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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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나는 업무적으로 해결할 일이 있어서 회사 우리 부서장을 모시고, 타 지방으로 외근을 나갔다. 외근을 나간 이유는 용역기술자들을 모아 회의를 하는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사는 지역이 지방이고, 다른 회사에서 온 분들은 수도권 쪽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 1분은 다른 장소에서 회의마치고 잠시 본 적이 있었다. 다른 기술이사와 더불어 내려올 때 내가 기차역까지 배웅해드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를 마친 후 마침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고속버스터미널 인근에서 식당을 찾다가 우연히 식육식당이 있어서 간단히 전골세트를 시키면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옆에 계신 우리 회사 부서장과 상대회사 기술이사와 대화를 나눈 것을 들으면서 조금 놀라운 부분을 발견했다.

 

2사람은 원래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다는 점이다. 상대회사는 아마 서울권 출신 공대생이고, 우리 부서장은 내가 사는 지역의 공립대학교 출신이다. 공부로서 엘리트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공부를 했었다. 그런 2사람은 같은 회사에 들어갔다. 단지 1사람은 서울 쪽에 다른 1사람은 지방에 있었다. 회사의 지점이 서울은 분점이고, 지방 쪽이 오히려 본사였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2사람이 예전에 기사, 대리 시절에 잘 나가던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정도 된 것 같다. 서울 쪽은 부도가 나서 월급을 제대로 못 받고, 지방 쪽은 그나마 남은 용역과 과업을 정리하여 월급을 거의 다 받고, 직원이 나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은 회사가 부도나도 어떻게 된지도 모르고, 자신의 월급에서 어느 정도 받은 것도 모른 채 그저 회사에서 나왔고, 다른 회사에 갔다. 서로 먼 곳에서 과거 저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안 노련한 기술자들이 다시 다른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번에 읽은 소설 장강명 씨의 <한국이 싫어서>란 책을 읽을 때가 딱 이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이라 하여 제법 읽는데 시간이 걸린 줄 알았지만, 막상 읽으니 1시간 정도에서 끝이 났다. 주인공 계나라는 여성이 한국을 떠나 호주에 가서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다.

 

소설이라고 해도 너무 리얼리티가 넘쳐난다. 사실 소설은 현실적인 요소와 밀접하게 연결되면서도 한편으로 환성적인 요소 혹은 비일상적 요소가 들어가기도 한다. 현실적인 요소에서 사건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점이 하나의 비일상적 요소일 줄 모른다. 다양한 경험을 1사람이 겪을 수 있지만, 그런 풍파를 마치 줄줄이 비엔나처럼 엮어갈 수 있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최근 뉴스에서 4년제 초봉을 받는 신입사원이 월290만원을 받는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런데 그런 확률은 매우 희박하며, 정규직의 길로 가기도 어렵다. 얼마 전 서울에 가서 한 직장남성을 잠시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 인턴을 뽑았는데, 처음에 많이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으로 이야기했지만 20명 넘는 직원에서 3명만 되고, 나머지는 탈락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20명도 수많은 경쟁을 뚫고 온 자고, 어느 기업은 인턴의 인턴을 뽑는다고 했다. 인턴에서 정규직 전환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 수준인데, 인턴의 인턴에서 정규직은 무슨 코미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씁쓸한 기분이었다. 나보고 물어보면 해마다 계약서를 쓰고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통례 일뿐이지 정규직에 가깝다. 물론 어느 순간 부서에 쓸데없이 인간이 넘치면 운이 없으면 나갈 수 있겠지만, 아직 그것도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고, 나와도 기사자격증이 있어서 적당히 넣으면 구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공대출신이란 공돌이는 자격증이 먹여살려준다. 문제는 크게 먹여주지 못하는 점과 그래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금전적인 혜택은 없다. 사업자가 되려고 해도 이미 엔지니어 바닥은 새롭게 나가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도시계획이 정비되고, 환경과 법적인 절차가 계속 요구되니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짜증이 나는 것은 분명히 있다. 나라에서 고시로 정한 대가기준이 있어도 우리는 그 기준의 반에 가져가지 못하고, 때로는 1할 수준에 일을 처리한다. 나라에서 국가기술경쟁력 도모와 성장, 기술자들의 능력을 운운거리나 현실에서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시한 엑셀로 짠 설계예산서를 보고 있자면 웃음만 난다.

 

그런 웃음이 나는 예산에서 일을 하는 현실은 웃기고, 그런 일을 1인당 프로젝트 소수가 아니라 몇 개씩 잡고 있는 것도 웃기다. 지방과 서울의 중소기업이나 메이저나 상황은 같다. 아니 메이저 쪽은 평일에 제시간 퇴근이란 단어는 없고, 주말에 나와 PC 앞에서 좀비처럼 눈이 퍼렇게 들어가는 것도 다반사다. 계나라는 주인공이 소설에서 호주에서 가서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차도를 건널 때의 모습이다. 물론 알고 있지만, 우리는 차 앞에 갑자기 사람이 놀라 짜빠지면 운전하는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욕하거나 화를 낸다. 그런데 호주에서는 어느 늙은 신사분이 쓰러진 계나에게 괜찮은지 묻는다.

 

잠시라도 멈추면 화가 나서 화산이 터지는 상황이다. 요새 많이 등장하는 신문기사로 난폭운전과 보복운전이 있다. 조금 나도 해 본 일이 있는 듯하다. 심각하지 않으나, 1차선으로 유턴을 하려고 천천히 진입하는데, 2차선에서 갑자기 차 한 대가 방향지시등도 켜지 않고 올 때, 그때 친구와 나는 그 차를 보고 욕을 하고, 경적을 울렸다. 문제는 그 상대편도 같이 시비에 말려들어 운전 내내 인상을 찡그리면서 간 것이다. 가끔 운전할 때 창문으로 내 얼굴을 본 사람들이 창문을 다시 올리고 가는 일이 많기에 별로 운전하다 그런 일은 없지만, 가끔은 있다.

 

그렇게까지 독하게 굴 것까지는 없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양해를 구하고 오면 되는 문제다. 그것조차 바라지 않고 바로 표출한다. 그만큼 한국사회에 여유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빡빡한 일상과 현실은 여과 없이 닥친다. 아침 출근길은 지옥철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닐 때 가끔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왜 내 팔은 위에 손잡이 잡지 않지만, 지하철의 진동에 내 몸은 쓰러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을까라는 점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기대어 만든 한자가 人이라 한다. 한자로 보면 하천을 의미하는 川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대신 짐을 선반에 올리지 못해 2팔이 괴로웠지만 말이다.

 

형이 서울에 살면서 지하철을 타고 교통정체 없이 가느니, 차라리 차가 막혀도 내 차로 간다라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과연 그 이유가 왜 그런지를 난 알게 되었다. 보이는 것은 답답한 벽이고,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바쁜 업무와 골치들이다. 이런 세계에서 과연 청춘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사랑이란 단어에 연애조차 간단하지 않은 것을 안다. 연애는 남자와 여자의 문제지만, 결혼은 가정과 가정의 연결이다. 가정에 부모님과 형제자매만 있는 게 아니다. 그 부모님의 형제자매와 주변 사람도 같이 엮여가는 순간 일은 점점 더 복잡해진다. 최근 핵가족 체계로 되어 그 정도지, 참견하기 좋아하는 한국 어른들의 문화에서 각종 꼰대들이 개입한다.

 

계나가 탈출하는 이유는 사랑도 직업도 꿈도 없고, 집에선 좁아터진 방에 3자매가 서로 엉켜 살아간다. 18평 집에서 재개발로 24평에 간다고 해도 1억원이 이상 소요된다고 한다. 소설의 시점에서 계나가 26살 정도에 호주에 갔고, 6년 정도 있다가 다시 한국에 온 점을 본다면, 유학을 간 시점은 대략 2010년 이전으로 볼 수 있다. 그때가 1억이니 지금은 대략 2억은 넘을 것이다. 주택재개발사업에서 예전 집과 새롭게 지어질 집의 가격은 같지 않다. 지대만이 아니라 건축물까지 가격을 정하면 계나의 집은 이사 가지 않은 편이 좋고, 재개발이 오지 않은 편이 좋다.

 

계나의 집에 쥐가 나오고, 어린 시절 아는 친구가 연탄가스에 일산화탄소에 의한 중독사를 당할 정도라면 어느 것이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계나는 꿈은 단순했다. 크고 좋은 집에 훌륭한 차를 몰고 다니는 게 아니라 그저 다리 2쪽을 펴고 잘 수 있는 집에서 소박하게 살고, 가끔 1달에 1번은 외식을 하고 공연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 쉽지 않은 것이다. 외식이나 공연을 할 여유나 시간이 없다. 그런다고 호주 역시 간단하지 않다. 오자말자 호텔비보다 비싼 숙소에서 불편한 잠을 자야했고, 엉뚱한 인간들로 사고에 말려 전 재산을 탕진하고, 심지어는 교도소에 수감되어야 하는 비극까지 겪었다.

 

어째보면 상황의 극적인 불운은 호주가 더 강한 것 같은데, 계나는 호주를 선택하고 영주권까지 받아낸다. 그리고 옆에 재인이란 1살 어린 남자도 나름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뭘 해도 안 되고, 뭔가 하려면 뒤가 받쳐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겉으로는 노력하면 되잖아 하면서 뒤에서는 해보았자 그게 그것이지 하는 이중성이 숨겨진 점에서 이 소설을 보는 내내 계나와 같은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생각하면서 의무와 선택에서 모두 중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선택하는 지점에서 의무적인 요소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 의무를 하기 위한 기본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중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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