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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와 침묵의 제국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그 역사의 기록에서 전해진 사건들이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그런 역사적 맥락은 매우 중요하다. 100년 전 한일합방이나 을사늑약, 200년 전의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 그 이전에 일어난 일들은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2014년 침몰한 선박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비통에 빠져 있을 때, 교황님이 한국에 방문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종교는 없지만, 그 교황을 존경한다. 그분이 오실 적에 한국 가톨릭성인 중에 윤지충이란 인물을 성인으로 봉했다. 1791년 신해년 어머니 권씨 장례를 치루던 그는 어머니의 신주를 불사른 이유로 이종사촌과 함께 참수를 당했다.
따지고 보면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고, 앞으로 조선 천주교의 미래에 피 냄새가 진동하는 초석이 되었다. 정조가 죽자 노론들이 1801년 신유사옥을 일으키고, 황사영백서로 조선의 천주교의 대박해가 있었고, 이후 계속 더 심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신해박해와 신유박해는 종교적인 문제보단 정치적인 문제가 더 심했다. 왜냐하면 두 사건은 모두 노론의 정적인 다산 정약용을 노리기 위한 극도의 전략이었고, 전자는 어떻게든 넘어갔으나 후자는 정약용의 가계를 풍비박산을 내었다.
다산 정약용을 파괴한 이유는 바로 그가 정치적으로 남인에 위치했고, 남인들은 당대 권력자들인 노론에게 귀찮은 존재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조선은 심각한 모순에 빠졌다. 그런 모순에서 정치적으로 제도를 정비하고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왕과 사대부들이었다. 문제는 그 사대부양반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할 점이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부터 각종 사화에서 조선은 조용한 나라가 아니라 선비들의 피가 뿌려진 역사였다.
권력을 잡은 사대부들은 호위호식하며 위로는 왕을 속이고, 아래로는 백성을 탄압했다. 공자가 이르기를 범보다 더 무서운 것은 부패한 관료라고 했다. 즉 가렴주구의 현실이 이제 조선의 운명을 몰락의 길로 인도했다. 그렇다면 그 시작은 어디인가? 예나 지금이나 백성 즉 국민이 신음에 괴로워하고 통곡하면 그 나라만큼 비참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 공자의 유학이란 바로 그런 백성의 도탄에서 구하는 것이다. 논어에서 정치가란 농민에게 농사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농사를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정치란 아래 사람을 편안하게 하여 위로 하여금 올바른 정사를 돕는 것이 선비의 자세다.
백성이 변을 당하면 선비의 책임이고, 선비의 변을 당하면 대부의 책임이듯이 조선의 건국 이념은 유교이다. 유교의 공자와 맹자의 이론을 깊이 들어가면 상당히 계급절대적인 사고방식이나 때로 생각하면 그렇게 되어 더 이상 백성 아니 국민들이 도탄에 빠지지 않은 것이 더 나을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지금 유교문화를 생각하면 기본적으로 공자의 책을 읽어본 사람은 거의 없고, 공자의 사상조차 알아보려고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비뚤어진 유교문화는 우리사회 전반에 뿌리 깊이 못 박혔다.
개인적 내 일화로 나는 종교가 없지만, 그래도 다른 종교를 가진 친구가 있다. 딱히 그 종교를 문제 삼자고 한 것은 아니나, 그 집에 놀러가 내 친구의 어머니가 나보고 자신이 다니는 종교에 믿고 한 번 가자는 말에 나는 거부했고, 30분 정도 이런저런 말이 오고갔다. 그런 뒤에 내 친구는 뒤에 이런 말을 했다. “아무리 싫더라도 우리 어머니가 하는 말인데 조금 심한 것 아닌가.”라고 말이다. 물론 어른에 대한 아랫사람의 말대꾸는 보기 좋지 않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른이라고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논리는 유교문화에서 시작되고, 그 유교문화와 전혀 접점을 이루지 않은 종교를 나에게 권유하는 친구 어머니에서 우리사회는 유교가 가진 의미적인 부분을 버려도 유교가 가진 모순은 계속 유지했다.
물론 진짜 유교에서 공자는 제자들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의견들을 서로 나누었다. 즉 유교는 선비들이 학문을 하여 서로 간의 사고를 정리하여 말하고, 그것이 옳은 것이라면 당연히 세상에 실천으로 보임으로 만백성을 편하게 만드는 것이 취지다. 그러나 공자의 유학은 정치적인 경전이지, 종교적인 색은 없었다. 남송의 주자의 성리학이 여러 가지 종교적 내용을 보강하여 퍼지고, 그것이 조선에 유입되었다. 주자의 논리는 조선사대부에게 유교가 가진 민본중심 사상에서 사대부중심으로 변해갔다. 사대부중심이 된 계기는 바로 사회적 모순으로 인해 자신들의 이권에 큰 위협이 다가오자 이에 대한 방어책으로 나온 것이다.
전쟁에 대한 피해가 결국 사대부의 무능함과 이기심이었지만,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은폐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점에 올리려했다. 그런 점에서 윤휴의 투쟁은 한국에서 왜 제대로 된 토론문화가 될 수 없는지 그리고 왜 아직까지 그게 되는지 보여준 사례다. 조선의 사화에서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그런다고 선비나 유학자들이 내놓은 상소나 의견을 두고 사형에 이르지 않게 했다. 설사 귀양이나 관직박탈이 존재해도 목숨까지 빼앗지 않았다.
그런다고 하여 노론의 입장에선 그걸 용인하지 않았다. 국가를 위한 것인지 아니라면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위한 것인지가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노론의 서인이었고, 서인은 동인과 반대되던 당파였다. 서인은 임진왜란 이전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동인세력을 꺾으려 했고, 임진왜란 시기에 동인이던 서애 유성룡이 잦은 정치적 논쟁, 그리고 이순신조차 동인계통이었다. 그리고 서애 유성룡의 가까운 학자이자, 퇴계 이황과 학문적 교류를 나눈 윤복, 개혁유학자 조광조의 친구 윤복의 형 윤구, 이들의 흔적은 예송논쟁이란 희대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길이 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인조반정 대신들은 청에 대한 복수, 그리고 명에 대한 은복을 위해 북벌론을 제기하나, 막상 그 실천을 옮기려 하던 자는 없었다. 북벌론을 제기하던 자들은 효종과 같이 뜻을 모우려 했지만, 효종은 병으로 죽고 만다. 어이없는 점은 아주 강한 의지와 체력을 가진 효종이 그 말을 꺼낸 지 1달 만에 병으로 죽었다. 얼굴에 난 종기를 침으로 제거할 때 혈관을 잘못 찔러 죽었다는 것은 이해가지 않는다. 즉 얼굴에 지나치게 깊이 침을 넣지 않은 이상 출혈쇼크로 사망할리 없다. 효종은 왕궁에서 직접 궁마(弓馬)를 수련했다. 왕이 한 사람의 장수로서 지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효종이 죽자 그의 장례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충돌했다. 두 세력은 인조반정에 기여한 점도 있지만, 남인은 조선의 군주인 왕을 위해 상복을 3년을 주장했지만, 서인은 효종이 장자가 아니기에 1년을 주장했다. 남인은 조선사대부의 군주는 군왕이었지만, 서인들의 군왕은 명나라 황제였다. 그런다고 하여 북벌론을 주장하면서 실천하지 않았다. 이때 굴러들어온 돌이 윤휴였다. 그리고 윤휴와 더불어 윤선도의 공격은 서인들로 하여금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그들은 남인의 학자이면서 윤선도는 남인의 영수였다.
서인들의 논리는 왕을 사대부와 같은 직급으로 보고, 사대부의 이익을 올리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서인들은 성리학의 절대적 이론을 두고 자신들의 권력을 확장했다. 성리학에서 주자의 논리 1자조차 건들지 못하게 했고, 만약 건들면 사문난적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윤선도는 귀양살이를 가게 되고, 그는 평생 남은 시간을 귀양살이로 마무리하여 노년에 고향 인근 보길도에서 생을 마감한다. 귀양살이하던 윤선도와 달리 윤휴는 1차 예송논쟁 이후 2차 예송논쟁에도 활약했다.
현종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때 상복은 1년인가 9개월로 할 것인가에서 다시 말썽을 발휘했다. 효종의 죽음은 1년으로 끝났지만, 그 뒤에는 왕의 권력보단 신하의 권력을 우위에 두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남인(청남)들은 왕권을 주장하고, 북벌론을 위해 백성들의 살림을 보전하게 하고, 양반들의 특권을 정리하는 게 옳다고 보았다. 송시열의 서인은 그런 정책을 잘못하면 국가가 어지러워지며, 사대부들에게 군포를 지게 하는 것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고, 게다가 서자의 군역을 나가게 하여 벼슬을 하게 하는 것 역시 특권층의 이익을 반하는 것이었다.
이때 청남에서 가장 큰 대변자가 윤휴고, 그는 서인들과 대항하다 숙종 때 경신환국에서 죽음을 당한다. 그가 죽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서인들의 세력이 왕실 척신으로 자리 잡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방해하는 윤휴와 청남세력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남인의 세력에서 윤선도의 죄는 아들에게 연좌될 수준이었다. 남인세력 특히 청남들은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몰린 선비로, 왕권 중심을 내세운다. 그리고 왕권을 앞세우고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기에 결국 실학의 거두가 여기서 비롯된다.
윤선도의 경우 학문만 아니라 의학과 음악 각종 예술과 과학에 능했고, 그의 학문은 공재 윤두서와 윤두서의 친구 옥동 이서에게 미친다. 옥동 이서는 조선중기 최고의 실학자 성호 이익의 형이다. 이익의 형인 이잠은 숙종 때 장희빈을 편을 들다 장형으로 죽는다. 그리고 이익의 아버지 이하진은 숙종 경신환국 때 서인에 의해 귀양을 가게 된다. 그런 흐름에서 남인과 노론의 피 냄새가 나는 당쟁이 시작되었다. 서인들은 왕의 독살사건과 사도세자 죽음까지 이어지고, 영조는 평생 노론의 그늘 아래 살아야했다.
노론들에게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당시 서인 영수들의 권력은 절대적이고, 이들의 권력을 계속 이어져 내려와 특권층으로 된다. 권력에 대한 비판은 사대부들이 해야 할 도리였다. 그러나 상소문을 올리고 받는 기관마저 그 이속으로 가득하면 아무 소용없다. 그런 흐름은 계속 이어져 정조 사후는 조선의 빛은 사라졌다. 지금도 이상한 성리학으로 윗사람이 잘못된 말이나 행동을 하여 아랫사람이 말하면, 감히 어디서라는 말부터 튀어나온다. 바른 말과 정당한 주장만이 답이 아니라 그 세력이 원하는 구미를 얼마나 맞추는가에서 생존까지 달라진다.
선비의 상소는 지금으로 본다면 언론의 기능이다. 백성들 중에서 극소수인 선비만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지식을 가졌기에 아무리 봉기해도 전략과 책술로서 다스릴 수 있었고, 제도적인 요소로서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학문은 배워서 남을 주는 게 공맹의 유학이나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한 주자의 모순으로 어긋났다. 이런 구조에서 정약용의 유배와 형제들의 변은 이미 예고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지점이 어디서부터인지 찾아간다면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터준 것이나, 적어도 피를 흘릴 정도는 아니다.
그 피 흘리는 철저함은 2번의 예송논쟁이었다. <윤휴와 침묵의 제국>에서 윤휴의 후손조차 그의 조상을 말하는 것조차 버겁다는 점에서 한 개인의 역사가 먼 훗날 후손에게 큰 짐을 주었다. 정약용도 윤선도의 후손이고, 그의 이종사촌 역시 윤선도의 후예이기에 큰 화를 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 뼈대가 된 성리학의 전체주의적 사상, 권력지향주의, 관료주의 형태는 21세기 한국까지 움직이고 있다. 이 책에서 윤휴가 고문을 받고 서울 동대문으로 나오자 많은 백성들이 몰려와 그의 몰골을 보고 울었다고 한다.
전쟁과 가난, 병들은 국가아래 언제나 수탈과 핍박받은 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변호하다 산 송장이 된 윤휴를 보고 통곡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윤휴와 가까이 지내던 윤선도의 경우도 그렇다. 한국전쟁 때 많은 전투가 벌여지자, 예전에 양반들이었던 자들이 한국군과 북한군의 접전 중에 과거 원한을 산 일로 가옥이 불타거나 살해당한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해남의 윤선도 종가는 오히려 보호받았다고 한다. 선비의 본분은 왕으로 하여금 백성을 안위로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주자의 성리학에 빠진 사대부들에 의해 저지되었고, 그들에게 군주는 조선의 왕이 아니라 명나라황제였다. 물론 명이 완전히 청으로 넘어가면서 그들의 황제는 청나라황제였고, 일본에 의해 먹혀 들어간 순간에 아직까지 자국의 독립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에 치중했고, 그런 이기심을 포장하는 사변으로 정치적 명분을 만들었다. 21세기 왕도 양반도 노비도 없지만, 아직도 우리는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양반이란 신분은 철폐되는 게 옳아도, 양반이란 사대부가 가진 본래의 가치는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윤휴는 백골의 시아버지와 배냇물이 마르지 않은 아이의 군역이 오른 것을 보고 분노를 했다.
다산 정약용은 그런 군역에 견디지 못해 자신의 남근을 베어버린 갈대밭 남정과 그 남정이 아낙네의 절규를 보았다. 논어에서 공자가 제자의 질문에서 나라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백성이라 했다. 경제와 군사는 다음 문제다. 백성이 굶주리고 비참함에 통곡하는데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만 보는 것에서 지금의 한국 그때와 과연 다를까?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에게 귀양과 죽음만 내리고, 이젠 사회적 죽음으로 몰고 간다. 책을 보고 서평을 쓰면서 나에게 오는 것은 정말 짜증나는 분노와 증오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자신의 유배지에서 자신의 남근을 자르는 사건을 보고도 아무 것도 못한 채 나그네 방에서 그저 시 구절 외우는 것으로 달래야 한 점을 생각하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역사의 당시에는 패자 그리고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박해를 받은 자들은 먼 후대의 역사에 의해 복원되고 칭송받는다. 세상에 대한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내 시선을 어쩔 수 없지만, 그런 역사적 평가가 있기에 오늘 우리들은 자신의 양심을 걸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