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이대현.김혜원 지음 / 다할미디어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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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하면 보통 우리 일반 사람들은 “나는 영화 좋아해! 저번에 그 영화 좋았어! 재미있었어! 좋은 작품이야, 에이 별로야!” 수많은 반응이 오고간다. 하지만 그들의 문화산업에 대한 취미생활에 대한 부분을 별로 말하고 싶지 않으나, 다소 위선과 가식의 냄새가 나는 점에서 재미가 없다. 영화를 왜 보는가? 라는 점에서 단지 나오기 때문에 혹은 killing time이란 영역에 집착하여 어떻게 보면 kill in the name으로 될 판국이다. 영화라는 것은 하나의 우리에게 존재성에 대한 의문을 준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본래 영상에서 1초에 24프레임의 이미지가 겹치고 우리 인간이 미쳐 볼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영화라는 것은 인간이 시각정보로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를 보게 해준 하나의 새로운 세계이다.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모습이나 카메라 앵글에서 보이는 피사체의 행동들은 감독이 의도하든지 혹은 의도하지 않아도 보이고 싶거나 보이지 않을 것들이 보인다.

 

영화는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것에서 매우 재미있는 이유는 그것은 우리라는 인간들을 마치 타자로서 대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대한 카메라의 시선은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과 머나먼 존재에서 때론 자신과 같은 모습을 발견한다. 하지만 cliche의 영역에서 지나친 소재의 남발은 우리에게 몰입감만 요구한다. 영화 역시 문화산업의 일환이므로 경제적 요소가 배제될 수 없다. 영화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데올로기 추구에 당연히 부합되는 점이다.

 

이데올로기에 접근한 영화이기에 영화라는 속성에서 우리는 당연성에 대해 당연성을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영화로 소통하기와 영화처럼 글쓰기라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보편적 관점에서 서술해야 하는 미학적 가치와 더불어 그것이 하나의 헤게모니로 이어지는 아이러니는 영화에서 예술이냐? 아니면 입맛 맞추기 급급한 인스턴트 햄버거이냐? 물론 인스턴트 식품도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할 수 있다.

 

영화로 소통하는 것이란 그 함축된 의미와 숨은 의미를 잡아낼 수 있고, 영화처럼 글쓰기를 하면 그 세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다. 진중권 교수의 서적 <icon>에서 문화비평을 논한다. “문화비평이라는 이름의 글쓰기는 결국 말 없는 사람을 읽는 작업이다. 그것은 말 없는 사물에 인간의 목소리를 주어 그것들이 스스로 자신을 말함에 이르게 해야 한다.” 이것에서 가장 좋은 것은 영화다. 영화에서 배우들은 말을 하고 대사를 나눈다.

 

하지만 보는 자가 주체이지 보이고 있는 자가 주체가 아니다. 결국 자신의 말을 하지 않은 채 그것에 의해 지배당하는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담론화에서 자신의 상상력과 판단력으로 문화를 수용하여 재생산하여 사적인 영역의 현상화를 위한 길에서 영화 역시 좋은 소재다. 나는 어제 그것을 봤어! 너도 그것을 봤니? 그것 재미있지로 모두 끝이 나고 동의와 동질감을 느끼고 있을 때 영화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이미 안드로메타 성운에서 헤엄치고 있다.

 

영화든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 서사의 허구성에서 오히려 개인의 역사가 아닌 무의식적 신화의 공간을 보여주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서사의 맛이다. 영상서사에서 영화는 바로 우리 인간이 가진 모습을 보여준다. 단지 조금 다른 점은 스토리텔링 소재들이 이전에는 가상이야기에서 이제는 진실이 재구성되어 보이는 것이다. 영화의 본질에서 허구로 통해 허구의 인식이 중요한데, 사실과 허구의 재구성이 해체되어 하나의 사실감으로 변모될 위험이 있다.

 

그것이 때로는 순기능을 할 수 있지만, 때로는 악기능을 한다. 스펙타클이란 단어 연발에서 우리 대중들이 영화를 두고 스펙타클한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보고 무단히 거기에 얽매여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스펙타클이다. 예전에 아는 분의 추천으로 파이팅클럽을 봤는데, 인간이 속한 사회에 어떻게 인간은 속박을 벗으려 하나, 그 속박을 푸는 방법조차도 속박이었다. 스펙타클의 사슬을 푸는 것은 개인의 의지이지, 결코 남의 의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단지 스펙타클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다. 스펙타클을 전복해도 다른 스펙타클로 올라오고 수많은 스펙타클이 각기 서로에게 또 다른 스펙타클로 재생산된다. 때로는 스펙타클이 하나의 사실을 만들어버리는 시뮬라크르 세계다. 최근 pata-physics의 세계에서 스펙타클이란 진실한 의미도 부여한다. 피할 수 없고 도망칠 수 없다면 받아들여 즐기고 소비하자! 하지만 이런 과정을 위해서는 영화로 통해 소통해야 한다. 소통조차 불가능한데 어떻게 그것을 본다고 해서 말할 수 있으랴?

 

영화처럼 글쓰기는 자신이 영화를 다시 만드는 과정이다. 영화에 가려진 이야기를 찾아 우리 인간들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영화란 다소 불편한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편안한 영화에서는 우리 모습이란 없다. 단지 욕망의 신화에서 완벽한 허상만 존재한다. 현실에 있을 것까지도 않을 불편한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를 비추어준다. 전에 회사원이란 영화를 보았다. 살육이 하나의 회사일이 되어버린 잔혹한 세상에서 평범한 인간이 매우 잔인함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남들과 같이 밥먹고 야유회가고 출장가고 그런다. 그런데도 거기에는 살인과 폭력이란 무서운 행동이 있더라도 죄책감이 없다. 그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이다. 나라는 존재는 단체라는 패거리에 숨겨 자신을 타자화 시킨다. 그때부터 괴물은 탄생하기 시작한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에 가서 아우슈비츠 나치수용소의 악마 소장인 아이히만을 봤을 때, 그는 너무 단조로운 인간이었다. 사디즘이 없고 그저 권태롭게 보이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건 우리 보통 사람들이 그렇다. 사디즘의 미학이 오히려 고통과 상처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의 감정을 가진 채로 폭력을 수반하는 것이 더 미학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나도 모른 채 타인을 죽이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파시즘적인 영역에서 문화란 집단광기 도구의 방법이다. 독일 나치의 괴벨스의 프로파간다의 위력은 완벽한 우리를 추구함이다. 완벽하기에 너무 완벽하기에 결점은 모두 제거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다.

 

이미 자신만의 구원성이란 신화적 열망은 결국 스스로 파탄하는 것이다. 회사원은 그런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소 내용을 보면 이퀄리브리엄이란 영화가 생각난다. 마치 조지 오웰의 <1984>와 같은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감정을 잃은 인간이 무척이나 잔혹하다. 그 잔혹한 인간이 오히려 그 세계를 부순 영웅의 창조가 된다. 회사원은 영웅 대신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동기는 사랑하는 여자가 죽은 것에서 집단주의에 대한 저항의식이다. 폭력의 사회는 결국 폭력으로 구원할 절대적 신화로 이어지는 것인가?

 

영화로 소통하는 것은 결국 불편한 것에 대한 의미를 잡아 보는 것이다. 순수하게 포장되어 있는 바비인형은 아무 것도 낳지 못한다. 아이들에 의해 즐겁게 가지고 노는 도구에 불과하다. 문제는 바비인형을 만들고 즐기는 것은 우리 인간이다. 스스로 바비인형을 가지고 놀기에 갖가지 험상궂은 바비인형이 탄생한다. 물론 바비인형 스스로는 자신이 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외적으로 완벽하게 꾸며져 있으니 말이다.

 

영화처럼 글쓰기에서 헤겔과 아도르노 식의 변증법은 매우 효용이 있을 것이다. 찬, 반, 합에서 부정의 부정은 긍정인가? 또 다른 부정인가? 영화의 세계에서는 이런 방법이 계속 통용된다. 회사원이란 영화는 부정의 부정이 결국 긍정이 되었다. 파괴적 이데올로기의 정당화란 카타르시스의 염원을 관객에게 부른다. 그러나 부정의 부정이 또 다른 부정을 낳는 그로테스크에선 우리는 어떻게 보면 좋을까? 지구 종말에서 위기를 넘어도 해결되지 않은 채 또 다른 여정을 걷는다.

 

최근 영화 <남영동 1985>에서 실제 인물인 김근태 전 의원에 대한 이야기를 각색했다. 서사의 마무리는 부정의 부정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고문전문가의 휘파람 소리에서 또 부정의 시기가 온다는 것으로 영화서사를 마무리해도 그 영화서사의 소비자에게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제부터의 영화는 당신이 감독이야! 이런 의미를 던진다. 문제는 그 영화감독들의 인원이 다소 부족함에서 <남영동 1985>는 신화의 파괴로서 신화를 만들려 했으나 결국 신화의 한 조각으로 되어버렸다.

 

어째든 이 책을 보면서 과거에 내가 영화비평을 해본 작품이 있었다. 아니 영화리뷰라고 해야 하나? 생계를 위해서나 전문가 세계가 아니라 아마추어적인 취미와 성향에서 영화텍스트에 대한 재생산은 반가운 내 자신을 만난다. <부러진 화살>, <고지전>, <글러브>, <코쿠리코 언덕에서>, <마당을 나온 암탉> 영화가 아닌 소설로 본 <걸리버 여행기>, <고백>은 내가 소설과 영화라는 문자서사와 영상서사에 대한 텍스트 세계에 있던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물론 가끔씩 영상서사를 분석한다. 그러나 아쉬운 부분은 영상서사의 분석은 시청이 2시간 내외라면 글을 적는 시간 역시 2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아니 그 이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영상서사에 대한 의미해석과 주변 정보 관계 그리고 좀 더 보완할 상황은 스스로 찾아야 할 숙제다. 그래서 영화보기보다 영화읽기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을 아는 맛만큼 보기만 하는 것 이상으로 즐거움을 준다. 영화로 세상과 소통하고 영화처럼 글쓰기를 하여 영화를 보는 것에서 주인공은 영화 속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판단하는 나라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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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 A Life - 고요한 밤의 빛이 된 여인
도로시 허먼 지음, 이수영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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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존경하는 정치철학자로는 미국 자유주의 철학자 존 롤즈다. 그의 자유주의는 포괄적인 자유주의가 아니라 정치적 혹은 민주적 자유주의다. 그것은 자신만의 자유를 위해 자유를 말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자유와 인권 그리고 삶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진실한 정의란 힘이라는 도덕적 권력보다는 최소수혜자에 대한 지원에 대한 일반적 삶의 구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최소수혜자의 존재적 가치는 너무 미약하다. 오히려 그들을 배제하는 것이 지금이나 옛날의 모습이 아닌가라는 의문에서 조금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최소수혜자에게 단지 생활의 보장이 아니라 일반인들과 같이 똑같은 선에서 달릴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하는 의미다. 그것이 진정한 평등이고 그 평등이 있어야 자유라는 것이 존재한다. 당장 내일 아침을 먹지 못하거나 오늘 밤에 잠을 잘 곳이 없으면 이들에게 자유란 없는 것이다. 인간이 단 한 명이라도 고통 받는 세상이라면 절대로 철학하기를 멈추지 말라는 어느 유명한 철학자의 말이 있다. 인간에게 특히 우리 같은 일반 소시민들에게 그런 말은 하늘에 떠 있는 조각배와 같다. 조각배 자체가 하늘에 뜰 수 없으며, 뜬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 기적이나 행운을 바라는 것에서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자신은 스스로 되지를 않으나 뒤에서 쉽게 이야기하곤 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희생이란 것은 값진 것일까? 이 책 마지막 부분에서 헬렌 켈러가 남긴 문구는 너무 보편적 진리다. “우리는 언제 알게 될 것인가? 너와 내가 모두 이어져 있다는 걸, 우리가 모두 한 몸뚱이를 이루고 있다는 걸. 인종, 피부색,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 정신이 세상을 채우는 그날, 사회 정의가 이루어진다.”

 

정의라는 것은 정말 단순하다. 헬렌 켈러가 말한 저 문구처럼 상대방과의 다름을 다르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기와 같지 않다는 것을 보고 배타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 어둠에 가려져 희망을 버린 채 내일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에 대해 헬렌 켈러는 사랑하고자 했다. 그녀는 성녀이기 위해 성녀가 된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에서 우려 나온 이상적 가치였다. 듣고 보지 못하고 말조차 할 수 없는 답답함이기에 더 촉각, 미각, 후각, 육감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글을 남기고, 상상력의 세계에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의 행위는 미국을 지나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대통령이든 왕이든 심지어 일반 국민이나 길가에 뛰어 노는 아이들까지도 말이다. 그 많은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기에 헬렌 켈러라는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라고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장애와 더불어 타인과 세상의 불통은 그녀를 하여금 외로움과 난폭함에 젖게 만들었다. 아무도 구원할 수 없는 현실, 그런 절망에서 앤 설리번의 등장은 절대적인 변화였다.

 

앤 셜리번이란 헬렌 켈러에게 말하여 인생 그 무엇과 바꿀 수도 바꾸지도 못할 존재다. 세상의 단절 그리고 인내심으로 태어난 헬렌 켈러의 사회화, 단지 안타까운 것은 앤 설리번이 순수한 마음으로 헬렌 켈러를 대한 것이 아니란 점이다. 자신의 가난과 지난날의 고통과 상처를 뛰어넘기 위해 앤은 몸부림을 친 것이다. 아일랜드의 가난한 아버지 밑에서 결국 동생과 고아원에 맡겨진 채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나마 삶의 위안이던 동생마저 병으로 죽자 앤의 인생은 파탄을 맞은 것처럼 보였다.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아 수술과 치료를 통해 겨우 볼 수 있던 앤, 그녀는 헬렌이 있는 남부까지 오는 것조차 힘들어 했다.

 

그래도 그녀는 헬렌과 만나 헬렌으로 통해 세상을 배웠고, 그리고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느꼈다. 나는 장애를 안고 있던 그녀들이 가진 뜨거운 욕망에 놀랐다. 앤은 존 메이시라는 연하의 지식인과 결혼했고, 헬렌 역시 자신을 흠모하던 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하려고 했다. 장애인이란 이유로 사랑조차 허락하지 않은 사회적 통념과 가족들의 억압에서 헬렌의 성적 욕망이 제일 인간다워 보였다. 하지만 결국 앤과 가족에 의해 무산되었고, 그녀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것이 결혼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들 성인으로서 바라본 헬렌의 모습에서 저렇게 여성의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균형 잡힌 몸매에 푸른색으로 된 인조 안구로서 사람들을 대해주길 바란 것이다. 헬렌에게 가장 큰 속박은 세상도 그렇지만 주변 인물이었다. 자신을 세상에 내보내 준 것은 분명 앤, 폴리, 넬라 였으나, 세상 사람과의 대화를 막은 것도 이들이었다. 헬렌이 보여준 기적은 모든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이들은 헬렌을 통해 성공과 부를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자기에게 가장 좋은 후원자였으나 차후에 가장 그녀와 앤을 공격하던 에너그노스와 그가 퍼킨스학교는 헬렌을 인간으로 대하기보단 오히려 하나의 도구로 대했다. 헬렌으로 통해 얻어질 명성은 행운의 여신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은 사실 앤이 한 노고였다. 단지 퍼킨스학교에 머문 점에서 모든 것을 공치사하려는 이들에게 헬렌의 인생에서 역정이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다. 자기가 작문한 글이 다른 작가의 글이란 점에서 맹비난을 받은 헬렌에게 생각해보면 그런 모방이라도 장애를 가진 자가 그것을 과거에 읽고 기억했다는 것을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그녀를 공격하기 바빴다. 헬렌 켈렌이 성녀로서 살아온 만큼 그녀는 뜨거운 투쟁을 하였다. 헬렌은 이성을 중시하고 감성도 중시했다. 1917년 2월과 10월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헬렌은 열렬히 러시아혁명을 지지했다. 심지어 자신은 마르크스와 레닌을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당시 FBI의 국장인 에드가 후버에게 감시를 받았으나, 헬렌은 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아무런 단서를 주지 못했다. 아니 처음부터 단서를 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와 관련된 사람을 만나도 그녀는 마르크스주의와 연관된 사람보다 그곳에도 인간의 이성이 있는 즉 휴머니즘을 찾는 것이라 생각하게 만들었다.

 

헬렌에게 중요한 건 사상과 국경이 아니었다. 고통 받는 자들의 안식과 평온이었다. 록펠러나 카네기와 같은 대부호들이 미국의 대자본으로 성장할 때 헬렌은 이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노동자와 가난한 자들을 옹호했다. 모두 흑인들에 대해 경멸하고 무시할 때도 흑인들도 인간적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헬렌은 천사인 동시에 때로는 피하고 싶은 존재였다. 왜냐하면 그녀에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어도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진정한 용기였다. 두려움 없이 자신의 있는 의지를 외치는 그녀에게 가녀린 육체이나 그 정신은 그 누구보다 강했다. 단지 그녀가 그렇게 하면 할수록 지원을 해주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과 생활의 안위를 바라는 사람들이 괴로워지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헬렌 역시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경제적 관념이 없었기에 그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기심에서 벗어났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헬렌은 가난하고 단아한 이미지만 강조하는 것에서 지난 호사스럽고 부유한 것도 같이 받아들였다. 옆에 있던 코디네이터 폴리의 입장에서 매우 불쾌하겠지만, 헬렌은 주는 것만큼 받는 것을 정성스레 간직했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이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개를 좋아한 만큼 개를 사는 것에 대한 비용과 기르는 비용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헬렌과 주변사람들은 경제적 관념이 없기에 이기심은 없으나 없는 만큼 현실적 상황에 대응이 느렸다.

 

모든 일에서 좋은 일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때에 따라서는 난제가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특이한 점은 자신이 원하거나 혹은 우연히 들어온 물품들이 화재나 사고로 사라져도 그것에 연연하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앤의 이혼한 남편인 존이 집을 불태워 모든 것을 날리는 순간조차 말이다.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지지 못한 그녀가 욕심보단 차분한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진정 강한 정신은 그런 대담한 모습인가? 그런다고 시위에 참가하여 죽어가는 노동자의 모습에서는 상처를 받는 헬렌에서 강함은 약함에 대한 포용임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세상이 빛이 된 이유는 그녀 자신은 분명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녀가 빛이라고 여긴 것은 어둠 속에서 보통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과 그 불굴의 의지였다. 헬렌은 그런 자신의 업적에서 모든 것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은 장애인들까지 그 자비의 손길을 뻗으려 했다. 장애를 가진 이유로 차별 받는 부당하며 오히려 이들을 일반인들과 같이 살게 해주려고 했다. 그런 모습을 그녀를 성녀를 만들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사람들은 헬렌의 기적 같은 모습과 그 외모에 비중을 높였다.

 

그녀가 원한 여성들의 참정권 내지 보수적인 기독교에서 출산제한 조치를 거부한 것을 문제를 삼았다. 21세기에서 당연한 것이 20세기에는 당연하지 않았다. 헬렌은 모든 것이 거부당한 것 같은 세상에서 자신의 세계에서 더 넓은 세계로 나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강한 정신만큼 앤, 폴리의 죽음을 지켜 볼 때는 마음이 힘들었다. 특히 아버지의 죽음에서 자신을 초대하지 않은 가족들의 사연에서는 매우 애통한 심정을 내비추었다. 그녀가 행복한 인생이냐고 물어보면 헬렌은 그렇다고 할 것이다. 단지 그 길은 평탄하지 못한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어둡고 침묵에 갇힌 세계에 자신이 있었기에 가시밭길을 넘어 모두의 마음을 열어주는 인생을 걸었고, 뜨거운 가슴이 있었기에 고요한 진리를 모두의 가슴을 다시 뜨겁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일구어 놓은 자리에 많은 장애인들이 자신의 꿈과 미래를 열어갈 수 있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우리는 숙제가 많다. 언제인가? 국내 무슨 국제 행사를 열리는데, 거리에 있는 장애인들을 모두 강제로 보이지 않게 했다고 한다. 단지 세계 정상들이 보고 좋지 못한 인상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이것을 본 헬렌 켈러라면 아마 눈물을 흘릴 것이다. 헬렌이 진정 바라는 것은 이들이 보통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는 관용과 배려의 미덕이 살아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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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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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a-physics, 예전에 해운대구 문화회관에서 들은 강의 내용이 생각난다. 이때 이 주제에 대한 원래의 텍스트가 무엇인지 모른 채 재미있게 대략 90분을 강의를 듣고 진중권 교수에게 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해 기술한 도서를 드디어 찾아내었다. icon, 일종의 상징 내지 혹은 윈도우에서 프로그램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보이도록 하여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이다. 물론 과거 MS-DOS 체계에서는 인간이 모든 컴퓨터를 조작하기에 컴퓨터는 인간에 대해 종속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윈도우 3.11990년대 나와도 그다지 효력이 없었다. 대부분 DOS 명령어 내지 M이라고 하여 디렉터리와 파일을 화면에 정렬시키는 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 윈도우 95가 나오고, 그것은 너무 불안한 소프트웨어이었으나 점차 98과 최근 me 버전까지 나오면서 윈도우는 모든 컴퓨터를 지배하는 주인이 되었다. 특히 포스트모던 사회의 정보화 유출에서 네스케이프 대신 익스플로어의 대두는 자기에게 필요한 소재들은 인간의 손이 책으로 통해 찾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의 공간에서 찾는다.

 

덕분에 우리는 컴퓨터와 인터넷에 대해 분리될 수 없는 존재적 현실에 처해있다. 게다가 애플에서 만든 아이폰과 거기에 따른 삼성 갤럭시 시리즈의 도래는 우리 인간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지게 했다. 어느 사무실에 가더라도 네트워킹이 되지 않으면 업무를 수행할 수 없으며, 실제로 기계적으로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치 그것에 대해 다 알 수 있는 hyper-reality로 도래한다. 우리에게 가상이란 과연 가상으로 끝나는 것인가? 오히려 이젠 가상이야 말로 현실의 지배를 도래했다.

 

그런 것인가? 이 책에는 아방가르드 예술이 나온다. 아나키스트처럼 정치와 상관없이 자유만 추구하기 보단 정치적 저항을 하는 이들에게 대중적 문화에서 자신들은 클래식적인 고급문화로 보여야 하고, 대신 부르주아 문화에서 속물적인 요소를 제거하기에 아방가르드는 이 이율배반 속에서 쇠퇴와 몰락을 거쳤다. 그럼에도 아방가르드 운동에서 정치적 예술적 미학적 가치가 있는 이유는 기존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거나 혹은 볼 수 없거나 생각지도 못한 성과를 보여준다.

 

1968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5월 혁명은 최후의 아방가르드들이 선두한 운동으로 물론 구조주의와 마르크스주의, 트로츠키주의, 보헤미안, 페미니스트 등과 같은 사람들도 참여했지만, 이들 중에서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행동이 독특한 것이다. 현대사회는 이미지가 매개로 되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스펙타클의 사회라고 지칭한 기 드보르처럼 이제는 이 스펙타클이 하나의 삶이 되었다. 단지 스펙타클에 의해 슬라보예 지젝의 도서명처럼인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부정적 명제에서 오히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려고 합니다.”로 발전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은 바로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상황에서 어느 것이 진실 된 가치인지 혹은 거짓된 위선인지 모르는 상황이다. 절대적인 자신 주장 아래 상대방에 대한 상대적 배타적 태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흐리게 한다. 우리에게 정체성이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자신의 존재적 가치가 없다. 마치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공격에도 무의식 내면 기저에 깔린 심연의 세계는 그 누구도 다가갈 수 없다. 다가가려면 끝없는 정신공격과 더불어 그 정신을 같이 공유하는 해방의식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전자에 모든 것을 치중한다.

 

계몽주의라는 상투적인 말에서 오히려 어느 틀에 메이게 한다. 물론 그런 건 많은 사람들에게 통용된다. 그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니나 진중권 교수가 직접 겪은 일화로 본다면 그가 독일에 유학시절 독일 여대생과의 일화의 소개가 흥미롭다. 그 학생은 진중권 교수가 기독교인인데도 철학적 무신론자에서 혼란해지자 이에 대한 진중권 교수의 답변은 종교적으로 기독교인이고, 철학적으로 무신론자이고, 윤리적으로 쾌락주의자이고, 논리적으로 금욕주의자이고, 경제적으로 사회주의자이고,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이고, 문화적으로 무정부주의자이다.”라고 말한다.

 

최근 간행된 <생각의 지도>에서 우리 인간들은 일정한 것에 매달려 있기에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이 약하다. 거대한 패거리 문화에서 발생되는 하나의 교조주의는 자유를 외치며 자유를 없애는 검열주의자로 변모한다. 독일 유학생이 만약 나에게 물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중권 교수님의 답변은 이율배반의 한도가 너무 높기에 이것은 어느 것이 정답이라 할 수 없지만 부정할 수 없다. 정체성이란 한 가지에 집착하는 뿌리가 존재하나 그것에 집착하면 모든 것을 망각하기에 그렇다.

 

일단 나는 종교적으로 무()이고, 철학적으로 유물론과 관념론이 섞여 있으며, 윤리적으로는 현실적 이상을 추구하는 시민주의자이고, 논리적으로는 구조주의자에 가까우며, 경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 가깝고,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이고, 문화적으로 오타쿠다.”라고 답을 할 것이다. 이미 이 모든 것에서 뒤섞임이라는 상대주의와 그 상대주의 하나에 올라간 절대적인 영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이상하게 보게 만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서 나의 신념은 정치적 자유주의다. 우리나라처럼 자신에게 존재하고 타인을 인정하지 않은 배타적 내지 포괄적 자유주의에서 떨어져있다.

 

참고로 존 스튜어트 밀이 마르크스가 영국에 올 때 그가 하던 행동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자유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주의다. 내 자유가 남이 침해하지 않은 한 모든지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것은 프랑스혁명에서 시민들이 외치는 중요한 미사어구다. 결국 그것을 무시한 혁명위원회가 스스로 언론을 압박하여 혁명은 말아먹었지만 말이다. 인간에게 이런 여러 가지 면은 인간 스스로 모순을 만들어 낸다.

 

과거의 신화의 시대에서는 신화 그 자체가 하나의 절대적 도그마였으나, 그리스신화 유적지가 단순히 유적지 박물관이 된 것에서 신화의 시대는 결국 신화적 시대로 내려온다. 왜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가? 신화가 살아있는 사회에는 신화는 분리된 신적영역 믿음의 존재이기에 이른바 분리적 사고가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리적 사고가 불가능하다. 왜 내가 처음부터 pata-physics에 모든 것을 보려 했을까?

 

이 글을 적는 나로서도 pata-physics에 갇힌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에 갇혔다고 부정하는 아방가르드 운동가들처럼 은둔생활하거나 혹은 자기의 심장에 겨누고 권총 쏘는 것도 제맛일 것이다. 하지만 그럴 용기는 나에게 없다는 점과 은둔생활을 하더라도 먹고는 살아야 하고, 환경공학자가 보기에 한국이 점차 오염되어 자급자족이 어려울 정도로 산림이 황폐하고, 설사 가능한 곳에 가도 국립 내지 시도에서 정한 생태보호구역이므로 들어가서 수렵과 사냥을 하면 법적으로 구속된다.

 

권총은 한국에서 총기를 매매할 수 없기에 그것마저 불가능하다. 아쉽지만 아방가르드 운동가들 특히 상황주의자들의 용기와 상상력에 박수를 보낼 수 있어도 따라갈 수 없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자기와 똑같은 행복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pata-physics를 즐기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 싶다. 앵프라맹스, 지각할 수 없는 무한소의 차이, 그 얇은 막을 드러내려는 시도 이것 어디서 많이 들어본 개념이 아닌가?

 

오타쿠라면 당연히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최근 개봉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에서 등장한 AT-field 절대적으로 침투가 불가능한 영역,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다. a마음의 벽은 종이 한 장보다 가볍고, 베를린 장벽보다 높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도 여전히 굿바이! 레닌이란 영화에서 주인공 어머니는 서독에게 합병된 동독의 망념에 사라잡혀 그 사실조차 모른다. 아니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정보의 과잉, 그리고 쉽게 말할 수 있는 현실 발터 벤야민이 언급했던가? 과거의 문맹인들은 글자를 모르지만 앞으로 영상을 모르면 문맹인이 되어야 하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영상의 문화가 넘쳐대면 이성과 논리의 사고 대신 감정과 무의식으로 대체되기 쉽다. 영화예술감독인 칸단스키가 영화에서 인간을 자극하는 것은 영상이 아니라 사운드다. 대략 70% 정도일까? 야한 비디오를 보면서 신음소리를 내는 남녀와 내지 않은 남녀에서 우리의 오감의 차이는 나는 이유는 아마 그럴 것이다.

 

아니라면 상상의 나래에서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결국 pata-physics의 성립은 가상의 현실화인데도, 진실은 오히려 사실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부터 진실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사실이라고 강조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가상이기에 사실처럼 보이려는 것이다. 그런 공간이 되어주는 것이 인터넷이란 무한세계는 인간의 가면을 처음부터 제공하기에 진실된 모습을 보여준다. 예전에 발터 벤야민의 <괴테의 친화력>에서 본문 내용보단 머리말을 제공한 역자의 글이 인상이 갔는데, 우리의 인터넷 문화는 id라는 메일이나 어드레스 주소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id는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의 이드(id)와 같이 간다. 또한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에서도 인터넷이야 말로 인간이 가진 본능적 욕망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라 한다. 눈에 실재하지 않은 2D 공간에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분출한다. pata-physics란 그런 것이다. 단지 그것을 소비의 향락에서 스토리텔링과 콘텐츠의 개발로 가야 한다. 일본 닌텐도 wii게임이 상당한 소득을 올린다. 직접 게임을 즐기지 않았으나, 그 게임을 하면 테니스를 치지 않아도 테니스 라켓을 대체한 물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테니스를 치는데 테니스가 아니다.

 

르네 마끄리트가 파이프를 그려 놓았는데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한다. 파이프 그림일뿐이지 파이프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이 그림의 대상이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율배반과 사실과 허구가 하나의 경계점을 혼돈하여 함열하는 것이야 말로 현대사회의 문화이다. 최근 나로서도 현실에서 페르소나라는 가식의 모습을 지닌 인간보다 오히려 인터넷이란 페르소나가 장착되어 있기에 진실적이란 인간상을 알게 되었다. 책이나 인터넷 투고기사를 봐도 실제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것이다.

 

pata-physics는 바로 그런 인간들에게 가상의 이미지가 오히려 현실화하는 상상의 구체화다. 한국처럼 정해진 틀과 관념, 속박에선 인간의 상상력과 감성을 무뎌져 간다. 스펙타클의 지배는 퇴근 후에 TV 앞에서 노동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TV에서 보이는 상품과 광고들에서 인간은 욕망하게 되고, 또한 광고주들과 방송사들은 이익을 챙긴다. 단순히 TV수신료만 내고 보는 문화적 소비자가 아니라 문화적 착취대상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즐거움이 되고 기쁨이 된다.

 

TV 앞에서 세상을 다 가진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한국이야 말로 드라마천국에서 현실적 상황과 드라마의 상황을 구분하지 못하는 pata-physics로 넘쳐댄다.대중문화의 지나친 압도는 인간에게 상상력을 배제한다. 늘 같은 이야기가 다른 형태로 바뀌어가기에 권태감으로 가득한 그 권태로운 매체를 권태로운 것조차도 느끼지 못할 권태적인 인간이 된 것이다. 논리의 이상이 pata-physics이니 TV의 세계는 이미 논리의 범주를 탈출했다. 최근에 들어서는 오히려 TV야 말로 조지 오웰의 소설인 <1984>의 전초전으로 보이니, 상상의 세계도 없는 가상에 빠진 인간들은 자신들의 자위를 하는지도 모른 채 계속 자위만 해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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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 줄이고 농촌을 살려라 - 변산농부 윤구병과의 대화 이슈북 4
윤구병.손석춘 지음 / 알마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아주 독특한 마초가 있었다. 마지막 변산농부 윤구병 전 교수와 손석춘 교수의 대담에서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예전에 일부다처제에서 일부일처제로 넘어가면서 윤구변 선생님은 자기는 사랑이 최고라고, 욕망이 없는 그것이 사랑이냐는 말에 순간 망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단지 다부다처제라는 이야기에서 진정한 인간의 자유는 모든 것을 자연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진정한 진보적인 것은 오히려 더 전통적인 영역에 있었다. 자연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느끼라는 것이다.

 

도시에 살면서 은근히 도시화인간이 되어버린 나로서는 윤구병 선생처럼 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반드시 이분처럼 살아야 하고, 따라야 하는 이유는 없다. 그래도 이분의 생각에서 우리가 선을 긋고 서로 으르렁 거리는 진보와 보수를 넘어 아니 전통까지 담아가는 윤구병 선생님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진정 필요한 게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물론 다소 도발적이고 위험한 발언도 있었다. 나 같은 경우 평소 독서생활을 하고 있기에 고전 문학이나 철학도서들을 읽는 경우가 있다.

 

우리집 내방 책장에서 담겨있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과 <공산당선언>을 생각하면, 보통 옛날 분들이라면 분명 나를 두고 반국가단체라고 하겠으나, 막상 진실에서 그 반국가단체 조직과 단체로 간주한 자들과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은 전혀 그런 조직과 단체와 관계없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사후 트로츠키가 정치적 패배로 인한 스탈린의 집권에서 찾아야 한다. 대부분 이를 알지 못하나 지식인들 사회 내지 인문학에 관심 있는 영역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윤구병 선생님이 자기는 스탈린이 좋지 못한 것까지는 알겠으나, 그녀석도 잘 한 것은 칭찬해야되! 라는 말에서 많은 지식인 사회에서 그를 스탈린주의로 보았다. 스탈린의 독재정치, 그리고 하다못해 이때까지 근현대사의 정치적 영역에서 독재자조차도 공과 실을 구분하고 단순히 한쪽만 물고 늘어지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했다. 물론 그게 포용되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도 내일도 어제 같은 지금까지도 계속 우리는 네편 내편으로 나누어 싸운다. 그 속에 나도 끼여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진정한 자유는 시골에 가서 농사짓는 이분에게 있는가 싶었다.

 

그런다고 농촌이 세상과는 자유롭게 본다는 것은 무리다. 도시화로 황폐한 농촌, 농사짓는 힘이 있다면 농촌에서는 젊은 축이라고 한다. 70~80세의 어르신들이 아직도 밭을 갈고 논을 일구고 있으나 그들이 노동이 중단되면 거기도 멸망이다. 윤구병 선생은 느린 세상을 원한다. 나도 느린 세상을 원한다. 각박하고 치열하고 경쟁만 존재하여 조금만 발이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지면 거기서 우리는 Game Over다. 아쉽게도 오락실의 게임은 100원 짜리 주화를 넣으면 Restart이나 현실은 Out이다. 즉 살 수가 없다.

 

모두 거기에 이를 악물고 서로 노릴 수밖에 없는 수라장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더 일하자고 발버둥 치면서 우리는 계속 우리는 착취한다. 자연이 왜 소중한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성적인 영역보다 무의식적이고 감정적인 영역이 강하다. 자연의 세계는 바로 인간 본성을 어울리게 하여 맑은 영혼을 유지하게 한다. 시끄러운 소음, 답답한 매연, 땅만 쳐다봐도 더러움으로 가득한 이 세계, 물론 감정으로 이루어졌기에 인간의 삶에 대한 열정을 찾을 수 있으나 진실한 삶의 여유는 없는 것인가?

 

내셔널 트러스트라고 영국의 환경주의자들에 대한 소개에서 인간이 가진 영혼이 자연과 맞닿으면 누구나 인격이 온순해진다고 한다. 맑은 숲속과 깨끗한 물을 말이다. 길가다가 오수와 폐기물로 가득한 냄새나는 하천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지금 살아있는 존재인가? 윤구병 선생은 우리에게 엉덩이를 의자에 앉기보단 들판에 나와 일하라고 한다.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과 인간성을 찾기 위해서는 직접 발로 뛰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억지스러운 지식보단 친근한 말투라고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제일 인상 깊은 것은 한국말이었다. 어려운 한자어나 영어로 도배하여 지식에 대한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익숙한 한국 사람들에게 오히려 그것이 발전을 저해되는 점이다. 나도 학교에 다니면서 왜 이렇게 어려운 영어원서를 읽으면 공학을 배울까라는 생각만 들었다. 한참 군복무 하면서 야간에 산업대학원을 다니면서 어려운 수학공식도 골치 아팠으나 영어번역은 더욱 난감했다. 좋은 책이란 권위도 필요하나 받아들이는 자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도 중요하다.

 

전문적인 내용이기에 다소 전문성의 용어는 부득이 피할 수 없다. 그렇지만 최대한 알기 쉽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다고 전달자에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사회에서 시민으로서 의식이 없다면 그 주체자도 문제다. 자신이 판단하고 올바른 선택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에 집착하기에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는 이미 프랑스혁명부터 시작된 문제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 그리고 늘 과거에 얽매이는 요소는 발목만 잡는 행위라는 것이다. 반면교사적인 역사관 대신 카르텔들의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신화적 요소에 우리는 지금도 넘어가는 점을 보면 근본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생각할 기회가 없다. 상상력이 없고 구체적인 부분을 다룰 수가 없다. 마치 공장에서 주어진 생산품처럼 정해진 틀에 매이고, 거기서 멀어지면 폐기처분되는 세상이다. 방학을 반년에 가깝게 하자라는 의미는 학교가 사람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망치는 곳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어떻게 보면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그 사회의 병든 사회인지는 그 어른들의 아이들인 학생들을 보면 안다. 우리 교육현실이 병든 것은 학생들의 책임이 아니라 어른들이 아닐까?

 

이들에겐 자유로운 사고와 넓은 세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점수 1점과 등수 하나에 목숨을 버리는 비극이 오늘날의 한국이다. 빠르게 가는 것보다 느리게 가는 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기 위한 시간이 필요해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경제적인 동물이다. 이기적인데 동물은 자신의 다가오는 불행에 대해 부정하고, 타인의 불행에서 안도감을 내쉰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인간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수라인가? 천국인가? 농촌에서 생명을 가꾸면 생명에 대한 시선이 달라진다고 들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을 너무 경시하고 무시하는 세상이다. 아니 다르게 보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는 사회다. 죽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희망 잃은 영혼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바치면 그들의 영혼을 위로 할 수 있으리오? 각박한 세상에서 일에서 사람들에게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자연의 숨결과 인간미를 느끼게 해줘야 한다. 미래를 위해서는 무조건 앞만 보는 것이 아니라 뒤도 옆도 위도 아래도 봐야 한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서로간의 화합이다. 농촌에서 농사짓는 게 힘든 일이나 윤구병 선생님에게 행복이다. 오늘을 살아도 살고 오늘도 죽어도 살고, 자연이 있는데 인간이 죽는 것은 당연지사라는 태도에서 철학은 복잡한 머리만큼 단순한 의미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게 안 되는 세상이니 안타까움만 더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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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소년 3
임진주 지음, 임애주 원작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이번에 적어보는 <금지소년> 3권 째의 리뷰는 매우 특별하게 여긴다. 그것은 예전에 금지소년 2권을 리뷰이벤트에서 나의 리뷰가 임진주, 임애주 자매 작가의 마음에 들어 이벤트 당첨 발표에 상품수여명단 1번째로 내 별명이 있었다. 그리고 3번로 나온 단행본이 나온 후에 내가 구입하여 리뷰 할 예정이라고 하니 역시 거기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팬들이 자기의 서적을 사주고, 리뷰까지 적어 인터넷이란 매체로 통해 팬들의 반응을 보는 작가의 마음은 매우 설레일 것이다.

 

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작가에게 만화책을 보고 리뷰를 취미로 하는 입장에서 예의를 다하여 글을 적을 수밖에 없다. 내용에 대한 전반적인 스토리를 설명해주는 것보다 이 만화책에서 담론하는 것을 주로 적어보기로 했다. 기본적으로 이 만화책은 사회적인 성과 생물학적 성에 대한 이중적인 요소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본래 자신이 남성임에도 여장을 하는 나운이의 경우 분명 사회적인 성이 방해였기 때문에 스스로 포푸리 소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즉 포푸리 소녀는 자신의 살기 위한 생계수단으로서 여자행세를 했다.

 

그것은 사회적 성인 gender 요소가 강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성적인 부분이 등장한다. 2화 마지막에 엄청난 미남이 옆에 미녀를 끼고 앉으면서 마지막에 포푸리 소녀의 허벅지를 만진 모습이 나온다. 그의 이름은 홍지수, 미남 중학생 홍지우의 친누나였다. 그녀는 사회적인 성인 gender에서 남자가 된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성인 sexuality로서 남성 행세를 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남동생 지우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함이다. 동생은 어린 시절 부모님이 옆에 없기에 외로움을 탔기에 지수는 지우의 엄마와 아빠가 되기로 한다.

 

양성적인 존재하기 바랐으나 실존적인 형상은 오히려 남자가 가까웠다. 포푸리 소녀의 경우 아직 어리고 야윈 소녀로 보이나, 은근히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선 친오빠의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포푸리 소녀가 아무리 여장하고 여자처럼 보이려고 해도 근본적인 요소는 버리지 못한다. 그것은 동생인 나솔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고, 그는 오빠로서 솔이를 돌보기 위해 사회적 성을 바꾼 것이지 지수와 같이 본래의 성향을 바꾼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지수의 동생 지우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지우는 매우 여자다운 매력을 가진 여성을 좋아했다. 머리카락이 길고, 화장과 의상을 세련되게 가꾸며, 말도 아주 부드럽게 하는 여성으로 말이다. 곧 그것은 지수의 선택이 틀렸음을 의미한다. 어릴 때의 지수는 긴 검은머리에 치마를 입기 좋아했던 누나였다. 오히려 지수는 그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지우에게 큰 따뜻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신화에 두면 마치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엘렉트라는 그리스신화 중에 전쟁영웅인 아가멤논 왕의 딸이다. 여기서 아가멤논 왕이 그리스신화에서 매우 중요한 서사인 전 트로이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바다에 배를 타고 가는데, 때마침 폭풍우를 만나고 그것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딸을 죽여 제물로 받쳐야 한다는 신탁을 받는다. 결국 아가멤논 왕은 자신의 딸을 희생양으로 바치고,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집에 돌아오자 자신의 아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인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당한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집에서 쫓겨나 비참한 생활을 하던 아가멤논 왕의 딸 엘렉트라는 동생인 오레스테스를 불러 자신의 어머니와 그녀의 정부를 살해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충동과 어머니를 자신으로 것으로 하고 싶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가능하게 된 동기는 오레스테스는 어린 시절 누나인 엘렉트라의 손에서 컸다는 점이다. 지수와 지우의 부모님은 어린 시절 모두 집에 비운 상태이고, 지우는 그것에 대한 외로움에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누나가 아빠와 엄마가 되어주겠다는 것은 결국 2가지 모두 하겠다는 것과 동시에 2가지 다 될 수 없다는 의미와 같다.

 

결국 누나는 여성성을 모조리 버리고, 여성 안의 남성성인 아니무스만을 추구한다. 만약 지수가 머리를 자르지 않고, 옷도 류아처럼 치마와 긴 생머리를 지니고 있었다면 동생인 지우는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달려가 사귀자는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어린 시절 지수의 뒷모습은 류아의 모습과 흡사하다. 류아에게 절대적으로 따라다니는 지우의 성향은 바로 어머니가 없기에 대신 어머니 같은 누나를 원하고 따르는 오레스테스의 모습이다. 그러나 진정한 누나와 같은 느낌, 아니 어머니와 같은 느낌은 포푸리 소녀에게 비추어졌다.

 

포푸리 소녀가 나운이로 한창 솔이를 돌볼 때 가난과 배고픔에서 괴로워했다. 그리고 솔이가 먹고싶은 것을 먹지 못하고, 냉장고에 음식이 거의 바닥날 때, 계란에 밥과 소금물 넣어 아주 소박하나 정성이 가득한 음식을 주었다. 결국 남성에게 필요한 여성의 매력이란 것은 인간 아니 어머니, 혹은 여성의 섬세함인가? 요리대회에서 지수의 손에는 비싼 음식재료와 고급향신료만 가득했으나 나운이에겐 계란, 쌀, 소금물과 같이 매우 쉽게 구하고 익숙한 재료였다. 이 시합에서 지우는 둘째 치더라도 도대남과 그 후배들도 포푸리 소녀가 준 음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여성성을 모조리 버린 것처럼 지수, 그러나 포푸리 소녀를 만나면서 그녀는 자신이 버렸다고 여기는 여성성을 보인다. 임진주, 임애주 작가의 그림체를 보면 항상 여학생들의 가슴이 크다는 점이다. 류아부터 시작하여 지수의 4인방 미소녀의 가슴 역시 크다. 가슴이란 여성성의 상징성에서 지수는 가슴이 남성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포푸리 소녀와의 2번째 대결에서 여성성을 내보인다. 그것은 허벅지의 굵기였다.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 작화에서 해부학적인 근골계에서 여성의 가슴과 허벅지는 <금지소년>에서 항상 강조되는 방법이다.

 

포푸리 소녀가 남자이기에 탄력 있는 굵은 허벅지를 가질 수 없다. 작은 키에 야윈 몸, 분명히 가녀린 소녀로서 나운이는 포푸리 소녀로 연기하면서 그나마 여성적인 점을 강조하는 것은 허벅지이다. 그런데 수영복을 입은 지수의 몸에서 그런 모습이 보였다는 점은 지수에게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남성성으로 무장한 자신의 모습에서 감추고 싶은 아킬레스건을 내보낸 점이다. 지수가 여자면서 여자의 몸을 탐닉한 건 그녀 스스로 레즈비언이라고 여기는 게 아니라, 1년 전 수영대회에서 누군가의 질투로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여자이면서도 여자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로 주변에 있는 여자에 대해 마치 하렘에 사는 왕처럼 군림하고, 자신의 남동생에게 여자를 믿지 못할 존재라고 한다. 그중에서 오직 포푸리 소녀는 제외하고, 그런 가시만이 돋친 지수를 제대로 여자로 봐주는 것은 동물처럼 감이 예리한 도대남이었다. 인간에게 보이지 않은 질투와 시기, 분노는 결국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성격파탄으로 이어진다. 지수가 포푸리 소녀와의 수영대결은 자신이 버릴 수밖에 없었던 여성성의 회복이다.

 

포푸리 소녀가 준 케이크를 먹고 싶어도 앞에서 부끄러워 먹지 못함은 지수 스스로가 억압하는 강박관념이었다. 단순히 지수가 지우의 이성교제를 허락하는 문제에서 벗어나 이제는 스스로가 여자로 돌아가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놓인 것이다. 만약 다시 지수의 어린 시절 섬세하고 다정한 누나로 돌아간다면 지우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지우가 바라는 것은 여성의 포근한 손길과 정이지 강하고 거친 남성적 위압이 아니다. 지우가 지수보고 누나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이 지수보고 누나로 인정하는 것에 제대로 본 적이 없기에 <금지소년> 3권의 대결이 4권으로 넘어가면 다른 문제해결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번 3권에서는 류아와 나운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대조했다. 나운이가 처음으로 류아의 집에 방문할 때, 류아의 집이 엄청난 집이란 사실에 놀라는데, 이때 나운이를 비추는 모습은 하이앵글, 즉 위에서 아래로 보는 구도였다. 반대로 나운이의 전화를 받는 류아의 모습은 다리를 강조한 로우앵글이었다. 상대적으로 류아의 권위가 강함과 동시에 모든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끝으로 마지막 부록편을 보면, 항상 그림은 임진주 작가가 그리는 반면 부록에선 글을 맡은 임애주 작가가 맡는다. 이번에 트랜스 섹슈얼 즉 남성과 여성의 반대로 된 자는 안승호인데, 참으로 기가 막힌 포즈로 시작한다. 안승호가 여자로 변하고 긴머리의 포니테일에 매우 짧은 치마를 엉덩이를 가리고 있는데, 엉덩이와 그리고 엉덩이가 연결된 허벅지가 매우 탄력적이거 날씬한 허리, 그리고 상체를 보면 가슴 역시 크다는 점이다. 작가분이 여성이라는 전제로 본다면 여성의 가슴은 자신의 상징적 요소로 볼 수 있고, 하체는 여성의 기본골격을 나타낸다.

 

다소 성적인 매력을 강조하는 것과 그러면서 자기의 정체성이란 2가지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서 본래 남성 캐릭터마저 본래 여성캐릭터로 나오는 특성까지 같이 부여해 버린다. 물론 이전에 여성이던 류아를 남성처럼 보인 그림도 역시 만만치 않게 남성의 모습을 나타낸다. 게다가 지우로 통해 아무 여자에게 들이대는 남성, 여성성을 버린 채 여자에게 들이대는 지수, 처음부터 류아에게 들이대는 도대남, 그런 도대남과 같은 남자를 류아의 계략에 걸려 유혹해야 하는 포푸리 소녀 나운, 스토리 전개가 매우 코믹적 요소는 많은 작품에서 성적담론을 살펴보면 이번 3편 역시 매우 역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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