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이돌에 대한 인상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하려 한다. 내가 예전에 데이트했던 여성 중에서 스타일이 엄청 좋으신 분하고 하천강변을 걸으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연히 한국의 연예인들에 대한 부분이 나왔다. 나에게 물었다. TV에서 나오는 여자연예인들이나 아이돌가수 같은 사람하고 만나고 싶은지 말이다. 나는 2가지 이유로 거절했다. 1가지는 옆에 여성이 있기에 거짓이라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조금 아닌 점(스타일만큼은 진짜 연예인에게 뒤쳐지지 않았다)과 다른 1가지는 내가 연예인 자체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답변은 내가 여자연예인들을 만날 일도 없고, 만날 것에 대해 기대조차 하지 않으며, 처음부터 나에게 그런 일이란 있을 수 없으니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래도 만약에 혹시나 만날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말에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다고 했다. 내가 추구하는 삶의 재미하고 그런 세계에 있는 사람하고 어울리는 게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극장판 애니메이션 <아이돌 마스터>를 리뷰 할 때, 아이돌에 대한 나의 관점이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관점에서 무엇을 바라보는 것은 좋지 않다. 예술이란 것도 문화라는 것도 각각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기에 새로운 발전과 가치가 탄생한다.

 

그런 것은 학문이나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인 점은 분명하다. 아이돌에 대한 인상이 왜 중요한가? 우선 <아이돌 마스터>를 리뷰하기 전에 한국과 일본의 아이돌 문화가 너무 차이나는 점을 느꼈기 때문이다. 언제 한 번 큰 전시회장에서 세계 음식문화를 소개하는 행사가 있었다. 그곳에 가니 한국을 시작하여 인도, 일본, 러시아, 대만 등 세계 다양한 나라의 음식이 전시되어 판매하고 있었다. 그렇게 재미있는 행사는 아니지만, 갑자기 일본 후쿠오카 쪽에서 음식 소개와 더불어 지역아이돌의 즉석공연이 있었다. MR 반주를 튼 음향 속에서 3명의 소녀(고등학생 정도 되려나?)가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었다. 라이브로 하는 즉석공연에서 제대로 된 라이브콘서트가 아니므로 사운드나 무대의 크기는 한계성이 있었다. 그들의 키와 옷차림, 율동을 보면서 생각한 건, 한국의 아이돌과 뭔가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았다.

 

2. 아이돌 문화의 변화성

한국에서 아이돌을 살펴보면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하여 2000년대를 지나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모든 가요시장에서 아이돌문화가 제패했다. 아이돌문화의 특징은 초반에 백댄서 내지 대형기획사에서 프로젝트로 시작했던 아이돌 스타 기획은 전 방위적으로 음반기획사에서 추진하게 되었다. 아이돌시장에서 비중이 큰 부분은 남성보단 여성이며, 과거 음반시장의 중심이 남성이었던 점에서 큰 변화가 발생했다. 남성중심은 이미지 메이킹보단 곡 그 자체에 대하여 비중을 차지했지만, 아이돌문화에서 여성에 대해서는 곡보다는 이미지 메이킹과 안무에 대한 효과를 중시했다.

 

생각하자면, 1990년대에도 컬러 TV가 보급되었으나, 대부분 음악방송은 정규방송에 의해 내보내졌으며, 인터넷에 의한 미디어콘텐츠는 걸음마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IT이 열광적으로 보급된 것은 스타 크레프트 블러드 워가 피시방을 석권한 점이 크다. 인터넷 온라인 게임이 피시방에 많은 사람들을 몰리게 하면서 인터넷문화를 기하학적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처음 인터넷을 즐기던 사람들이 피시방에 갔으나 대단지 아파트와 일반가정까지 인터넷이 보급되자, 인터넷은 어느 특정장소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생활양식이 되었다. 최근 스마트폰이 2010년대에 대부분 한국사회에 보급되면서 미디어콘텐츠는 TV 중심에서 인터넷 스마트폰으로 전환되었다.

 

아이돌문화가 급속히 성장할 수 있는 계기와 더불어 음반시장의 저하는 인터넷의 영향이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매체적인 전환은 아이돌문화에서 색다른 전환이 이루어졌다. 아이돌의 발탁은 대형기획사에서 지망생 유치나 오디션으로 통해 선발했다면, 이제는 인터넷으로 통한 유 튜브나 각종 자발적 콘텐츠로 계속 그 시장을 확대했다. 아이돌문화의 발전은 콘텐츠의 발달로 인터넷으로 아이돌을 접하는 청소년들이 증가한 것과 아이돌에 대한 시장의 공급이 증가할수록, 아이돌을 지망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3. 한일 아이돌의 차이성

그러나 한일간의 아이돌을 비교하면 조금 다른 점이 보인다. 한국에서 아이돌 캐릭터 이미지를 보면 미국이나 일본의 아이돌이나 연예인 컨셉을 이용하여 다른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의상이나 가사, 댄스안무와 이미지 메이킹에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당연하다. 단지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한국의 아이돌과 일본의 아이돌은 각자에게 보이는 아우라가 틀리다는 점이다. 그 대상에 뿜어지는 분위기나 느낌에서 한국은 상당히 강렬한 이미지를 준다. 대부분 한국의 여성아이돌을 보면 상당히 미모를 가진 미인에 스타일의 조건도 매우 좋다는 점이다.

 

모든 아이돌이 그런 것은 아니나, 많은 인기 여성아이돌 그룹을 보면 섹시컨셉이 매우 강조한 점과 화면에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점이 명확하게 전달된다. 위에서 언급한 후쿠오카에서 온 3명의 아이돌은 한국의 아이돌과 달리 상당히 다른 느낌을 준다. 한국의 아이돌처럼 외적인 요소가 강렬하거나 안무에서 상당한 일원성을 보이는 것보다 다소 부드러운 이미지와 다소 엉성한 느낌을 주었다. 물론 일본의 메이저 탑 아이돌이라면 아주 철저한 안무와 이미지 메이킹을 했을 것이다.

 

그런다고 반드시 그렇게 다가온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 대표적 아이돌 AKB48의 뮤직비디오를 본 순간, 화면에서 보인 그녀들의 모습은 정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보단 상당히 유동적인 모습이었으며, 억지로 통일성을 부여하기보단 각자의 모습을 부여하는 느낌이었다. 사람이 지나치게 많다보니 정형성이 강조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외적인 모습을 보더라도 스타일적인 요소도 한국의 아이돌이 훨씬 우위에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AKB48만이 아니더라도 많은 아이돌이 길거리에서 혹은 소극장에서 톱아이돌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도 댄스 팀들이 방송이나 프로가 아니더라도 따로 활동하지만, 일본은 그런 아이돌문화가 상당히 발달한 점이다.

 

4. 애니메이션으로서 아이돌

극장판 애니메이션 <아이돌 마스터>는 게임으로 제작되었으며, TVA로 먼저 상영된 작품이다. <아이돌 마스터>가 비록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가상의 인물이 가상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가상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도 분명히 리얼리티라는 현실적 요소가 기반되어 있다. 그 사회상이나 공간적 배경은 현대의 일본이고, 작품의 배경이나 주변 생활양식은 현실적 조건을 충분히 반영했다.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역시 제작된 국가에 따라 그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가 녹아들어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이돌 마스터>가 일본에서 제작된 이상, 일본의 건축양식, 교통체계, 음식문화, 거리상가 등과 같은 다양한 요소가 그대로 작품에 녹아든 것이다. 아이돌이란 모두에게 빛나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나 빛이란 언제나 움직이는 에너지로서 존재한다. 빛이 어느 일정 구간에 놓인 한 줄기라면, 그 빛은 언제나 그 에너지가 닿아 없어질 때까지 계속 우주를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빛이란 한 번 움직이면, 방금 그 빛인 A는 없어지고, A-1, A-2... 등이 이어서 다가온다. 빛의 저편으로 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빛이 와야 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면 아이돌은 하이퍼 리얼리티(Hyper reality)라는 파생실재로서 우리에게 등장한다. 우리가 아는 아이돌은 실제 그 아이돌의 현실세계와 다른 존재이고,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단지 화면에 보이는 존재는 그렇게 아이돌로서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아이돌 역시 인간이고, 그들은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우리가 화면에서만 바라보는 화려하기만 한 존재는 아니다. 빛이 우리에게 강한 시선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 자신이나 혹은 우리 주변의 모습이 밝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아이돌의 빛남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에게 없는 그 빛을 바라보는 것으로 자신에게 없는 빛을 타자로 하여금 찾도록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으로 아이돌문화 역시 사회적인 존재로 등장한 것이다. 아이돌 자신은 그 자체로 아이돌이 되는 것을 욕망했고, 그 욕망은 관객과 시청자로부터 갈채와 응원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고, 반대로 갈채와 응원을 보내는 관객과 시청자들은 자신의 일상에 존재하지 않은 빛나는 모습을 아이돌로부터 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욕망의 운동에서 우리는 그 욕망에 대해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너무 지나치지 않은 이상 우리 인간에게 삶의 원동력이나 활력소가 필요하다. 그 대상이 아이돌에 대한 동경이나 아이돌문화에 대한 취향으로 될 뿐이다. 단지 모든 것의 중심이 아이돌로 된다는 점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상실할 수 있으므로 문제가 될 뿐이다.

 

<아이돌 마스터>는 본래 게임으로 제작된 것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아이돌에 열광하는 문화적 현상이 있는 반면, 그 아이돌을 자기가 만들고 싶다는 욕망도 있다. 육성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은 게임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한다. 과거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나, 코에이에서 제작된 <삼국지>들은 육성전략 시뮬레이션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를 남겼다. 단지 전략이 되는 대상을 국가나 가족에서 아이돌로 전환되었을 뿐이다.

 

5. <아이돌 마스터>에서 보여주는 작품의 미학, 그 시작점 아마미 하루카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이돌일 것이고, 그 아이돌이 활동하는 배경일 것이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아이돌 그 자체이다. 아이돌로 등장하는 히로인이 누구인지, 그 히로인들이 어떤 모습과 재능을 보여주고, 어떤 개성을 살려 자신의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돌 마스터>라는 작품이 아이돌을 내세우는 장르라고 해도, 그 역시 전대물에 가까운 작품이다. 전대물처럼 모든 등장인물이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전대물처럼 다수의 등장인물이 나오고, 그 안에서 누군가 중심이 되는 리더가 있다는 점이다. 리더의 자리를 보면 항상 가장 정의롭게 보이거나 또는 강하게 보이거나 또는 아름답게 보이는 인물로 설정된다.

 

리더로 선발된 이들은 주인공으로 자리를 차지한다. 리더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전대물 형식을 바라보면 위에서 언급한 요건들은 대부분 갖추고 있다. 아이돌이 나오는 작품이라면 분명 아이돌 중에서 가장 눈에 잘 보이거나, 가장 강한 인상을 주는 인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돌 마스터>는 그런 전대물적인 왕도에서 벗어난다. 같은 아이돌 장르에서 <러브 라이브>에서 가장 인상이 강한 인물로 마키가 선호되나, 주인공은 호노카 중심이다. 호노카의 경우 외모나 스타일로 보자면 마키나 에리보다 덜하다. 그런데도 리더가 된 이유는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제일 먼저 행동하기 때문이다.

 

전대물 등장인물에서 리더의 조건에 강한 의지와 행동력이 호노카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Wake up Girls>에서도 리더를 맡은 나나세 요시노의 경우, 본래 모델과 CF에 등장할 정도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으며, 강한 인상을 가졌기에 리더의 자리에 적합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아이돌 마스터>에서 리더를 맡은 아마미 하루카의 경우, 다른 아이돌 작품이나 전대물적인 요소에서 리더로 등장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그녀의 외모는 애니메이션 여성캐릭터가 대부분 미소녀라고 할지라도, 미소녀적인 캐릭터에서 다소 멀어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돌 마스터>에서 가장 재능이 넘치고, 외모나 스타일이 우월한 인물로 호이시 미키다. 작품을 보면 인기가 다른 그룹멤버에 비하여 좋을 뿐만 아니라 헐리우드 영화배우 입성까지 할 정도이다. 춤도 잘 추고, 센스도 좋으며(피규어로도 잘 팔린다), 아이돌이 가져야 할 화려한 요소를 가장 잘 반영한 인물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시장공략대상이 남성이고, 그 나이계층을 중고등학생이라면, 여동생캐릭터, 동급생캐릭터, 누님캐릭터로 나눈다면, <아이돌 마스터>에서 동급생 이미지로 호이시 미키가 가장 두드러지게 보인다.

 

다른 캐릭터에서 키와 머리색, 그리고 의상을 본다면 눈에 잘 띄는 인물로 타카츠키 야요이, 미나세 이오리, 시죠 타카네(내 개인적인 관점)으로 보인다. 나머지 캐릭터는 각자가 가진 개성과 특성에 따라 에피소드로 등장하면, 캐릭터의 이미지로서는 호이시 미키 외 강하게 느껴지는 인물이다. 그러나 <아이돌 마스터>의 서사를 초반부터 보면 이야기의 진행은 아마미 하루카와 프로듀서로 전개된다. 프로듀서는 모든 아이돌을 책임지고 일을 진행하는 디렉터라면, 아마미 하루카는 그 아이돌 중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이다. TVA에서도 멤버들의 불화 속에서 그 중심이 되어 해결을 하던 인물은 하루카였다.

 

그런 하루카가 프로듀서를 대신하여 멤버를 이끌어가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선택이다. 아마미 하루카는 강한 인물이 아니라 평범한 인물이고, 그녀의 이미지 메이킹에서 머리에 달려있는 장식리본이 보이지 않는다면 캐릭터의 존재감이 매우 얇다는 점이다. 하루카의 성격이 밝고 친절한 마음을 가졌다고 하나, 친절한 모습은 일상 내지 다른 아이돌과의 생활하는 과정에서 보여주고, 밝은 성격도 다른 아이돌 역시 가지고 있는 요소이다. 하루카를 다른 아이돌 멤버와 비교하여 어떤 장점이나 특성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딱히 떠오르지 않은 캐릭터다. 그녀는 자신이 아이돌이 되어 모두의 환호 속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한다.

 

6. 리더로서 보여주는 아마미 하루카

<아이돌 마스터>는 게임으로 제작된 것이기에 자신이 원하는 캐릭터를 선택하여 게임 플레이어로서 육성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의 경우 게임플레이어가 아니라 애니메이터들의 선택이나 관점에 의해 전개된다. <아이돌 마스터>에서 아마미 하루카가 주인공 중에서 리더로 선택되어 이야기에서 그녀가 보여준 행동에 대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아이돌장르나 전대물에서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영상서사인 애니메이션이라도 기본적으로 문학, 영화, 만화 등 다양한 서사물과 비교하여 처음이 있다면 결론이 있고, 그 이야기과정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이념이나 이상이 존재한다. 애니메이션 영상과 소리는 시청자에게 내러티브(Narrative)를 전달해주는 내레이터(Narrator)의 기능을 담당한다. 그렇다면 아마미 하루카의 활약에서 우리는 <아이돌 마스터> 극장판 작품에서 의미하는 미적인 요소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서사의 시작과 마무리에서 어차피 765프로덕션은 관객과 팬들의 호응 속에서 좋은 공연을 하는 것이 목표다. 처음부터 초심자로 시작하여 큰 대스타가 되는 것은 어차피 서사적인 요건에서 크게 고민할 이유는 없다.

 

단지 그 과정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고, 플롯에서 보이는 갈등과 해결이 거대한 서사 안에서 서사로 등장한다.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TVA와 달리 2시간 이상의 런닝타임을 가진다. 2시간 넘게 상영되는 이야기에서 아마미 하루카의 존재성은 초반보단 오히려 후반에 가서 두드려진다. 아마미 하루카란 인물은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카리스마 내지 확실한 기량이 보이지 않은 캐릭터다. 가창력으로 보자면 치야하가 뛰어나고, 댄스를 보자면 미키, 무술능력은 마코토, 스타일 그 자체로는 타카네가 뛰어나다.

 

캐릭터 가지고 있는 외적인 요소를 다른 캐릭터와 비교해도 아마미 하루카에겐 특이한 장점은 없다. 그런데 극장판에서 공연할 아레나 공연장에서 같이 백댄서로 활동할 아이돌지망생 중에 다른 6명은 모르나, 어느 한 소녀는 하루카에 대한 동경심이 매우 대단한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목표는 하루카짱, 아니 아마미 상이라고 말하는 소녀의 모습에서 아이돌 중에서 왜 하루카가 그런 대상이 되었을 까이다. 하루카를 동경한 소녀는 다른 지망생에 비하여 외모나 스타일이 특별나게 뛰어난 것도 아니고, 공연에 대한 부담감과 자신의 능력에 벽을 느끼는 바람에 과식을 하게 된다.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사람마다 해결하는 방안이 다르지만, 폭식에 의한 스트레스 해소는 많은 여성에게 큰 치명적인 증세이다. 다른 백댄서 멤버들은 그 소녀에 대하여 다소 불필요한 존재로 여겼으며, 공연 날이 다가오자 모두들 그 소녀를 배제한 상태에서 라이브를 하자고 의견을 모으려 했다. 그러나 오직 하루카만은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이돌이 된 자신이지만, 그 과정이 아주 멀고도 힘들었으며, 자신의 노력과 더불어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을 말이다. 소녀는 하루카에 대해 큰 우상으로 다가왔지만, 사실 하루카 역시 그 소녀가 느꼈던 초조함과 한계의 벽을 느꼈던 것이다.

 

멤버들의 불안 속에서 실력이 부족한 소녀를 배제하자고 한 다른 백댄서는 자신이 어느 정도 위치가 되니 그 노력을 무단하게 날리고 싶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로 인해 모두가 고생한 시간을 날리고, 게다가 자신의 의도하고 상관없이 성과를 포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루카에게 그 소녀를 지켜주는 것은 어떻게 보자면 효율성과 다변성의 저울에서 다변성으로 중심을 둔 것이다. 백댄서의 발언에서 중요한 부분이 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라이벌이라고 말이다. 그 말은 들은 이오리는 물론 자신도 여기에 있는 765멤버 모두 라이벌이라고 한다. 하지만 라이벌이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7. 라이벌이란 무엇인가?

결국 효율적인 공연운영과 다변적으로 인원을 구성할 것에 대한 갈등에서 하루카는 다변성을 선택한다. 라이벌의 관계성에서 하루카가 고민할 때, 미키가 화장실에서 하루카에게 말을 건넨다. 자신은 프로듀서가 리더의 선택을 자신이 아닌 하루카에게 한 것에 대해 매우 부럽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유일한 라이벌은 하루카라고 말한다. 미키는 765멤버에서 대표적인 아이돌이다. 가장 활발한 활동과 인기를 받는 미키가 왜 하루카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미키는 전대물의 리더로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하루카에게 리더로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미키는 자신만이 월등한 아이돌이지, 아이돌 그룹 내를 모두들 받아들일 수 있는 도량에선 하루카에게 이길 수 없었다.

 

프로듀서가 리더를 하루카에게 지정한 이유가 바로 프로듀서는 단순히 일만 따오고 진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돌 모두를 돌보고 챙겨줘야 하는 가장이란 점이다. 가장의 필수요건은 어느 누구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같이 이끌고 가야 하는 점이다. 하루카의 아이돌로서 빛나는 모습을 가진 것은 그 균형적인 모습을 지킨 것이다. 하루카는 알고 있었다. 라이벌은 배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때로는 같이 있어야 할 때도, 때로는 경쟁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이다. 아이돌 세계에서 자신만 혹은 자신들만 존재하는 것은 허무한 공간이다.

 

내가 아닌 타자가 있어야 비로소 내가 새로운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볼 수 있는 이유다. 하루카가 TVA에서 라이벌 회사에서 활동하던 3인조 남성 아이돌에 대하여 계속 친분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감을 가지되 자만심을 가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자신이 이때까지 여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계기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자신에게 일어난 그 모든 일들이 하나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하루카가 그 소녀를 백댄서 팀에서 배제한다면 이때까지 쌓아올린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8. <러브라이브>와 <Wake up Girls>의 비교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대표적인 아이돌장르 애니메이션은 <러브 라이브>와 <아이돌 마스터>이고, 그 2가지와 비교하여 인지도 낮으나 <Wake up Girls>가 있다. 물론 그 외 아이돌 장르의 애니메이션이 있으나, 2010년대를 기반으로 하여 아이돌 장르를 보면 3가지가 기억이 난다. 각각의 TVA와 극장판을 본다면 <러브 라이브>의 경우 현실적인 요소에서 매우 낮은 세계관이고, <Wake up Girls>는 아이돌세계에 대한 어둠과 부조리를 보여준 점에서 매우 현실성을 반영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전개나 작화 등의 문제로 <Wake up Girls>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어찌보면 TVA <아이돌 마스터>도 고비는 많으나 모든 멤버가 인기 아이돌이 된다는 설정으로 본다면 진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문제는 TVA를 지나 극장판에서 어떻게 보여준 점이다. TVA와 달리 극장판 <아이돌 마스터>는 상당히 현실적인 요소가 반영되었으며, 억지스러운 설정보단 실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를 넣었다. 개연적인 관계로서 본다면 매우 납득이 가는 일화인 점이다.

 

그러나 서사에서 비교해야 할 점은 현실세계에 대한 리얼리티 요소만이 아니라, 작품에서 보여주는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러브 라이브>의 경우 모든 9인 멤버는 개성이 다르더라도 가지고 있는 목표는 같다. 인기 스쿨아이돌이 되어 학교 신입생을 늘리고, 3학년이 졸업하여 팀이 해산되더라도 영원히 Muse는 우리만이다. 모두가 같은 목표와 의지를 가지고 있는 점에서 겉으로 보자면 매우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게다가 다른 학교 아이돌마저 스쿨아이돌의 최고를 보여주자는 설정은 작품에서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 개방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폐쇄적인 가치관으로 이어진다.

 

아이돌 장르에 국한되기보단 걸즈 밴드나 걸즈 그룹으로 전위적인 모습을 보여준 작품으로 <케이온>이 있다. <케이온>에서 1학년으로 입학한 4명의 소녀는 이미 자신들이 부실에 오자말자 2월에 졸업한 선배들이 모두 나갔기 때문에 새롭게 시작한다. 2학년이 되어 새롭게 멤버를 추가한 후 다시 그녀들이 졸업할 때, 2학년 멤버 1사람과 친구 2사람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된다. 상황적 조건은 분명 좋지 않지만, 그 자리를 버리고 가는 게 아니라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 연속성이 존재하고, 자신들만의 세계로만 끝내지 않는다.

 

<러브 라이브>에서는 Muse팀은 해체된다. 대신 아이돌부가 남아 다른 사람들이 이어가지만, 그것은 Muse를 이어가는 게 아니라, Muse라는 그룹을 하나의 아이돌세계에서 우상화된 존재로 남게 된 것 같은 것이다. 즉 소통의 대상이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서 <러브 라이브>와 <아이돌 마스터>는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것이다. 같은 학교 안에서 찾은 멤버들에게 자아와 타자의 구분은 어렵다. 학교의 폐교를 구하자는 목표의식에서 이미 자아의식은 확고하다. 이에 반해 <아이돌 마스터>는 멤버의 목표는 아이돌로서의 성공이다. 학교를 지키자는 집단적 가치보단 그 집단 안에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러브 라이브>와 <아이돌 마스터>는 같은 아이돌장르지만,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Wake up Girls>는 실패한 아이돌 멤버와 처음부터 아이돌이 되려던 자, 그럴 생각조차 없는 자들이 모인 팀이다. 내부의 이야기에서 조율화음이 매우 시끄럽고, 계속 위기만이 다가올 뿐이다. 거기서 각자의 개성이 7가지의 무지개로 되었다는 점에서 다변적인 모습을 추구한다. 그런 점에서 <러브 라이브>는 <아이돌 마스터>와 <Wake up Girls>에 비해 아름답게 그릴 수는 있다.

 

아름답게 보이는 것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식물에서 장미는 예쁜 꽃으로 아름답게 보이지만, 민들레나 국화 같은 식물은 차로 마시거나 약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보이는 것과 우리가 그 대상으로 어떻게 사용하거나 여기고 있는지에 따라 가치관이 다른 것이다. 합목적성을 가진 어느 대상이 실제로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따라 미적인 가치관이 바뀔 수 있다. 만약 장미가 몸이 편치 않거나 병이 든 사람에겐 아무 필요 없는 식물이나, 연애를 하려는 남성에겐 구애하고자 하는 여성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다.

 

하지만 아이돌은 TV세계와 엔터테인먼트 세계에서는 가장 화려한 꽃이다. 장미처럼 활짝 펴고 시들어버리면 버리게 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활동하는 것이 아이돌이다. 그렇다면 아이돌에 대해 우리는 효용성만으로 보는 것이 정당할까 아닐까? 팬들의 입장에서 아이돌은 계속 데뷔하는 끝이 없는 콘텐츠의 샘물이다. 언제나 많은 소녀들이 자신의 화려한 모습을 꿈꾸며 무대를 향하여 달려가기 때문이다. 대중 앞에 등장하는 수많은 아이돌은 그저 선택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한 것이다.

 

대중의 선택은 시장성과 연결되어 있기에 기업의 전략성에서 냉혹한 판단으로 이어지고, 대중의 눈에 들어오지 않은 아이돌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런다고 대중의 눈에 그렇게 비출지언정 아이돌 안에서 그 팀 내부적으로는 다르다. 대중과 아이돌은 팬과 스타의 관계로 전환되어도 아이돌 내부 팀원끼리는 가상의 세계로 만나는 게 아니라 실제 같이 생활해야 하는 구성원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내 같지가 않고, 나 역시 남같이 될 수 없다. 모두 각자의 특성과 장단점이 있으므로 다변적인 요소를 지닐 수밖에 없다.

 

내가 글 초반에 데이트를 했던 그 여성에 대해 언급한 점에서 그 분(<아이돌 마스터>에서 아즈사의 인상이 가까운 것 같다. 하지만 <아이돌 마스터>에서는 타카네가 좋다.)이 확실히 스타일이 좋았다는 점과 나보다 훨씬 머리가 좋고 유능해서 데이트를 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 만날 때 여기저기 구경하고 돌아다니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 생각하거나 추구하는 성향은 조금은 달랐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가치관을 서로 인정해줬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가서 자신에 대하여 말하라고 한다면, 분명 그 사람이나 혹은 나나, 또는 불특정 다사들은 자신은 특별한 존재로 여기기도 하나,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남들과 비교하여 특별한 존재로 대우받고 싶으나, 자신만을 특별히 알아주는 것에 대하여 타인과의 이질적인 요소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 점은 자신만의 특별함을 모두가 추구하고 느끼는 보편적인 성향이 등장한다. 자신의 특별한 날에 특별한 것을 받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특별한 날에 원하는 특별함의 기준선에서 멀어지면 특별한 게 아니라 특이한 것이 된다. 대중문화와 아이돌 관계에서 아이돌은 특별한 존재로 될 수 없다. 특이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모두가 같은 특별하다고 여기고 보편적 성향에 따르면 다른 아이돌과 겹치는 경우가 분명 나타날 것이다. 자신만의 개성과 특징을 부각해야 어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어필이 되는 개성과 특징을 과연 멤버 내부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냐는 점이다.

 

그것은 남들과 비교하여 우월한 요소도 있지만 분명 열등한 요소도 있다는 점이다. 개성적인 요소는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 수반되는 이중의 칼날이다. 하루카의 활약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는 평범한 소녀라는 아이돌의 단점도 있지만, 그렇기에 모두의 리더로서 이끌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단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멤버들도 드러난 것도 있지만 드러내지 못하는 것도 많다. 하루카가 보는 빛의 너머에는 그 장단점을 모두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또한 자기가 이미 탑아이돌이 된 게 당연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과정에 있었던 시간이 당연했을 뿐이다. 하루카가 자신을 알아주고 멤버를 알아주며, 댄스팀원까지 알아준 것은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지 못하나, 나와 같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잘 이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나를 잘 알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니라면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얼마나 잘 알아갈려고 노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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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무엇을 찾아가는가?

인간에게 자신이 언제나 고민하고 갈등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그것은 자신이란 존재에 대한 정체성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디에 존재해야 하고, 누구하고 같이 있어야 하는지 또한 그것으로 통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번에 영화관에서 관람한 <괴물의 아이>는 전형적인 서사를 갖춘 애니메이션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가진 한 소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발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작품이다. 렌이란 소년은 9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주변 친척으로부터 외갓집의 후손을 이어가기 위해 어머니가 살던 집에서 나오라고 한다. 아버지는 이미 전에 이혼을 하여 소식조차 닿지를 않는다. 이런 어린 소년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이란 무엇인가?

 

2. 서사의 시작

렌은 어머니와 함께 했던 시간,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사망했는데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음에 대해 어른들의 사회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부정하게 된다.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은 현실이란 세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괴로워하고, 죽은 어머니를 계속 그리워하게 된다. 그런 깊은 상처는 렌에게 지울 수 없는 짐이 되어 가슴에 큰 구멍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그 구멍이 발생한 이유는 부모와의 이별에서 겪은 흔적이므로, 자신의 비극적 상황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렌에게 현실의 세계는 그저 괴로움으로 가득한 먼 세계였던 것이다. 렌이 우울함에 지쳤을 때 갑자기 덩치 큰 사내가 렌에게 말을 건다. 그의 이름은 쿠마테츠, 강력한 힘을 괴물로 자신의 제자를 찾기 위해 괴물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오가고 있었다.

 

렌이 만난 쿠마테츠, 렌이 현실에서 있을 곳은 없었고, 그에게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했다. 그 욕망은 공간적으로 비틀게 되었고, 평범한 인간이 갈 수 없는 괴물의 세계로 갔다. 괴물의 세계를 가니, 현대사회와 다른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건축양식은 일본의 근대 초반의 모습을 갖추었고, 시부야의 대도시의 모습보단 그저 과거에 존재했던 일본의 도시처럼 생겼다. 렌이 만난 쿠마테츠는 그 도시에서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은 괴짜였고, 쿠마테츠는 수장 자리를 두고 이오젠이란 강한 멧돼지 괴물과 결투를 해야 했다.

 

3. 인간의 관계

처음 만난 쿠마테츠는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자신이 정한 일에는 절대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외골수적인 쿠마테츠는 길에서 우연히 시비가 걸린 이오젠과 싸우면서 아무도 그에게 응원을 해주지 않는다.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차가운 반응과 거부감이었다. 렌을 큐타라고 이름 짓고 제자를 삼으려 해도, 그런 성격인지라 렌과 쿠마테츠는 계속 다투기만 했다. 다투기만 하다가 렌은 어느 순간 알았다. 렌은 자신이 부모 없는 외톨이란 점에서 세상과의 단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렌 본인만 느낀 감정이 아니라 쿠마테츠 역시 어린 시절부터 혼자 자라온 외로운 괴물이었던 것이다.

 

부모 없이 혼자서 커야 하는 아이들은 예절이나 사람대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울 수 없다. 보호받지 못하기에 언제나 다른 자들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고, 상대방에게 억눌리지 않기 위해 항상 거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렌이 쿠마테츠에게 제자로 들어간 이유는 자신만이 혼자라는 슬픔을 가진 게 아니라 쿠마테츠 역시 그런 슬픔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분명 독자적인 주체로서 태어난다. 하지만 태어나기까지 어머니라는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생명이고, 어머니와 분리되더라도 육체가 아닌 정신은 계속 이어져 있었다.

 

바로 가족이란 것은 육체적인 끈과 더불어 정신적인 끈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 끈을 상실한 것은 엄청난 충격이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잊을 수 없는 상처이다. 쿠마테츠와 함께 살아가는 렌에게 가족의 빈자리를 쿠마테츠로 채울 수 있었고, 언제나 혼자 고독한 삶을 살아야 했던 쿠마테츠에게도 삶의 지지대가 생겼다. 인간은 분명 고립된 공간에서 혼자 있으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경계심으로 무장한다. 그 긴장감은 분명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자신이 고독하다는 마음에서 깊은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쿠마테츠가 렌을 제자로 삼으면서 강해진 것은 렌만이 아니다. 쿠마테츠도 이전보다 더 강한 무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스스로 강해지는 것보다 옆에 누군가 같이 한다면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그런다고 무조건 인간이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렌은 강해져도, 렌을 이은 다른 제자들은 강한 제자가 되기 어려운 이유는 옆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본인 스스로가 강한 마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자신의 개성과 주체적인 요소도 자신 혼자서 만들 수 없다. 인간은 타인의 존재로서 자신의 개성과 정체성을 형성해 간다. 쿠마테츠와 렌이 수장의 부탁으로 강한 자를 찾아가면서 그들이 말하는 강함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강해질 수 있다면, 그 힘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인가?

 

4. 강함이 무엇인가?

옛날에 사람들은 의식을 치루면서 사회적 공동체를 단결하고, 어려운 환경으로부터 서로를 지켜내려 했다. 흔히 제사음식으로 동물을 바치며, 그들의 고기를 신에게 올린 후에 마을 사람들이랑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동물로 소와 돼지가 있지만, 보통 양(羊)을 이용했고, 제사에 바칠 양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더 좋은 의식이 될 수 있었다. 고기의 양이 많다는 것은 배고픈 고대인들에게 축복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양이 크다는 것이 좋다는 것으로 아름다운 미(美)라는 한자어가 탄생한다. 아름다운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반드시 아름다운 것은 제사에 바치는 양고기만이 아닐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미적인 갈등에 의해 살아간다. 미라는 기준은 인간의 이성과 감정에 의해 좌우되며, 그것에 따른 결과로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한다. 우리 인간에게 존재하는 판단력은 어떤 상황에 놓일 때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저울을 잴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아름다운 모습이란 결코 모두에게 일관적인 요소로 될 수 없지만,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윤리적 논리가 존재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이기심과 교활함을 이성의 논리라는 무기로써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만 저지를 뿐이다.

 

다소 렌과 여고생 카에데의 만남은 너무 진부한 요소가 반영된 글리셰(cliche)로 가득하나, 렌이 카에데와 친하게 지낼 수 있던 이유는 바로 카에데 역시 강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옳다면 행동하는 모습이 렌의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행패를 부리는 학생들로부터 카에데를 구한 렌은 이때까지 친구는 쿠마테츠와 타타라, 햐쿠슈보에 불과했지만, 이제 인간의 친구를 만들 수 있었다. 괴물의 세계에 자란 렌은 현실의 세계에서 말소된 인간이 되었지만, 다시 인간이란 세상에 사회적인 존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의 첫 걸음으로 언어의 사용이다. 사회적 약속으로 정해진 언어, 그리고 자신의 연배에 맞는 언어로서 교육과정을 접한 렌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놓이게 된 것이다. 작품에서 현실에서 보이는 것보다 오히려 환상의 세계에 있는 환상이 더 진실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렌에게 현실은 자신에게 진실한 세상이 아니었다. 어른의 사정으로 외갓집으로 가야했던 렌은 혼자 힘으로 집에서 나왔다. 인간의 현실세계가 아닌 괴물이란 환상적인 세계로 갔던 렌에게 자신의 존재적인 진실은 현실이 아닌 오히려 환상의 세계에 존재했던 것이다.

 

인간은 현실세계에서 뭐든지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 그렇게 되는 일들은 없다. 언제나 자신의 주변에 조건과 한계가 따르며,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좌절감을 맛본다. 자신이 원하는 세상, 이상적인 공간은 현실이 아닌 환상의 세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이다. 렌은 괴물의 세계에서 쿠마테츠의 제자가 되어 자신의 모습을 만들었다. 하지만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산다는 것은 정체성의 혼돈을 의미한다. 행방불명이 되어 다시 자신의 호적을 등록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동의가 필요했다. 어머니 죽음 이후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던 렌에게 다시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란 오랜 시간을 두고 새겨진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아버지가 과거의 일은 잊고, 다시 새로 시작하자는 말에 렌은 분노한다. 여태까지 잊고 있었던 자신의 어두운 기억과 슬픔이 다시 떠올랐으며, 그동안 아무도 돌봐주지 않은 자신에게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쿠마테츠와의 시간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현재는 과거의 시간을 축척에 의해 존재한 것이다. 과거에 의해 축척된 현재는 다시 또 다른 과거가 되어 미래에서 현실로 전환된다.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의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셈이고, 현실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미래를 향하여 발을 돌리는 것조차도 부정당하게 되는 셈이다.

 

쿠마테츠와 보내면서 렌은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쿠마테츠와 보낸 시간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라 아주 소중했으며, 쿠마테츠와의 추억은 자신을 강한 인간으로 만들어준 계기였다.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의지할 게 없다면 자신의 가슴에 빈 공간이 생기고, 인간은 그 공간에서 나온 깊은 어둠과 아픔으로 세상을 극단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구멍을 메울 수 있는 것은 본인의 의지와 인내라고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구멍이지, 마음 안에서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계속 가슴 속을 도려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다.

 

그 상처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결국 자신을 이해해주고, 자신의 속내를 말할 수 있으며,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서 강해지고, 그 강함은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논리로서 아름다움을 만들 수 없다. 논리라는 것은 자신의 이기심이 반영되어 경제적으로 이익을 보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논리로 말할 수 없는 마음이 강하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카에데는 흔히 볼 수 있는 가냘픈 소녀이다. 카에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공부를 잘하는 것이고, 렌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은 공부를 봐주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카에데는 후반부에 가면 위험하고 아찔한 순간에서 용기를 내어 렌의 곁에 서준다.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카에데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에서 강한 마음으로 렌과 함께 한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서는 억지로 보여주는 것보다 자발적인 모습에서 비로소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쿠마테츠가 이오젠과 대결할 때 처음에 밀리기 시작했다. 옆에 함께 해주던 렌이 인간세계로 다시 돌아간다는 말에 화가 나서 싸워서 렌이 집에서 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렌이 다시 무도장에 오자, 쿠마테츠는 렌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 후 힘을 되찾은 후 이오젠에게 승리한다.

 

5. 허먼 멜빌의 <모비 딕>

19세기 영미문학 작가로 허먼 멜빌이 있었다. 그가 만든 소설 <모비딕>은 거의 1,000페이지에 가까운 거대한 소설이며, 소설을 읽으면 고래에 집착하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괴물의 아이>는 일본의 설화에서 민담이나 전설적 요소를 작품에 반영했다. 괴물들은 수인으로 이루어졌고, 수장으로 나오는 토끼는 자신의 옷에 연꽃을 새겨 넣었다. 연꽃은 불교에서 자주 등장하는 꽃으로 더러운 연못에도 향기로운 연꽃이 나온다는 점에서 진정 향기로운 인간은 깨끗하기만 한 곳에서 나온 자가 아니라 오히려 깊은 상처와 아픔, 시련을 겪은 인간에게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타인에 대한 진정한 교감이 있어야지 인간은 진실로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소설 <모비 딕>은 그것과 반대되는 소설이다. 9살 집에서 나온 렌이 친척들이 짐 정리하는 도중에 우연히 발견한 책이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이다. 그리고 도서관에 들렸을 때 우연히 카에데를 알게 된 동기도 <모비 딕>을 읽어서이다. 이치로히코와 결투를 펼칠 때, 이치로히코는 렌이 들고 있던 <모비 딕>을 발견한 후 쿠지라(고래)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이치로히코는 스스로 흰 고래(모비 딕의 한자어는 백경(白鯨)이다)이 되어 시부야의 거리를 파괴한다.

 

<모비 딕>이란 소설을 보면 주인공 이슈메일은 고래잡이배를 탑승하고, 그 안에서 이교도 용사 퀴퀘그를 만난다. 위대한 전사의 후예인 퀴퀘그는 고래잡이배에서 거친 바다를 누비며 고래를 사냥하러 왔으며, 주인공 이슈메일과 의기투합하는 인물로 나온다. 그리고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배의 선장은 에이해브이다. 그는 포경선에서 아주 노련한 선장으로 다리 한쪽을 잃어 목발을 사용하여 걸어 다닌다. 에이해브 선장의 다리를 빼앗은 것은 아주 큰 흰 고래 모비 딕(Moby dick)이었다. 몇 년 동안 복수에 눈을 빼앗겨 미치광이처럼 변한 선장은 오로지 모비 딕을 찾기 위해 머나먼 바다를 향하여 찾아간다.

 

집에 아내와 자식이 있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많은 고래를 포획하여 돈을 크게 벌어도 소용없다. 오로지 모비 딕에게 작살을 날려 모비 딕의 배를 가르고 그 살을 씹어 먹는 게 그의 유일한 삶의 목표다. 모비 딕을 알고 있던 카에데는 그 소설에서 인간의 내면이 바로 모비 딕이란 큰 고래이며, 인간은 자신을 파멸하기 전까지 어디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방황한다는 점이다. 실제 소설 <모비 딕>에서 에이해브 선장이 타던 배에 탑승했던 선원은 거의 다 죽는다. 오로지 소설에서 주변사람과 상황을 관찰하는 이슈메일만이 기록의 전달자로서 살아남을 뿐이다.

 

인간을 사로잡은 집착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날린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의 삶의 목적, 자신의 현재성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찾을 수 없으며,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모르면 삶의 재미와 의미를 느끼지 못해 매우 비참하고 쓸쓸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옆에 누가 있어도 고립된 자신과 고독으로 가득한 마음은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게 된다. 이치로히코가 모비 딕으로 변한 점은 그 자신이 고립되었다는 점에서 참을 수 없는 고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와 타인을 다르나, 비슷한 공통점이 있으며, 그것은 자신에게 소속의식으로 통한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믿었던 진실로부터 멀어지면서 자신의 존재성에 대해 부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세상을 부정하는 것과 같으며, 이치로히코는 그런 자신의 어둠에 갇혀 폭주하게 된 것이다. 자신 스스로 모비 딕이 되던 것처럼 말이다. <모비 딕>과 관련하여 애니메이션 음악을 일본 밴드그룹 Mr. Children이 맡았다. Mr. Children도 제법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들이 음악연출을 맡았을 때, 소설 <모비 딕>이 나온 점에서 Led Zeppelin의 <Moby Dick>이란 곡을 삽입했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나오지 않은 점에서 조금 아쉬웠다.

 

고래가 되어 시부야 바다처럼 묘사된 아스팔트 도로를 돌아다니는 모습, 고래가 바다에서 뛰어 오를 때의 모습, 렌이 고래와 싸우는 모습은Led Zeppelin의 <Moby Dick>하고 어울렸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도 생각하면 소설 <모비 딕>에서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 딕에게 패배했지만, <괴물의 아이>에서 에이해브 선장이 되어야 했던 렌은 모비 딕에게 승리한다. 그것은 렌이 모비 딕으로 변한 이치로히코의 어둠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6. 의지할 것이 없어지는 인간

<괴물의 아이>의 리뷰에서 많이 생각한 점은 우리 인간들은 주변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은 나름 영상 연출과 복선관계에서 잘 배치하려 했지만, 주제의식에서 큰 독창성을 볼 수 없었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독창성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나 <늑대아이>편이 훨씬 강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가 과도기적인 청소년을 거친 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일반적인 모험이나 드라마장르의 작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호소다 마모루의 <괴물의 아이>에서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이란 과연 무엇이냐는 점이다. 작품의 절정에 가면 쿠마테츠가 보인 결단은 인간에게 의지가 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바로 신이란 점이고, 그 중에서 정령신이란 점이다. 눈에 보이지 않은 정령들을 믿는 것을 두고 샤머니즘이라고 한다. 작품에서는 다소 토테미즘적인 요소를 보였다. 괴물들은 동물들이 수인처럼 등장했으며, 토템이란 것은 인간들이 동물을 자신의 조상이나 신으로 모시며, 그 동물의 특성에 따라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문화적 특성이 있다.

 

작품에서 수장인 토끼, 쿠마테츠의 라이벌 이오젠은 돼지, 타타라는 원숭이였고, 렌이 처음 주텐가이에서 마주친 괴물은 말이었다. 이 동물은 주로 12간지에 등장하는 동물이며, 쿠마테츠의 경우 곰으로 등장하나, 일본 북해도 토착민족 중에 하나인 아이누족의 종교문화가 곰을 토템으로 하므로 기본적으로 일본문화권에서 토템적인 요소를 지닌 동물들이 괴수로 나온 점이다. 게다가 이들은 수장이 되면 신이 될 수 있다고 한다. 토템을 믿는 민족에게 그 토템의 동물은 신이다.

 

인간의 세계와 갈라진 괴물의 세계는 본래 분리되기보단 인간의 사회에서 잊어진 세계의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신에 대한 믿음, 과거에 유지했던 신앙적 체계가 크게 변했다. 그런데 쿠마테츠가 선택한 정령신 형태는 인간에게 신이란 존재가 필요하다는 점으로 볼 수 있다. 마음속의 칼, 쿠마테츠가 언제나 주장하던 말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진짜 마음속의 칼이 되어 렌과 함께 살아간다. 괴수가 아니라 하나의 신으로써 말이다. 그렇다면 신이 없는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에게 뭔가 집착할 수 있는 상징을 부여하는 것이다. 인간이 어디에 기대지 못한다면 자신의 소지품에 의지하는 경우가 있다. 행운의 부적으로 반지와 펜던트, 인형이나 목걸이는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다. 카에데가 처음 렌에게 건넨 물건은 자신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책갈피였다. 렌이 정체성의 혼돈으로 괴로워하자, 카에데가 그것을 행운의 상징이라 한다. 그러자 렌은 안정을 되찾았으며, 후에 이치로히코와의 결투에서도 그가 가진 고립감을 채워주기 위해 카에데가 준 책갈피를 이치로히코의 손목에 걸어준다.

 

자신의 마음에 의지할 수 없는 존재, 자신만의 신이란 존재가 없다면 어떤 상징적 도구에 자신의 마음을 부여하라는 것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참을 수 없는 고독을 느끼며, 가끔 자신이 고립되었다는 사실에 깊은 좌절과 슬픔을 느낀다. 누군가 알아주는 이 없이 혼자 계속 외롭게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외로움을 채울 수 없기에 자신의 내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대하게 된다. 그런데 그 우울한 굴레를 신의 방문과 행운의 상징으로 대체하여 결론부로 보여준 점은 다소 안타깝다고 여긴다. 오히려 다시 재회한 아버지와 혹은 카에데와의 교류,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가는 과정이 좋았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에데는 괴물의 세계를 모르는데 불구하고, 수장과 괴물의 주민들의 초대로 괴물의 마을에 찾아온다. 넓은 세계로 나가야 하는 렌에게, 그가 존재했던 세계를 본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축척된 공간적 기억을 보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를 향하여 한 발을 밟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 축척된 시간에 의존하는 것으로 비추어 볼 수 있다. 렌에게만 스스로 돌아보게 함으로 앞으로 나가야 할 새로운 대안으로 반증하는 편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렌은 모두 사건을 해결하고 아버지와 같이 살면서 검술을 두 번 다시 펼치지 않았으나, 앞으로 새롭게 살아갈 것이라면 더 새로운 모습이 좋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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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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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나는 업무적으로 해결할 일이 있어서 회사 우리 부서장을 모시고, 타 지방으로 외근을 나갔다. 외근을 나간 이유는 용역기술자들을 모아 회의를 하는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사는 지역이 지방이고, 다른 회사에서 온 분들은 수도권 쪽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 1분은 다른 장소에서 회의마치고 잠시 본 적이 있었다. 다른 기술이사와 더불어 내려올 때 내가 기차역까지 배웅해드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를 마친 후 마침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고속버스터미널 인근에서 식당을 찾다가 우연히 식육식당이 있어서 간단히 전골세트를 시키면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옆에 계신 우리 회사 부서장과 상대회사 기술이사와 대화를 나눈 것을 들으면서 조금 놀라운 부분을 발견했다.

 

2사람은 원래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다는 점이다. 상대회사는 아마 서울권 출신 공대생이고, 우리 부서장은 내가 사는 지역의 공립대학교 출신이다. 공부로서 엘리트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공부를 했었다. 그런 2사람은 같은 회사에 들어갔다. 단지 1사람은 서울 쪽에 다른 1사람은 지방에 있었다. 회사의 지점이 서울은 분점이고, 지방 쪽이 오히려 본사였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2사람이 예전에 기사, 대리 시절에 잘 나가던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정도 된 것 같다. 서울 쪽은 부도가 나서 월급을 제대로 못 받고, 지방 쪽은 그나마 남은 용역과 과업을 정리하여 월급을 거의 다 받고, 직원이 나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은 회사가 부도나도 어떻게 된지도 모르고, 자신의 월급에서 어느 정도 받은 것도 모른 채 그저 회사에서 나왔고, 다른 회사에 갔다. 서로 먼 곳에서 과거 저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안 노련한 기술자들이 다시 다른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번에 읽은 소설 장강명 씨의 <한국이 싫어서>란 책을 읽을 때가 딱 이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이라 하여 제법 읽는데 시간이 걸린 줄 알았지만, 막상 읽으니 1시간 정도에서 끝이 났다. 주인공 계나라는 여성이 한국을 떠나 호주에 가서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다.

 

소설이라고 해도 너무 리얼리티가 넘쳐난다. 사실 소설은 현실적인 요소와 밀접하게 연결되면서도 한편으로 환성적인 요소 혹은 비일상적 요소가 들어가기도 한다. 현실적인 요소에서 사건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점이 하나의 비일상적 요소일 줄 모른다. 다양한 경험을 1사람이 겪을 수 있지만, 그런 풍파를 마치 줄줄이 비엔나처럼 엮어갈 수 있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최근 뉴스에서 4년제 초봉을 받는 신입사원이 월290만원을 받는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런데 그런 확률은 매우 희박하며, 정규직의 길로 가기도 어렵다. 얼마 전 서울에 가서 한 직장남성을 잠시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 인턴을 뽑았는데, 처음에 많이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으로 이야기했지만 20명 넘는 직원에서 3명만 되고, 나머지는 탈락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20명도 수많은 경쟁을 뚫고 온 자고, 어느 기업은 인턴의 인턴을 뽑는다고 했다. 인턴에서 정규직 전환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 수준인데, 인턴의 인턴에서 정규직은 무슨 코미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씁쓸한 기분이었다. 나보고 물어보면 해마다 계약서를 쓰고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통례 일뿐이지 정규직에 가깝다. 물론 어느 순간 부서에 쓸데없이 인간이 넘치면 운이 없으면 나갈 수 있겠지만, 아직 그것도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고, 나와도 기사자격증이 있어서 적당히 넣으면 구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공대출신이란 공돌이는 자격증이 먹여살려준다. 문제는 크게 먹여주지 못하는 점과 그래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금전적인 혜택은 없다. 사업자가 되려고 해도 이미 엔지니어 바닥은 새롭게 나가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도시계획이 정비되고, 환경과 법적인 절차가 계속 요구되니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짜증이 나는 것은 분명히 있다. 나라에서 고시로 정한 대가기준이 있어도 우리는 그 기준의 반에 가져가지 못하고, 때로는 1할 수준에 일을 처리한다. 나라에서 국가기술경쟁력 도모와 성장, 기술자들의 능력을 운운거리나 현실에서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시한 엑셀로 짠 설계예산서를 보고 있자면 웃음만 난다.

 

그런 웃음이 나는 예산에서 일을 하는 현실은 웃기고, 그런 일을 1인당 프로젝트 소수가 아니라 몇 개씩 잡고 있는 것도 웃기다. 지방과 서울의 중소기업이나 메이저나 상황은 같다. 아니 메이저 쪽은 평일에 제시간 퇴근이란 단어는 없고, 주말에 나와 PC 앞에서 좀비처럼 눈이 퍼렇게 들어가는 것도 다반사다. 계나라는 주인공이 소설에서 호주에서 가서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차도를 건널 때의 모습이다. 물론 알고 있지만, 우리는 차 앞에 갑자기 사람이 놀라 짜빠지면 운전하는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욕하거나 화를 낸다. 그런데 호주에서는 어느 늙은 신사분이 쓰러진 계나에게 괜찮은지 묻는다.

 

잠시라도 멈추면 화가 나서 화산이 터지는 상황이다. 요새 많이 등장하는 신문기사로 난폭운전과 보복운전이 있다. 조금 나도 해 본 일이 있는 듯하다. 심각하지 않으나, 1차선으로 유턴을 하려고 천천히 진입하는데, 2차선에서 갑자기 차 한 대가 방향지시등도 켜지 않고 올 때, 그때 친구와 나는 그 차를 보고 욕을 하고, 경적을 울렸다. 문제는 그 상대편도 같이 시비에 말려들어 운전 내내 인상을 찡그리면서 간 것이다. 가끔 운전할 때 창문으로 내 얼굴을 본 사람들이 창문을 다시 올리고 가는 일이 많기에 별로 운전하다 그런 일은 없지만, 가끔은 있다.

 

그렇게까지 독하게 굴 것까지는 없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양해를 구하고 오면 되는 문제다. 그것조차 바라지 않고 바로 표출한다. 그만큼 한국사회에 여유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빡빡한 일상과 현실은 여과 없이 닥친다. 아침 출근길은 지옥철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닐 때 가끔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왜 내 팔은 위에 손잡이 잡지 않지만, 지하철의 진동에 내 몸은 쓰러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을까라는 점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기대어 만든 한자가 人이라 한다. 한자로 보면 하천을 의미하는 川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대신 짐을 선반에 올리지 못해 2팔이 괴로웠지만 말이다.

 

형이 서울에 살면서 지하철을 타고 교통정체 없이 가느니, 차라리 차가 막혀도 내 차로 간다라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과연 그 이유가 왜 그런지를 난 알게 되었다. 보이는 것은 답답한 벽이고,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바쁜 업무와 골치들이다. 이런 세계에서 과연 청춘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사랑이란 단어에 연애조차 간단하지 않은 것을 안다. 연애는 남자와 여자의 문제지만, 결혼은 가정과 가정의 연결이다. 가정에 부모님과 형제자매만 있는 게 아니다. 그 부모님의 형제자매와 주변 사람도 같이 엮여가는 순간 일은 점점 더 복잡해진다. 최근 핵가족 체계로 되어 그 정도지, 참견하기 좋아하는 한국 어른들의 문화에서 각종 꼰대들이 개입한다.

 

계나가 탈출하는 이유는 사랑도 직업도 꿈도 없고, 집에선 좁아터진 방에 3자매가 서로 엉켜 살아간다. 18평 집에서 재개발로 24평에 간다고 해도 1억원이 이상 소요된다고 한다. 소설의 시점에서 계나가 26살 정도에 호주에 갔고, 6년 정도 있다가 다시 한국에 온 점을 본다면, 유학을 간 시점은 대략 2010년 이전으로 볼 수 있다. 그때가 1억이니 지금은 대략 2억은 넘을 것이다. 주택재개발사업에서 예전 집과 새롭게 지어질 집의 가격은 같지 않다. 지대만이 아니라 건축물까지 가격을 정하면 계나의 집은 이사 가지 않은 편이 좋고, 재개발이 오지 않은 편이 좋다.

 

계나의 집에 쥐가 나오고, 어린 시절 아는 친구가 연탄가스에 일산화탄소에 의한 중독사를 당할 정도라면 어느 것이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계나는 꿈은 단순했다. 크고 좋은 집에 훌륭한 차를 몰고 다니는 게 아니라 그저 다리 2쪽을 펴고 잘 수 있는 집에서 소박하게 살고, 가끔 1달에 1번은 외식을 하고 공연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 쉽지 않은 것이다. 외식이나 공연을 할 여유나 시간이 없다. 그런다고 호주 역시 간단하지 않다. 오자말자 호텔비보다 비싼 숙소에서 불편한 잠을 자야했고, 엉뚱한 인간들로 사고에 말려 전 재산을 탕진하고, 심지어는 교도소에 수감되어야 하는 비극까지 겪었다.

 

어째보면 상황의 극적인 불운은 호주가 더 강한 것 같은데, 계나는 호주를 선택하고 영주권까지 받아낸다. 그리고 옆에 재인이란 1살 어린 남자도 나름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뭘 해도 안 되고, 뭔가 하려면 뒤가 받쳐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겉으로는 노력하면 되잖아 하면서 뒤에서는 해보았자 그게 그것이지 하는 이중성이 숨겨진 점에서 이 소설을 보는 내내 계나와 같은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생각하면서 의무와 선택에서 모두 중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선택하는 지점에서 의무적인 요소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 의무를 하기 위한 기본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중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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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사회의 문제와 모순점을 간단히 알려주는 해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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