혹적인 글래머인 마리와 성행위, 포주와의 편지와 조언, 노인과 개, 해변의 태양...이것들이 다시 재판장에 올 때 뫼르소에게 모두 불리했다. 우연이란 설정에 그의 우연은 마치 고의적인 행동으로 보였다. 검사의 취조, 무기력한 뫼르소의 모습, 뫼르소는 재판장안의 모든 것이 낯설고 괴이했다. 심지어 자신이 재판장에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자신이 사건의 발원지인데도 그 발원지인 자신은 그것에 대해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주변에서 스쳐 지나가는 바람같이 보았다. 그는 자신의 일인데도 자기 스스로를 이방인처럼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이방인 뫼르소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임을 그는 밝히려 한다. 우리의 인생이 마치 우리의 선택이 타인들의 선택에 의해 조작되고, 그 순간조차도 타인들 역시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조작되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뫼르소는 죽음의 순간이 오자 자신을 구원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사제가 와서 나의 아들이여 하는 말과 그를 구원하기를 바라는 사제의 기도에 욕과 짜증만 내세웠다. 신을 믿지 않으며, 오히려 사제의 말이 더 자신의 심정을 괴롭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어딘가에 몰리거나 막다른 골목에 접하면 순간 비과학적이고 미신의 세계에 의탁한다. 뫼르소는 그런 것도 없었다. 아니 삶의 활력에 대한 의미를 찾지 않으니 죽음에 대한 공포심은 있으되, 그 공포심에 자신을 위로하지 않으려 했다.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없기에 자신의 존재적인 것에서 의미가 없어 항상 피로한 모습이다. 차라리 죽음이 온다는 생각에 자신의 어머니가 죽기 전 양로원에서 왜 약혼자를 두는지 이해하겠다는 뫼르소의 독백은 죽음의 순간이 와야 진정한 자신의 삶을 발견할지 모른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그 기분을 독백한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모든 고통을 씻어 주고 희망을 없애 버리거나 한 듯 온갖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가 가진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이 열린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 마치 형제 같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내게 남은 소원은 오직 하나, 그 모든 것이 완성되고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질 수 있도록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 그날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와 증오에 가득 찬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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