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인적 동기

<혁명기 발브레이브>는 네이버 블로그 이웃님의 홈을 보고 조금 관심이 있어서 감상했다. 물론 애니플러스로 통해 작품 검색하다가 조금 흥미가 있어서 보기로 생각했었다. 그 이유는 나는 중장기적인 편수보다 12화 내외의 작품을 보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혁명기 발브레이브>는 24화로 그 편수 조정이 다소 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24화까지 보았다. 신작이 아닌 구작이기에 한 순간 몰아보는 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작품을 보며 느낀 점은 정말 잘 만든 것이다. 인간의 대립이란 항상 나와 타자, 내가 속한 집단과 남들이 집단이다. 그것은 마치 토마스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생각날 수준이다.

 

인간이란 결국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다. 자신의 안위와 상태가 보장받지 못하면 타인에 대해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다고 동물처럼 본능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인간에겐 인간 최대의 딜레마인 이성이란 것이 존재한다. 이성은 모든 걸 판단하는 척도가 되지만, 한편으로 그 이성이 자신을 무너뜨리는 함정이기도 하다. 인간이란 완벽하지 못하고 항상 이율배반적인 모순에 놓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말려들기도 하고, 때론 순수하게 자신을 희생한다. 그런 점에서 <혁명기 발브레이브>는 아주 심오한 주제를 남긴다. “발브레이브 그것은 세계를 파헤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세계를 파헤치고 밝히는 일을 결국 세계란 무엇이고, 그 세계에 사는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를 파헤치고 알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성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다. <혁명기 발브레이브>를 알아가는 것은 인간과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을 넘의 철학이란 학문과 연속되는 점이다. 철학을 아는 것이란 결국 인간의 존재를 탐구하고, 도 나아가 사회의 존재성까지 이어진다. 철학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은 정치라는 무거운 세계인 것이다.

   

2. 민주주의와 혁명기 발브레이브

<혁명기 발브레이브>의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을 지오르 학생들이 만들어가는 정치체계다. 1화에서 도르시아 제국의 테러로 인해 지오르 국가는 수많은 인명과 시설피해를 입는다. 어른들은 모두 강제로 납치 되고 남은 것은 고등학교에 남은 학생들이다. 그들은 싫든지 좋든지 선택해야 했다. 여기서 모두 죽을지 아니라면 한 치조차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인지 말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 학생들은 어른들이 모두 납치된 가운데, 임시정부개최를 선언하고, 자신들의 정부대표를 뽑기 위해 선거를 개최한다. 즉. 시민 한 명에게 투표권과 정치적 참여권을 부여한 셈이다.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원칙이 따르므로, 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자만이 정치적인 행방을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런다고 하여 그 대표를 따르는 사람이 대표에 대한 권한만 부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도 같이 권한을 부여하여야 한다. 단지 대표자는 그 권한을 결정하고 판단하여야 하고, 모든 시민이 자신들의 권한을 수행하여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 철학의 핵심이다.

 

이런 기본적인 개념을 설명하는 이유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어보면 나온다. 그것은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이 중요하게 여기는데, 자유라는 것은 방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다. 책임 없는 자유란 의미 없는 비겁한 발언이다. 대표자를 뽑아놓고 모든 문제와 해결을 맡기고, 자신은 뒤로 숨은 것은 부당한 일이다. 하지만 대표자가 1명이 천 명 정도라면 같이 시민주의로서 대표를 맡을 수 있으나. 만 명 내지 10만 명을 넘게 될 경우 매우 어려워진다.

 

권력관계에서 대다수의 시민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대표자에게 향하는 권력은 강해진다. 모든 시민에 대해 대표자가 만날 수 있는 여건이 존재하지 못한다. 따라서 민주주의 정체제도의 한계성은 대표자가 모든 시민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이와 달리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주인공인 쇼코는 모든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알며, 그들과 함께 학창시절을 보내는 활발한 소녀다. 그런 소녀가 대표자로서 정치적 자유주의를 펼칠 수 있는 이유는 소수의 지방자치단체로 이루어진 국가이기 가능하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모인 인구수가 적어야 가능하다. 정치적인 선택에서 참고할 만한 도서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인데, 사회계약론의 관점으로 본다면, 정치적 선택은 결국 일반의지이어야 한다. 민주주의 정치제도에서 자신과 반대되어도 상대방의 의결이 채택될 경우 그것에 대해 지지해주는 것이다. 일반의지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에 의한 선택지점이다. 하지만 인구가 많을 경우 많은 인간들이 거기에 대한 선택 지점에서 전체의지로 전환된다. 너무 많은 사람이 존재할 경우 자신의 의견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고, 거대한 소수 의견으로 집중되기 때문이다.

 

 

3. 프랑스대혁명과 <혁명기 발브레이브>

19세기 프랑스 철학자 중에 토크빌이란 사람이 있다. 그의 유명한 저서 중에는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이란 책이 있다. 여기서 앙시앵레짐이란 구체제라는 의미를 가진 것이다. 구체제에 해당되는 시기는 정확하게 말하여 1789년 7월 파리에서 일어난 프랑스대혁명 두고 나온 의미이다. 프랑스대혁명과 관련하여 그 원인은 루이왕정은 불안한 권력과 귀족의 세력다툼 그리고 교회세력도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주어서였다. 그런다고 프랑스 루이왕정이라고 하여 어느 시대에도 그런 정치적 견제를 받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토크빌의 서적에서는 분명히 밝힌다면 경제적인 조건을 들었다. 당시 프랑스는 미국독립전쟁을 지원하였는데, 그 이유는 영국이 자신들과 경쟁국가라는 점이었다. 전쟁의 물자소모는 무척이나 크고, 군수물품을 위해 많은 인력과 자원이 필요했다. 게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대부분 원자재들이 전쟁물자로 사용하기에 식량이나 의상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다. 당시 유럽에서 경제적 기본바탕은 역시 농업이다. 물론 파리나 도시로 향하여 찾아온 빈민들이 많이 있었다. 유럽에서 빈민들이 많아진 이유는 전쟁과 흑사병으로 인해 농경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게 되자 무역으로 통해 식량을 구매했다. 식량 구매를 한다면 당연히 화폐나 다른 지불조건이 필요하다.

 

그때 양털이 좋은 상품이고, 기존에 밀과 농산물이 나던 땅은 모두 양을 방목하기 위한 들판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도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면 많은 작품에서 배경적 상황이 19세기 전후의 유럽이고, 그 작품의 주인공이 소년이라면 양을 치는 경우가 많다. 양치기 소년이 단골메뉴로 나오는 것은 괜한 이유가 아니다. 그런 유럽의 경제적 상황조건, 특히 프랑스의 상황에서 혁명의 시작은 당통, 로베스피에르, 마라 등과 같은 자코뱅당에 의해 주도되나, 그 에너지를 얻을 수 있던 것은 도시빈민과 시골농민들의 분노였다.

 

따라서 혁명의 원인이 되는 근본적 원인은 프랑스대혁명처럼 인간의 생존과 연결되는 경제적 조건일 수도 있고, 혹은 부당한 억압과 독재에 대한 반항일 수도 있다. 혁명의 원인이 제각기 다르지만, 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은 그 사회가 부조리하거나 문제가 심각하여 더 이상 현상 유지가 불가능 할 때 일어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난다고 해서 모두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혁명가들이 나오더라도 민중의 지지가 없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혁명은 많은 사람과 무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 역사적 교훈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1919년 3·1운동에서 많은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주도했으나, 일본군의 총칼에 의해 무참하게 밝혔으며, 무력항일투쟁을 하던 독립군도 소수인력과 보급문제로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했다. 혁명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그 부조리한 사회구조에서 억압을 받는 피지배계급자들에게 지배계급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점이다. 가령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자, 그 영화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왕정에 대항하나 총과 대포에 무참히 쓰러진다. 총과 칼에 대해 총과 칼로 대항하더라도 그 무력의 차이가 결국 혁명의 패배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프랑스혁명역사와 더불어 <혁명기 발브레이브>를 보면 혁명은 2가지로 형태로 이어진다. 1가지 혁명은 사키모리 학생들이 납치로 인해 부재중인 어른들과 아루스 및 도르시아의 무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독립군으로 선언한다. 그런 정치체계에서 어른이라는 기성세대들이 비록 모두 납치되어 그 직권을 가지고 있어도, 그 직권을 대신하여 스스로 정부를 만들고 정치조직을 정비했다는 점, 발브레이브라는 전투장비로 통해 무력으로서 주권과 영토를 방위했다는 점이다.

 

학생들이 스스로 혁명을 하여 정부를 세운 이유는 단 1가지다. 자유분방한 생활을 누리고 싶은 것도 있으나, 도르시아에게 가면 안전을 약속받을 수가 없고, 아루스는 그저 발브레이브의 기체에 욕심만 있었다. 게다가 아루스의 의원은 사키모리학원 학생들의 탈출이 어렵게 되자, 발브레이브와 하루토만 아루스로 데려가려 했다. 게다가 자신들만 도망치기 위해 학생들에게 총을 겨누어 발사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학생들이 혁명을 일으켜 시민국가로 만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생존을 위한 인간의 본능이었다.

 

원인은 다르지만, 결론적으로 프랑스대혁명이나 사키모리학원 학생들이나 모두 위기에 닥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스스로 일어섰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오르 정부를 수립 후에 계속하여 위기에 봉착한다. 그것은 도르시아군대가 계속 침공하고, 추후에 지오르정부마저 마기우스의 공작에 의해 지오르의 학생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기 때문이다. 혁명의 성공에서 역사적인 교훈은 단순히 자국만의 성공만이 성공이 아니라 그 이후에 닥치는 위기를 극복해야 혁명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도르시아의 혁명은 어떤 것인가?

 

 

4. 러시아혁명과 <혁명기 발브레이브>

세계사에서 혁명에 대한 역사적 사건에서 3가지가 있다. 위에서 소개한 1789년 프랑스대혁명,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 그리고 1917년 러시아혁명이다.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러시아혁명을 거론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바로 도르시아라는 국가가 러시아혁명과 아주 관계가 깊다. 우선 도르시아는 도르시아제국보다는 도르시아 연방이라고 한다. 결국 연방이란 말을 사용한 국가는 20세기 태어나고 소멸한 소비에트 연방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원래 연방 국가보다는 군주가 통치하고 있었던 왕국이었다.

 

그 국가에서는 천 년이나 평화롭게 통치되어 있을 정도로 군주는 국민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피의 목요일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고, 아루스에게 군사적으로 열세했던 도르시아는 순간적으로 군사강국으로 태어난다. 문제는 피의 목요일이란 단어가 어디서 나왔을까 라는 점이다. 1905년 러시아에서는 아주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에서 가폰 신부가 수많은 노동자를 이끌고 거리에 가두 행진하였다. 그는 러시아황제인 차르에게 부디 자비를 베풀어 달라면서 차르의 사진을 들고 평화롭게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군대가 들이닥쳐 사격을 가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런 비극적 사건을 두고 피의 일요일이라 하고, 이에 대한 불만으로 러시아 내에서는 각종 파업과 시위가 발생했다. 그런 점에서 약간 의아스러운 것은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천 년의 왕국이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피의 목요일이 러시아혁명에서 피의 일요일이란 모티브를 가지곤 온 셈이다. 그렇다면 국왕이 국민들에게 미움을 살 정도로 실정을 저질렀는가? 라는 의문이다. 카인 대령의 부관인 크림힐트는 카인 대령이 소속된 반정파가 아니라 왕당파였다.

 

크림힐트와 기존 도르시아 군주를 지지하는 수많은 왕당파들이 도르시아 군대 내에 잔존하고 있었다. 작품에서 엘 엘프는 도르시아 국가에 대해 말하자면, 너무 무력에 치중한 나머지 그 무력으로 인해 나라는 더욱 암울해졌다고 말한다. 도르시아는 본래 아루스와 외교적으로 갈등을 빚은 국가이며, 아루스보다 군사력이 약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러시아혁명과 더불어 아루스를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하는가?

 

5. 러·일전쟁과 <혁명기 발브레이브>

<혁명기 발브레이브>에 대해 조사하다가 조금 의아한 면을 찾았는데, 각본가인 오코우치 이치로가 이전에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의 각본가였다는 점이다. 코드기어스와 같은 경우 브리타니아제국이란 군국주의 국가에 대해 eleven이라 불린 일본에서 제로와 흑기사 조직이 레지스탕스를 펼쳐 결국에 브리타니아제국의 세계제패를 위한 폭력을 해체한다는 것으로 끝맺음을 낸다. 주인공인 를르슈를 떠나 작품 전반을 보면 백인의 서구중심 세계 권력에 대해 일본이란 국가가 대항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코드기어스 시리즈 중에서 <망국의 아키토>와 같은 경우는 배경이 일본이 아닌 유럽인 점을 생각하면 그들의 피해의식이 무의식적으로 남아 자위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피의 목요일이 왜 러시아혁명에서 피의 일요일을 봐야 하는 점이다. 1904년~1905년 사이 일본은 대한제국이란 조선을 점령하기 위해 청나라와 전쟁하고 그 후에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다. 이때 러시아가 패배를 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전쟁물자로 인해 국민들에게 식량과 의복이 부족해지고, 경제위기로 많은 사람들이 실직되었다. 즉, 생존을 위한 인간의 의식주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피의 일요일은 러·일 전쟁의 러시아의 패배로 인한 결과고, 1905년에서 12년 뒤인 1917년에는 2월 혁명과 10월의 볼셰비키혁명까지 일어나는 도화선이었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시기를 보면 혁명이 있던 시기는 반드시 전쟁이 있었다.

 

1차인 1905년은 러·일 전쟁, 2차는 제1차 세계대전이 연접했다. 당시 러시아군대가 제1차 세계대전을 참전했을 때, 그들은 단지 총알받이 불과했으며, 많은 군인들이 지휘관의 어리숙함으로 전쟁에서 죽었고, 그것도 모자라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기도 했다. 그런 군인들이 수 백 만 명에 이른다고 했으니 혁명의 기회는 결국 전쟁에 의해 국내 상황이 불안해지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 조건은 전쟁의 위치적 조건이 자국 내부거나 혹은 자국이 패배할 경우에 높다. 전쟁의 패배는 고위관료들에게 치명적인 실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도르시아의 경우 아드라이는 본래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의 출신이 왕자이지만, 왕자이기 때문에 국가가 살벌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했다. 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또 다른 폭력을 부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폭력을 두고 정의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의라는 이름은 결국 물리적인 수단으로 실행하여 현실의 부조리 내지 문제점을 해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카인이나 반정파가 기존의 왕당파의 화목주의를 유지하는 것을 동의했다면 아드라이나 혹은 엘 엘프가 카인과 총통에 대하여 대항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의 시작에서 독특한 설정은 도르시아 총통과 카인이 일으킨 반정이 12년 전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1905년 피의 일요일, 1917년 볼셰비키혁명에서 그런 시간적 차이는 과연 우연일까?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아루스와 도르시아는 본래 적대 국가이나, 마기우스의 정체를 은폐하기 위해 지오르에 대해 세계의 적으로 만드는 공작을 펼친다.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이나 영국이 동맹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2차 세계대전 때 나치독일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때는 어느 정도의 명분이 있었지만, 지오르의 발브레이브 조종사들이 불사의 몸이고, 팬텀을 보여주어 지오르에는 괴물 내지 위험한 생물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언론에 퍼뜨린다.

 

6. 미디어와 <혁명기 발브레이브>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여러 가지 작품설정에서 아주 중요한 상황적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미디어라는 정보다. 많은 사람들이 휴대폰과 PC로 통해 실시간 SNS를 사용하고 그것으로 통해 지오르의 상황을 전 세계에 전파하고, 지오르의 교역을 나누던 아루스의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일으킨다. 하루토가 혼자 발브레이브에 탑승하여 도르시아 군대를 무찌른 것과 루키노 사키가 같이 싸우고, 노래하는 아이돌로 나오는 것까지 나온다. 심지어 사키로 통해 광고모델로 활용하여 지오르 국가가 운용할 수 있는 예산까지 확보한다.

 

하루토가 처음 활약한 후에 하루토가 SNS로 메시지로 보내자 세계는 그에게 답장을 수도 없이 보내주고, 그에 대한 열기는 마치 신앙과 같았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심지어 유명한 연예인과 스포츠스타까지 하루토를 만나고, 그를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미디어의 힘이고, 미디어는 모든 대중을 사로잡는 무기가 된다. 하루토의 활약이 자금이 모인다는 점은 미디어는 결국 정치적, 경제적인 요소가 배제될 수가 없으며, 바로 그 미디어를 통제할 수 있는 자가 국민을 통제할 수 있다.

   

어느 사상가의 말을 빌리자면, “국민을 통제하는 방법은 국가권력보다는 미디어가 훨씬 유용하다.”라는 말도 있다. 그리고 <중2병 데이즈>에서 그 문제되던 대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미디어 장악은 문화장악의 기본이니까.”, 이 말은 나치독일의 대표적인 군중선동가인 괴벨스 박사의 정치수단이었다. 마기우스는 사람의 몸을 옮기고 다니면서 세계적으로 권력이 막강한 사람들에게 기생하면 살아가고 있다. 대규모 은행이나 방송사의 지배자로서 말이다. 대중에 의한 통제는 결국 정보력이고, 사키를 배를 찌르는 도르시아 총통의 행동은 결국 미디어로 통해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타파한 것이다.

 

영상으로 이루어진 정보는 우리 인간이 그 실질적인 물리적 공간에 있지 않아도 그 공간에 있다고 여기게 만든다. 인간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가상적인 영상이 마치 실재와 같이 느끼는 가상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미디어로서 보이는 정보가 여러 가지가 아니라 단순하고 일정한 정보라면, 그 정보를 공유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은 유사하게 될 것이고, 거기에 대한 반응과 답변은 거의 비슷한 것으로 돌출될 것이다. 언론이라는 미디어가 결국 인간에게 같은 생각과 유사한 행동을 하기를 원한다. 미디어의 장악이야 말로 세계의 여론을 잡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키모리학원의 학생들이 지오르 군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도 그 누구도 구원해주지 않았다.

 

내가 적고 있는 글에서 토크빌이란 이름을 거론했는데, 그가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에서 중요한 말이 나온다. “민주주의는 가장 전체주의가 되기 쉬운 정치제다.”, 그런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강렬한 힘을 실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국민들의 여론이고, 그 여론은 미디어에 의해 좌우된다. 왜 미디어는 계속 국민들에게 전체주의적인 요소를 요구하는 것일까?

   

7. 일본 VS 일본 <혁명기 발브레이브>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는 일본이 2가지로 나온다. 하나는 지오르라는 중립국으로 학생들의 이름은 일본식이고, 학교 인근에 신사가 위치한 것과 전통음식이 나오는 것을 본다면 일본문화를 표현하고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지오르는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한 지오르로 나온다. 아루스는 대통령이라고 하나 지오르는 총리대신이 정치적 결정권자로 등장한다.

 

아루스의 정치 최고결정권자는 대통령이나, 그 국가는 기본적으로 일본을 의미한다. 단지 시장자유주의가 미국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처럼 그 아루스라는 일본은 기존 미국에 의해 영향을 받은 일본일 것이다. 아루스 대통령이 일부러 마기우스의 정보를 알려 봉기를 일으킨 이유는 그들이 막대한 자본과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루스의 은행장부터 가장 먼저 잡혔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인 상징이 되는 은행에 누군가 침투했다로 볼 수 있다. 아루스는 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다고 지오르라는 일본이 아루스에 의해 미국의 영향권에 벗어나고 싶어 한 점에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인가? 그것도 아니다. 일본 역시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나, 아직까지 천황이 살아있고, 천황의 생일은 국경일로 지정하여 휴무일로 기념한다. 게다가 일본은 전범들의 후손들이 권력을 잡고 있으며, 야쿠자들도 정치권에 크게 관여한다. 그런 점에서 지오르의 학생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지오르 총리대신인 쇼코는 도르시아 장군과 화상통화를 하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인질로 잡힌 것을 확인한다.

   

쇼코는 아버지의 목숨과 지오르의 국가에서 고민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상적인 가치관이라면 모두 국가라고 하나, 그것은 막상 개인의 상황이라면 다른 결과로 이어진다. 쇼코는 인질을 비인도적으로 협박하는 도르시아 장군에게 비겁하다고 한다. 쇼코의 답변을 들은 도르시아 장군은 어른이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칭찬이라며 잔인한 미소를 짓는다. 쇼코가 원한 국가인 민주주의에서는 어른의 사기나 비겁함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일본에서 그런 문제가 없을까? 그래서 <혁명기 발브레이브>는 매우 혁명적인 사고방식으로 쇼코로 통해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지오르의 정치관료가 지금 일본의 정치관료 체계가 유사하고, 아루스는 미국과 비슷하나, 도르시아의 관계를 보자면 또 하나의 일본과 연결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저항의식은 주인공인 하루토에 의해 보여준다. 발브레이브는 지오르 어른들이 만들었고, 지오르의 어른들은 모두 군인들이었다. 학교의 선생님도 거리의 상인들도 항구의 직원들조차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발브레이브에 왜 룬을 집어넣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자신들의 아이들을 모두 발브레이브 파일럿으로 만들기 위해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조작했다는 점이다.

 

결국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아이들의 미래까지도 억지로 조종하려 했다. 그래서 하루토가 지구에 가서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자 말자, 아버지는 하루토를 매우 반가운 표정으로 대한다. 아버지는 하루토가 원하는 답변보단 오히려 아버지를 원망하게 된다. 자신들의 신체를 억지로 바꾼 것도 모자라 발브레이브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은 모습과 발브레이브 운용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생명을 빼앗아 가는데도 오히려 그것을 두고 연구를 위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루토는 아버지의 그런 비인간적인 발언에 분노하여 아버지에게 주먹을 날린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 어른들에 의해 조장된 아이들의 미래, 이것이 지금의 일본사회에서 가능한가? 일본이 제 아무리 개인적인 국가라고 해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아버지를 때리거나 죽이는 행위들은 용납되기 어렵다. 어른들의 부조리를 강요하는 것도 모자라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혁명은 반드시 정치적인 영역이 아니라 사회적인 영역까지 이루어져야 그 사회와 국가가 변화한다(단재 신채호 연구자료 참조).

 

8.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이상적인 나라란 어떤 것인가?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이상적인 나라란 어떤 것인가? 기본적으로 지오르의 사키모리학원 학생들이 만들고 싶은 국가란 누구나 대화를 할 수 있고, 서로 다투기보단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공화주의국가로 만들고 싶어 한다. 따라서 전쟁과 무력은 남을 공격하고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들의 가치관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투쟁에 가깝다. <혁명기 발브레이브>을 보면 시기적으로 하루토와 엘 엘프가 만나던 시점이 현재라면 과거의 12년이 있다면, 앞으로의 12년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미래의 12년은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이 제일 중요한 가치인 것이다. 12년 후의 지오르 국가인지 모르나, 아직까지 어린 모습이 나음 사키모리학원 학생들은 어느 모두 성인이 된 장면이 나온다. 그때 어떤 남자아이의 모습이 나온다. 그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왕자라고 불리고, 머리카락 색과 모양은 엘 엘프와 흡사하고, 동공의 색은 녹색이었다. 이런 외형적 특성을 비교하여 판단하면 아마 엘 엘프와 쇼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가장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 남자아이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과거 사키모리학원들의 학생들은 바로 자신들이 있을 곳이란 미래가 있는 곳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미래가 있는 곳에는 무력과 공포로 지배하는 국가가 아니라 아름다운 새소리와 맑은 물소리가 나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르시아 국가는 마기우스의 정체의 탄로와 도르시아 내의 왕당파의 복권으로 다시 과거의 군주정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 반정파에 대한 왕당파의 혁명의 성과에서 가장 공이 큰 사람은 도르시아 국가의 엘 엘프와 아드리아이다. 특히 아드리아의 경우, 출신이 일반 국민이 아니라 왕자였다. 그는 왕자로서 반정에 대한 위기에서 구한 영웅인 것이다. 아드리아의 공을 생각하면 그는 다음 왕권을 넘겨받을 정도로 큰 성과를 남겼고, 아드리아 자체의 목표도 공포와 무력에 의한 정치보단 평화로운 정치를 원했다.

 

지오르 국가가 추구하는 정치적 체계는 바로 공화주의라는 점이다. 그러나 왕자가 있다면 왕자의 아버지인 왕과 어머니인 왕비는 분명히 존재한다. 지오르 제국이 공화주의적 입헌군주제라면 그 군주가 되는 자는 어떻게 정치를 하는 것인가? 마지막 장면에서 쇼코가 자신의 나라에 침입한 2사람의 외계인을 조우할 때 그들을 향해 응징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화를 나누자고 한다. 자신의 보물은 자신들의 존재를 있게 해준 과거의 친구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자신들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파괴하려는 침입자를 막아야 하나, 한편으로 상대방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것 역시 자신들의 자유와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9.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한 희생, <혁명기 발브레이브>

가끔 자유와 평화를 위한 희생자들의 추모행사를 열리는데, 그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하루토는 자신이 타는 기체인 발브레이브를 다른 사람들이 타는 것을 심하게 반대한다. 발브레이브를 타는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경고문이 뜨기 때문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는 더 이상 보통 인간과 어울릴 수 없고, 화신(化神)이 되어 불사의 몸으로 적들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발브레이브 1호기는 아주 치명적인 장치가 숨어있다. 강력한 힘이란 결국 그 힘만큼 적을 이길 수 있는 만큼 자신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하루토는 그것을 두고 저주라고 한다. 저주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일이 일어나도록 사주하는 행동 중에 하나이다. 저주를 걸어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들거나 혹은 치명적인 상황으로 가게 할 수도 있다. 저주는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이나, 그런 인간의 심리적인 요소가 남에 대한 적대행위로 표출되기도 한다. 하루토는 발브레이브를 저주받은 무기고, 자신은 발브레이브에 의해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제일 중요한 대사는 하루토는 그 저주는 자신이 마지막이 되어야 하고, 최후에는 모든 발브레이브를 파괴해야 한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발브레이브는 파괴되지 못하나, 대신 그 저주의 굴레를 모두 하루토가 짊어진 채 운명했으며, 그 저주의 굴레를 스스로 이어가고 있기에 미래의 지오르가 있었다. 현재의 평화가 결국 과거의 전쟁과 재앙으로 이루어졌다는 변증법적인 현상에서 어떤 목적지가 있다면 그 목적지와 반대되는 현실과 싸울 수밖에 없는 화해할 수 없는 대립관계가 형성된 점이다. 대립관계의 충돌은 새로운 결과로 이어지고, 그 결과는 또 다른 결과로 이어진다. 현재의 우리는 과거의 역사가 축적되어 나타난 결과인 점이다.

 

따라서 역사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역사를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결국 그 희생에 대한 기억을 유산으로 남기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의 정통성이 되는 셈이다. 지오르 제국은 왕자가 있다는 점에서 군주제가 있지만, 한편으로 민주제도 포함되어 있다. 쇼코가 투표에 의해 총리가 된 점이고, 과거 프러시아의 군주 프리드리히가 자신은 “모든 국민들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이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 없기에 대표자로서 그 의결권을 주는 것이 민주주의제도에서 볼 수 있는 행위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인간의 피를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기에 쇼코는 하루토가 입던 붉은색 슈츠를 입고 하루토와 친구들의 모습이 새겨진 흉상 앞에 있는 것이다. 지오르제국에 자유와 평화가 깃든 것은 모두 이들의 희생이라고 말이다. 그 희생에서 하루토는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미래를 찾아갔다. 그가 원한 미래는 인간이나 혹은 마기우스였던 리제로테 또는 인간도 아닌 마기우스도 아닌 그 누구라도 같이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를 원했다.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는 자유와 평화를 모두에게 누려야 하는 천부인권이 부여되어야 하며, 공화주의 국가는 국민이 전쟁 등에 의한 위험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켜줘야 하기 때문이다.

 

10. 전쟁과 <혁명기 발브레이브>

전쟁이 일어난다면 각 국가 간의 무력과 병력에 의해 승패가 갈리며, 무력과 병력에 의한 소모전이 장기화되면 국민들에게 생명과 재산이 위험해지는 것이다. 진실로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정치적인 갈등이 있는 국가와 서로 협력하여 희생을 최소화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갈등을 이용하여 정치적 이권을 노리는 경우도 있다. 아루스처럼 처음에는 자신들의 지지도를 유지하기 위해 지오르를 도와주는 척하다가 마기우스의 사주를 받아 지오르의 학생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아루스의 대통령을 볼 수 있다.

 

아루스의 대통령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키모리학원 학생들이 아루스를 위협하는 괴물로 취급하여 사키모리학원 학생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안보팔이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괴물처럼 몸이 변한 사람은 하루토를 비롯하여 총 5인의 학생이며, 나머지 학생들은 발브레이브의 존재도 모를 뿐만 아니라 인간을 살해하는 무기조차 가지지 않은 민간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루스의 대통령과 도르시아의 총통은 이들에 대해 위험생물로 간주하여 잔인한 살인을 한다. 그리고 아루스의 군인들도 그들이 겉보기에 자신들에게 저항할 힘도 없는 것을 알고 있으나 단지 상부의 명령에 의해 살인행위를 저지른다.

   

폭력의 수단과 방법에서 국가의 폭력만이 오직 합법적이고, 폭력의 행위로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문제는 그 폭력의 희생자가 누구인가? 라는 것이 중요하다.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희생양이 되는 인간은 대부분 지오르의 학생이고, 그들은 민간인이다. 무장한 세력은 오직 엘 엘프와 발브레이브 조종사들이다. 지오르 학생들의 희생을 보면 처음 도르시아 군의 폭격이 시작으로 가장 잔인한 학살은 도르시아 군의 독가스 살포다. 베르사유조약과 같이 현대인류는 전쟁에 독가스 살포를 금지하도록 세계조약을 만들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19세기가 지나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전쟁의 양상이 군인들끼리 싸우는 것보다 군인이 상대국가의 군인 및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을 보면 항공기술이 발달하여 공중폭격이 주요전략이 되었는데, 그 공격대상이 군사기지나 작전지역이 아니라 민간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던 장소인 것이다.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적진의 보급과 안전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고, 또 하나는 민간인이 상대편의 전력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타국의 국민과 군인은 결국 같은 국가의 국민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전쟁은 민간인 학살이 주를 이루었으며, 공격수단이 총과 칼처럼 백병전이 아니라 미사일이나 독가스를 이용한 광역적인 공격방법이란 점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을 읽다보면 1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들에 대한 일화가 나오는데, 전쟁 중에 총과 칼에 의해 죽은 사람보다 화학전과 세균전에 의해 죽은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사키모리학원 학생들이 가장 많이 희생당한 때가 바로 도르시아 군대가 거대한 드릴로 침공하는 장면에서 독가스이었다.

   

전쟁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인도적인 세계조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민간인을 학살하는 행위를 누가 사주하고, 그로 인해 무엇을 얻는 것인가? 그것은 뒤 세계에서 계속 권력을 유지하던 마기우스의 안위다. 그 존위를 위해서라면 다른 국가를 공격하고 사라지고, 그 국가의 민간인들을 살해하며, 죄 없는 사람들을 희생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는 것으로 세계의 평화가 지켜진다고 한다. 처음부터 아루스와 도르시아는 적대국이지만, 마기우스 평의회에서 몰래 비밀 회담을 열어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려고 했다.

 

11. 마기우스와 <혁명기 발브레이브>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마기우스의 존재는 특이하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어떻게 보고 판단하는 것인가? 의식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가 있어서 의식이 있는 것인가? 마기우스는 육체적 조건이 없다고 단지 정신적 영역을 가진 존재다. 그들은 계속 어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몸으로 이동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결국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고 그것이 세계를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육체의 소멸은 정신의 소멸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육체의 소멸로 끝나는 것이다.

 

마기우스의 역사를 보면 그들이 실존하는 존재는 아니나, 적어도 작품 내에서 인류에 의해 탄압을 받는 과거가 나온다. 그 중에서 17세기 마녀사냥 광기에 휩쓸린 유럽의 모습이 나온다. 그것은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데, 누가 거기에 불을 질러 화형에 처하는 모습이다. 마녀사냥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은 심한 고문을 받고, 거짓자백을 하여 결국 최후에는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이 부당하게 죽어야 한 이유는 보통 인간과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르게 본다면 마기우스는 부당하게 타인의 몸을 점령하여 그들의 존재를 그들의 것이 아니라 마기우스의 것으로 바꾸었다.

   

몸을 빼앗아도 그 인간의 기억과 경험은 여전히 존재하는 점에서 마기우스는 작품으로 본다면 원인미확인 존재이고, 현실에서 본다면 인간을 지배하는 사상 내지 변질되는 인간의 모습이다. 카인은 12년 쿠데타에선 우정과 명예를 중시한 군인이나, 지금은 잔혹한 권력자로 나온다. 아니라면 반드시 카인이 아니더라도 어긋난 권력자는 늘 존재한다. 최근 독일에서 등장하는 네오나치나 혹은 일본의 전범후예들이 보여주는 언행은 마기우스와 같은 존재는 계속 끊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왜 마기우스는 인간을 지배하려고 뒤에서 세계를 조종할까? 처음부터 그들은 인간을 농락할 생각은 없었으나, 인간들이 그들을 두려워하는 까닭에 그 두려움은 폭력으로 변모되어 마기우스를 공격했다. 만약 서로 간의 공존을 위해 도모했다면 비극은 되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기우스는 자신들의 안위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권력욕에 빠져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 그들이 잡은 권력을 해체하기 위해서 전 세계적으로 봉기가 일어났다. 물론 인간의 집단적 행위에서 폭력이 하나의 정의가 되었기에 마기우스는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12.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대하는 인간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제1의 자신이기도 하나 제1의 타인이기도 하다. 아기와 어머니는 본래 하나였으나 결국 분리되기 때문이다. 어머니에 의해 분리된 인간이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거울 속에 비친 사람이 처음에 자신인줄 모를 수도 있지만, 결국 자신이라는 사실을 각인한다. 인식에 대한 조건에서 인간의 감각에 의하여 보고 듣고 느끼는 것으로 정보를 습득한다.

   

그리고 그런 정보가 하나의 기억으로 축적되어 자신의 인성을 형성하게 된다. 인간은 원래부터 이성적인 동물로서 이성을 소유하고 있으나, 그 이성 자체는 인간이 살아오면서 축적된 하나의 기록이며 역사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너는 누구이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고 물어본다면 이에 대해 대부분 “나는 일을 하거나 또는 공부하는 는 인간이고, 가족과 함께 어디에 살고 있으며, 지금 친구나 애인과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살아갈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에서 본다면 결국 인간은 행복을 위해 살아가고 싶은 존재라는 점에서 말이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말하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인지 먼저 정립해야 한다. 그런데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하루토와 그 이전의 마리에가 발브레이브 1호기를 타면서 자신의 기억을 자꾸 지워버리게 된다. 마리에는 학교에 오기 전에 기억이 전혀 없었으며, 1호기 안의 피노의 기억장치로 인해 자신이 예전에 발브레이브 1호기 실험체란 사실을 알게 된다. 발브레이브의 에너지는 조종사의 기억과 생명이다. 발브레이브를 조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력을 소모하고, 기억을 삭제되어야 했다. 하루토가 처음 엘 엘프를 덮친 이유는 생명력을 담보로 했기에 새로운 생명의 힘이 필요했고, 루키노 사키를 강제로 덮친 것은 인간은 생명이 위험해지면 자신의 DNA를 유지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계속 누군가를 덮치는 것은 누군가를 희생하는 것이고, 그런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하루토 스스로를 희생해야 했다. 그것은 마리에와 같이 기억상실이고,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회색빛 재로 변하는 죽음이었다. 인간이란 기억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혼자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인간과 같이 무리를 지어 활동하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사회적 존재가 같이 시간적인 기억을 공유하지 않으면 같이 어울릴 수가 없고,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도태되어 버린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분명하나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다. 마리에와 하루토의 죽음에서 그들은 자신이 이때까지 쌓아온 시간들이 모두 사라져서 그 생명이 사라졌다. 시간이 없는 인간은 죽음이다. 곧 자신의 존재는 시간의 축적에 의해 조성되고, 미래라는 것은 현재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시간적 축적이다. 인간은 지나간 존재에 대해서 시간이라고 하나, 현재에 대해서는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시간이기에 기억으로 남을 수 있지만, 공간은 시간에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 그리고 시간에 의해 변화되는 공간은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증거다. 인간은 계속 이동을 하는 존재이기에 같은 공간에 언제까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은 기억에 의해 존재하면 타인과의 관계는 지속될 수 있다. 과거가 모조리 없어지면 현재 자신에게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누구인가는 결론적으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그것으로 인해 지금의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존재성이 존재한다고 인식하지 못하면 자신만 아니라 세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고 의미하는 것이다.

 

13. <혁명기 발브레이브>와 오마쥬

사전에서 오마쥬란 단어를 찾아보면, 오마쥬란 hommage란 불어에서 온 말로 '경의의 표시' 또는 '경의의 표시로 바치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술작품의 경우 어떤 작품이 다른 작품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일부러 모방을 하거나, 기타 다른 형태의 인용을 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는 오마쥬적인 요소가 등장한다. 사소한 것까지 모두 찾을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독수리5형제>와 같이 팀플레이 전개로서 발브레이브를 운용하는 것은 메카닉 계열을 보여주며, SF메카닉 애니메이션의 큰 반향을 일으킨 <퍼스트건담>을 연상하게 된다.

 

우선 하루토가 지구 지오르인들일 찾으러 갈 때 자신의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는 하루토가 발브레이브 조종하는 것만을 신경 쓰지 그 이외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퍼스트건담>에서 건담조종사 아무로 레이는 아버지가 건담을 만든 사람 중에 하나인 것을 아나, 그가 자신이 겪은 괴로움과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생각하지 않는 부분과 일치한다. 또한 하루토의 기체는 다른 기체와 달리 검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퍼스트건담>에서 아무로 레이가 조종한 건담은 레이저 검으로 적의 기체를 베는 모습이 나온다. 하루토의 발브레이브 역시 검으로 적을 베는 모습이 나온다.

 

또 다른 오마쥬로서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네르프의 작전으로 사도를 물리치는데 있어서 에바라는 인간형 로봇이 등장한다. 에바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조종사가 필요하나, 에바를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신지, 아스카, 레이였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같은 학교에 같은 반

 

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미사토가 네르프와 에바에 대한 의문을 품고 조사한 결과 에바 파일럿은 모두 신지가 다니고 있던 학교의 학생이었던 것이다.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서 사키모리학생들은 모두가 발브레이브를 조종할 수 있는 신체를 선천적으로 타고 난 점이 중요하다. 아루스의 유명한 파일럿이 발브레이브 1호기를 탑승하려다 결국 죽고 만다.

 

학교 안의 학생들이 모두 파일럿 후보라는 점과 그것을 일부로 어른들이 조장한 점을 보면 오마주적인 요소가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혁명기 발브레이브>는 단순히 메카닉적인 요소로서 <퍼스트건담>과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차용한 것이 아니다. 주제적인 요소에서도 <퍼스트건담>에서 전쟁과 평화,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인간의 실존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은 경우에는 기존의 기성세대와 그에 저항하는 신세대, 제일 무서운 적은 강력한 타자보단 자기 자신이란 점이다.

 

14. <혁명기 발브레이브>에 대한 정리 및 평가

<혁명기 발브레이브>는 SF메카닉 작품으로서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른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전쟁에 말려든 신세대들의 이야기다. 기성세대들의 정치적인 이권에서 신세대들의 인생까지 억지로 조작하려는 점과 상대방을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속임수와 협박으로 대하는 점에 대해 큰 불만을 느끼고 이에 대해 저항하는 모습이 나온다. 부조리한 현실과 부당한 처사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결론적으로 지오르의 사키모리학원 학생들은 스스로 국가를 조직하고, 국가가 존위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필요하고 또한 영토가 필요했다.

 

따라서 이들은 민주주의의 절차에 따라 정치적 제도와 체계를 정비했지만, 아루스 고위관료와 마기우스가 잠입한 도르시아 권력자들의 이권을 위해 희생당한다. 따라서 지오르는 자신들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무력투쟁을 하게 되며, 무력투쟁을 위해 하루토를 비롯한 학생들은 발브레이브에 탑승한다. 발브레이브의 강력한 무력을 얻는 대신 그들은 평범한 인간이 될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 했고, 심지어 전투 중에 죽거나 또는 하루토나 마리에는 정보기억이 소멸하여 죽게 된다.

 

자신들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 폭력으로 대항하나, 그 힘에 대한 대가는 무척 위험했고, 그 저주받은 힘은 계속 이어지면 안 되고, 그 힘에 의한 희생자는 하루토 자신이 마지막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루토가 목숨 걸고 싸우는 이유는 자신이 영웅이 되고 싶은 것이나 혹은 강력한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것도 아니다. 오직 친구를 위해 싸우고, 그런 친구들이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다시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닌 남을 위해서 싸우는 것도 있지만, 결국 친구가 죽거나 다치면 나 역시 슬픔과 고통을 받게 되고,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친구를 위해 싸우는 것은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과 같다. 그 친구를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싸우는 이유는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다. 어느 누가 다른 누군가를 강제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평화롭게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을 말이다. 만약 그런 국가가 생긴다면 누군가는 불편할 것이다. 평화롭게 사는 것은 자유와 평화라는 것을 평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권력자인 마기우스 입장에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지오르에 대하여 계속 무력으로 억압했고, 결국 마기우스는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어 멸망한다.

   

<혁명기 발브레이브>는 작품 이름 자체에서 나타나듯이 발브레이브는 조종사를 죽이게 하는 강력한 병기이나, 혁명을 위해 사용되는 기계이다. 혁명이란 지배계급에 의해 핍박받는 피지배계급이 그 지배계급을 전복시키는 현상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자신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 권력체계와 무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발브레이브와 같은 강력한 무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혁명기 발브레이브>는 이중적인 일본을 보여준다. 일본 문화적 특성 중에 할복을 작품 내에서 보여주는데, 발브레이브 1호기의 임계게이지가 666에 도달하면 할복블레이드 사용한다.

 

 

할복이란 것은 일본의 유미주의(唯美主義)적인 요소가 말하는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일본에서는 불꽃놀이와 벚꽃놀이가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불꽃을 쏘아 올리면 가장 아름답고 화려할 때 사라지고, 벚꽃놀이도 가장 활짝 핀 벚꽃 잎이 떨어지는 모습에서 아름답다. 결론은 가장 아름다울 때 사라지는 것에서 유미주의에 대한 성향이 드러난다. 할복블레이드 한 번이면 도르시아 대규모 부대조차 퇴각시킬 정도로 매우 강하고, 그것은 곧 지오르의 생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오르의 위기에서 생존에 대한 유일한 방법이 할복블레이드라는 점에서 할복 자체가 지오르의 운명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기 발브레이브>는 일본 VS 일본이란 대립구도가 나올 수밖에 없다. 지오르는 기존의 기성세대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지만 한편으로 할복이란 일본 특유의 문화를 작품에 반영했다. 제 아무리 민주주의국가조차도 자신들이 가진 역사와 문화적 전통에 의해 그들만의 성향이 도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혁명이란 단어가 나오므로, 혁명은 그 자체로 성공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혁명 이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중요하다. 단순히 A-1라는 자를 쫓아낸 B-1이란 자가 다시 A-2로서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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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2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년 전 글이지만 댓글 남깁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은발소년이 머리는 엘엘프인데 눈동자색은 녹색이 아니고 파란색이에요 쇼코 후손 아닌 걸로 보여요

만화애니비평 2022-03-11 16:00   좋아요 0 | URL
나중에 확인해 볼게요
 
[eBook]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철학
임승수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6월
평점 :
판매중지


 

 

마르크스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사실 마르크스의 서적들을 읽다보면 그가 철학자임은 분명하나 철학도서로 만들기 위해 철학자로서 활동을 한 적은 없다. 그의 책들은 하나의 사회과학 도서들이다. 혹이라면 정치학 내지 경제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세계의 철학사에서 마르크스의 단원은 매우 중요하다. 근대철학사상에서 마르크스는 프로이트 그리고 니체와 더불어 그 자리를 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정말 철학자로서 철학을 생산한 것인가? 그래서 나는 이 책 제목을 읽으면서 조금 의아하게 여겼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저술한 임승수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표지를 처음 보면서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라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어가는 사상가들을 보면 많은 철학자도 있고, 사상가, 혁명가, 문학가, 경제학자, 역사학자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철학은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예전에 루이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하여>를 읽으면서 예전에 내가 적은 그 책의 서평을 찾아보니 이런 문구가 나왔다.

 

“루이 알튀세르는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인 견해는 관념적일 수도 없고, 유물론적일수도 없다고 했다. 아니라면 두 가지를 동시에 대립하면 꾸준히 발전해 나가야할 가치라고 했다. 그런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존재하는데, 그 철학이 철학으로서 생산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철학이 그 자체로 움직이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철학에서 철학적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철학만 논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생애에서는 그는 분명 철학을 많이 알고 있었으나 그는 비판적인 경제학과 사회과학으로서 행동했다. 그런다고 해서 그가 철학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직접 철학적으로 행동했지만, 그런다고 그는 철학을 철학으로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경제학과 역사학 그리고 정치학에서 철학적인 관점이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를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본론>과 <공산당선언>을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내지 <프랑스 내전>과 같은 서적이 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정치적인 시각으로서 마르크스가 적은 도서다.

 

아직까지 나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나 마르크스의 철학적 변화에 대해 많은 설전이 오고간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시점이나 혹은 <자본>과 <공산당선언>에 대한 해석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어받은 많은 마르크스주의자까지 분파가 생기고, 여러 가지 형태로 등장한다. 재대로 이해하기 힘든 마르크스주의자 내지 그런 사상가에 대한 연구도서를 본 상태에서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을 읽는 순간, 마르크스의 사상적 기본은 잘 쉽게 설명했으나, 마르크스철학이란 단어를 이 책을 읽는 때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철학이나 혹은 마르크스주의라는 말만 들어본 정도다. 마르크스 철학보단 차라리 마르크스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닌지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루이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하여>에서 나온 그 소절 때문이었다. 루이 알튀세르는 프랑스 최고의 지성인들이 모인 파리고등사범학교 철학을 전공하고, 다시 그 학교의 교수로 임용되어 가르친다. 20세기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이도 하나, 철학사상도서에 보면 프랑스 구조주의자로 나오기도 한다.

 

혹은 알튀세르가 아니더라도 <맑스 재장전>을 읽어도 마르크스에 대한 관점이 매우 다르게 서로 해석된다. 물론 임승수 작가본인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란 모택동이나 레닌 등이 한 업적에서 마르크스가 가르친 것과 상당히 다르게 한 것과 그 후에 이어진 것들이 마르크스가 오히려 부수고 싶은 것이란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의문점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보다 임승수 작가가 더 많은 지식과 이해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외국에서 실제로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의 서적을 읽은 입장에서 다소 의문스런 것이 당연하다는 점이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에서 마르크스가 주장한 내용이나 발견한 법칙에 대하여 본다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매우 어렵기로 소문난 <자본론>의 텍스트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고, 그런 이론적인 요소에서 실재 현실적 요건을 반영하여 적용했으니 이해가 매우 빠르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연구도서가 독일, 프랑스, 영국, 심지어 미국조차도 나오는 점을 본다면 제목이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은 적절하지 못하고 차라리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사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솔직히 말하여 우리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대해 낯설거나 혹은 이상하게 여기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사회시간이나 역사시간이나 우리는 은근히 마르크스주의적인 요소를 받아들이고 있다. 아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생각하면 역사는 주요인물로서 설명하나, 그 시대의 문화적 조건과 지리적 조건, 환경적 영향을 생각하면 역사에서 유물론적인 요소가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가령 내 개인적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는 바로 그의 중원대륙에 향한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본의 전국전쟁에서 보다시피 다이묘로 필두로 하여 여러 분파들의 귀족들이 대규모의 사병을 가지고 있었기에 절대권력자가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 입장에서 상당히 불편할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신하들이 늘어나면 이들에 대한 포상이 필요하고, 자신이 가진 물자에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신하가 서로 좋은 사이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을 조선을 보내면 국내정치적 갈등은 안정될 수 있고, 전쟁 이후 살기로 넘치는 귀족과 무사집단 그리고 사병들까지도 정치적인 위해로 올 수 없다. 조선까지 땅이 넘어오면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큰 이득이 온다. 일단 일본은 날씨가 습하고 농사가 어려운 토지이므로, 벼농사가 잘 되는 조선에서 식량을 조달하고, 조선의 문물을 들이면 국가가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성장한다.

 

또한 일본은 섬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므로 타국의 침입이 용이하지 않기에 무역거래의 용이성에서 조선만큼 좋은 영토는 없는 것이다. 임승수 작가말대로 토대가 상부구조를 만드는 것이라 말이 딱 맞는 것이다. 물론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문화유물론>으로 가면 토대와 상부구조는 다시 상부구조, 구조, 하부구조로 분할된다. 왜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이토록 중요한가? 이른바 인류학에서 마르크스주의 역할이 무척이나 크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자본론> 이외에도 여러 책들을 보면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는 역사부터 다룬다. 왜냐하면 인류는 생존을 위해 살아왔고, 그것을 위해 경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경제라는 것은 반드시 돈, 화폐만이 아니라 자급자족부터 시작하여 물물교환, 화폐와 상품의 가치교환까지도 포함이다. 문제는 <자본론>에서는 그런 경제적인 역사에서 착취라는 것이 등장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착취는 누군가는 일하고 고생하는데, 그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하지만, 착취로 인해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고생도 없이 풍요와 쾌락을 보낸다. 그런데 그것이 곧 인간이 문명으로부터 시작한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란 점이다. 그런 것을 최초로 밝힌 사람은 마르크스보단 사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이라고 말하고 싶다.

 

단지 마르크스는 그것을 경제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소상히 밝혀내었다. 하지만 인류학이란 학문에서 20세기 최고의 인류학자인 레비 스트로스는 인류학의 시작은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이라고 한다. 그리고 레비 스트로스는 자신의 인류학에서 토대가 되는 것을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라고 한다. 인류의 형태는 결국 경제적인 조건, 즉 유물론적인 요소가 필요한 점이다. 따라서 착취가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누군가는 그 착취로 이익을 보는 것이고, 착취는 단순히 그 사회만 아니라 다른 사회나 국가로까지 이어진다. 전쟁의 목적은 결국 인간의 광적인 관념이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생존수다이다. 경제학의 영역은 단순히 화폐가 아니라 인간의 생존성이다.

 

얼마나 적게 일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가? 이것이 경제학이란 점이다. 그래서 원시부족들이 자본을 몰라도 경제적인 부분을 모른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유물론적인 조건, 눈앞에 일어나는 현상과 자연적, 지리적 조건 등이 결국 인간의 토대가 되는 점이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에서 문화는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인 조건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물질에서 관념이 되는 경우도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풍요롭게 보일 수 있으나 그 풍요로운 세계란 실제 우리가 물리적으로 접근하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로 이루어진 정보에 의해서다.

 

spectacle이라고 하는 흔히 아무 의미도 모른 채 사람들이 말하는 스펙타클, 이미지로 매개되는 사회에서 우리가 아는 정보는 정말 우리가 아는 정보인지 그것으로 조장된 정보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되었다. 보드리야르의 하이퍼리얼리티가 이미지의 허구라도 그것이 하나의 사실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소 마르크스사상과 무슨 상관이 있을지 모르나, <스펙타클의 사회>를 저술한 사람은 프랑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이란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이다. 자본력의 의해 만들어진 미디어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을 밝힌 것이 그의 저서다.

 

물론 마르크스주의 연장선에 있는 독일 프랑크푸르크대학의 학자들이나 혹은 영국 버밍험대학교 학자들도 그런 의견을 내고 있다. 결국 마르크스가 주장한 인간에 대한 가치가 하나의 인간성에 의해 판단되는 게 아니라 상품으로서 판단되어 인간의 가치가 물품의 화폐로서 결정되는 물신주의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상품에서 이미지라는 것은 미디어에 의해 생산되므로 이미지가 결국 화폐의 새로운 척도가 되고, 이미지 중에서 상표나 기호 등이 결국 자본력을 좌우한다. 우리는 흔히 TV나 인터넷에서 브랜드 가치 내지 미디어의 상호로서 가치를 매긴다.

 

삼성자동차나 현대아파트나 엘지냉장고 모두 그 상호에 의해 제작된 것이라고 여기지, 그 생산품에 대해 생산과정의 인간들은 모두 잊어버린다. 인간의 가치가 소실되고 이미지의 기호만이 등장하여, 노동하는 사람들은 상품에 의해 드러나지 않고 숨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과정에서 몇몇 희생자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우리는 상품에 대해 구매가능하고, 결함이 있다면 교환이 가능하다. 상품의 교체는 가능해도, 인간의 교체는 대체할 수 없다. 이런 문제점이 마르크스는 이해했다. 지금 우리는 인간가 축소된다고 큰 고민을 한다. 그런 고민은 마르크스도 했다. 지나친 과로(18시간 내외 업무와 간간히 진행되는 철야작업)와 열악한 환경(더운 방, 먼지가 가득한 방, 통풍되지 않은 방)에 모두 병에 걸린 셈이다.

 

인간에게 노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재생산이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재생산되어야 사회와 국가가 운영된다. 약 30년 주기로 인구가 사라지면 그 대체할 인구가 나와야 한다. 하지만 균형이 무너지면 심각한 문제가 일어난다. 노동력을 대체인력이 없어지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지나친 노동은 인간수명을 단축시키고, 그 단축으로 인해 노동인구를 감소시킨다. 이에 반해 한국은 지나친 물가로 인해 인구를 감소하고, 노동인구를 단축시킨다. 자본가들은 자신의 자본을 위해 노동인구를 재생산하는 점을 각인하고 어느 정도 경영해야 하나 오히려 그 재생산 과정으로 통해 이득을 보는 것 같다.

 

이런 과정이 계속 이어지면 사회는 양적인 요소가 붕괴하여 질적인 변화가 온다. 양질관계의 변화에서 마르크스가 제기한 것처럼 우리도 그 문제에 봉착했다. 부부 1인당 1.2 내외의 아기를 가진다면 추후에 한국에 일할 사람도 없어지고, 국방력에서도 큰 문제를 일으킨다. 국방부 군인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육군부대의 규모가 조금씩 축소되는 것으로 아는데, 최근 내가 전역할 때는 군대에 필요한 지원시설에 대해 아웃소싱을 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재생산이 중요한 것은 그 사회의 영속성을 유지하느냐 마느냐이다. 그런데 문제는 피라미드 구조와 빈부격차가 심하면 심할수록 인구감소와 국가적 안위가 결정되는 것이다. 해결대안으로 결국 빈부격차를 줄이고, 인구증가를 위한 지원을 해야 하나, 예산은 어디서부터 나오며 또한 그것을 모우기 위한 방편은 무엇인가? 빈부의 경제적 조건에서 중하위 계층이 많은 점을 감안하면 그들에게 모울 수 있는 금액이 한계가 있고, 상당한 부를 지닌 부자들의 세금을 거두려면 부자들의 반대가 이어진다. 상부구조가 토대로부터 이루어지면 부자들의 세금 추가징수 및 혹은 기업의 제재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인구는 줄고, 사회적 문제를 커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변증법적인 대립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마르크스는 이런 변증법적인 관계로 통해 균형을 이룰 수 없다면 그 대치지점에서 축척되는 밸런스의 불균형으로 인해 질적 변화 즉 사회적 변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임승수 작가가 잘 지적한 프랑스대혁명의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그들은 프랑스 대혁명의 영웅이고, 법조인으로서 루소의 열렬한 지지자들이다. 그리고 인류 최초의 좌파세력인 자코뱅당이다.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부르조아가 최초의 좌파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혁명이 가능하게 만든 것은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처럼 프랑스가 국가경제운영의 문제, 미국독립전쟁의 참전, 지방자치제가 아닌 중앙집권화로 이미 루이14세부터 경제적 위기가 시작한 점이다. 예산을 줄고, 세금을 필요한데 귀족들은 계속 납부를 거부하고, 할 수 없이 농민과 상인에게 세금을 거두게 되었다. 게다가 신흥 부르주아 세력은 우수한 두뇌와 재력이 있어도 신분상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에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도화선이 폭발한 것이 프랑스대혁명이다. 당초 삼부회소집에서 입헌군주제를 삼부회 부르주아 대표들이 요구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봉건세력과 신흥 부르주아 세력의 대립관계다. 이런 변증법적인 대립이 역사를 계속 바꾼 것이다.

 

그러다보니 마르크스를 안다는 것은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고, 인류의 생산과 소비를 다루기에 인류학 영역까지 이어진다. 경제공황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던 시절, 마르크스가 그것을 밝혀내고 경제공황은 소비자는 일정한데 과잉생산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애덤 스미스의 시장경제주의적인 경제학은 생산과 소비가 일치했으나, 실제로 우리는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다. 부도가 나는 업체에서 물건을 생산해도 팔리지 않아 상품가치가 없다면 빚더미에 앉을 뿐이다. 양적인 부분이 한계지점에 도달하면 결국 파산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파산되는 것이 자본가인 업체 사장이냐? 그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업체에는 수많은 노동자가 있고, 그 노동자에게 가족이 있다. 시장경제에서 소비의 주된 출처는 먹고 입고 자는 것이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서민경제는 파탄난다. 업체는 망하고, 경기는 침체하고, 돈은 없다면 노동자와 그 가족은 생계가 곤란하고, 그들의 생계로서 살아가는 상인 역시 곤란하다. 경제학을 전공한 것은 아니나, 진짜 똑똑한 경영인이나 국가지도자라면 어느 정도 다 생활에 어려움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그래야지 자신의 상품이 팔린다.

 

노동자는 단순히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다른 상품을 구매하고 팔아주는 또 다른 고객이다. 그래서일까? 일본 문화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도서 어느 부분이 생각난다. 하다못해 노동자에게 국가는 있어도 소비자에게 국가는 없다. 소비자가 결국 기업과 국가를 살리는 것이다. 소비자를 죽이는 기업과 국가에게 미래란 없다. 자본으로 국경을 초월한 기업에겐 다른 시장을 찾으면 그만이나, 국가는 물리적으로 국경이 존재하므로 다른 선택지점이 없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을 읽고 쓴 글이지만, 이 책을 읽는 그 이상으로 말하자면 “우리들에게 날개란 없다(일본 애니메이션 작품제목).” 단지 추락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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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 '마르크스 자본론'의 핵심을 찌르는, 제2판
임승수 지음 / 시대의창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세계에서 어려운 고전으로 여러 가지 서적들이 있을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게오르크 헤겔의 <정신현상학>,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등등 근대철학만이 아니라 고대철학과 현대철학 역시 어렵다. 그런 점에서 철학을 알아가는 것은 돈과 명예 등과 같은 이익보다는 역으로 별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려서 오늘날 더더욱 어렵게 되었다. 안 그래도 어렵다고 느껴지는 것이 철학인데, 그 어려운 철학마저 접근하기 어려운 시대다. 그렇지만 철학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철학은 결국 인간이 세상을 볼 수 있는 하나의 등불이다.

 

어느 풍랑이 세차게 몰아치는 바다 위에 어떤 한 척의 바다가 있다. 그 바다 위에서는 한 치 앞도 예상하지 못해 이들의 운명은 언제 죽음의 사신과 춤을 춰야 할지 모른다. 그 속에서 한 줄기의 등불이 보인다. 아주 작고 약한 불이지만 그나마 그것으로 통해 앞길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철학이다. 세상을 보는 작은 눈, 하지만 그 작은 눈이 계속 이어지면 풍랑에 위태로운 선박은 운 좋게 낯선 무인도에 잠시 정착하여 파도를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이란 한 번의 답변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학문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철학에서 우리는 인간의 존재성 내지 근원 그리고 실존적인 문제에 대면하게 된다.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 이 세상을 두르고 있는 근원과 내가 살아가는 사회란 무엇이고? 그리고 더 나아가 국가란 무엇이며 세계란 또한 무엇인가? 작은 고민이 어느새 큰 물결이 치는 넓은 곳까지 볼 수 있는 것이 철학이다. 하지만 철학의 중요한 기능이 있다. 카를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에서 외친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생각하면 철학자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들은 중세유럽까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물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사상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들이 제기한 철학은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일련의 군주정치 내지 민주제도라도 소수 귀족에게 그 권한을 두고자 했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제도에서 민주주의라고 해도 그것은 10% 미만의 성인남성이고, 어린아이와 여자 그리고 노예와 이방인에게 제외되었다. 민주주의가 공화주의적인 정치로 본다면, 공화주의란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박애가 상실된 민주주의 정치란 순 위선에 둘러싼 자기 이름을 살리기란 점이다. 박애만큼 위대한 정신적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박애가 존재해야하지 자신의 자유만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살리고, 인정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애적인 사상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기 위한 조건 중에 하나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인간에게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날 이 글을 적는 본인과 혹은 내 주변이나, 그 밖에 사람들 대부분이 과연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나는 내 자신이 대해 행복하다고 여긴 적이 그다지 없다. 단지 행복보단 일련의 안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슬아슬한 일과를 보내고, 오늘도 무사히 혹은 이번에도 무사히 자체가 행복이라 여기지 못한다. 단지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한 순간의 안도이다. 행복감은 그런 안도에서 올 수 있겠지만, 근본은 달라지지 않고 또 다른 시련과 고통이 찾아온다. 언제까지 그런 안일한 자기만족에 의한 순간적 안위에 만족할 수 있는 것인가? 다소 회의적인 발언이 아닐 수가 없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까지 일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잔업과 야근을 해야 하며, 상상 이상으로 업무에 시달려야 한다. 그렇게 힘든 일과를 매일처럼 보내고 나온 대가란 이른바 돈이다. 우리는 돈에 의해 살아가고, 돈에 의해 죽어간다. 자본이 매개로 되는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살아간다. 자본주의구조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개 소시민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이때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경제적 시스템이 아직 대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특성은 결국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경제구조에 있다.

 

지금 한국인 인구가 5천 만 명을 넘었다. 따라서 좁은 국토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므로 언제나 부동산 과잉열기에 인플레이션은 하늘 무서운지 모르고 오르고 있다. 이런 시기에 각자가 주거하여 살아갈 수 있는 집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이 소유한 집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많고, 전세나 월세로 어렵게 버티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집을 가지기 위해 거액의 돈을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아, 그 대출 이자만 해도 상당히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돈이라는 것에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속박 받고 있다.

 

결국 우리 현대인들은 자신이 가진 돈에 의해 인생과 생활 그리고 미래까지 결정 받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사회구조에서 철학이란 무엇이고, 세상이란 무엇일까?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신선놀이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망각의 존재로 보이는 철학이야 말로 존재해야지 현재 상황을 바르게 이해한다. 그래서 이 글의 제일 위에 나온 세계에서 어려운 도서 중에 하나로 속하는 서적이 있으니 바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다.

 

<자본론>에 대해 일단 기본적인 설명을 하자면, 카를 마르크스가 독일에서 태어나고 철학박사를 수여받고, 노동자의 부당한 현실에 대해 분개하여 노동운동으로 활동하다가 당국에 의해 추방되어 영국으로 망명을 오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런던도서관에 머물면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리카도, 제임스 스튜어트 등의 서적을 읽으면서 경제학에 몰입했고, 그렇게 탄생한 게 <자본론>이다. 한국에서 <자본론>과 그리고 마르크스를 이야기하면 이상한 사람을 몰리겠지만, 유럽과 같은 선진국에 가면 마르크스는 엄청난 학문을 만든 장본인이다.

 

조금 의아한 점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사회과학 도서로서 경제학을 말하지만(도서관에 가면 사회과학 분류도서로 앞자리에 3을 부여받는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다르게 보면 철학도서와 같다. 세계 3대 경제학 도서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케인스의 <일반이론>이 있다. 물론 애덤 스미스의 경우 경제학자 이전에 윤리도덕학자였고, 케인스도 경제적 문제가 국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민생활에 큰 여파를 주므로 기본적으로 철학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자본론>은 이 2가지 서적과는 큰 차이가 있다. <자본론>은 순수하게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고찰 도서이고, 그 고찰로 통해 자본의 유무로 인해 고통 받는 약자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집에서 <자본론(도서출판 길, 번역자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강신준 교수)>을 읽으면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공장감독관에 의해 기록된 보고서를 읽게 되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하루 24시간 중에 12시간 노동은 예사고, 주말도 없을 때도 있으며, 심지어는 18시간 넘게 노동을 시킨다. 어린아이는 이제 4~5살부터 시작하여 잠도 재우지 않으며, 좁은 공간에 더러운 공기 속에서 장시간 노동착취를 당해야 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실로 지옥이 어디냐고 신이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지옥이 있는 곳은 사람의 관념 속에 자리 잡은 곳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말할 터이다.

 

신이란 있는 것인가?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온 유명한 문구가 있다. “신은 죽었다!”, 정말 신이란 존재가 존재성을 두고 생각하자면 있을지도 모르나, 그 신이란 인간의 운명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그냥 구경만 하는 존재라고 생각 든다. 신은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TV에서 쇼프로그램을 보고 즐기고 있듯이 구경하고 있는 방관자라고 생각할 뿐이다. 왜냐하면 신이 정말 존재하여 현실에서 심판을 한다면 죄 없는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거나,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억압과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내 머리 속의 이성과 지식이다. 물론 인간은 감정에 변하기 쉬우며, 무의식적인 요소로 순간 잘못된 길을 선택한다. 초자아라는 슈퍼에고, 이드라는 무의식 사이에서 자아는 늘 갈등한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사회구조 역시 그렇다. 문제는 이드로 인해 조장된 현실이 이상하게 슈퍼에고로 위장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작가나 그렇고 나도 그렇지만, 현실의 문제에 대해 개선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최근 생활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우리는 언론에 통해 많이 접하게 된다. 그들의 비참함의 종말은 소설 겸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코제트의 어머니가 생각날 정도다.

 

문제는 빅토르 위고가 그렇게 저술한 당시가 마르크스의 <자본>이 나오는 내용 그대로라는 점이다.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이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나, 막상 그것이 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지는 않는다. 현실에 대한 각인에서 자신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일목의 관심도 없으면서, 사건이 터지면 마치 자신은 착한 사람인양 걱정을 한다. 도대체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 것인가? 아니 그렇게 되는 것을 막아내지 않은 사회와 국가기관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참으로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이런 사건이 터지는 것은 미디어로 통해 타인의 죽음을 접하나, 직접적으로 나와는 무관하기에 그것은 하나의 미디어라는 매체로 통해 이루어지는 감정소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평소 남에게 박애정신을 가지지 않은데, 왜 이럴 때에만 자기는 인간인척 하는 것일까? 인간이란 위선과 모순을 가지는 게 당연하지만, 그것마저 거부한다. 결국은 자신의 이기심에 의해 존재하려 하고, 그 이기심에 의해 타인들에게 비난당하지 않도록 순간적인 가면을 쓸 뿐이다. 감정적으로 안타깝다는 기분은 실제이나, 무의식적으로 나는 아니라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회구조에서 자본주의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인간의 생활양식에서 자본주의의 종말을 생각하기 어렵다. 지금의 생산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소비체계 역시 어렵다. 대량적으로 생산되기에 우리는 밥을 먹고 옷을 입으며 집에서 잠을 잘 수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런 소비적 관계에 모순이 발생했다. 생산하는 것에 비해 소비가 가능한 사람들의 입장이 난처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경제구조가 있어야 모두 살아갈 수 있다고 하나, 최근에 자살한 가족들이나 혹은 어려운 환경에서 매일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그들이 백만 명 중에 1명이라면 문제가 안 되나, 과연 1명이 백만 명에서 1명일까? 아니면 천이나 만 명 중에 하나인가? 빈곤층의 증가로 최근 양극화 더불어 사회적 문제도 발생한다.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바로 자본주의의 폐해다. 개인의 능력과 개발을 위해 경쟁적인 요소로서 자본주의는 절대 부정적이라고 여기지 않으나, 문제는 그런 점까지도 모두 부정하는 자본주의로 된 것이다. 이전에 존 롤즈의 <정의론>을 읽다보면 최소수혜자에 대한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지원을 해주어야 정의로운 사회가 되며, 만약 최소수혜자에게 최소한의 사회적, 경제적 지원이 없다면 그들은 정치적 자유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고 한다. 정치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지식이 필요하고, 지식을 위해 교육을 받아야 하나 적정한 교육이 없다면 정치적 선택사항이 멀어지고, 그 선택지점에서도 경제적 문제로 인해 일을 해야 할 경우가 있다.

 

수정보완가능한 자본주의라면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국가가 자본을 운영하는 게 아니라 개인이 운영을 한다. 빈곤층에 대한 문제는 국가의 문제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자본은 이미 국경을 초월했다. 기업은 국가의 기업이 아니라 기업의 기업이다. 임금문제나 환경오염, 시장독점이나 경제공황 역시 이런 문제에서 발생한다. 많은 경영자들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말하나, 지금은 그런 경제활동이 <국부론>과 어울리지 않고, 처음부터 애덤 스미스는 경제활동에서 공정한 상거래야 한다고 했다. 타인의 생계나 생명을 짓밟는 행위에서 애덤 스미스는 납득이 가능할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회적 구조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무엇이 가로막고 있고, 그 무엇은 어떻게 이런 문제를 야기하는지 말이다. 따라서 자본은 경제학을 다룬 사회과학도서이나, 그 실존적 문제를 대해 과학적인 법칙을 설명한 철학도서일 수 있는 것이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자본론>은 매우 어려운 책이다. 개인적으로 마르크스의 서적은 몇 권 읽어봤고, 특히 <자본론>은 동아대학교 강신준 교수가 번역한 도서로 읽었다. 예전에 서울대학교의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은 읽지 않았다. 이번에 읽어본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은 작가가 서울대 출신인지 김수행 교수의 도서로 인용했다.

 

<자본론>을 1차례이나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기에 나는 그 책이 어려운 책이란 사실을 안다. 그런데 원숭이가 이해할 수 있다니 무슨 말인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은 상당히 <자본론>을 쉽게 설명했다. 하지만 그 분량은 1-1권과 다른 권에 있는 일부라는 점이다. 3,000(글자 수가 빽빽한)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200(글자 수가 큼직함)페이지 분량의 도서를 다 커버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본론>이 초반에 무엇을 다루고자 하는지에 생각하면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런다고 원숭이도 이해한다고 해도 진짜 원숭이가 아니라 작가 본인이 원숭이로 캐릭터처럼 나온 점에서 원숭이라고 나는 여긴다.

 

원숭이라는 작가, 하지만 작가 본인은 서울대학교 출신이고, 서울대가 아닌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국민들이다. 그래서 원숭이로 나온 작가의 모습은 왠지 이율배반적인 요소로 다가왔다. 그러나 적어도 모두가 꺼리는 <자본론>을 이렇게 쉽게 책으로 설명할 수 있는 점은 매우 놀라웠다. 특히 착취에 대한 잉여노동시간과 물건의 가치를 화폐로서 정하는 부분은 <자본론>을 읽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마르크스가 발견한 법칙이 아직까지 21세기에도 보이고, 21세기인 지금도 세계 명문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이 포진하고 있다. 설사 마르크스주의자까지 아니더라도 마르크스의 영향은 철학, 경제학, 문학, 미학, 예술까지 영향을 주고 있으니 한국에서 보는 마르크스와 세계의 마르크스의 하늘과 땅 차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마르크스를 알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아니 오히려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안 좋게 보는 사람도 한심하게도 마르크스에 대해 엄청나게 영향을 받은 사람의 서적을 추천했다. 서적명은 <문화의 수수께끼>,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치던 마빈 해리스 교수의 저명한 서적이다. 문제는 마빈 해리스는 <문화유물론>이란 서적으로 통해 자신의 문화인류학의 연구결과에서 <문화유물론>이란 도서명은 결국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대한 헌정이라고 했다. 마빈 해리스의 서적을 추천한 사람이 평소 적어대는 글과 그가 추천한 책을 보면 이율배반적이다. 그것도 제법 한국에서 인지도 있고, 유명한 사람인데도 그런 행동을 한다. 이게 한국의 지식인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수준이다.

 

전부 그러한 것은 아니나, 적어도 세상을 보는 눈에서 다양한 관점이 중요하다. 마르크스의 서적을 읽으면 내가 읽지 않은 시기에 한 생각이 나온다. 자꾸 중소기업이 망하고, 대기업만 흥행하면 대기업의 일자리는 한정적이고 중소기업에 일하는 사람들이 해고되면 결국 경제문제가 대두되지 않을까? 그것은 사실로 나타났고, 지나친 노동이나 혹은 열악한 노동조건에 의해 사람이 망가지는 것은 옆에서 봤기에 충분히 공감되었다.

 

따라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기 위해서는 결국 관점을 새롭게 보고 다르게 볼 수밖에 없다. 그중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매우 도움이 되는 책이다. 19세기 저술된 서적이라 오래된 것이 아닌가 하나, 적어도 애덤 스미스보다 1세기 후에 나왔다. 아직도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에서도 배우고, 경제역사학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다. 어째든 인간의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한 것이나 인지하지 못한 것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은 아마 그 걸음마로서 좋을 것이다. 단지 이 책을 보고 이해하기 쉽다고 하여 <자본론>이 이해가 쉬울 것이라 여기면 안 되나 말이다. 그래도 한 번 추천한다. <자본론>을 이제 막 흥미를 가진 사람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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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다시 읽기 - 민족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돌베개 한국학총서 15
이호룡 지음 / 돌베개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신채호 다시 읽기>,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한 영화가 생각났다. 예전에 영화배우 장동건 씨가 출연한 <아나키스트>라는 작품이었다. 한국이 일제강점기 시대 아나키스트들의 활동과 그리고 죽음, 우리들의 기억 속에 잊어진 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을 보면 전형적인 모던보이였고, 그래서인지 항상 멋진 양복을 입고 모자를 눌러 쓰며, 술집 미녀아가씨와 농담을 나누는 그들의 모습에서 시대의 암울함을 느끼기보단 오히려 거기에 빠진 것처럼 보여준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들은 겉과 다르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멋쟁이 미남청년들은 알고 보면 술과 노래, 패션을 좋아하는 모습은 물론 좋아하기도 하나 그 이면에는 항일운동을 하던 자였다. 일본군의 주요인물을 살해하거나 또는 공작테러를 일으키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영화는 <아나키스트>처럼 아나키스트들은 무정부주의자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자였다. 단지 작품에서 장동건 씨가 맡은 역에서 마약을 흡입하는 모습에서 자신이 처한 운명과 현실, 그리고 거기에 저항하는 젊은 지식인들의 고뇌가 숨어 있다.

 

그런데 이 아니키스트의 정신은 어디서부터 시작인가? 한국에서 유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래저래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 중에서 주요 단체나 조직을 보면 제일 유명한 것이 상해임시정부부터 시작하여 김좌진 장군이나 홍범도 장군이 운영하던 항일유격대, 그리고 종교단체로는 대종교, 정치적인 체제에서도 좌우 이데올로기 역시 같이 참가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는 모호한 면이 있다. 아나키스트는 자유주의이나, 모든 억압과 소속을 거부한다. 그런 점에서 권력이 지식을 생산하고, 지식이란 체계가 누군가에게 권력을 독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지식과 권력에 대한 관계에서 지식은 누구만의 소유가 아니라 전체가 나누거나 공동체적으로 가져야 할 것이란 점이다.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미셀 푸코의 담론이 생각났으며, 거기에 대한 대안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요소가 생각났으나, 그런다고 아나키스트는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체계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노동자나 농민이 단합하여 하나의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는 것이라면 아나키스트는 그것마저도 해체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살았던 이가 그 유명한 단재 신채호 선생이란 점이다.

 

생소하고 너무나도 낯선 한국의 아나키스트, 한국에서 아나키스트라는 존재를 그다지 접해보지 못했으며, 그들의 극단적인 자유주의는 현재 신자유주의라는 자유주의와 전혀 다른 자유주의다. 무정부주의는 작은 정부도 아닌 정부가 없는 것을 추구한다. 단재 신채호라는 이름은 독립운동가 이름 중에서 나오는 이름으로 민족주의 사상가이면서 역사학자다. 그런 그가 한국의 아나키스트 운동가 중에서 상당한 역할을 맡았다는 자체가 신기했다.

 

단재 신채호라는 인물은 조금 알아보던 계기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많은 인물 중에서 대종교에서 활동한 점이다. 신채호와 활동하던 인물 중에서 대종교 3대 교주인 윤세복이란 이름이 나온다. 당시 대종교의 주요 인물들 중에서 독립운동이나 한국의 민족주의를 위해 헌신하지 않은 분이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 역시 대종교에서도 활동을 했고, 그동안 한국역사를 가려진 곳에 있었는데, 다시 복원하려고 했다. 특히 조선시대도 그러하나 우리나라가 사대주의사상에 가려져 자기민족의 역사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음을 크게 염려했다.

 

그래서 김부식이 집필한 삼국사기를 비판하고, 한국의 역사를 제대로 잡기 위해 순암 안정복 선생의 동사강목을 비롯하여 다양한 역사서적을 연구했다. 특히나 광개토대왕비를 직접 보러 가거나 각종 역사문헌을 참고하여 한국역사를 복원하려 했다. 당시 단재 신채호 선생은 민족주의를 사회진화론으로 보려고 했는데, 처음에는 강력한 국력을 중시했고, 국가와 민족에 대한 다소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국가주의로서 접근했다. 구국적인 가치를 국가주의로서 당시 고구려시대의 영웅들을 칭송했다.

 

을지문덕이나 양만춘 장군과 같이 중국의 거대한 병력을 지혜와 용기로 물리친 장군을 소재로 글을 적었다. 초반에 신채호 선생은 나라를 구하는 것은 용기와 지혜 있는 몇몇의 영웅으로 생각했다. 사회진화론적인 가치와 더불어 일제로부터 구할 수 있는 것은 영웅이란 점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게 되었다. 러시아혁명과 삼일운동을 보면서 국가가 있는 것은 국민들에 의한 국가주의가 아니라 국민 그 자체 아니 민중이라는 그들이었다.

 

그런 역사적 가치관이 처음에는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로 시작했으나, 어느새 역사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고, 역사의 중심은 특정인물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던 인간이어야 하는 점이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아나키스트적인 정신은 남녀노소라는 신체적 조건을 떠나 인간이 사는 사회에서도 모든 것이 민중이어야 한 것처럼 생각했다. 그가 바란 세상은 오직 모든 것에서 해방이기에 처음 그의 목표는 대한민국 독립만이 아니라 독립 후에도 모든 것을 해방하기를 원했다.

 

그런 해방적 미래를 위해 동양의 아나키스트를 모은 점은 매우 흥미롭다. 그가 적대한 국가는 일본이나, 일본 내에도 아나키스트들이 있었고, 그가 아나키스트가 되려는 것은 고토쿠 슈스이의 <장광설>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접했고, 일본 내에서도 일본천황을 암살하려던 아나키스트들이 있었다. 적대하는 국가에서도 어느 정도 동조한 인물이 있었다. 동양의 아나키스트들은 자금을 모아 무기를 제조하는 공장과 보급책을 획득하기 위해 위조지폐를 만들기도 하고, 수많은 인파들 속에 일본관료나 군장성이 오면 암살작전을 실행한다.

 

단재 신채호의 독립운동방식으로 테러적 직접행동론을 민족해방운동의 방략으로 체계화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의 아나키즘 정신으로 수용했으며, 1936년 민족전선론을 폐기할 때까지 단재 신채호의 사상을 수용했다. 그래서 갑자기 생각난 영화가 바로 <아나키스트>라는 작품이다. 그들은 은거하거나 위장하여 군장성을 살해하는 테러행위를 벌인다. 그들의 테러는 자신을 위한 테러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간억압에서 해방하기 위한 테러였다. 그러나 시대와 혹은 이상한 교과서나 어느 특정사람들은 그들은 단지 테러리스트로 보려 했다.

 

그렇지만 왜 그들은 테러를 했어야 하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조명과 민족의식이 있다면 당연히 납득될 사항이다. 자국을 지키려면 자국민이라는 의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기반하는 것은 자국민이란 역사적 민족적 의지가 분명해야 한다.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은 아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분명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사회진화론에서 사회개조론으로 진보하여 보편적인 인류의 자유를 위해 그는 온 몸을 바치고 결국 뇌일혈로 서거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교도소에서 서거한 후에 고국으로 돌아올 때 자국의 땅에 묻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의 무덤을 만들려는 사람에 대해 감금과 구속, 고문이 이어졌을 정도니 말이다. 다행히 그의 육신의 불길에 나온 하얀 가루는 땅에 심어져 그의 안식처는 찾았다. 그러나 그가 진정 원한 세계는 찾을 수가 없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사상에 무조건으로 동의할 수 없고, 그 방식이나 행동조차도 옳다고 볼 수 없다. 단지 그가 바란 모든 것에 대한 억압이 끝이 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상적인 세계는 결코 현실에서 이룰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향하여 계속 향할 뿐이다.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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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문화인류학적인 요소로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대해 이번에는 단군신화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동기는 단재 신채호 선생에 대한 도서를 보면서, 단군역사에 대한 연구를 보면서이다. 딱히 본 서적에서는 그런 내용을 상세히 다루지 않으나, 적어도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원래 민족주의자 내지 사회진화론자에서 아나키스트 내지 사회개조론조로 변모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단재 선생 역시 역사관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의 사상은 근대주의에 입각했다. 근대화라는 산업체는 1960년대부터라도 근대사상은 이미 일제 강점기 독립군 내지 열사들과 같은 시대지식인에 의해 확립된 셈이다. 그러나 근대사상은 우리나라 근대화에 반영되지 않았고, 단지 경제적 근대화만 이룩했다. 뿌리 없이 자란 풀과 같아 모서리의 잎자락이 모두 병에 시든 것이다. 어쨰든 단군신화를 문화인류학적인 관점에서 그 시대적 요건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우선 곰과 호랑이에서 우리는 토템이즘이라고 하는 동물숭배 원시적 종교체계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환웅일족이 가진 것은 풍백, 우사, 운사, (뇌사) 무리 3000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환웅이라는 군주는(배달국을 세운 것이 한국의 최초의 국가이지 단군이 세운 것이 최초의 왕국이라 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하는 것은 나 역시 그래 여긴다.) 토템이즘이란 종교적인 사회구조가 아니라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정령적인 존재를 신으로 받드는 부족의 수장이다.

 

그가 배달국을 만들 시기에 문화인류학적 관점 또는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적인 요소로 본다면 결국 지리적, 기상학적, 환경학적, 경제학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우선 우사와 운사, 풍백은 기상조건을 말한다. 그것은 기상학을 알던 지식인들이 환웅일족은 보유하고 있고, 그들은 농경사회의 기술을 가진 셈이다.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벼농사로 통해 얻을 수 있는 쌀이란 식량이다. 벼농사 경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강우량이다.

 

 

비나 바람은 농경사회에서 벼를 가꾸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자다. 한국의 기후가 몬순기후로 여름에 많은 호우와 가을에 건조해지는 점에서 특히 한가위라는 추석문화는 벼농사의 전형적인 축제문화로 볼 수 있다. 벼는 여름에 많은 물이 필요하고, 가을에 건조해야지 수확을 제대로 얻을 수 있다. 벼가 여물기 시작하여 어느 정도 크기가 되어갈 때 호우가 내리면 벼이삭이 무거워서 모두 농경지로 빠져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환웅일족은 농경사회로서 그들은 농사를 짓기위한 도구를 지니고 있었다. 즉 신석기 이후의 뛰어난 석기문화와 더불어 청동기문화가 그들의 중요한 농경문화라는 점이다. 그가 가지고 온 삼부인에서 칼이란 권력적 상징이 중요한데, 칼을 가지고 있으면 구식무기에 비해 단단하고 날카로워 살상력이 강력하다. 만약 청동기문화 부족이 석기문화를 가진 부족과 만나면 석기문화족들은 모두 사멸한다. 망자의 길을 피하기 위해서는 흡수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토템을 가진 부족은 어떠한가? 곰과 호랑이에서 나는 그들의 음식문화에 대해 생각해봤다. 곰이란 동물은 육상의 나무와 풀에서 나오는 열매와 과실을 먹고, 또한 육상동물이나 강에서 나오는 물고기도 섭취가 가능하다. 곰이란 동물은 생물학적으로 잡식성이고, 생물이 살 수 있는 조건이라면 식량공급이 가능한 동물이다. 하지만 호랑이는 대부분 육상동물을 먹는다.

 

음식문화에 대한 조건적으로 곰과 호랑이는 식성이 다르다는 점이다. 그리고 조금 알아야 할 점은 흔히 우리는 곰은 순하고 둔하다고 하나, 야생의 곰은 사납고 빠르고 무서운 동물이다. 곰이나 호랑이 모두 야생에서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두려운 존재다. 호랑이와 곰을 만나면 어디가 더 치명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무서운 동물이다. 그러나 토템적 요건에선 결국 음식문화로 넘어간다면 환웅일족과의 만남에서 농경사회부족과 채취 내지 사냥일족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원시부족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연구에서 원시부족 중에서 평화로운 부족이 있는 반면 매우 사나운 부족이 존재한다. 그들의 성질을 좌우하는 것은 일정한 토지위에 놓인 인구수가 문제라는 점이다. 만약 1제곱킬로미터 내에서 인구가 100명과 1000명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그들의 식량공급이 사냥 내지 채취, 수렵이라면 결국 계속되는 사냥과 채집으로 식량이 되는 동식물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같은 식량을 두고 서로 싸우는 것이다. 원시부족들이 전쟁한다고, 그리고 살해하고 인육을 먹는 것은 잔인하고 야만적이나, 우리가 그들의 생계를 책임을 질 수 없다.

 

환경적인 조건에서 야생의 생활은 생존적인 법칙이 곧 인간들에게 식량의 유한성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전쟁노예 이전에는 전쟁포로는 대부분 돌려보내거나 모두 죽이는 것이 관례인데, 그 이유는 전쟁포로를 수용할 수 있을만큼 식량이 넉넉치 못했다. 그래서 인육을 먹는 부족이 생긴 이유다. 그렇다면 문명을 가진 환웅부족에서 곰과 호랑이가 서로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곰만 남고 호랑이가 나간 이유는 무엇인가?

 

곰은 3·7일만에 인간으로 된 것은 결국 농경문화에 적응했냐이다. 다시 넘어가면 식량은 벼농사 위주이기 떄문에 쌀을 주식으로 삼고, 채집이나 사냥이 아닌 탄수화물로 영양분을 보충해야 한다. 하지만 쌀을 이용한 탄수화물보다 오히려 고기로 통해 얻는 지방과 단백질이 칼로리도 높고, 특히 단백질은 인간에게 다양한 영양소를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쌀로만 보충할 수 없는 영양성분들을 쑥과 마늘과 같은 약용채소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본다.

 

고기만 먹던 수렵부족에겐 쌀을 비롯한 약용채소가 자신의 식성에 맞지 않아 스스로 떠나갔을 확률이 높다. 곰은 동물도 비롯하여 과일과 야채도 먹기 때문에 곰 토템을 지닌 부족이 농경문화에 적응했을 것이다. 농경문화의 이전은 결국 식량문제에 의한 인구증가 문제다. 같은 땅에서 수렵이나 채렵으로 얻는 식량보단 농사로 얻는 식량이 더 많고, 게다가 농사는 혼자가 아니라 집단노동이기 때문에 야생으로부터 안전을 지킬 수 있으며, 인간들 무리 속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장소에 살지 못하거나 혹은 살 수 없도록 내친 종족들은 유목지를 이동하면 살 수밖에 없다. 계속 한 곳에 정착할 경우 동물들은 모두 잡혀 먹히게 되고, 그 동물들을 키우기 위해 식생들이 사라질 수 있다. 그런 환경적인 조건에 의해 유목은 비과학적인 생활이 아니라 오히려 더 경제적인 조건과 환경적인 조건을 생각한 과학적인 생활양식이 된 것이다.

 

신화라는 것은 신의 이야기라고 하나, 사실은 인간의 이야기다. 인간이란 본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나, 혹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보고 그것에 대한 욕망으로 통해 나올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억압과 통제, 왜곡에 의해서도 신화라는 이야기는 진행되는 것이다. 하지만 신화는 하나의 과학성보단 공시적으로 비과학적인 요소가 숨어 있다. 단군신화가 한국의 건국신화라고 하나, 그 이면에는 역사적 과학적 증거가 있을 터이다. 이번에 내가 적은 글에 대해 이미 누군가 연구했거나 학설로 인정받거나 또는 어느 서적에 실려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런 것을 누가 제시하기보단 스스로 사고하여 적는 것도 역시 좋은 학문적 업적이라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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