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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 줄이고 농촌을 살려라 - 변산농부 윤구병과의 대화 ㅣ 이슈북 4
윤구병.손석춘 지음 / 알마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아주 독특한 마초가 있었다. 마지막 변산농부 윤구병 전 교수와 손석춘 교수의 대담에서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예전에 일부다처제에서 일부일처제로 넘어가면서 윤구변 선생님은 자기는 사랑이 최고라고, 욕망이 없는 그것이 사랑이냐는 말에 순간 망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단지 다부다처제라는 이야기에서 진정한 인간의 자유는 모든 것을 자연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진정한 진보적인 것은 오히려 더 전통적인 영역에 있었다. 자연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느끼라는 것이다.
도시에 살면서 은근히 도시화인간이 되어버린 나로서는 윤구병 선생처럼 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반드시 이분처럼 살아야 하고, 따라야 하는 이유는 없다. 그래도 이분의 생각에서 우리가 선을 긋고 서로 으르렁 거리는 진보와 보수를 넘어 아니 전통까지 담아가는 윤구병 선생님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진정 필요한 게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물론 다소 도발적이고 위험한 발언도 있었다. 나 같은 경우 평소 독서생활을 하고 있기에 고전 문학이나 철학도서들을 읽는 경우가 있다.
우리집 내방 책장에서 담겨있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과 <공산당선언>을 생각하면, 보통 옛날 분들이라면 분명 나를 두고 반국가단체라고 하겠으나, 막상 진실에서 그 반국가단체 조직과 단체로 간주한 자들과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은 전혀 그런 조직과 단체와 관계없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사후 트로츠키가 정치적 패배로 인한 스탈린의 집권에서 찾아야 한다. 대부분 이를 알지 못하나 지식인들 사회 내지 인문학에 관심 있는 영역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윤구병 선생님이 자기는 스탈린이 좋지 못한 것까지는 알겠으나, 그녀석도 잘 한 것은 칭찬해야되! 라는 말에서 많은 지식인 사회에서 그를 스탈린주의로 보았다. 스탈린의 독재정치, 그리고 하다못해 이때까지 근현대사의 정치적 영역에서 독재자조차도 공과 실을 구분하고 단순히 한쪽만 물고 늘어지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했다. 물론 그게 포용되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도 내일도 어제 같은 지금까지도 계속 우리는 네편 내편으로 나누어 싸운다. 그 속에 나도 끼여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진정한 자유는 시골에 가서 농사짓는 이분에게 있는가 싶었다.
그런다고 농촌이 세상과는 자유롭게 본다는 것은 무리다. 도시화로 황폐한 농촌, 농사짓는 힘이 있다면 농촌에서는 젊은 축이라고 한다. 70~80세의 어르신들이 아직도 밭을 갈고 논을 일구고 있으나 그들이 노동이 중단되면 거기도 멸망이다. 윤구병 선생은 느린 세상을 원한다. 나도 느린 세상을 원한다. 각박하고 치열하고 경쟁만 존재하여 조금만 발이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지면 거기서 우리는 Game Over다. 아쉽게도 오락실의 게임은 100원 짜리 주화를 넣으면 Restart이나 현실은 Out이다. 즉 살 수가 없다.
모두 거기에 이를 악물고 서로 노릴 수밖에 없는 수라장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더 일하자고 발버둥 치면서 우리는 계속 우리는 착취한다. 자연이 왜 소중한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성적인 영역보다 무의식적이고 감정적인 영역이 강하다. 자연의 세계는 바로 인간 본성을 어울리게 하여 맑은 영혼을 유지하게 한다. 시끄러운 소음, 답답한 매연, 땅만 쳐다봐도 더러움으로 가득한 이 세계, 물론 감정으로 이루어졌기에 인간의 삶에 대한 열정을 찾을 수 있으나 진실한 삶의 여유는 없는 것인가?
내셔널 트러스트라고 영국의 환경주의자들에 대한 소개에서 인간이 가진 영혼이 자연과 맞닿으면 누구나 인격이 온순해진다고 한다. 맑은 숲속과 깨끗한 물을 말이다. 길가다가 오수와 폐기물로 가득한 냄새나는 하천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지금 살아있는 존재인가? 윤구병 선생은 우리에게 엉덩이를 의자에 앉기보단 들판에 나와 일하라고 한다.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과 인간성을 찾기 위해서는 직접 발로 뛰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억지스러운 지식보단 친근한 말투라고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제일 인상 깊은 것은 한국말이었다. 어려운 한자어나 영어로 도배하여 지식에 대한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익숙한 한국 사람들에게 오히려 그것이 발전을 저해되는 점이다. 나도 학교에 다니면서 왜 이렇게 어려운 영어원서를 읽으면 공학을 배울까라는 생각만 들었다. 한참 군복무 하면서 야간에 산업대학원을 다니면서 어려운 수학공식도 골치 아팠으나 영어번역은 더욱 난감했다. 좋은 책이란 권위도 필요하나 받아들이는 자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도 중요하다.
전문적인 내용이기에 다소 전문성의 용어는 부득이 피할 수 없다. 그렇지만 최대한 알기 쉽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다고 전달자에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사회에서 시민으로서 의식이 없다면 그 주체자도 문제다. 자신이 판단하고 올바른 선택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에 집착하기에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는 이미 프랑스혁명부터 시작된 문제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 그리고 늘 과거에 얽매이는 요소는 발목만 잡는 행위라는 것이다. 반면교사적인 역사관 대신 카르텔들의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신화적 요소에 우리는 지금도 넘어가는 점을 보면 근본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생각할 기회가 없다. 상상력이 없고 구체적인 부분을 다룰 수가 없다. 마치 공장에서 주어진 생산품처럼 정해진 틀에 매이고, 거기서 멀어지면 폐기처분되는 세상이다. 방학을 반년에 가깝게 하자라는 의미는 학교가 사람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망치는 곳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어떻게 보면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그 사회의 병든 사회인지는 그 어른들의 아이들인 학생들을 보면 안다. 우리 교육현실이 병든 것은 학생들의 책임이 아니라 어른들이 아닐까?
이들에겐 자유로운 사고와 넓은 세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점수 1점과 등수 하나에 목숨을 버리는 비극이 오늘날의 한국이다. 빠르게 가는 것보다 느리게 가는 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기 위한 시간이 필요해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경제적인 동물이다. 이기적인데 동물은 자신의 다가오는 불행에 대해 부정하고, 타인의 불행에서 안도감을 내쉰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인간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수라인가? 천국인가? 농촌에서 생명을 가꾸면 생명에 대한 시선이 달라진다고 들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을 너무 경시하고 무시하는 세상이다. 아니 다르게 보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는 사회다. 죽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희망 잃은 영혼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바치면 그들의 영혼을 위로 할 수 있으리오? 각박한 세상에서 일에서 사람들에게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자연의 숨결과 인간미를 느끼게 해줘야 한다. 미래를 위해서는 무조건 앞만 보는 것이 아니라 뒤도 옆도 위도 아래도 봐야 한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서로간의 화합이다. 농촌에서 농사짓는 게 힘든 일이나 윤구병 선생님에게 행복이다. 오늘을 살아도 살고 오늘도 죽어도 살고, 자연이 있는데 인간이 죽는 것은 당연지사라는 태도에서 철학은 복잡한 머리만큼 단순한 의미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게 안 되는 세상이니 안타까움만 더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