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 - 무지와 오해로 얼룩진 사극 속 전통 무예
최형국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집안 문중에서 발간한 도서를 보면 반드시 등장하는 그림이 있다. 자신의 얼굴을 그린 자화상이 현재 국보 240호로 되어 있고, 그의 작품 중에 유명한 것으로 <유하백마도>가 있다. 백마를 그린 이 작품을 본다면 당시 한국의 말들, 즉 조선의 마필은 우리가 TV에서 보는 말하고 상당히 다르다. 우리가 보는 말은 다리가 매우 길고, 몸매가 매우 날씬하여 승마용으로 사용되는 말들이다. 그러나 조선의 말은 덩치가 크고, 다리가 그렇게 길지 않으나 다리 굵기가 매우 굵은 편이다. 제주도의 조랑말이나 혹은 조선의 여타 지역의 말은 보면 키가 그렇게 높지 않으나 덩치나 다리 굵기가 매우 튼튼해 보이는 점이 특징이다.

 

한국의 지리를 잘 생각해보자. 유럽의 지형은 일부지역은 제외하면 대부분 평야들판이다. 산이 많지 않고 오히려 큰 하천을 중심으로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하상계수, 하천의 경사가 급한 한국의 지형에서 서양의 말들, 특히 경마공원에서 보이는 말들이 제대로 달릴 수가 없다.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구릉지에 도로를 만들고, 산을 깎아내려 거대한 대규모 단지를 만든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개발이 덜 된 지역을 가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한국의 산세는 그렇게 평탄한 편이 아니란 점이다. 배산임수(背山臨水), 산을 뒤로 하고 강이 앞에 있는 지형은 전형적인 한국의 전통적인 삶의 형태이다.

 

산에서 나무도 하고, 열매를 채집하며, 사람이 죽으면 산에서 장례식절차를 밟는다. 강이 옆에 있으면 논에 물을 대고, 식수도 구한다. 산이 많은 지형에 경기용 승마들이 달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TV 사극이나 하다못해 역사를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에서도 서양식 마필과 안정까지 등장한다. 역사적 고증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학자들도 과연 얼마나 여기에 집중하고 하는지 모르나, 대부분 국민들이 접하는 역사는 중고교 과정의 국사 혹은 대학에서 배우는 교양 선택과목 수준이다.

 

그 외는 TV에서 보는 것인 역사이다. 주몽이 누구냐고 물으면 고구려의 창시자로 인식하기보단 오히려 탤런트 송일국 씨를 생각할 것이다. 태왕사신기에서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을 소재로 한다면, 광개토대왕을 사람들은 떠오르기보단 배용준 씨를 더 먼저 생각 낼 것이다. 물론 배우의 인기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분명한 것은 어쩔 수 없으나, 하다못해 역사적 고증절차는 신경 써야 하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나라는 안타깝게 일제 치하 시대와 한국전쟁으로 많은 문화유산을 소실했다.

 

조선시대나 그 이전에도 전쟁에 의해 문화재들이 모두 소실되는 경우가 많다. 아주 사소한 단서로 역사의 형태를 복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에서 작가는 이런 문제를 잘 지적했다. 그는 처음부터 E.H Carr<역사란 무엇인가> 한 대목을 제기한다. 역사라는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계속 대화하는 점이다. 과거의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하나의 사실보단 현재의 상황에 따라 새롭게 재구성되는 현재형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조선의 병사들은 삼지창처럼 생기 당파를 들고 싸웠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파는 베거나 찌르는 도구로 사용하기에 많은 문제가 있다. 당파는 창의 길이처럼 되어 있으나 창처럼 길게 찌르기에 부적합하고, 환도처럼 베는 것도 어렵다. 무기는 단순히 폼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이 거기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면 조선의 병사들은 당파만 들고 있다. 오히려 일반적인 창이나 환도를 들고 있는 것이 적합한 게 아닐까 싶다.

 

대부분 병사들은 당파만 사용하는데, 당파 말고 다른 무기가 없는 것인가? 전쟁에서 무기의 백미는 20세기부터는 공중전, 16~19세기 전후로는 근대는 총과 대포, 그 이전에는 칼이다. 물론 근대전쟁에서 근접전에서 칼은 중요하다. 한국 군대를 입영하는 장병에게 총검술은 아직도 필수과목이다. 총에 검을 부착하여 적에게 직접적인 물리공격을 취하는 것은 공중에서 미사일을 날려도 유효하다. 다소 구시대적 발상이 아닐 수 없겠지만, 칼을 사용하는 것이 최고의 전략전술 뿐만 아니라 전투에서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칼을 사용할 때 보병과 기병의 차이에서 기병은 보통 칼집을 한 손에 잡고, 말고삐를 잡고 이동한다. 다르게 생각하면 말의 고삐는 두 손을 잡는 편이 더 안전하고, 말을 훨씬 조정하기 쉽다. 이 책에서는 기병은 어리에 허리끈처럼 생긴 띠에 칼집을 연결시켜 칼을 언제 어디에서 꺼낼 수 있도록 고안했다. 허리춤에 칼을 차는 것은 일본 왜구군사들이 많이 쓰던 방법이다. 무기나 갑옷 체계도 일본, 중국하고 분별하지 않은 게 많았던 것이다.

 

이러다보니 시청자들에겐 보이는 조선시대 전쟁은 그렇게 만들어진 사극에 의해 아니면 그 영화로 만든 장면에 바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의복은 어느 정도 거의 일치하지만, 전투장면은 언제나 볼거리로 만들어진 셈이다. 전쟁에서 장수는 언제나 군주나 군주 바로 밑에 있는 고위신료들이 지휘하는 것은 옳다. 적어도 국가가 처음 생길 때는 군주가 장수로 등장하여 부하를 이끄나, 국가체계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히면 장수가 앞에 나가 싸우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지휘관은 전장에서 부하를 이끌고 명령하는 존재지, 선발대 병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투구도 착용하지 않고, 맨 머리로 싸우는 형태, 칼을 한 번 베면 바로 죽는 장면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과거 전쟁에서 가장 많이 죽는 이유는 칼에 신체()가 절단되거나 과다한 출혈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처에 파상풍균 등과 같은 세균에 의한 패혈증 증세로 사망하는 경우가 높다. 갑주를 만들 때 그리 쉽게 칼에 베이거나 화살이 관통당하지 않는다. 화살도 깃이 3개가 정석인데, 우리가 보는 TV2개로 나온다. 조선시대 무기체계가 상당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어느 순간 한국 전통문화는 낡은 것이고, 그런 소재조차 고증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멋대로 만들어낸다.

 

현대 산업은 문화라는 콘텐츠를 통해 새로운 이익을 창출한다. 문화산업을 하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와 정체성을 드러나게 해주는 중요한 수단이다. 일본하면 유명한 소재는 사무라이이고, 중국하면 쿵푸나 소림사 권법이다. 유럽에도 유럽 나름의 문화재 소재를 항상 문화산업 매체에 반영한다. 그런 중요한 일에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자면 다소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다른 나라의 작품을 참고하는 것도 좋지만, 국내 사극드라마 전투장면은 일본 사무라이 장르를 어느 정도 따라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드라마로 통해 조선시대 역사를 거의 배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도전과 이성계, 태종대왕과 세종대왕, 세조와 단종, 성종과 연산군, 정조와 영조 등등 그 시대의 인물은 우리가 직접 보지 않았기에 알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현대적 관점으로 복원하는 가이다. 지금 만일 이런 관점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우리의 먼 미래에 사는 한국인도 21세기 한국인에 대한 정의를 엉뚱하게 내릴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대해 아주 고리타분하고 지난 것은 보겠지만, 우리 역시 먼 미래에 아득한 과거에 불과하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는 책이 있듯이 우리의 미래는 결국 현대의 인간들이 조성한 토대에 의해 올라올 수밖에 없다. 과거의 모든 것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있었던 것을 모조리 부정하면 나라는 존재는 과연 어디에서 왔는지를 잃어버린다. 외국에 나가면 세계 문화유산을 접한 계기는 매우 많다. 하다못해 그 나라의 지역에서 조성된 유서 깊은 거리나 마을을 방문하면서 좋은 경험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막상 우리나라에 대해 생각하면 깊은 관심을 표하지 않는다. 그렇게 깊게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나, 최소한 우리가 무엇인지 생각을 하고 주변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

 

나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관점, 그 무게의 중심을 잡은 후 서서히 주변을 확장하여 퍼져가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 중에 불교가 조선에 오면 조선의 불교가 아니라 부처의 조선이 되고, 유교가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의 유교가 아니라 공자의 조선이 된다는 말을 본 것 같다. 세계화 시대가 이미 지난 시대에 근대화란 이름은 이렇게 우리 스스로를 파괴했는지 모른다. 전통을 지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나, 전통도 새로운 문화적 형태를 받아들여 그 자체로 전통이 된다. 가령 우리 제사상을 보면 사과와 시금치가 올라오나, 그것들은 원래 한국 토지에 없던 작물이었다. 그러나 집안제사를 가면 사과는 항상 올라가는 과일이다.

 

한국 전통문화 제사조차 그러하니, 앞으로 한국의 다양한 문화가 그대로 유지되기보단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고증이나 제대로 된 장면을 위해서라면 그런 섬세한 요소를 제대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전에 읽은 책으로 <문무를 갖춘 양반의 나라>를 보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동반인 문관보단 서반이 무관의 수가 더 많았다. 집에 있는 족보를 봐도 나의 할아버지들은 문관보단 오히려 무관들이 더 많았다. 그 중에는 을묘왜변(1555) 때 왜구를 무찌른 만호공(萬戶公)도 계셨고, 임진왜란 시기에 무관을 하시 분도 계셨으며, 그 무관의 친척들은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는데, 아버지와 아들, 조카까지 같이 순국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가 400년이나 더 되어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순신 장군을 성웅으로 모시고, 통영 충렬사에서 매년 충무공을 위한 제사가 열린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 동상이 조선의 갑옷이 아닌 중국식 갑옷이란 책 본문을 보면서 아직 갈 길이 참으로 멀다고 여겼다. 가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보면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 신선조와 유신자사의 이야기가 너무 낭만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과 메이지유신 이후의 조선침략 준비 시기는 그들에게 언제나 좋은 콘텐츠거리이다. 그에 반해 우리는 어떠한가?

 

독도문제가 외교문제만 아니라 역사문제까지 확장되는 점을 보면서 생각하지만, 지나친 민족주의는 문제가 되나, 근본을 모르는 상태는 더 심각하다고 여겼다. 조선이 처음부터 문약한 국가라고 생각하나, 처음부터 문약한 게 아니라 문약해지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도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과거가 문약하고 여기는 것은 역사에 대하여 너무 가볍게 혹은 너무 재미를 위한 관심거리로 봐서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든다. 가벼운 기분으로 접하는 부분은 인정한다. 대중이 쉽게 접하는 방법은 미디어밖에 없다. 그러나 그 미디어 자체가 틀려먹는다면 많이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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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7-04-10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화문 이순신 동상은 중국식 갑옷에 일본식 검을 차고 있다는데, 사극 속 우리나라 무예와 전쟁신 또한 잘못된 고증이 많았나 보네요. 몰랐던 사실을 알고 갑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04-10 15:54   좋아요 0 | URL
칼집이 허리춤에 있는 띠가 아닌 그냥 들고 있지 않은 게 한국식 무장체계이니 읽으면서 계속 놀라움만 뽑아내었습니다.
 

<건담, 철혈의 오펀스> 시리즈가 완결되었다. 1기와 2기로 구성되어 철화단이란 팀이 성립하여 몰락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동안 건담 시리즈는 퍼스트 건담, 제트, 더블 제트, 썬더볼트 등을 감상했다. 기존 건담 시리즈를 보면 주인공은 특별한 선택적 존재가 강했다. 어디에나 있을지 모르나, 어디에나 없을 것 같은 존재, 비운의 주인공이란 속성이 매우 강했고, 그 비운의 존재는 부모가 정치인, 건담이나 기체 과학자 등 건담을 타게 된 동기는 어느 우연의 일치일 수 있겠지만, 그 일치는 어떤 정해진 하나의 숙명과 같은 일들이었다.

 

건담 철혈의 오펀스를 방영하면서 중간에 제작된 썬더볼트나 유니콘을 보면 그런 느낌이 매우 강하다. 특히 유니콘 시리즈를 보면 폰 프록탈은 샤아 아즈나블의 재림 내지 그의 사상을 이어받고 있고, 건담 유니콘 조종사인 버나지 링크스는 베일에 쌓여진 가문의 사생아로 등장한다. 그와 같이 위기를 헤쳐 나가는 히로인은 지온 총수의 영애 미네바 라오 자비는 이미 공주 신분이었다. 건담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은 이렇게 거대한 세력의 얼굴이나, 그 얼굴 아래 숨어 있는 거대한 뿌리의 원천과 깊은 연계성이 있었다.

 

그러나 철혈의 오펀스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인간이 아닌 하나의 기계였다. 건담 조종사들은 우주의 진화에 이끌려 이른바 뉴 타입으로 각성했지만, 그들은 뉴 타입 같은 초월적 능력을 가진 자도 아니고, 거대한 권력과 은밀한 권력을 가진 자도 아니다. 말 그대로 우주의 쥐 혹은 떠돌이 개들의 집단이라 해도 의문이 없을 정도였다. 건담 시리즈에서 이렇게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존재는 없었다.

 

기존 건담 시리즈를 보면 로봇메카닉 장르에 일본의 문화를 교묘하게 섞어 만들었다.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한창완 교수의 <저패니메이션과 디즈니메이션의 영상전략>에서 형이하학적 일본 고유의 문화를 담론하게 되었고, 하드고어적인 요소를 메카 장르로 구성했다. 로봇이 큰 총을 들고 다니고,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으며, 게다가 전자 빔을 들고 다닐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막상 모빌 슈트의 전투 장면을 보면 군인들의 사격술 내지 검술로 볼 수 있다. 기계로 움직이는 로봇이나 사실은 인간을 대체하는 하나의 기호인 점이다.

 

건담에서 최종적으로 모빌 슈트의 전투는 칼과 도끼로 싸운다. 특히 도() 형태를 들고 싸우는 경우를 보면 사무라이 영화의 한 장면과 같다. 건담 철혈의 오펀스 마지막 장면에서 미카는 죽는다. 그의 죽음에서 상대편 파일럿은 자신의 모빌 슈트를 조종하여 건담 발바토스의 머리를 자른 후 칼끝에 그 머리를 걸어 놓는다. 이 장면은 전장에서 적장의 목을 벤 후 승리를 포효하는 형태이다. 칼로 일기토를 나누는 전쟁방식은 20세기 오면서 완전 사라졌다. 형이하학적 역사적 담론 부여는 바로 이런 부분이다. 한창완 교수가 지적한 일본이란 국가는 사무라이라는 존재에 대한 환상이 매우 깊게 있는 것을 착안한 점이다.

 


건담 철혈의 오펀스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서양인인지 동양인인지 구분할 수 없다. 미카나 올가 모두 영어와 일본식 이름이 섞여 있고, 사실 그들은 말하는 게 일본어로 등장해도 사실은 영어로 모든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올가가 터빈스 두목과 의형제를 맺거나, 테이와즈 두령과 아버지와 아들관계를 맺을 때, 그들의 모습은 서양보단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이름을 적을 때 붓을 이용하여 한자로 적어내는 모습에서 이번 건담 시리즈는 일본만의 문화를 깊이 드러내었다.

 

그래서 어느 누군가는 일본 야쿠자 문화를 철화단 및 기타 조직들에게 깊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하나, 야쿠자와 철화단은 그런 집단 자체가 하나의 가족이란 인식도 있지만, 다른 방식이 있다. 야쿠자는 이른바 자신들에게 가지고 있다는 대의(大義)를 내세우나, 철화단은 대의를 내세우지 않는다. 야쿠자의 대의는 의리 내지 혹은 그밖의 신념이라 말하지만, 타인과의 관계성에서 그들은 사회적 도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깊은 이권경쟁에서 하나의 명분을 붙이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철화단은 대의 내지 거대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1가지만 바란다. 우리는 기계나 소모품, 우주의 쥐가 아니라 생명을 갖고 있는 하나의 생명이란 점이다. 철화단은 자신들이 어디서 태어난 것도 모르고,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오로지 자신들이 처해진 가혹한 환경과 여건에서 계속 생존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인간이 처음과 마지막으로 타인 내지 집단과 접할 때 보여주는 행동이 폭력이다. 폭력이 처음 일어나는 이유는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가 등장하여 순간 적개심이 일어나는 행위이다. 낯선 존재와 조우는 곧 인간 본연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마지막 폭력은 대화와 어떤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이 통하지 않을 때이다. 철화단이 취한 폭력적 수단은 마지막이다. 그들이 전쟁을 선택하고, 죽음을 알면서 뛰어든 이유는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폭력이 왜 정당하면서도 정당하지 못하는가? 폭력을 취하는 것은 인간의 공포에서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타인에 대한 우월감과 열등감에서 시작될 수 있으며,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철혈의 오펀스에서 미카만 아니라 많은 파일럿이 척추에 센서를 부착한 수술을 받았다. 아라야식 시스템은 인간에게 생물학적 영역에서 기계적인 공간으로 확장시켰다. 전투 병기를 다룰 때 상상을 초월한 반응, 이성과 감성을 배제한 인간에게 유일하게 남은 생존본능이 폭력성을 키웠다. 문제는 그 폭력성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이다. 철화단은 기존에 상당히 부조리한 대우에서 일을 해야 했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일도 계속 맡아왔다. 갈라르호른이 처음 침투할 때 기지에 남아 그대로 생명을 빼앗길 위기도 있었다.

 

구원이란 단어는 그저 의미 없는 존재이고, 미래라는 단어는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는 인간이었다. 인간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 아마 죽음일 것이다. 하지만 휴먼 데브리를 비롯한 우주의 쥐들은 죽음조차 무서운 것이 못되었다. 죽음이란 세계는 늘 자신과 같이 살아가고 있었다. 우주의 쥐를 보면 대부분 나이가 10대 어린 아이들이나 청소년이었다. 청소년인 아이들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가혹한 환경에서 계속 살아온 인간이다. 어린 아이라면 누구나 보호받고 교육보장 및 문화적 삶을 보장 받아야 했다.

 

공부는커녕 하루조차 살기 어려웠다. 이 작품 히로인으로 등장한 코델리아는 타카키에게 공부를 하면서 세견을 넓히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진다고 했다. 타카키는 성인이 되자 정치인의 보좌관이 되었고, 그는 뒤에 그 정치인을 이을 후계자로 정해지도록 유능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누구나 그런 자리를 할 수 있지만, 할 수 없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결국 그것은 자신의 환경, 즉 후천적인 불평등이다. 이런 관점은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으로 볼 수 있다.

 

코델리아는 작중에서 혁명의 소녀로 나온다. 그녀는 마치 낭만주의 작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생각나게 만들 정도로 강한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코델리아는 여론의 주목은 받지만, 그녀에게 힘은 없었다. 정치적 발언도 없고, 미카처럼 건담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단지 그녀가 철화단과 세계의 인류에게 보여준 건 오로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과 그 희망은 미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미래와 희망이 없다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철화단은 자신들의 몸부림으로 많은 희생을 따랐다. 그러나 그들은 후회는 없었다. 마지막 철화단이란 이름은 없지만, 그 안에서 인간으로 살아보고 싶은 유일한 소망은 이루었다. 작중 철화단 적대세력 정점인 라스탈은 군인이면서 정치가이다. 그가 유일하게 바란 것은 대의의 유지이다. 위에서 대의를 입에 달고 다니는 존재는 대의가 사실 없는 존재에 가깝다. 대의라는 것은 제일 아래 고통 받는 자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기원론>1789년 프랑스대혁명 시기의 이데올로그가 된 책이고, 19세기와 20세기에 많은 혁명가들의 복음서가 되었다.

 

혁명은 피를 부르나, 그 책은 피를 부르기 위해 만든 책이 아니라 피를 멈추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더 이상의 피를 막기 위해선 또 다른 피를 흘러야 하는 최소악적인 조건이 따른다. 맥길리스 파리드는 그런 폭력의 원천을 알았다. 그도 역시 철화단 어느 소년들처럼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파리드가 친구를 배신하고 죽인 이유는 그가 살아온 환경과 그의 친구가 살아온 환경은 달랐기 때문이다. 파리드를 따른 많은 청년 장교들은 갈라르호른의 부패에 불만을 가졌다.

 

작중에 지구인과 화성인을 따졌고, 변방의 인간들은 앞으로 출세조차 할 수 없고, 어디에나 가도 무시를 당했다. 파리드의 야욕은 절대적 폭력을 이용한 혁명이다. 그는 전설적 존재를 찾았다. 그가 추구했던 힘은 신화적 존재 건담 바알이고, 라스탈은 그동안 갈라르호른이 계속 유지해온 역사라는 서사를 제시했다. 파리드의 신화 서사와 라스탈의 역사 서사가 충돌했지만, 신화적 서사가 패배했다. 현대사회에 오면서 역사가 신화를 이기게 된 것이다. 갈라르호른이 부패한 이유는 정치제 구조였다.

 

갈라르호른은 세븐즈 스타 가문에 운영되었다. 갈라르호른은 지구방위와 치안유지로 공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질서의 유지는 추상적 개념이나, 그것을 운영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행위이므로 결국 그 질서를 지키기 위한 법적인 운영은 어떤 인간들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린 셈이다. 그것이 개인의 이권에 결부되는 순간, 공권력은 질서가 아닌 이권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세브즈 스타를 보면 정치제 구조가 과두정이다. 소수 몇 명이 권력을 나누어 가지면서 서로를 견제하기도 하나, 그 견제에 의해 하나의 체계가 자리 잡히게 되는 점이다.

 


갈라르호른 내부항쟁과 철화단의 반격으로 갈라르호른은 많은 타격을 입었지만, 라스탈은 오히려 이것을 이용하여 과두정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민주정의 우두머리로 되었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소 민주주의적 요소를 보인 민주정인 셈이다. 대의를 외치기만 하고, 그 대의 너머의 문제점을 계속 방치하면 대의가 성립하지 않게 된다. 결국 마지막에 휴먼데브리를 만드는 것을 중지시킨다. 그 이전에 갈라르호른은 휴먼데브리의 존재를 알았고, 심지어 그들을 이용하는 조직과도 은밀히 손을 잡았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었지만, 대의라는 거대한 역사적 서사에서는 역사적 진보와 더불어 권력의 세계는 더 견고한 틀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화성의 식민지 정책에서 우회한 이유도 대의를 내세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 점이다. 코델리아는 처음에 세상물정 모른 아가씩였으나 마지막에는 정치적인 수완이 좋은 훌륭한 정치가가 되었다. 물론 라스탈은 철화단과 코델리아 관계도 알고, 그녀조차 죽이고 싶었지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은 오로지 대의라는 명분이다. 코델리아도 대의가 있지만, 그 대의를 이룰 힘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제거하려는 갈라르호른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원수와 손을 잡아야 하는 아이러니 속에 건담 철혈의 오펀스는 상당히 변증법적인 관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건담 시리즈는 서로간의 대의가 부딪혀 이해할 수 없어 사라져가는 존재들이 많았다면, 철혈의 건담은 오로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줄리에타는 가엘리오와 대화하면서 처음에 미카와 철화단이 인간이 아닌 괴물 내지 짐승으로 알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에겐 전장이란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생존의 순간을 두고 몸부림치는 인간 그 자체였다.

 


전쟁이란 대립관계가 놓인 세력이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 최후의 수단이 되는 행위이다. 철화단이 투쟁하게 된 동기는 정치사회적 문제에서 시작되지만, 그들은 정치사회적 관계를 염두하고 싸운 것이 아니다. 오로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싸웠다. 내 옆에 친구가, 내 뒤의 동생이, 앞으로 태어나 살아갈 후예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짐승과 같은 시간을 더 이상 이어지지 않기 위해 투쟁했다.

 

한국문학가 성석제의 <투명인간>이란 작품이 있다. 일제강점기 해방과 동시에 한국전쟁으로 피난인의 후손들이 한국사회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보여준다. 자신들에게 닥친 가난과 배고픔, 그 속에서 죽어간 많은 사람, 그들은 당장 오늘은 먹고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으나, 생계가 조금 나아지고, 형제자매들이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가게도 만들자 자신들만의 희망을 만들려했다. 어린 시절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통 받은 자들은 하루 밥 한 끼 배부르게 먹고, 따듯한 방에서 푹 쉬는 것이 소원이었다.

 

자신에게 내일은 없다. 오직 오늘만 존재하고, 미래의 걱정은 없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보면 1830년 프랑스 3월 혁명을 모티브로 하여 제작한다. 그림을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총과 무기를 들고 나온다. 여신의 뒤를 보면 어린 아이가 권총을 들고 나오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왜 어린 아이가 무기를 들고 죽음을 무릎 쓰고 나오는 것인가? 1870년 파리 코뮌이란 또 다른 혁명이 있었다. 기록을 보면 팔 하나를 포격으로 잃은 남자아이가 대포에 포환을 넣는 장면도 나오고, 어린 소녀가 총을 들고 나오는 장면도 나온다.

 

그들은 아주 똑똑하거나 대의라는 이데올로기는 모르나, 단지 이것만은 안다. 부조리한 세상에 더 이상 희망과 미래는 없고, 오로지 우리에게 남은 것은 마지막 남은 목숨이다. 하지만 그 목숨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도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건담 철화의 오펀스에서 철화단원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죽음이 닥쳐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온 과거에서 벗어나 인간으로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건담 철혈의 오펀스에서 부조리한 세상에서 가장 고통 받는 존재는 어린 아이와 여자로 등장한다.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 약하기 때문에 폭력이 노출된 야만의 세계에서 희생되는 존재이고, 어린 아이는 그 성인 여성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 약하기 때문에 가장 심한 희생양이 된다. 어린아이가 총을 들고 싸우고, 여자들이 위험한 일을 하는 세계란 제정신이 박힌 곳이 아니다. 아직까지 현대사회에서 테러조직은 아이들에게 자폭테러를 시키고, 여자들에 대한 인권탄압을 한다. 어린아이들은 죽음이란 관념을 모르기에 그대로 죽음을 당하고, 여자들은 폭력적 남성에 의한 성적 착취, 그리고 전투요원 재생산을 위해 출산도구로 만든다.

 

그런 여자에게 태어난 아이들은 불행한 삶을 피할 수 없고, 그들은 죽음을 당하거나 죽음을 이겨내 어른이 되면 똑같은 테러리스트로 성장하고, 똑같은 역사의 비극을 되풀이한다. 철화단은 바로 그런 아이들이 모인 세계이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건담이 가진 세계관은 정치적 이념이나 사상적인 영역이다. 지온과 연방의 패권다툼은 인간불평등에 의해서였지만, 지온 총수의 이념 아래 결국 지온공국이 생성되었다. 자비가문에 의해 결국 지온총수는 암살당했지만, 지온이란 국가는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국가들의 분쟁과 달리 철혈의 오펀스는 경제적 조건 물질적 조건에 의해서였다. 관념론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상당히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작품이 진행된다. 살기 위해서는 현실조건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고, 현실은 자신에게 유리하지 못하며, 알 수 없는 변수들이 계속 충돌하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했다. 유물론적 조건은 결국 코델리아라는 인물로 통해 정치적인 입장을 내세운다. 변증법에서 물질변환법이 있다. 어느 일정 양이 충족되면 질이 변경되는 점이다. 물을 100도까지 올리면 수증기로 변화하는 원리와 같은 것이다.

 

파리드와 철화단이 갈라르호른하고 전투를 벌이면서 기존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게 한 셈이다. 모순의 한계성을 드러내자 결국 라스탈은 현 시점을 폭력을 폭력으로 마무리한 게 아니라 폭력으로 마무리를 한 것을 오히려 평화적 노선으로 변경한 것이다. 역사는 2번 반복된다고 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 말이다. 라스탈은 역사를 반복하기 위해 그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 다소 많은 문제점들을 수용했다. 물론 가엘리오와 줄리에타 역시 자신과 대적하던 적들의 가치관과 삶을 받아들인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따라 적응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삶의 방식은 그가 자라온 환경 그 자체에서 시작된다. 경제적 조건, 문화적 혜택, 정치적 입장, 교육의 기회,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조건을 형성하게 해주는 기질이다. 처음부터 노예로 살아가야 할 인간은 없지만, 노예처럼 살아오던 인간은 많았다. 그런 인간들이 생기는 이유를 건담 철혈의 오펀스에서 부패한 갈라르호른과 경제권력을 가지고 있는 상회들이란 점을 보여주었다. 코델리아와 철화단을 도와주는 척하다 마지막에 위기에 빠뜨리는 인간도 있고, 자신의 이권을 위해 아버지와 조직의 간부조차 팔아먹는 인간도 나온다.

 

경제권의 세력가가 갈라르호른과 결탁하여 철화단을 공격하는 모습도 나오나, 애초부터 화성의 거주민들이 가난한 이유는 경제권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화성인의 경제력을 저하시킨 이유이다. 경제적 조건에 의해 정치적 체계가 이루어지는 형태는 유물론적인 형태이다. 물론 변증법적인 힘의 관계에서 철화단은 밀렸지만, 그들의 덕분에 휴먼데브리는 존재하지 않아도 되었다. 세상은 철화단을 잊었다고 한다. 철화단에 누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물론 파리코뮌도 마찬가지이다. 팔 하나를 잃은 소년이나, 총을 들고 있는 소녀의 이름은 그 누구도 모른다. 단지 그런 사람들이 그 역사에 있었기에 역사는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미카는 자신이 죽을 것을 각오하고, 코델리아에게 아트라와 아트라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부탁했다. 미카는 죽었지만, 미카와 아트라의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 또 다른 미래를 만들고 희망을 만든다. 참으로 어려운 선택이다. 생물학적으로 삶을 위해 노예처럼 죽을지, 아니면 자신의 자유의지를 위해, 내가 아닌 나를 대신하여 이어갈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생물학적으로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철혈의 오펀스는 후자를 선택한다. 나는 스스로 인간으로 살아가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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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인간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말이란 언어라고 칭하며, 언어(言語)를 살펴보면 둘 다 한자어 중에 를 분리해보면 숫자 사(, 다른 한자로 )와 입 구()자를 사용한다. 네 명의 입이 모이면 말씀 언자가 생기는 원리에서 말하는 것은 인간이 모이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의 행위이다. 왜 예전에 저녁 석()에 입 구()자가 붙으면 이름 명()이 되는 것인가? 이름을 부르는 것은 밤에 입을 사용하는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은 어두운 밤에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이름은 언어라는 하나의 주술력이 강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왜 주술적인가? 생각해보면 누가 길을 걷다가 다소 불량한 행동을 한다. 그런데 뒤에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행인이 나타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불량한 행동을 하던 사람은 어느 순간 동작을 멈추고 자신의 신변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인간이 가진 말이란 행위는 엄청난 힘을 가지는 것이다. 말과 글에서 모두 같은 뜻을 전달할 수 있다. 배고프면 밥을 먹는다면, 우리 부모님이 누구야 어서 저녁 먹어라라고 말하는 것과 문자로 저녁 먹자라고 말한다면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

 

말로 전달하는 게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시각은 인간의 눈으로 보고 뇌에서 판단하고, 귀는 들으면서 감정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인간에게 말 하다는 것은 그 사람이 본질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글은 쓰면서 상대방에게 보여주므로 생각할 틈을 주는 반면, 말은 말하는 순간 화자나 청자 모두 그 상황에 몰입한다. 글은 흔적을 남기지만, 말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신 귀에 들리는 언어의 울림은 매우 강렬하다. 말하는 그 순간은 판단의 이성능력보단 감성의 공감능력이 중시된다.

 

방송이나 주변 토론회를 보면 패널이 참여하여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어느 누군가는 매우 침착하고 논리정연하고, 다른 누군가는 논리도 없이 억지를 부리며 심지어 욕설과 큰 소리로 떠드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말하다 그 자체는 결국 인간의 본질적인 요소가 바로 튀어나오는 패턴으로 볼 수 있다. 김영하 작가의 <말하다>는 작가 김영하가 인터뷰를 하면서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책이다. 말은 귀로 들어야 하나, 요새는 녹음 장비가 잘 되어 있으므로, 녹음된 인터뷰 내용이 책으로 실려 기록으로 전해진다.

 

김영하 작가가 말해주는 그의 이야기,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이야기를 하기 전에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기 위해 생각하는 것이라 한다. 결국 말하는 방법이나 이야기 속 내용은 그 인간의 본질이 튀어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야기하면서 생각하고, 그 생각이 이야기로 이어지고, 그 이야기로 통해 다시 생각이 이어지는 반복이 이루어지면서 대화가 오고 간다. 그러니 그 인간의 본질이 대화로 통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어쩔 수 없다.

 

김영하의 이야기는 언어로 통해 인터뷰하는 사람의 귀로 전달된다. 아마 우리가 책을 보는 감정과 청자의 귀로 듣는 목소리는 상당히 다를 것이다. 김영하 작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꾼적인 기질을 보여주었다. 그의 사고방식은 매우 독특했다. 김영하 작가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그의 소설책이 제법 많이 나온 것도 알고 있다. 게다가 그의 소설 하나가 영화로 제작되어 조만간 나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김영하의 책을 한 번도 읽지 않았고, 단지 그의 대화록인 <말하다>만 읽었을 뿐이다.

 

그의 사고회로는 매우 독특했고, 사고의 확장에는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으면서 뭔가 모르게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김영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저술한 밀란 쿤테라를 좋아했다, 밀란 쿤테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인간이 존재라 가벼운 깃털 같은 존재이기도 하나, 그 가벼움 속에 아주 무거운 삶이 눌러져 있다. 외과의사 토마스는 생명을 살리는 의사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 테레사 외에도 다른 여자와 성행위를 즐기는 바람둥이다. 인간을 가볍게 여기는 것인지 무겁게 다루는 것인지? 아니라면 소비에트 연방의 탱크가 체코 프라하를 밟아 넘어오던 시절, 자신이 적은 글이 신문에 기고되면서 의사에 해고되어도 그는 단호한 모습을 보여준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영역은 도대체 어디에서 보여주는 것이란 말인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토마스와 정반대의 삶을 살았고, 자신의 삶에 주어진 그 자체에 무거운 집착을 보여준다. 밀란 쿤테라의 소설이라면 인간의 삶을 토마스를 통해 본다면 가볍다면 오히려 마지막 토마스의 죽음을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김영하가 밀란 쿤테라를 좋아하고, 그의 글에서 많은 영감이 왔다면 그는 밀란 쿤테라와 다른 길을 가는 것 같다. 밀란 쿤테라는 니체의 말을 많이 사용하면서도 한편으로 공산당에서 활동한 만큼 사회적인 관심이 높다.

 

김영하는 철저한 개인주의자이고, 비관적 현실주의자로 선언한다. 현실에서 한국은 개인주의자로 살아가기 힘들고, 단지 집단적 이기주의 하나의 개인주의로 되어버렸다. 개인의 이기심에서 타인에게 관심도 없다가 뭔가 화제나 이익거리가 생기면 순식간에 모이는 속성, 현실에 너무 좌절하거나 혹은 지나친 기대를 하는 것, 독자가 김영하에게 묻는다. 이 사회에 희망이 있는가? 희망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수 없다. 단지 그 환경에 냉정하게 생각하고 대처하라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그렇게 죽음의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생각에 반대하는 것은 그것은 단지 생물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지, 생물학을 넘어 사회학적으로 살아가는 것에서 비관적 현실주의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 어느 개인에게 주어진 삶을 바꿀 수 없다. 방관적 태도로 삶을 보는 작가라 하여 그 자체가 틀리거나 부정할 수 없다. 자신은 자신만의 개인주의 성향을 가지고 사는 건 자유다. 그러나 그 자신의 입지로 인해 타인의 삶에 큰 영향을 주면서 개인주의 성향이라 말하는 것에서 아주 모순되어 있다. 인간은 모순과 부조리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김영하의 <말하다>를 보면서 재미는 분명 있었다. 단지 마지막 페이지를 접은 후 남은 것들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개인주의 성향은 책에서 읽혀진다. 나의 이야기는 이렇고, 그 이야기를 재밌게 전달하지만, 그런다고 이 이야기는 당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책 본문에서 소설과 현실적 관계에서 그는 연결성을 배제하려 한다. 역사와 소설은 분리한다. 역사라는 사실과 소설이 문예적 세계관을 분리되면, 형식주의적 형태의 글이 탄생된다. 그의 소설을 읽지 않아도 그의 소설을 읽은 주변 사람과 이야기해보면 확실히 느낌이 온다.

 

영화로 제작되면 아주 재미있겠지만, 막상 영화관을 나오면 무엇이 지나갔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겉의 세계는 화려한 꽃다발이라면 꽃 안에 숨겨진 달콤한 꿀은 없는 느낌이다. 글을 쓰는 것이 인간에게 유일하게 남은 최후의 자유라고 한다.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을 하더라도 글을 적어 힘들게 손가락을 아프게 하고, 책상에서 불편하게 앉아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책에서 그런 의미심장한 전달과 더불어 책 안의 내용이 서로 유리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말하는 것은 순간적이나, 글은 지속적인 것이다. 예전에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다산 선생이 강진에 유배 오면서 남양주에 식구들의 안위가 무척 걱정되었을 것이다. 외로운 귀양살이 중 다산 선생은 집에서 비보를 접한다. 자신의 막내아들이 병으로 죽은 것이다. 아직 4~5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다산의 아들이 죽었지만, 다산은 아들에 대한 죽음을 애도하며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이 없었다면 그 아들은 살아있었다는 사실조차 후대에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 죽고 세상에서 사라져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사리일 수 있다. 하지만 태어난 순간, 내가 살아가는 이 시간만큼 나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은 몸부림을 친다. 정체성이란 결국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주변에게 알리는 하나의 방법이다. 김영하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이 인간에게 남은 최후의 자유이고, 그 글을 쓰게 만드는 생각의 확장은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인간의 재산이다. 인간이 글을 쓰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나라는 존재를 다시 돌아보고 그 자신이 어떤 세상에 살아가며,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돌아볼 수 없다.

 

그러면 김영하 작가의 개인적 성향과 자아성찰 세계가 모순을 일으킨다.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되고 또 하나의 부정이 되어 간다. 변증법이란 반드시 어느 한쪽만 옳다고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인간은 내가 누군가 영향을 받고 있다면 또 다른 누군가도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을 하는 것은 그 영향을 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말하다>를 읽으면서 사고와 표현의 확장을 동반하면 거기에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변증법적 관계 역시 동반한다. 말을 하는 화자는 언제나 옳은 말만 논리적인 주장만 하지 않는다.

 

내 서평을 읽으면 누군가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말과 언어는 무슨 관계이고, 김영하 작가가 말하는 내용과 소설은 좋다는 것이야? 나쁘다는 것이야? 작가가 마음에 드는 것이야 들지 않은 것이야? 솔직히 말하여 김영하의 <말하다>는 재미있는 책이지만, 좋은 책은 아니다. 김영하의 이야기들은 재미있고 새로운 생각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말이나, 한편으로 현실적 상황과 조우하면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이다.

 

딱 무엇이 맞거나 틀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말하는 것이란 모두에게 맞는 이야기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가장 중요하고 조심할 부분은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점이다. 어느 관점을 두고 바라보는 것은 중요하고 당연하다. 무게의 중심이 있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 무게에 자신의 의식과 판단조차 같이 침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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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5 1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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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7 09: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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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7 09: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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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8 09: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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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체험 : 나는 103호 환자 천재들의 생각법
사회적기업 인문학카페 지음, 샤크언니 그림, 임시혁 글 / 인문학카페 / 2017년 1월
평점 :
품절


<나는 103호 환자>라는 서적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철학이란 개념이 얼마나 익숙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철학이란 단어를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것이라 여기고 멀리 하려 한다. 물론 철학을 진짜 한다는 것은 어렵다. 이 책에서 처음에 니체로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칸트로 끝이 난다. 중간에 플라톤과 프로이트, 마르크스도 등장하지만, 그런 이름들을 듣는 순간 많은 이들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 이름이 가진 하나의 의미로도 벅차지만, 그들이 저술한 책을 보는 그 자체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이 책을 상당히 쉬운 방식으로 개념을 전파했다. 인간이란 지식과 경험 그리고 몸의 지식이 있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으로 충분히 상기시킬 수 있는 내용이었다. 단지 왜 나는 103호의 환자이었을까? 103호에는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있다. 단지 환자라는 대상이 바로 어린이병동에 입원한 사람이란 점이다. 어린이란 존재란 곧 배움을 받아야 할 대상이고, 배움으로 통해 사회적인 가치와 삶의 방식을 익혀간다.

 

주인공은 아무런 기억도 없고,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니라면 나이와 국적조차 모른다. 이름을 본다면 백인이 맞겠지만, 그래도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서 어디서 자란지도 모른다. 곧 자신의 이성은 존재해도 이성이란 하나의 관념을 좌우할 수 있는 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선험적 판단이 가능하다. 인간은 자신의 사회적, 지리적, 환경적 속성에 따라 경험을 가지고 그것은 자신의 판단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로크가 말한 백지설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인간은 자신의 요건이 선천적인 요인보다 후천적인 요인이 클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지 않았으나,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모든 불평등과 사회적 갈등은 인간의 후천적인 영향에 의해 기인된다고 말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어본다면 알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선험적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 할 것이나, 경험과 주변여건에 따라 다르게 되고, 곧 그것은 윤리와 논리를 지배하는 하나의 방해로 된다. 그러나 철학이란 모든 게 하나의 답만 옳은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다양한 관점과 시선 그리고 그 너머의 해답을 알려줄 뿐이다.

 

답을 제공하는 점에서 이 책에서 주인공 중에 하나인 바덴 박사와 같이 굳이 정신의학과 전공자나 혹은 철학도, 인문학자가 아니어도 철학을 말할 수 있다. 철학(哲學)이란 사리를 밝히는 학문이고, 서양철학의 시작점인 플라톤은 철학이란 필로소피아(philosophia)란 단어를 스승 소크라테스로 통해 밝힌다. 철학은 신을 사랑하는 학문이고, 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학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지혜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지혜와 지식은 조금 다르다.

 

이 책에서 지식을 몸과 경험 등으로 쌓을 수 있겠지만, 지혜는 지식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지식에 철학적 사고를 집어넣어야 지혜가 탄생한다. 옛날 우리 어른들도 보면 그렇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 못해도 많은 일들을 슬기롭게 처리한다. 철학이란 우리 인간사를 슬기롭게 처리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철학이 어렵고 복잡해진 이유는 과거와 달리 현대로 넘어오게 되면서 세상이 많이 변화하고, 좁은 세계가 넓은 세계로 확장되고, 인간이 보던 우주조차 더 넓어지게 되었다. 종교와 과학, 윤리와 논리가 계속 변화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철학을 알아가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복잡한 사회와 세상 더 나아가서 우리 안에 있거나 혹은 없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탐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철학은 돈은 되지 않으나, 철학이 없다면 인간에게 인간이란 이름을 부여할 수 없다. 왜 철학을 배우는가? 라는 말보단 왜 우리는 철학을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인간이고, 언젠가 죽을 수 있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시간이 소중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를 먼저 생각하고, 그 나라는 존재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스스로 지키기 위한 길인 것이다.

 

그런데 철학을 할 때 왜 유명한 철학자로 통해 보는가? 인간사고방식은 누구든지 자신이 가진 생각이 타인에게 확인할 수 있지만, 자신이 사고할 수 없던 지식과 지혜를 타인으로 통해 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이나 존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런 사고를 할 수 있는 예비지식 내지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물론 그 지식과 지혜의 습득은 쉽지가 않다. 1권에서 어린이의 새 생명에 대한 찬양에서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지 않으면 길을 열 수 없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쉽지 않은 책이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선악의 저편> 등을 읽으면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의아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이 쉬우면서도 쉽지 않은 게 바로 이때까지 내가 접하지 못한 영역을 접촉하고, 그 경험으로 통해 새로운 것을 마주하고 배워간다는 것이다. 철학함이란 결국 계속 배우는 인간이고, 배움으로 통해 늘 새로운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철학을 그런 식으로 진행하면 모두가 지칠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된 과학적 사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제시한 마르크스의 경우, <자본> 전 권을 읽기 위해선 몇 개월을 고생해야 한다. 헤겔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책에 접근한다면 어느 일반인들이 철학에 흥미를 가지게 될 것인가? 철학은 처음에 쉽게 간단히 접근하는 편이 좋다. 만일 조금 더 깊은 성찰과 현실에 대한 존재성을 탐구하고 싶다면 더 높은 책을 읽는 게 좋다.

 

배를 타면 나침반이 필요하듯이, 학문 역시 나침반이 필요하다. 더구나 철학을 알아갈 때 기존 자신이 가진 가치관으로 접근할 수 없다. <나는 103호 환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때까지 가진 고정관념에서 조금이라도 더 벗어나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103호 환자보단 바덴 의사처럼 되고 싶어 한다. 물론 자신은 바덴 의사와 같이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103호 환자만이 철학적 연구대상으로 지정하지 않는다.

 

103호실 환자를 치료하는 바덴 박사조차 하나의 대상으로 놓는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과 같이 정언명령, 인간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하나의 목적으로 대해야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수 없는 것처럼, 바덴 박사는 병원비나 기타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나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위해 103호 환자에게 호의를 보낸다. 생각해보면 바덴 박사가 하는 행동은 자신의 이기심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자면 여러 임상조건을 연구하여 다양한 증세를 파악하여 세미나에 발표한다면 자신의 입지 이상으로 의학발전에 큰 발전을 줄 수 있다.

 

이 책에는 없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처럼, 경제라는 것은 어떤 재원과 서비스를 필요할 사람이나 그것을 제공하는 사람 모두 좋은 이익을 줄 수 있는 게 나라가 부유해지는 것이라 말한다. 아마 마지막 파트에서 애덤 스미스의 생각처럼 모두가 좋아지는 결론이었다면, 칸트의 논리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따라 행동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는 개인의 선택이나, 그 선택적 기로에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할지는 철학적 사고는 필수적이다. 세상은 나만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타인의 존재가 있기에 자아라는 존재가 인식하는 것처럼, 한 번은 우리 스스로 103호 환자는 아니더라도 102호나 104호 환자 정도 되어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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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를 갖춘 양반의 나라 조선의 사대부 5
김강식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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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다시 작성한 시간이 너무 오래 된 것 같다. 그동안 글을 올릴 수도 없었고, 글을 올리기 위해 책 1권조차 제대로 볼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그동안 말기 암으로 고생하다 결국 다시 넘어올 수 없는 머나먼 세계로 떠나갔다. 아버지와의 지난 추억을 생각하면, 그렇게 좋은 기억은 없다. 아버지는 배를 타는 선원이고, 집에 있는 시간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112달 중에 1~2개월 정도, 집에 온다고 해도 여유는 없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업무를 해야 했고, 집에 가만히 쉬는 게 아니라 오래된 집을 수리하기에 바빴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이고, 같이 있는 시간이 길지 않기에 유대감이 다른 집안의 아이들보다 크지 않았다. 어느 정도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20대 후반 회사에 취업하면서이다. 그때는 배도 멀리는 가지 않았고, 집에 자주 왔으며, 나도 하사 군복무를 마친 후라 집에 계속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평생 고생만 하신 분이다. 어린 시절은 추위와 배고픔, 청장년은 배만 탔고, 노년은 그동안에 고생한 삶에 의해 암으로 마감했다.

 

이런 아버지이기에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와 추억은 별로 없다. 단지 예전에 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삶을 살았고,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그리고 가족의 내력만 자주 들었다. 기억나는 일화 중에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우리 친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 유산 중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고, 오로지 집안의 족보만 가져갔다. 어린 시절 집에 족보가 있었는데, 한지로 된 책이 3권이 있었다. 할아버지도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고, 농부로 살아왔기에 한자를 제대로 읽지는 못한다.

 

아버지도 배운 것이 없지만, 그래도 혼자 독학하여 한자를 어느 정도 읽으시고, 집안의 족보를 이야기해주었다. 집안 제사를 지내면 나는 8대조 할아버지를 시작하여 증조할아버지까지 제사를 지낸다. 시제를 올리면 할아버지의 이름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족보를 읽어야 했다. 아버지나 형도 요새 같은 시대에 무슨 조상의 덕을 보겠냐고 하나, 그래도 아버지는 족보를 챙기시던 분이었다.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은 집안의 족보, 즉 자신이란 존재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정체성이 유일한 끈이고, 그 끈은 나와 형, 그리고 형의 아이까지 이어진 것이다.

 

제사를 지내면서 제일 먼저 가는 8대조 할아버지(그 이상의 할아버지는 큰댁에서 먼저 제사를 가져가므로)는 조선시대 벼슬을 했다. 첨지(僉知),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정삼품 무관이었고, 통정대부라는 직책이 주어진다. 아마 대략 영조시대 정도인 것 같은데, 무덤을 보면 묏자리는 정말 좋으나, 그렇게 권력이나 재산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비석이나 묘비는 없고, 단지 봉만 존재했다. 우리 집안은 조선시대 붕당계열에서 남인(南人)에 속했다. 남인은 정조대왕 이후 거의 몰락했으며, 남인 지식인들이 천주교와 많은 연루된 관계로 정치적으로 박해를 당한 일도 많다.

 

아버지 말로는 천주교 박해나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경우 다산 정약용의 제자나 주변인들이 화를 당했다고 하는데, 거기에 우리 집안도 끼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신해사옥과 황사영백서가 일어날 때 당시 우리 할아버지와 조금 먼 친척분이 관아에 끌려가 문초를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시대 양반이 뭐고, 상놈이 무엇인가에서 의미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역사가 있다는 것은 버려서 안 될 기록이다. 그것은 한국이 그동안 가진 역사이란 점이고, 다른 나라에서도 과거의 기록과 역사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나의 가계를 알아가는 것은 과거를 보는 것도 되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나에겐 아무 것도 남긴 것도 없이 그저 고생만 하다 저승으로 가신 아버지가 그나마 그분께서 마음속으로 지켜오던 것을 계속 유지시켜주는 가교에 불가하다. 이런 내 모습이 고지식하다 여겨도,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조선시대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그런 것을 볼 이유는 없다.

 

한국에 태어난 이상 한국인이란 점과 한국의 역사에서 우리는 멀어질 수 없다. 또한 한국 이전에 조선이란 국가,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사대부가 통치하던 국가가 어떤 곳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태 문치를 내세웠지만, 나름 조선도 무예를 중시한 점이 의외였다. 내가 집안의 내력을 다시 돌아본 계기도 그런 점이다. 양반(兩班)은 문관인 동반(東班), 무관이 서반(西班)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시대 무관의 이름보다 문관의 이름을 많이 알지만, 무관이 문관을 하고, 문관이 무관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들의 직급이나 업무에서 문무를 오고가는 것이 많았다.

 

조선역사를 보면 600년이다. 600년 동안 유지한 단일 국가는 세계에 내놓아도 좀처럼 없다. 물론 고조선 역사가 2,000년이란 말도 있지만, 그래도 600년이란 역사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 시간이다. 어리석고 잔인하고 교만한 양반사대부가 많은 점은 확실하나,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관들이 직접 목숨 걸고 전쟁에서 싸우고, 문관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인의예지를 지켰다. 대신 그런 집안의 가족들은 큰 화를 당했고, 그런 가족들의 후손들까지 그 여파가 닿기도 했다.

 

이 책에서 우리가 흔히 아는 인물인 서애 류성룡이 나온다. 류성룡은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극복한 명재상이고, 이순신을 천거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뛰어난 책략가이다. 그러나 선조와 반대 당파의 논쟁으로 고향인 안동으로 은거하게 되었고, 친구인 이순신도 전쟁터에서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병법이나 전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위기를 모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왜구의 침입을 어느 정도 예상했는데, 명종 때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때 재상이면 동고 이준경이 직접 군사를 정비하여 적을 무찔렀는데, 그는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탄수 이연경의 사촌동생이었다. 이준경이 전남 연안에서 적을 칠 때 우연히 우리 집안의 어른도 계셨다. 그 당시의 할아버지의 동생, 만호(萬戶)라는 무관을 지녔고, 이준경의 막하에서 무장을 맡으며, 왜구를 소탕했다. 그리고 만호를 지낸 분의 형인 나의 직계 할아버지는 본래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시작한 무관이었고, 나중에 순천부사로 부임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실 순천부사를 지낸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리고 그분의 아버지는 문과 급제하여 현감을 맡았고, 당상관인 통정대부까지 이르렀다고 말해주었다. 그때는 몰랐으나 대부분 할아버지들이 문관일줄 알았는데 오히려 무관들이 더 많았던 것이다. 조선시대 개국 전에는 군기소윤(軍器少尹, 군수를 관리하는 참모)을 하신 분이 있었고 그분의 형은 대호군(大護軍, 수도방위를 책임지는 참모)으로 무관을 맡았다.

 

그러나 조선으로 넘어가자, 군기소윤의 아들이 무관 창신교위(彰信校尉), 그 창신교위 아들이 진위장군(振威將軍)과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을 맡았다. 무관이면서도 사간원에서 언론을 맡은 사간을 맡은 것이다. 문무를 동시에 수행했던 것이다. 그 다음은 무관이 아닌 문관 중 하급관리인 참봉, 그 다음은 현감, 그 다음에 순천부사를 지낸 분이었다. 그 다음은 진사로 성균관에서 학업을 하시다 정암 조광조를 따르는 이유로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후 몇 십년 뒤 영의정 동고 이준경의 천거로 어모장군(禦侮將軍)이 되신 분이 계셨다.

 

어모장군의 동생은 만호를 지냈고, 어모장군의 아들은 무관 훈련원 사정(司正)을 맡다가 훈련원정과 북청군을 지키다 변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분이 명종 때 무관으로 임관하여 광해군 2년 때 돌아가셨는데, 나이가 70세가 넘은 노장이니 조선시대 이 나이에 변방에서 근무해서 운명했다면 순국하신 것과 것이다. 이때까지 보면 순수 문관은 2분이고, 나머지는 다들 무관을 맡았다. 변방에서 순국하신 분의 아들은 동몽교관(童蒙敎官,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이였고, 그 다음은 가선대부 좌승지이었다.

 

좌승지를 하신 분의 아들은 벼슬하지 않았지만 그분의 아들이 중추부첨지사를 맡게 되어 벼슬하지 않은 분이 증 동부승지로 되었다. 이 뒤로는 벼슬한 분은 없고, 마을에서 훈장선생을 하신 분은 계셨지만, 남인세력이었기에 그대로 몰락양반이 되었다. 몰락한 양반의 가계가 지금까지 거의 200년을 안고 갔다. 아버지나, 할아버지, 증조부나 고조부조차 가난한 농부로 살아야했던 운명은 조선시대에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위에 말한 것처럼 조상의 덕을 본 게 없다면서 형은 집안내력에 신경 쓰지 않고,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집안내력을 소상히 나에게 말해 주었다. <문무를 갖춘 양반의 나라>를 읽은 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다음날에 읽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나와 형이다. 어떻게 보자면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도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지만, 그래도 아버지만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다 내게 이야기해주었다.

 

20세기를 걸쳐 21세기 대한민국은 물질만능주의 사회이다. 민주주의라고 해도 돈에 따라 인생의 굴곡이 달라진다. 그래서 돈이 넉넉지 못한 한 개인이 이런 피폐한 세상에 살려면 무엇을 의지해야 할지 난감하다. 조상을 잘 안다고 해도 돈이 나오거나 출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아야 하는 이유는 내가 지금 살아있는 현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농공상이 얼마나 심각한 폐단이 있었는지 알고, 개혁론자 사대부들이 천민들도 능력이 되면 벼슬을 줘야 한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하고 몰락한 사례도 많았다.

 

지금도 사회적 문제가 만연하고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배워야 하고, 무엇을 찾아 배워야 하는가? 결국은 역사를 알아야 한다. 개인가족이 지닌 역사와 국가가 지닌 역사의 규모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 개인가족이 전승해온 기록에서 당시 살아간 인간들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문무를 갖춘 양반은 필요했다. 비겁하지만, 문자를 알아야 지식을 찾고, 지식이 있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지난 과거가 멀다 하지만, 우리도 먼 미래 후예들에게 단지 과거의 존재일 뿐이다. 과거라는 이유로 우리가 앞을 것을 모두 부정하면, 먼 미래의 주인공 역시 우리를 부정할 뿐이다. 존재의 부정성은 곧 다시 자신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정체성 없이 산다는 것은 결국 마지막에 우리가 어떤 존재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는 미궁 속에 빠질 수밖에 없다. 티베트에서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한 예술가를 보았다. 티베트의 흙을 가지고 와서 티베트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만든 마을공터에 뿌려주었다.

 

티베트의 유민들은 그 흙을 기리며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언젠가 다시 돌아가기를 약속했다. 예술가 본인의 아버지는 이미 사망한지 옛날이고, 어머니 역시 노년에 이르렀다. 과거가 좋든 말든 그 과거 자체는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선택이다. 그래야 어떤 삶을 살아갈 건지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양반의 사회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문제가 심각했다. 그래도 병자호란 이후 근 270년 정도를 유지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섞어도 나라가 굴러간 점에서 그 근원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후로 갈수록 무예를 소홀해지면서 일제에 조선이란 나라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지금도 삼면이 바다고, 북한과 러시아, 일본, 중국, 미국 등 수많은 나라와 접한 이 환경에서 우리나라가 문무를 고르게 가지지 못한다면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반면교사, 온고지신이란 단어는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작성하면서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며,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지켜온 집안의 내력을 생각했다. 조선개국 아래 할아버지 9분이 계속 벼슬자리에 올랐으며,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도 삶의 흔적을 발견했다.

 

인간의 진정한 죽음은 육신이 다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인지는 각자의 가치관마다 다르지만, 아버지의 삶을 내가 기억하고 싶다면, 그 이전의 사람도 기억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 앞에 살았던 자들은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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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5 23: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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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6 09: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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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6 10: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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