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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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내 글을 쓰는 형태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는 내 글에 대해 생각하면 문법이나 문장의 매끄러움이 부족한 것을 안다. 과거에 적은 내 글에 비교하면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많은 어려움에 부딪힌다. 특히 논문을 심사하면서 벽에 부딪히는 부분이 역시 문법과 어감의 난해성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나, 마음 한편에 숨은 불편한 초조함은 언제나 내 마음을 억눌리기에 충분하다. 이런 식의 화두를 던지 이유는 이번에 읽은 서적이 <밤이 선생이다>라는 황현산 교수의 산문집을 읽었기 때문이다.

 

불어불문학을 전공하여 문학서적과 번역도서를 출간한 이 분, 황현산이란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하는 생각에 그의 프로필을 보니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인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를 번역했던 분이다. 디드로의 책을 읽지 않으나, 그 책의 정보를 찾기 위해 인터넷에 검색하면서 번역자의 이름으로 황현산이란 이름을 본 것 같았다. 문체에 대해 생각하게 된 동기는 황현산 교수의 <밤이 선생이다>가 매우 논리적인 성찰은 논리로서 풀어낸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문체로 살려낸 것이다.

 

내 글을 본다면 그렇게 쓸 자신이 없다. 내 글을 보면 상당히 파고 들어가는 감이 없지 않게 강하다. 이른바 오타쿠라는 무단히 파고들어가는 인생살이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아니라면 다른 삶에 의한 요소인가?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타인과의 소통이 잘 되는 편은 아니다. 남의 말을 들을 때 정보의 인식은 정확히 알아들어도 거기에 대한 기호적인 대답은 다른 식으로 전달된다. 쉽게 말하면 엉뚱한 녀석이다. 인간에 대해 내가 생각하자면 누구나 변태적인 요소가 있고, 도착적인 요소가 있다고 여긴다. 변태라고 하여 성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성격과 말투, 몸짓, 관심, 취향, 정체성까지 파고들어간다고 여긴다.

 

인간은 원래 동물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라면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도처에 쇠사슬에 묶인 존재라고 해야 하나? 어째든 인간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인위적 존재가 되고, 자연적 본연의 모습과 현실의 인위적인 관계에서 만들어진 간극 아래 자신의 입장과 의지가 모호하게 비치된다. 즉 인간은 본연적인 삶을 살 수 없고, 삶의 틀에서 타자와의 관계성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자신의 본연적인 세계가 아니라 본연적이지 세계가 형성되어 자신의 말과 언어로 표출된다.

 

황현산 교수 역시 삶을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 단지 그 분은 아주 부드러운 섬세한 글로 보여준다면 나는 오히려 투박하고 퍽퍽한 느낌이 강할 것이다. 문체의 부드러움과 표현에 대한 환상적 요소, 삶에 대한 시선이 언제나 비딱하게 보는 나에게 무리인 것 같다. 언제 개인적으로 작문하여 내가 다시 확인해보면 뭔가 작품 내 등장인물이 다소 강박적인 반응하고, 다른 사람을 내 눈의 대신 관찰할 때도 역시 뭔가 경계하는 날카로움이 담겨있다. 즉 내 글은 절대 부드럽고 친절한 글은 아니다.

 

그런다고 나쁘지 않다고 여긴다. 그것도 그 나름대로의 매력과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본질은 하나로써 보는 것이 아니라 다방면적인 보고 느끼는 것이며, 과거에 있던 것들을 현재의 입장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현대인들은 그런 예술적 삶을 제대로 맛 볼 수 없다. 솔직히 그렇지 아니한가? 1970년대 6시 되면 오디오의 파놉티콘이 울려 퍼지고, 너나 할 것 없이 억지로 눈을 떠야 했다. 인간은 생물이고, 자기만의 바이오리듬을 가지고 있다. 낮에 물론 자신의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에 접해 있겠지만, 밤의 공간은 언제나 자신의 세계다.

 

낮에는 착취당하고, 밤에는 위로받는다. 사실 낮에는 타인의 눈에 자신을 맞추어야 하나 밤에는 자신의 눈에 맞추어야 한다. 고요한 밤이 왜 중요한가? 조용한 방에 시야를 빼앗기는 것도 없이 오로지 어둠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낮과 밤은 모두 같을지 모르나, 인간 개인에게 낮과 밤은 서로 다르다. 낮과 밤 속에서 단지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의 대조만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책에 언제나 낮의 밝은 것만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강박관념을 바라본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적인 조건에 의해 움직인다. 자신의 결정한다는 그 자체도 사회적인 조건과 현실의 상황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 점은 부정하고 마치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는 것은 참으로 기만적이다. 우리 삶은 언제나 기만적인 것을 추구해온 것이다. 작가는 빠르게 지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나, 과거에 의해 조성되어 미래로 움직이는 시간적 존재다. 시간적 단절에서 우리는 시간의 축척을 무심코 버린다.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 맞추어야 하는지 몰라, 자신의 장소는 만드는 것보다 어디든지 화려한 곳이 보이면 너도 나도 상관없이 달려든다. 유행의 시대에 걸맞은 화제의 장소는 언제나 인파로 가득하다.

 

자신을 생산하기보단 스스로를 소비하고 소모하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그런 세상에 태어나다보니 나 역시 황현산의 글에 많은 놀라움을 느낀다. 작은 섬에 태어나 소금의 맛까지 말하며 바다의 정취와 산의 모습, 그리고 그곳에 살아가는 인간은 도시의 소모품이 아니라 농가의 인간이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가득 찬 회색 빛 천국에서 하늘의 달조차 매연에 가려져 흐릿하다. 현대인들은 감수성은 메마르고 감정은 폭발한다. 드라마를 비롯하여 TV를 거의 안 보는 나에게 TV 드라마만큼 가장 재미있는 콘텐츠이면서도 가장 저질스러운 콘텐츠는 없다고 본다.

 

인간의 이성을 마비하고, 오로지 욕망과 기만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세상은 현실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파생실재의 공간이나, 우리의 공간은 드라마부터 소외된 실존하는 가상에 위치해야 하는 세상이다. 모두가 꺼리는 세계, 밤이라는 것은 어둠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둠은 빛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우리는 밤이라는 어둠을 너무 외면한 것이다. 산문집처럼 밤이 선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언제나 주변에 화려한 것만 보고 듣기를 강요했기에 우리 안의 세계를 찾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우리 주변의 인간들을 잊어가고, 그들의 이야기를 외면하려고 했다. 밤이면 낮보다 조금 더 조용하고 한산하다. 낮에 소음으로 가득한 거리를 나와 주변의 소리를 기울이고, 다음으로 그동안 잊고 있던 이야기에 기울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잘못된 것은 고치는 것은 맞으나, 지나친 것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더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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