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자본』 탄생의 역사 - 마르크스 40년 경제 이론 작업의 전모를 밝히다 동아대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총서 3
비탈리 비고츠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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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준교수님의 이번 도서는 번역도서이군요.

마르크스 원전이 모두 번역하는 그날이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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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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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내 글을 쓰는 형태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는 내 글에 대해 생각하면 문법이나 문장의 매끄러움이 부족한 것을 안다. 과거에 적은 내 글에 비교하면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많은 어려움에 부딪힌다. 특히 논문을 심사하면서 벽에 부딪히는 부분이 역시 문법과 어감의 난해성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나, 마음 한편에 숨은 불편한 초조함은 언제나 내 마음을 억눌리기에 충분하다. 이런 식의 화두를 던지 이유는 이번에 읽은 서적이 <밤이 선생이다>라는 황현산 교수의 산문집을 읽었기 때문이다.

 

불어불문학을 전공하여 문학서적과 번역도서를 출간한 이 분, 황현산이란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하는 생각에 그의 프로필을 보니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인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를 번역했던 분이다. 디드로의 책을 읽지 않으나, 그 책의 정보를 찾기 위해 인터넷에 검색하면서 번역자의 이름으로 황현산이란 이름을 본 것 같았다. 문체에 대해 생각하게 된 동기는 황현산 교수의 <밤이 선생이다>가 매우 논리적인 성찰은 논리로서 풀어낸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문체로 살려낸 것이다.

 

내 글을 본다면 그렇게 쓸 자신이 없다. 내 글을 보면 상당히 파고 들어가는 감이 없지 않게 강하다. 이른바 오타쿠라는 무단히 파고들어가는 인생살이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아니라면 다른 삶에 의한 요소인가?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타인과의 소통이 잘 되는 편은 아니다. 남의 말을 들을 때 정보의 인식은 정확히 알아들어도 거기에 대한 기호적인 대답은 다른 식으로 전달된다. 쉽게 말하면 엉뚱한 녀석이다. 인간에 대해 내가 생각하자면 누구나 변태적인 요소가 있고, 도착적인 요소가 있다고 여긴다. 변태라고 하여 성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성격과 말투, 몸짓, 관심, 취향, 정체성까지 파고들어간다고 여긴다.

 

인간은 원래 동물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라면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도처에 쇠사슬에 묶인 존재라고 해야 하나? 어째든 인간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인위적 존재가 되고, 자연적 본연의 모습과 현실의 인위적인 관계에서 만들어진 간극 아래 자신의 입장과 의지가 모호하게 비치된다. 즉 인간은 본연적인 삶을 살 수 없고, 삶의 틀에서 타자와의 관계성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자신의 본연적인 세계가 아니라 본연적이지 세계가 형성되어 자신의 말과 언어로 표출된다.

 

황현산 교수 역시 삶을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 단지 그 분은 아주 부드러운 섬세한 글로 보여준다면 나는 오히려 투박하고 퍽퍽한 느낌이 강할 것이다. 문체의 부드러움과 표현에 대한 환상적 요소, 삶에 대한 시선이 언제나 비딱하게 보는 나에게 무리인 것 같다. 언제 개인적으로 작문하여 내가 다시 확인해보면 뭔가 작품 내 등장인물이 다소 강박적인 반응하고, 다른 사람을 내 눈의 대신 관찰할 때도 역시 뭔가 경계하는 날카로움이 담겨있다. 즉 내 글은 절대 부드럽고 친절한 글은 아니다.

 

그런다고 나쁘지 않다고 여긴다. 그것도 그 나름대로의 매력과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본질은 하나로써 보는 것이 아니라 다방면적인 보고 느끼는 것이며, 과거에 있던 것들을 현재의 입장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현대인들은 그런 예술적 삶을 제대로 맛 볼 수 없다. 솔직히 그렇지 아니한가? 1970년대 6시 되면 오디오의 파놉티콘이 울려 퍼지고, 너나 할 것 없이 억지로 눈을 떠야 했다. 인간은 생물이고, 자기만의 바이오리듬을 가지고 있다. 낮에 물론 자신의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에 접해 있겠지만, 밤의 공간은 언제나 자신의 세계다.

 

낮에는 착취당하고, 밤에는 위로받는다. 사실 낮에는 타인의 눈에 자신을 맞추어야 하나 밤에는 자신의 눈에 맞추어야 한다. 고요한 밤이 왜 중요한가? 조용한 방에 시야를 빼앗기는 것도 없이 오로지 어둠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낮과 밤은 모두 같을지 모르나, 인간 개인에게 낮과 밤은 서로 다르다. 낮과 밤 속에서 단지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의 대조만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책에 언제나 낮의 밝은 것만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강박관념을 바라본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적인 조건에 의해 움직인다. 자신의 결정한다는 그 자체도 사회적인 조건과 현실의 상황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 점은 부정하고 마치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는 것은 참으로 기만적이다. 우리 삶은 언제나 기만적인 것을 추구해온 것이다. 작가는 빠르게 지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나, 과거에 의해 조성되어 미래로 움직이는 시간적 존재다. 시간적 단절에서 우리는 시간의 축척을 무심코 버린다.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 맞추어야 하는지 몰라, 자신의 장소는 만드는 것보다 어디든지 화려한 곳이 보이면 너도 나도 상관없이 달려든다. 유행의 시대에 걸맞은 화제의 장소는 언제나 인파로 가득하다.

 

자신을 생산하기보단 스스로를 소비하고 소모하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그런 세상에 태어나다보니 나 역시 황현산의 글에 많은 놀라움을 느낀다. 작은 섬에 태어나 소금의 맛까지 말하며 바다의 정취와 산의 모습, 그리고 그곳에 살아가는 인간은 도시의 소모품이 아니라 농가의 인간이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가득 찬 회색 빛 천국에서 하늘의 달조차 매연에 가려져 흐릿하다. 현대인들은 감수성은 메마르고 감정은 폭발한다. 드라마를 비롯하여 TV를 거의 안 보는 나에게 TV 드라마만큼 가장 재미있는 콘텐츠이면서도 가장 저질스러운 콘텐츠는 없다고 본다.

 

인간의 이성을 마비하고, 오로지 욕망과 기만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세상은 현실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파생실재의 공간이나, 우리의 공간은 드라마부터 소외된 실존하는 가상에 위치해야 하는 세상이다. 모두가 꺼리는 세계, 밤이라는 것은 어둠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둠은 빛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우리는 밤이라는 어둠을 너무 외면한 것이다. 산문집처럼 밤이 선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언제나 주변에 화려한 것만 보고 듣기를 강요했기에 우리 안의 세계를 찾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우리 주변의 인간들을 잊어가고, 그들의 이야기를 외면하려고 했다. 밤이면 낮보다 조금 더 조용하고 한산하다. 낮에 소음으로 가득한 거리를 나와 주변의 소리를 기울이고, 다음으로 그동안 잊고 있던 이야기에 기울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잘못된 것은 고치는 것은 맞으나, 지나친 것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더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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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 루이 알튀세르 자서전
루이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 / 이매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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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추후에 읽을 예정인 <알튀세르 효과>는 최근 출판된 도서이다. 아주 묵직한(870페이지 분량) 서적으로, 루이 알튀세르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제시한 연구내용에 대해 후세 학자들(프랑스 철학자들이 작성 한국 철학자가 번역 및 추가 작업)이 새롭게 해석하여 제시한 도서이다. 루이 알튀세르라는 학자를 내가 알게 된 동기는 이른바 사상관련 도서를 찾아보면서이다. 구조주의 4인방인 푸코, 레비스트로스, 라캉, 바르트 외에 추가적으로 구조주의에 들어 갈만한 인물이 바로 루이 알튀세르인 것이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루이 알튀세르와 저 위의 인물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거의 비슷하다. 푸코는 알튀세르의 지도받는 학생이었고, 라캉은 알튀세르 초빙으로 프랑스 최고의 교육기관 고등사범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 외에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 자크 데리다 등 프랑스 20세기 중반부터 후반까지 최고의 사상가들과 교류한 알튀세르는 프랑스 지성계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사실 20세기 2차 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친 후에 세계적으로 철학과 사상의 조류는 프랑스 구조주의, 그리고 후기구조주의로 넘어간 것 같다.

 

20세기 나치만 아니라면 독일의 관념철학과 분석철학 그리고 독일에서 영국으로 추방된 마르크스주의까지가 독일에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쟁이란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 전쟁이 바로 알튀세르의 인생을 모든 것을 빼앗고, 그를 알튀세르로 만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읽은 알튀세르의 저서는 <재생산에 대하여>와 <철학에 관하여>이다. 재생산이란 자본주의사회구조에서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이 그 사회적 토대를 유지하는 것과 그것으로 인한 군중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연구하고, 철학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를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철학적 사유를 보여준다.

 

1990년 알튀세르가 죽을 해가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된 시기다. 그는 처음부터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고, 가톨릭신자였으며,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를 중심으로 홉스, 로크, 몽키스키외, 루소, 헤겔 등의 철학을 연구한 사람이다. 그가 그렇게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을 가게 된 동기 역시 전쟁이다. 전쟁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내가 <철학에 관하여>란 책을 읽을 때 그는 우연성에 초점을 맞추어 관념적인 사고와 유물론적인 현상이 부딪혀 새로운 현상을 보여준다는 충돌이론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마르크스주의에서 그런 이론을 제시했는가? 철학은 사실 철학이란 도서로 존재하여 교과서처럼 사람에게 오는 게 아니라 철학이란 하나의 실천적인 행위가 있어야 비로소 철학이 된다. 실천하지 않은 철학은 철학적 가치를 가진 게 아니라 그저 관념 안에서 흩어지는 안개일 뿐이다. 행동을 위한 사유, 사유로서 보여주는 철학적 가치관, 어떻게 보면 참으로 어려운 말일 수 있고, 간단한 논리일 수 있다. 그가 왜 마키아벨리를 생각하는가? <군주론>이란 서적에서 군주는 국민에게 사랑을 받는 공포의 대상이 되더라도 증오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다고 했다.

 

국민과 혹은 국민이 존재하는 국가라는 하나의 사회에서 국가를 보는 관점이 현실적 조건 경제적 상황 등을 제대로 간파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토대와 상황적 조건에 의해 구성되어진다. 관념론적인 요소는 어떤 운동을 위한 하나의 지표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 자체는 운동이 될 수 없다. 운동을 하기 위해 관념론적인 요소가 반드시 옳다고 볼 수만은 없다. 현실적 조건과 상황, 그리고 그 현실을 타파해 가야하는 주체들의 요건들이 바로 새로운 현상들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래 말하지 않았나? “철학자 들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만 세계를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해석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석을 한 후에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알튀세르의 자서전인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스피노자적인 가치관이란 자신의 틀에만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 봐야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루이 알튀세르의 사상을 파고들어가는 것도 중요하나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좋은 연구라고 본다.

 

루이 알튀세르의 서적인 <철학에 관하여>는 1980년 알튀세르의 아내 엘렌느를 정산착란 상태에서 살해 후 후견인 보호 아래서 저술했던 도서이다. 세계 최고의 교육기관인 파리고등사범학교 출신이면서 교수가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벌였을까? 그런 자신이 자서전을 저술하면서 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고 하는 것일까? 상당히 모순적이고 아이러니한 일들이다. 보통 자서전은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성장기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적고, 거기에 있었던 특별한 일을 기억하고,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사건이나 인물을 정리해간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적이나 이상을 제시하나, 알튀세르는 그런 식의 책은 아니다. 보통 나도 그렇지만, 대다수 지성인들은 자서전을 좋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자서전에 들어가는 내용을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도 살며시 보여주나, 마지막은 자화자찬으로 종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알튀세르는 장 자크 루소의 <고백>과 다른 책이라고 밝힌다. 루소의 <고백>은 인류 학문에서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다 보여주고, 거기에 대한 자신과 반성과 성찰을 보여준 책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연구에서 <고백>의 영향은 엄청나다고 하다. 인간의 심리는 모순적이면서도 역설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루소의 <고백>과 같은 자서전이 아닌 다른 식의 자서전으로 발간한다.

 

루소는 자신의 죄와 과오를 보여주고 성찰한다고 하겠지만, 알튀세르는 그것을 넘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분석하고자 하는 학문적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다. 단순히 자서전으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로 본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부분일 것이다. 책을 읽으면 알겠지만, 자신이 어릴 시절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르기까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제3자의 관찰을 집어넣고, 자신을 어떻게 주변에서 대응이 이루어졌는지까지 나온다. 하지만 모든 시작점은 역시 전쟁이 문제인 것 같다.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운 점이나, 한국에서 정신병이나 우울증, 과대망상증 같은 심리적 혹은 정신적 증세를 가진 사람에 대해 매우 불편하게 바라본다. 한 마디로 무슨 정신과에 다니는 순간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볼 가능성이 높다. 최근에 많이 줄어든 편이나, 솔직히 대규모 전쟁을 거친 국가로 본다면 한국인에 가해진 트라우마는 매우 심각할 것이다. 프랑스에서 정신병원에 수감된 환자가 만일 다시 사회에 나가더라도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더 이상 일상적으로 제재를 가하는 일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도 1960년대 알튀세르가 정신병원에 입원할 때를 말이다. 유럽의 역사에서 전쟁이 중요하다고 한 점은 세계 1차 및 2차 대전은 수많은 유럽인들을 충격과 공포로 밀어 넣었다. 기존의 전쟁의 백병전 중심으로 총과 칼, 그리고 대포로 이루어진 공격이나, 20세기부터는 폭격과 화학전이 도입되던 시기다. 총과 칼은 눈에 보이는 적만을 놀리지만, 폭격과 화학전은 눈에 보이지 않은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준다. 전쟁의 판도에 따라 달라진 전쟁에서 알튀세르의 아버지 샤를르는 자신의 동생 루이와 같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샤를르는 전쟁 중 잠시 휴가를 받아 돌아오나, 자신의 하나밖에 없던 동생 루이는 비행작전 중 공중에서 산화하고 만다. 문제는 루이 알튀세르의 어머니는 알튀세르의 삼촌 루이와 결혼하려고 했다. 그러나 삼촌 루이는 죽고, 샤를르만 돌아와 어머니와 혼약하고, 다시 전쟁터로 나갔다. 어머니는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던 루이의 죽음에 충격 받고, 그 와중에 샤를르와 결혼, 결혼식 후 첫날밤이 사랑이 아닌 강간처럼 이루어진 점, 자신이 이때까지 모은 재산을 그가 탕진했다는 점에서 모든 것이 뒤틀어져 버렸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저자는 루이 알튀세르이고, 아버지 이름은 샤를르 알튀세르, 그리고 삼촌의 이름은 루이 알튀세르이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죽은 삼촌의 이름 루이를 받아들인 어머니의 환상이 되어야 했던 아이다. 어머니가 바라본 알튀세르는 아들이란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예전 연인이던 루이의 대체용으로 취급당해야 했다. 살아있는 2명과 죽은 1명의 계약 아래 알튀세르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머니의 과도한 집착은 결국 그의 우울증을 야기했다. 삼촌의 영향은 컸다. 파리고등사범학교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삼촌 루이는 학자 같은 인물이었고, 매우 감수성이 넘치던 청년이었다.

 

그런 요소를 조카에게 물려준 셈이다. 그러나 그것이 알튀세르에게 우울증이 되었고, 청년과 장년 그리고 노년까지 끝까지 놓지 않았던 평생의 굴레였다. 아내 엘렌느의 교살은 참으로 끔찍하기 보단 아련했다. 아내 역시 우울증에 시달렸다. 죽기 전 보름 넘게 집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누가 와도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있었다. 아내는 나치가 프랑스 점령할 때 레지스탕스로 활동했고, 그녀의 어린 시절 부모님은 병으로 둘 다 돌아갔다. 우울증에 걸린 부부, 게다가 자살할 충동을 느껴도 자살할 용기가 없던 엘렌느는 알튀세르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다고 한다.

 

어느 날 아내의 목과 어깨를 마사지를 하는 도중, 알튀세르는 아내의 목을 졸라 죽인다. 그런데 문제는 고의가 아니라, 안마 도중 정신을 차려보니 아내의 동공은 풀어지고, 맥박이 없었다. 미친 듯이 당직의사실에 가서 이 사실을 고한 그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병원에 수용될 때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그때 알튀세르는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도 몰랐다. 노년의 찾아온 불행, 그것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우울증과 정신착란 증세였다. 어머니에게서 시작한 과오, 어머니를 벗어난 수용소 생활과 혹은 외할아버지와 함께한 농촌생활이 행복했을 것이다.

 

자신의 삶에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알튀세르, 물론 그 후로 활동하지만, 알튀세르라는 이름은 어떤 사회적으로나 신분에 대한 꼬리표가 달려 다녀야했다. 그의 자서전은 그런 기존의 자신이 마치 도처에 존재하는 쇠사슬에 묶여있는 인간이 아니라 본인 그 자신이고자 하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고 거기서 자신을 분석하여 앞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22장을 보면 마지막 문단 쪽에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고 한다. 그는 1918년생, 1980년대에 저술했다면 60이 넘은 노년이란 점에서 그의 새로운 시작은 나이보다는 그가 자신이란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는 시점에 스스로 선언을 한 셈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가 상당히 겁이 많았다는 사실, 그리고 여성의 성적인 매력에 집착하면서도 한편으로 거기서 얽매이는 것을 싫다는 것도 나온다. 한 인간이 가족에서 시작된 편력이 이렇게도 지독한 것인가? 아내의 죽음에서 결국 아내를 죽이게 된 원인은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자살적 충동을 아내에게 이어진 것이다. 아내 역시 죽음을 생각했고, 그녀 역시 죽음으로 얼룩진 인생이다. 알튀세르의 삼촌 루이의 죽음, 그리고 엘렌느 역시 레지스탕스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조직의 오해로 추방된 사건 등등, 인간의 상처란 쉽게 아물지 못하는 것 같다.

 

알튀세르는 항상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죽음에 의해 만들어진 가족의 탄생, 가족이 움직이는 형태, 그리고 살아가면서 겪어야 했던 아픔들, 자신은 살아있는 인간이나 죽은 인간을 대신해야 했던 존재, 처음부터 살아있던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자신,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분석했기에 그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고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삶은 계속되어 그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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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2-14 23: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튀세르 이름을 기억해두어야 하겠어요 ^^

만화애니비평 2016-02-15 08:44   좋아요 1 | URL
아~! 그렇습니까~~

보빠 2016-02-24 0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애니비평이신데 후기는 인물비평이시네요 저도 알튀세르 좋아하지만 저렇게 못느꼈는데 대단하십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2-24 09:25   좋아요 2 | URL
알튀세르를 읽기 전에 장 자크 루소의 <고백>을 읽었던 게 도움이 되었나 봅니다. 알튀세르와 루소의 글에서 역시 알튀세르의 의도처럼 그렇더군요.
알튀세르의 정신착란과 우울증에서 생각해보면 저도 엉뚱한 점이 많은(아마 이게 정신분석에서 과대망상이라 하겠죠) 사람인지라, 그런 점에서 염두하여 글을 적었죠.
일단 오타쿠인 이상 망상은 기본을 가지고 있다보니..
이번에 이책을 보면서 번역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프랑스 철학을 자주 읽는 편인데, 번역이 친절하지 못한 것 같더군요...
 
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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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나보고 천재가 있냐고 혹은 상당히 재능이 있는 인간이 있는 게 당연한 것인지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할 것이다인간의 불평등에서 현재 사회구조는 사회적도덕적 혹은 더 넘어 경제적문화적교육적인 불평등이 심각하지만,그래도 인간의 선천적인 신체적자연적 불평등은 존재한다물론 천재들이 태어나 이제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세계 명문대학을 입학하는 것에서 우리하고 별천지 세상처럼 보인다하지만 나에게 천재는 반드시 그런 자만 있는 게 아니다그들은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재주를 지녔지만사람을 감동하게 만드는 재주는 없다.

 

인간이 어느 상황을 보고 판단하여 선택하는 기준은 이성과 지성이어야 한다그러나 실제 현실을 살아가면 인간이 선택하는 기준은 이지적인 요소가 아니다오히려 감정적이고 무의식적인 욕구와 욕망에 의해 살아간다자신이 아주 현명하다고 여기거나 혹은 자신의 이기적인 사고가 마치 아주 뛰어난 경제관념이라 생각하는 자들을 보면 누가 과연 멍청한지 혼돈되는 경우도 많다내가 왜 천재의 기준은 단순히 두뇌의 능력도 중요하나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천재 수학자와 과학자가 있어서 그가 우주선을 설계하거나 과학적으로 미지의 영역을 풀어내더라도 일반인에게 미지의 세계일뿐이다왜냐하면 그것이 인간들의 실제생활에 막연한 관계성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하지만 감정적으로 혹은 감동으로 오는 것들은 다르다영역의 깊이와 넓이에서 다소 부족해 보일지라도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서 오히려 사소한 것들로 채워지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에서 그런 감정적인 요소를 자극하거나 혹은 감동을 주는 작가 중에 나는 최규석 만화가를 추천해주고 싶다막상 최규석 작가를 어떤 강연회에서 보거나연회 내지 회식자리에서 본다면 무척 특이한 인물일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실제 최규석 작가를 우연히 옆자리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주변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봤다상당히 조용한 성격이면서도 뭔가 하나에 집착할 것 같은 성향이었다.

 

그가 느낀 세상이란 무엇일까최규석 작가를 보면 뭔가 일반인들과 달리 모호하게 존재하는 것 같이 보여도 그의 그림을 보면 매우 현실적이고 잔혹하다최규석 작가의 작품이 왜 감정을 자극하고 감동적인가억지로 꾸겨 넣은 이야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매우 우화적으로 혹은 아이러니한 모습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생각하지 못했던 우리가 알고 있던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의 상상력이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에 읽은 <지금은 없는 이야기>, 마치 동화책을 보듯이 책과 안의 그림들은 무척이나 아기자기하다최규석 작품들은 나름 리얼리티가 살아있기에 한국의 리얼리즘(사실주의만화작가로도 평가되기도 한다그의 리얼리즘 요소는 단순히 사실주의적인 그림체와 배경만이 아니라 동화적인 그림체로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는 교훈을 알려주기에 너무 교훈적이지 못한 이야기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란 곧 하나의 서사 Narrative라고 볼 수 있다내러티브가 성립되는 이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이데올로기즉 사회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은 규칙과 패턴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란 바로 그 규칙과 패턴에 살아있는 우리의 모습을 그려낸다우화적인 요소로 인간보단 동물들이 등장한다마지막에 보여주는 동화의 잔혹한 이야기 말로들은 그 가해자들이 어떤 특정 인물이 아닌 불특정 다수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의 눈은 언제나 뜨고 있고그 눈으로 현실을 볼 수 있다그러나 그 눈으로 현실의 문제나 모순에는 전혀 눈을 돌리지 않는다어찌 보면 전체주의적인 방식은 인간의 기만성에서 비록된 것이 아닌가 싶다기만성으로 얼룩진 인간들은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입장을 저울질할 때 전혀 공정한 태도로 임할 수 없다인간은 공정하지 못한 존재이므로 자신의 입장에만 고수할 뿐이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를 보면 참으로 씁쓸하고 마음이 시리다.

 

동물들의 형태로 보여준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참으로 기가 막힌다물론 인간의 형상을 한 등장인물이 나온다늘 천사가 와서 참아야 해요라고 하나막상 마지막에 그에게 온 임종의 순간은 허무함으로 가득한 분노이다천사의 외침은 나에게만 강조하고외부에서 닥치는 폭력과 강요를 왜 참아야만 하는 것일까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참아야 할지 아니면 참지 말아야 할지를 잘 찾지 못하는 것 같다물론 <지금은 없는 이야기>이니 앞으로 없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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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위한 약속 사회계약론 나의 고전 읽기 3
김성은 지음, 장 자크 루소 원작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대학교 교수나 혹은 사회적으로 많이 알려진 지식인 내지 엘리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주장하거나 말하는 내용의 공정성이다. 어떤 사안을 토대로 일방적인 요소만 보여주고, 전후맥락적인 상황을 누락하여 오류로서 혹은 일부로 왜곡시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짓이다. 특히 학자가 그런 전후맥락을 무시하거나 일부로 적시하지 않으면 정보가 이상하게 엮이는 상황이 이르게 된다. 한국에 그런 학자들이 제법 많은 것 같다. 미국 자유주의 철학 사상가로 가장 유명한 학자로 존 롤즈가 있다. 최근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화제가 되었던 마이클 샌덜은 하버드 대학교 철학과 교수다.

 

샌델의 정치철학 강의, 그런데 샌덜의 이론은 결국 존 롤즈로부터 나온 것이고, 롤즈는 인간의 이성을 기반으로 자유로운 인간을 추구한 칸트주의자였다. 독일 관념론 철학의 거두인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선험적 이성에 의해 사물을 판단하여 그 어떤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이성의 영역을 침범해서 안 된다고 했다. 결국 <순수이성비판>을 읽다보면 인간의 관념적 이성에 대해 칸트는 인간의 의식과 논리에 대한 이성의 영역을 연구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의 인간은 순수하게 이성적 영역을 논리로서 보는 게 아니라 어떤 입장과 이익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의 논리에서 논리가 논리로서 작용하기 위해서는 윤리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익은 개인적인 영역이나 혹은 집단적인 이익을 노릴 수 있기에 윤리적인 도덕성과 무관할 수 있다. 그러나 입장의 차이는 분명히 다르다. 만약 병이 들고 가난한 노인이 어린 손자를 데리고 거주하고 있다. 노인은 더 이상 병으로 인해 일을 하지 못하고, 아들과 며느리는 사고로 인해 세상을 뜨고 만다. 그러면 남은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추구하는 정의적 가치는 경제적, 정치적, 교육적, 문화적 등 사회 전반적으로 입장이 불리한 약자들이 최소한의 사회적 활동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이른바 최소수혜자들에 대한 지원이다.

 

자유주의의 진정한 시작은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자들도 자유를 누리게 해주는 배려라고 한 것이다. 칸트의 철학에서 시작된 롤즈의 철학은 위로 가면서 루소와 로크까지 이어진다. 문제는 <정의론>이란 서적을 롤즈가 제작하더라도, 국내에서는 누가 번역하는가가 중요하다. 이 책을 번역한 분은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서울대에서 철학과 교수를 맡았다. 국내 최고의 서울대에서 철학과라면 엄청난 인물이다. 그런데 사실 서울대가 대단한 것은 인정하겠지만, 롤즈의 도서를 번역한 교수의 행적과 <정의론> 및 다른 도서의 머리말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롤즈에게 배웠다는 사람이 사실은 롤즈가 제시한 가르침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것이다. 권력에 아부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외면하면서 자유주의철학을 강연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기만을 어떻게 여길 것인가? 비단 이런 문제만은 아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민주주의 중우정치를 비판하는 철학 교수가 그 중우정치의 해당하는 자는 누군가? 라는 점이다. 시민사회인가? 아니면 어느 정당에 지지하는 사람인가? 군사독재 시절에도 편안히 교수자리에 앉아있던 철학과 교수가 정치철학에서 어떤 사회적 명제를 두고 글을 쓰는 것을 보면 읽고 내가 부끄러워진다.

 

최근 그런 비슷한 인물을 인터넷에서 본 것 같다.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해 생각하면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 인류학적 영역에서는 정치사회의 역사적인 요소에서 민주주의 정체라면 프랑스대혁명 이후 자코뱅당의 공포정치가 어느 정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정체에서 프랑스대혁명만이 아니라 사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죽인 역사적 비극 역시 귀족적 민주주의를 실행한 아테네 역시 그렇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를 배신하여 아테네가 큰 위기에 빠진다.

 

과두정 이후 민주정이 쿠데타를 성공시켜서 독재를 막을 내린가 싶으나, 정치적으로 불안한 아테네는 그 잠재적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다. 소크라테스의 독배는 무력으로 아무 힘도 없는 늙은 노인을 정치적 이익에 의해 희생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를 제거하고 싶은 사람에게 매수된 많은 아테네 시민은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중우정치의 한계는 아마 권력과 재산에 의해 매수된 시민, 그리고 그것을 용납하는 사회가 아닌가 싶다. 플라톤의 도서를 번역한 그 교수님은 아주 높은 지성을 갖추고 있지만, 그런 윤리적 의식에서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하다.

 

대부분 철학책이 기원전부터 현대까지 이어져온 지식의 보고이나, 항상 현대인들에게 혹은 미래의 인간에게 읽혀진다. 생각하자면 지나간 시대의 책이 무슨 현대에 들어맞는지 모르나. 그대로 나타나고 있으며, 수많은 지성인들과 교육기관에서 고전을 추천하는 이유도 그러한 것이다. 이번에 내가 발견한 웃긴 사례는 바로 프랑스대혁명과의 전체주의 기원, 그리고 히틀러의 파시즘이 루소에게서 나왔다고 하는 점이다. 경제학이 아닌 경영학 교수였다. 다른 글까지 읽지 않았으나, 경제학자가 철학을 할 수 있어도 경영학은 철학을 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일단 히틀러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전혀 이행하지 않은 점이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국가에서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으로 개별의지와 전체의지를 제외한 순수한 의지다. 히틀러의 독재국가가 일반의지라고 말한다면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몽키스키외와 루소의 이론을 토대로 헌법을 만들었다. 대한민국 헌법조차 루소의 사상이 기반으로 했는데, 한국의 헌법이 전체주의적인 발상이란 말인가? 사실 히틀러가 추구한 사상은 초인사상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니체는 자신에게 달라는 자들을 싫어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인간의 길을 찾아갈 것을 외치나, 자신을 따라 오란 소리는 하지 않았다. 히틀러의 전체주의 나치즘이 과연 니체가 말한 사상인가? 히틀러는 니체의 책을 읽어도 니체를 오용했고, 루소의 사상에서 일반의지로 들먹인다면,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폭력으로 행해진 정치는 결코 정당할 수 없다고 한다. 폭력으로 얼룩진, 그리고 독일국민들의 정치적 감시를 소홀히 한 덕분에 나치가 정권을 잡았다. 루소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위를 하는지를 시민이 감시해야 한다고 했다. 하다못해 영국인들은 투표를 하기 전에 가장 자유로운 인간이라 하지 않았나?

 

이런 이유는 아마 경영학과 경제학이 다르면서 비슷한 점이 돈에 대해 다루기 때문이다. 경영학은 business management, 즉 경영하기 위해 관리하는 것이다. 경제학은 관리를 하는 학문이 아니다. 자본을 관리를 할 수 있는 것은 개별적인 경제에서는 기업이나, 사회적 국가적인 영역에서 국가정부다. 정부는 국민을 관리하는 초점이 상급자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정부는 국민에 의해 선출된 자이므로, 정부가 국민을 지배하는 관리대상이 아니라 국민이 역으로 정부를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루소의 그런 부정적 견해는 루소의 사상을 어느 누가 이어받았느냐 하는 것이다. 루소의 사상은 자연주의 교육학, 낭만주의 문학과 미술, 근대민주주의 정치사상, 음악과 연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루소의 후예, 즉 루소에게 영향을 받은 인물로 로베스피에르 같은 프랑스대혁명의 선구자, 체 게바라와 같이 활동했던 피델 카스트로, 남미해방의 아버지인 시몬 볼리바르, 문학의 톨스토이, 실러, 괴테 등이 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인물은 카를 마르크스일 것이다. 우연히 유네스코 사이트에 가보니 카를 마르크스가 유네스코에 지정한 인물로 선정되어 그의 저작들은 세계문화유산 중에 소중한 것으로 등록되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1990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허망하게 끝난 것으로 보였지만, 21세기 금융위기와 전 세계적인 경제적 문제는 마르크스가 예견한 게 그대로 드러났다. 문제의 경영학 교수가 루소를 경계한 이유는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경제학에선 애덤 스미스이겠지만, 그의 선동적인 팸플릿과 구호문은 루소의 서적과 매우 흡사하다. 엥겔스의 서적을 읽다보면 <인간불평등기원론>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 <자본> 1권에 보면 루소의 <정치경제론>에서 제기한 신랄한 풍자의 글을 그대로 인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부유하고 당신은 가난하니,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 서로 합의하자. 내가 당신에게 명령하는 수고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사소한 것을 내게 준다는 조건으로 나를 섬기는 영예를 허락하노라.”, 루소의 정치사상은 <인간불평등기원론>처럼 자연적 신체적 불평등보단 도덕적 사회적 불평등을 주장했다. 경제적인 빈곤도 있지만 계급사회가 존재한 왕정시대인 점을 고려한 점이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더 세세하게 나아가 경제적인 빈곤을 토대로 사회를 비판한다. 어찌 되었건 루소와 마르크스는 18세기와 19세기에서 가장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가장 위험한 사상가였다.

 

그러나 루소의 사상이 없으면 왕정은 계속 유지되었고, 루소 그 자체를 부정하면 민주주의나 자유주의 사상 그 자체를 부정하게 모순에 이르게 된다. 그런 모순조차 사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모르고 지나갈 일이다. 그렇지만 학자라면 제대로 전후맥락을 보고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경영학 교수가 만약 칸트와, 롤즈가 주장한 이성적 자유를 추구한 자유주의를 제대로 숙지하고, 괴테와 톨스토이의 문학성을 제대로 생각했다면 조금 다르게 전개되지 않았나 싶다.

 

이런 글이 된 이유는 <인간을 위한 약속>이란 책을 보면서다. 저자는 내가 방금 전 내가 비판했던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자다. 다행히 철학과가 아니라 그 교수와 만났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루소에 대해 깊이 연구한 것 같다. 엘리트인 점은 분명하겠지만, 엘리트 안에서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그 엘리트의 지성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같이 바꾸어갈지를 아는 분이었다. 루소는 백과사전학파나 볼테르가 무시한 농촌의 농부를 매우 존경하고 그들의 자연성과 도덕심을 존중했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그런 농촌도 없고, 농촌 역시 그때의 농촌은 아니다.

 

하지만 도시와 농촌 모두 인간이 살고 있고, 그 인간들은 자신의 인간적인 존엄성을 보장받을 권리는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사회계약론이다. 사회계약론은 정치철학의 이론서보단 하나의 제안서에 가깝다. 현대철학이나 정치학 도서와 비교하면 그렇게 분량도 많은 편도 아니고, 심각하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거기에 담고 있는 내용은 매우 강렬하다. 국가기반인 헌법의 토대가 되면서도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는 혁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본다면 공자의 <논어>조차 군왕이 군왕으로 될 수 있는 것은 군왕으로서의 자질이 있어야 하는 점이다. 군신간의 관계는 신하가 받드는 게 아니라 신하의 받듦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군왕은 군주의 자격이 없는 것과 같다. 밑에 신하가 없으면 정사를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역시 그렇다. 정부행정기관보다 중요한 것은 입법권자의 올바른 의지다. 입법은 심장이고, 행정은 두뇌다. 두뇌가 죽더라도 심장을 움직여서 살아있지만, 심장이 죽으면 모든 것이 죽는다. 이런 말을 하는 루소가 과연 히틀러의 인도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상력인진지 망상력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인간을 위한 약속>이란 서적은 루소의 사상을 매우 알기 쉽게 적은 책이다. 처음 루소를 입문하는 사람에게 루소가 제시한 사상을 어느 정도 쉽게 접근하고, 루소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보여준 책이다. 하지만 가장 마지막장에서 조금 내가 말한 부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 등장한 인물은 루소가 아니라 마르크스다. 대영제국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마르크스는 루소의 진정한 후계자란 점을 이 책에서 보여준다. 루소의 연표에서 루소의 사망 이후 1848년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루소는 좌우 사상가에게 찬사와 비판을 받는 사상가다. 자유주의 철학자 롤즈의 사상이나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이 여기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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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빠 2016-02-24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본 리뷰중에 제일 멋있습니다. 철학이나 인문계통 일하세요?

만화애니비평 2016-02-24 22:45   좋아요 0 | URL
아니오. 그냥 엔지니어 업체 다녀요. 오덕질 하다가 이래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