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 '마르크스 자본론'의 핵심을 찌르는, 제2판
임승수 지음 / 시대의창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세계에서 어려운 고전으로 여러 가지 서적들이 있을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게오르크 헤겔의 <정신현상학>,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등등 근대철학만이 아니라 고대철학과 현대철학 역시 어렵다. 그런 점에서 철학을 알아가는 것은 돈과 명예 등과 같은 이익보다는 역으로 별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려서 오늘날 더더욱 어렵게 되었다. 안 그래도 어렵다고 느껴지는 것이 철학인데, 그 어려운 철학마저 접근하기 어려운 시대다. 그렇지만 철학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철학은 결국 인간이 세상을 볼 수 있는 하나의 등불이다.

 

어느 풍랑이 세차게 몰아치는 바다 위에 어떤 한 척의 바다가 있다. 그 바다 위에서는 한 치 앞도 예상하지 못해 이들의 운명은 언제 죽음의 사신과 춤을 춰야 할지 모른다. 그 속에서 한 줄기의 등불이 보인다. 아주 작고 약한 불이지만 그나마 그것으로 통해 앞길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철학이다. 세상을 보는 작은 눈, 하지만 그 작은 눈이 계속 이어지면 풍랑에 위태로운 선박은 운 좋게 낯선 무인도에 잠시 정착하여 파도를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이란 한 번의 답변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학문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철학에서 우리는 인간의 존재성 내지 근원 그리고 실존적인 문제에 대면하게 된다.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 이 세상을 두르고 있는 근원과 내가 살아가는 사회란 무엇이고? 그리고 더 나아가 국가란 무엇이며 세계란 또한 무엇인가? 작은 고민이 어느새 큰 물결이 치는 넓은 곳까지 볼 수 있는 것이 철학이다. 하지만 철학의 중요한 기능이 있다. 카를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에서 외친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생각하면 철학자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들은 중세유럽까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물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사상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들이 제기한 철학은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일련의 군주정치 내지 민주제도라도 소수 귀족에게 그 권한을 두고자 했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제도에서 민주주의라고 해도 그것은 10% 미만의 성인남성이고, 어린아이와 여자 그리고 노예와 이방인에게 제외되었다. 민주주의가 공화주의적인 정치로 본다면, 공화주의란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박애가 상실된 민주주의 정치란 순 위선에 둘러싼 자기 이름을 살리기란 점이다. 박애만큼 위대한 정신적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박애가 존재해야하지 자신의 자유만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살리고, 인정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애적인 사상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기 위한 조건 중에 하나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인간에게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날 이 글을 적는 본인과 혹은 내 주변이나, 그 밖에 사람들 대부분이 과연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나는 내 자신이 대해 행복하다고 여긴 적이 그다지 없다. 단지 행복보단 일련의 안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슬아슬한 일과를 보내고, 오늘도 무사히 혹은 이번에도 무사히 자체가 행복이라 여기지 못한다. 단지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한 순간의 안도이다. 행복감은 그런 안도에서 올 수 있겠지만, 근본은 달라지지 않고 또 다른 시련과 고통이 찾아온다. 언제까지 그런 안일한 자기만족에 의한 순간적 안위에 만족할 수 있는 것인가? 다소 회의적인 발언이 아닐 수가 없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까지 일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잔업과 야근을 해야 하며, 상상 이상으로 업무에 시달려야 한다. 그렇게 힘든 일과를 매일처럼 보내고 나온 대가란 이른바 돈이다. 우리는 돈에 의해 살아가고, 돈에 의해 죽어간다. 자본이 매개로 되는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살아간다. 자본주의구조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개 소시민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이때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경제적 시스템이 아직 대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특성은 결국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경제구조에 있다.

 

지금 한국인 인구가 5천 만 명을 넘었다. 따라서 좁은 국토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므로 언제나 부동산 과잉열기에 인플레이션은 하늘 무서운지 모르고 오르고 있다. 이런 시기에 각자가 주거하여 살아갈 수 있는 집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이 소유한 집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많고, 전세나 월세로 어렵게 버티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집을 가지기 위해 거액의 돈을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아, 그 대출 이자만 해도 상당히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돈이라는 것에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속박 받고 있다.

 

결국 우리 현대인들은 자신이 가진 돈에 의해 인생과 생활 그리고 미래까지 결정 받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사회구조에서 철학이란 무엇이고, 세상이란 무엇일까?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신선놀이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망각의 존재로 보이는 철학이야 말로 존재해야지 현재 상황을 바르게 이해한다. 그래서 이 글의 제일 위에 나온 세계에서 어려운 도서 중에 하나로 속하는 서적이 있으니 바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다.

 

<자본론>에 대해 일단 기본적인 설명을 하자면, 카를 마르크스가 독일에서 태어나고 철학박사를 수여받고, 노동자의 부당한 현실에 대해 분개하여 노동운동으로 활동하다가 당국에 의해 추방되어 영국으로 망명을 오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런던도서관에 머물면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리카도, 제임스 스튜어트 등의 서적을 읽으면서 경제학에 몰입했고, 그렇게 탄생한 게 <자본론>이다. 한국에서 <자본론>과 그리고 마르크스를 이야기하면 이상한 사람을 몰리겠지만, 유럽과 같은 선진국에 가면 마르크스는 엄청난 학문을 만든 장본인이다.

 

조금 의아한 점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사회과학 도서로서 경제학을 말하지만(도서관에 가면 사회과학 분류도서로 앞자리에 3을 부여받는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다르게 보면 철학도서와 같다. 세계 3대 경제학 도서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케인스의 <일반이론>이 있다. 물론 애덤 스미스의 경우 경제학자 이전에 윤리도덕학자였고, 케인스도 경제적 문제가 국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민생활에 큰 여파를 주므로 기본적으로 철학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자본론>은 이 2가지 서적과는 큰 차이가 있다. <자본론>은 순수하게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고찰 도서이고, 그 고찰로 통해 자본의 유무로 인해 고통 받는 약자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집에서 <자본론(도서출판 길, 번역자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강신준 교수)>을 읽으면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공장감독관에 의해 기록된 보고서를 읽게 되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하루 24시간 중에 12시간 노동은 예사고, 주말도 없을 때도 있으며, 심지어는 18시간 넘게 노동을 시킨다. 어린아이는 이제 4~5살부터 시작하여 잠도 재우지 않으며, 좁은 공간에 더러운 공기 속에서 장시간 노동착취를 당해야 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실로 지옥이 어디냐고 신이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지옥이 있는 곳은 사람의 관념 속에 자리 잡은 곳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말할 터이다.

 

신이란 있는 것인가?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온 유명한 문구가 있다. “신은 죽었다!”, 정말 신이란 존재가 존재성을 두고 생각하자면 있을지도 모르나, 그 신이란 인간의 운명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그냥 구경만 하는 존재라고 생각 든다. 신은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TV에서 쇼프로그램을 보고 즐기고 있듯이 구경하고 있는 방관자라고 생각할 뿐이다. 왜냐하면 신이 정말 존재하여 현실에서 심판을 한다면 죄 없는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거나,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억압과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내 머리 속의 이성과 지식이다. 물론 인간은 감정에 변하기 쉬우며, 무의식적인 요소로 순간 잘못된 길을 선택한다. 초자아라는 슈퍼에고, 이드라는 무의식 사이에서 자아는 늘 갈등한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사회구조 역시 그렇다. 문제는 이드로 인해 조장된 현실이 이상하게 슈퍼에고로 위장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작가나 그렇고 나도 그렇지만, 현실의 문제에 대해 개선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최근 생활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우리는 언론에 통해 많이 접하게 된다. 그들의 비참함의 종말은 소설 겸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코제트의 어머니가 생각날 정도다.

 

문제는 빅토르 위고가 그렇게 저술한 당시가 마르크스의 <자본>이 나오는 내용 그대로라는 점이다.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이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나, 막상 그것이 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지는 않는다. 현실에 대한 각인에서 자신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일목의 관심도 없으면서, 사건이 터지면 마치 자신은 착한 사람인양 걱정을 한다. 도대체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 것인가? 아니 그렇게 되는 것을 막아내지 않은 사회와 국가기관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참으로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이런 사건이 터지는 것은 미디어로 통해 타인의 죽음을 접하나, 직접적으로 나와는 무관하기에 그것은 하나의 미디어라는 매체로 통해 이루어지는 감정소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평소 남에게 박애정신을 가지지 않은데, 왜 이럴 때에만 자기는 인간인척 하는 것일까? 인간이란 위선과 모순을 가지는 게 당연하지만, 그것마저 거부한다. 결국은 자신의 이기심에 의해 존재하려 하고, 그 이기심에 의해 타인들에게 비난당하지 않도록 순간적인 가면을 쓸 뿐이다. 감정적으로 안타깝다는 기분은 실제이나, 무의식적으로 나는 아니라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회구조에서 자본주의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인간의 생활양식에서 자본주의의 종말을 생각하기 어렵다. 지금의 생산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소비체계 역시 어렵다. 대량적으로 생산되기에 우리는 밥을 먹고 옷을 입으며 집에서 잠을 잘 수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런 소비적 관계에 모순이 발생했다. 생산하는 것에 비해 소비가 가능한 사람들의 입장이 난처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경제구조가 있어야 모두 살아갈 수 있다고 하나, 최근에 자살한 가족들이나 혹은 어려운 환경에서 매일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그들이 백만 명 중에 1명이라면 문제가 안 되나, 과연 1명이 백만 명에서 1명일까? 아니면 천이나 만 명 중에 하나인가? 빈곤층의 증가로 최근 양극화 더불어 사회적 문제도 발생한다.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바로 자본주의의 폐해다. 개인의 능력과 개발을 위해 경쟁적인 요소로서 자본주의는 절대 부정적이라고 여기지 않으나, 문제는 그런 점까지도 모두 부정하는 자본주의로 된 것이다. 이전에 존 롤즈의 <정의론>을 읽다보면 최소수혜자에 대한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지원을 해주어야 정의로운 사회가 되며, 만약 최소수혜자에게 최소한의 사회적, 경제적 지원이 없다면 그들은 정치적 자유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고 한다. 정치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지식이 필요하고, 지식을 위해 교육을 받아야 하나 적정한 교육이 없다면 정치적 선택사항이 멀어지고, 그 선택지점에서도 경제적 문제로 인해 일을 해야 할 경우가 있다.

 

수정보완가능한 자본주의라면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국가가 자본을 운영하는 게 아니라 개인이 운영을 한다. 빈곤층에 대한 문제는 국가의 문제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자본은 이미 국경을 초월했다. 기업은 국가의 기업이 아니라 기업의 기업이다. 임금문제나 환경오염, 시장독점이나 경제공황 역시 이런 문제에서 발생한다. 많은 경영자들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말하나, 지금은 그런 경제활동이 <국부론>과 어울리지 않고, 처음부터 애덤 스미스는 경제활동에서 공정한 상거래야 한다고 했다. 타인의 생계나 생명을 짓밟는 행위에서 애덤 스미스는 납득이 가능할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회적 구조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무엇이 가로막고 있고, 그 무엇은 어떻게 이런 문제를 야기하는지 말이다. 따라서 자본은 경제학을 다룬 사회과학도서이나, 그 실존적 문제를 대해 과학적인 법칙을 설명한 철학도서일 수 있는 것이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자본론>은 매우 어려운 책이다. 개인적으로 마르크스의 서적은 몇 권 읽어봤고, 특히 <자본론>은 동아대학교 강신준 교수가 번역한 도서로 읽었다. 예전에 서울대학교의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은 읽지 않았다. 이번에 읽어본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은 작가가 서울대 출신인지 김수행 교수의 도서로 인용했다.

 

<자본론>을 1차례이나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기에 나는 그 책이 어려운 책이란 사실을 안다. 그런데 원숭이가 이해할 수 있다니 무슨 말인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은 상당히 <자본론>을 쉽게 설명했다. 하지만 그 분량은 1-1권과 다른 권에 있는 일부라는 점이다. 3,000(글자 수가 빽빽한)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200(글자 수가 큼직함)페이지 분량의 도서를 다 커버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본론>이 초반에 무엇을 다루고자 하는지에 생각하면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런다고 원숭이도 이해한다고 해도 진짜 원숭이가 아니라 작가 본인이 원숭이로 캐릭터처럼 나온 점에서 원숭이라고 나는 여긴다.

 

원숭이라는 작가, 하지만 작가 본인은 서울대학교 출신이고, 서울대가 아닌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국민들이다. 그래서 원숭이로 나온 작가의 모습은 왠지 이율배반적인 요소로 다가왔다. 그러나 적어도 모두가 꺼리는 <자본론>을 이렇게 쉽게 책으로 설명할 수 있는 점은 매우 놀라웠다. 특히 착취에 대한 잉여노동시간과 물건의 가치를 화폐로서 정하는 부분은 <자본론>을 읽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마르크스가 발견한 법칙이 아직까지 21세기에도 보이고, 21세기인 지금도 세계 명문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이 포진하고 있다. 설사 마르크스주의자까지 아니더라도 마르크스의 영향은 철학, 경제학, 문학, 미학, 예술까지 영향을 주고 있으니 한국에서 보는 마르크스와 세계의 마르크스의 하늘과 땅 차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마르크스를 알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아니 오히려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안 좋게 보는 사람도 한심하게도 마르크스에 대해 엄청나게 영향을 받은 사람의 서적을 추천했다. 서적명은 <문화의 수수께끼>,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치던 마빈 해리스 교수의 저명한 서적이다. 문제는 마빈 해리스는 <문화유물론>이란 서적으로 통해 자신의 문화인류학의 연구결과에서 <문화유물론>이란 도서명은 결국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대한 헌정이라고 했다. 마빈 해리스의 서적을 추천한 사람이 평소 적어대는 글과 그가 추천한 책을 보면 이율배반적이다. 그것도 제법 한국에서 인지도 있고, 유명한 사람인데도 그런 행동을 한다. 이게 한국의 지식인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수준이다.

 

전부 그러한 것은 아니나, 적어도 세상을 보는 눈에서 다양한 관점이 중요하다. 마르크스의 서적을 읽으면 내가 읽지 않은 시기에 한 생각이 나온다. 자꾸 중소기업이 망하고, 대기업만 흥행하면 대기업의 일자리는 한정적이고 중소기업에 일하는 사람들이 해고되면 결국 경제문제가 대두되지 않을까? 그것은 사실로 나타났고, 지나친 노동이나 혹은 열악한 노동조건에 의해 사람이 망가지는 것은 옆에서 봤기에 충분히 공감되었다.

 

따라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기 위해서는 결국 관점을 새롭게 보고 다르게 볼 수밖에 없다. 그중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매우 도움이 되는 책이다. 19세기 저술된 서적이라 오래된 것이 아닌가 하나, 적어도 애덤 스미스보다 1세기 후에 나왔다. 아직도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에서도 배우고, 경제역사학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다. 어째든 인간의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한 것이나 인지하지 못한 것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은 아마 그 걸음마로서 좋을 것이다. 단지 이 책을 보고 이해하기 쉽다고 하여 <자본론>이 이해가 쉬울 것이라 여기면 안 되나 말이다. 그래도 한 번 추천한다. <자본론>을 이제 막 흥미를 가진 사람이라면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