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한국은 영광의 날보다 어둠에 가려진 날이 더 많았다. 조선이란 국호를 지닌 국가는 마지막으로 그 이름을 잃었고, 조선의 인민(국가 이전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포함)들은 나라를 잃은 채 일제의 총칼에 억압을 당했다. 해방의 광복이 오는가 하더니 이제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지고, 전쟁이 끝난 후 가난과 독재로 다시 어둠 속에 방황했다. 역사란 단절된 시간이 아니다. 역사란 바로 지금 현세대를 구축한 하나의 과정들이다. 그래서 E.H Carr<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항상 과거와 현재가 계속 대화하며 이어져 가는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2017년 큰 방향을 보여준 한 해였다.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된 이후 헌법재판과정에서 탄핵되었다. 민중이 보여준 촛불혁명은 그 이전의 1987년의 혁명 이후 다시 찾아온 역사에 길이 남을 성과였다. 하지만 1987년과 2017년은 조금 유사하면서도 달랐다. 유사한 점은 헌법정치를 기본으로 하는 법치주의국가에서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국민의 주권을 보여주었지만, 1987년의 주권은 거의 박탈된 상태에서 일어난 혁명이고, 2017년 국민의 주권이 가진 상태에서 일어난 혁명이다.

 

그 차이는 바로 국민의 선택점은 과거는 없었으나, 현재는 있었다는 반증이다. 권력의 주권행사에서 독재정부에서 비밀투표를 하거나 선거인단을 권력의 입맛에 맞춘 자들로 포섭했다. 북한에서 선거하면 거의 100%에 가까운 찬성이 나온다. 투표자는 선택할 후보자가 1명이니 무슨 의미인가? 그런 비슷한 인들이 한국에서도 있었다. 하다못해 과거 군부대에서 부재자투표를 하면, 병사들의 투표용지를 검색하여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재투표하게 만든다. 물론 덤으로 온갖 구타와 욕설은 매우 후하게 대해준다.

 

지금 21세기 한국에서 독재자의 후예들이 살고 있지만, 과거처럼 그렇게까지 하지 못한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군화발로 국민을 밟은 자들이 이래저래 설치고 다녔다. 꾸준한 노력과 온갖 희생들이 지금의 현실로 만들었다. 예전에 386세대란 단어가 있었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나이가 30, 80년대 학번, 60년대 태어난 이들을 두고 지칭한 말이다. 이제는 586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 내가 어린 시절 286XT가 있었고, 도스를 디스켓에 넣고 부팅하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386 컴퓨터는 모니터도 컬러이고, 286과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게임과 소프트웨어를 실행할 수 있었다.


지금 80년대들은 도스와 윈도우 초기버전을 알고 있을 것이다. 21세기에 386은 고물이지만, 이제 그들은 586 펜티엄으로 돌아왔고, 조금 더 지나면 초특급 PC버전과 맞먹는 숫자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80년대 대학가 청년들은 20대 시절을 독재와 싸웠고, 이제는 또 다른 현실하고 싸운다. 영화 <1987>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30년 전의 암울한 한국사회는 다시 돌아와서는 안 되고, 돌아온 것까지는 

아니나, 그 당시 권력의 자리에서 국민들을 억압하던 이들과 그에 동조하던 세력이 아직도 버티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아주 급박한 느낌이 많이 든다. 국가는 온간 권력의 힘을 동원하여 민주투사들을 체포하고, 시위현장이나 학생운동을 하던 청년들은 무참히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영화는 암울한 시대를 보여주기 때문에 고문 장면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 <변호인>이나 영화 <1987> 역시 고문이 그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경찰이란 자들이 국민치안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나 국민을 상대로 불심검문하거나 불법으로 체포구금하거나 더구나 가족과의 연락을 차단한 채 어두운 방에서 고문을 자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문과 관련하여 가장 끔찍한 영화는 <남영동 1985>이다. 영화 <1987>보다 2년 전의 배경을 토대로 제작한 영화는 민주주의운동의 대부인 김근태 선생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김근태 선생의 수기록 <남영동>을 읽으면 그분이 받으신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영화와 소설에서 고문은 인간의 육체도 파괴하지만, 정신 역시 파괴하여 영혼까지 고통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고문에 의한 정신적 고통은 비단 당하는 자만 아니라 가해자 역시 깊은 상처를 받는다.

 

<남영동 1985>에서 고문을 계속 당하는 민주주의운동가가 계속 포기하지 않자, 고문을 가하는 형사들조차 그에게 제발 포기해달라고 애원을 한다. 고문을 가하는 형사들도 집에 가면 가족이 있고, 아이들도 있다. 민주주의 운동을 하던 이들은 나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 더 나아가 앞으로 살아갈 미래들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 희생하는 분이다. 고문을 가하는 자 역시 자녀가 있다면 그런 암울한 세계에서 폭력과 감시 속에 살아가야 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물론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들은 제외이다. 그들은 그런 폭력과 감시를 토대로 특권을 누리기 때문이다.

 

김근태 선생은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을 듣는 것이 제일 고통스러웠다. 비참한 현실 속에 들려오는 라디오의 이야기는 일그러진 환상세계의 잔인한 농담이기 때문이다. <1987>에서 라디오는 등장한다. 라디오에서 DJ의 목소리도 나오고, 테이프 카세트에서 음악이 들려온다. 이때 등장하는 유명한 가수와 노래가 등장한다. 김현식 3집은 대한민국 대중음반 역사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명반이다. 그 노래들은 지금도 리메이크 되거나 음악방송 프로그램에서 도전곡목으로 등장한다. 3집 앨범에서 가리워진 길이란 노래가 있다. 본래 김현식과 친한 유재하의 곡이나, 그 역시 천재의 운명인지 일찍 요절한다. “가리워진 길이란 가사는 상당히 시적이나, 당시 상황과 정말 잘 어울리는 곡이다. 가사를 보면

 

보일 듯 말듯 가물거리는 안개 속에 쌓인 길, 잡힐 듯 말듯 멀어져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길 없네. 그대여 힘이 되 주오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가듯 떠나는 이는 제 갈 길을 찾았나.

손을 흔들며 떠나보내고,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되 주오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어떻게 보면 독재와 싸우던 지난날의 그들은 민주투사도 있으나, 억압과 횡포 속에서 힘들게 숨을 죽이면 살아간 이들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암울한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최루가스가 바람을 따라 거리를 메우고, 군중의 신발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곤봉을 들고 있는 백골단이 무참히도 시민들의 머리를 내리친다. 영화에서 주인공 이한열은 연세대학교 만화동아리 회장으로 나온다. 그가 신입생을 모집할 때 보여준 영상은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촬영한 광주 518의 비극이었다. 사람들이 총에 맞고 쓰러지고, 피를 흘리는 광주시민들 사이로 아직 시대는 암흑기란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자국의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사격하던 그들, 독재의 칼날은 국민들을 사육장 안에 가두는 짐승과 같이 다루었다. 영화를 보면 썬데이서울 같은 잡지가 많이 나온다. 전두환 정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프로파간다 방법으로 3S(Sports, Sex, Screen)이었다. 덕분에 한국의 대중가요 역사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명곡이 가장 많았다. 연예인들의 활동이 활발하고, TV가 흑백에서 칼라로 보급되던 시기였다. 스포츠는 야구가 최고였고, 성적인 이미지를 활용하여 썬데이서울 같은 잡지도 많이 나왔다. 잡지의 특징은 미모의 여성이 수영복을 입은 화보가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기사에는 각종 연예계의 가십거리로 넘쳐나고 있었다. 국민들에게 정치적, 사회적인 관심보다 오락과 재미를 더욱 치중하게 했다. 그런 시기였으니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을 두고 아직도 북한의 소행이라 말하던 정신병자가 계속 나타나는 것이다. 독재에서 벗어나 그 무지개를 향하는 이들에게 과연 무지개는 발견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연희는 이한열에게 자신의 심정을 말한다. 연희는 자신의 아버지가 민주주의 운동을 하다가 변을 당했고, 외삼촌 역시 그런 사람하고 엮여 있는 것이 두려웠다.

 

이들은 왜 힘든 선택을 하였는가? 영화에서 고문하는 장면을 그대로 재현한다. 물론 연기와 설정상의 연출이라 하지만, 그 행위를 한다는 자체는 매우 끔찍한 일이다. 영화는 3가지 세력이 대조적으로 흘러간다. 한 세력은 경찰과 국가, 다른 한 세력은 몰래 숨어 민주주의 운동을 하던 이들, 마지막은 이들 중간에서 방황하던 사람이다. 연희는 3번째에 속하는 인물이다. 국가권력이 무섭지만, 더 무서운 것은 이들에게 가족과 친구들이 변을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외삼촌이 고문경찰에 끌려가자 결심을 한다.

 

어째 보면 혁명의 시작은 원대한 이데올로기만으로 해결되지 않은 것 같다. 혁명의 시작에서 사상이나 이념, 그리고 이상적 가치가 있어야 구심점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루소는 루이왕정 세력과 파리시민에게 조롱거리 대상만 되었을 뿐이다.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가 되었고, 19세기에는 마르크스와 혁명가들의 아버지가 되었고 20세기에는 민주주의의 아버지가 되었다. 하지만 혁명의 정신은 루소가 되었더라도 혁명의 주체는 시민들이 되었다. 보통 시민들이란 길거리에서 담배 피는 아저씨, 커피를 마시며 거리를 걷는 여성들,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는 젊은 대학생들, 군것질 하며 집에 돌아가는 학생까지도 포함되고, 노상에서 생선을 파는 아줌마나 트럭을 몰며 짐을 나르는 운전사들도 그렇다.

 

어디에나 있을법한 사람들이 모두 거리를 나와 독재의 부당함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이 불만을 가지고 반항한 이유는 자신들이 봐도 부조리한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희의 외삼촌은 교도소에 근무하는 교도관이다. 그가 근무하고 있는 교도소의 교도소장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때문에 혁명을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다. 폭력과 억압을 자행하던 그들의 행실에서 진정한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부하도 내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부하가 반항하면 부하의 가족까지 섬멸한다고 협박한다.

 

실제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시체마저 유기하고 은폐하였으니 당연히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끄는 주체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장악하고 있는 박처장으로 볼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지역에 살다 피난 온 그는 자신의 부모님이 주워온 아이가 어느날 자신의 가족 모두를 살해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지주계층에 대해 공사주의자들은 각종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들에게 마르크스의 <자본>이나 <공산당선언> 같은 이념적 토대 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만 부여했다. 그런 만행에서 가족을 잃은 박처장은 한국정부에 반항하는 세력을 모두 반국가행위자로 본 것이다.

 

그게 남영동의 고문실에서 박종철이 사망했고, 박종철의 시신은 부검된 후 바로 화장되어 강물에 뿌려진다. 박종철의 부모가 부검에 참관하지 못하고, 그의 삼촌만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 오열한다. 사람이 죽어도 쥐도 새도 모르게 그냥 병사 되거나 의문사 처리된다. 자신의 가족을 병으로 잃은 것도 한이 맺히는데, 젊은 청년이 고문으로 억울하게 죽은 것은 얼마나 한이 맺히는 일인가? 그것도 억울해도 억울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그 절망은 그들이 살아간 인생의 길에서 가리워진 길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외롭고 괴로우며, 아무 희망도 없이 그저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처럼 갈 곳을 찾을 수가 없다. 영화 <1987>는 그런 그들에게 길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안개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을 위해 서울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 억울한 현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처음에 집에서 숨거나 길거리에서 움츠리며 살아간 사람들이다. 그들 역시 길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었다. 길이 없다면 길을 만들어 가면 된다. 하지만 그 길을 만들어줄 사람들을 찾는 것은 너무 어렵다. 하지만 같이 그 길을 가면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

 

영화 <1987>과 더불어 6월 항쟁을 보여준 책으로 최규석 작가의 <100>란 만화책이 있다. 물이 100가 되면 액체에서 기체로 되고, 수증기의 힘은 매우 강력하여 주변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전환점이 된다. 그 책에서 권력 아래 순종적인 사람들이 스스로 그 권력 앞에서 저항한다. 대신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희생과 눈물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고문에 의해 죽거나 크게 다쳤으며,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일상이 모조리 파괴되었다.

 

지금 정치권에 다시 대두된 이들은 그 당시 그들과 같이 광장에 서고,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투쟁하던 이들이다. 그동안 10년 동안 시간은 과거로 간 듯 했다. 그러나 그 10년은 멈추고 다시 시계는 미래를 향하여 가고 있다. 촛불혁명이 한참이던 작년 늦가을,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들이 나와 같이 시위했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 당시 탄핵당한 대통령에 대해 욕을 했다. 가령 XX년 같은 것들을 말이다. 약간의 다른 사상적인 부분에서 옆에서 나무라던 분들이 있지만(이 사람들은 정말 그 어르신들이 왜 그렇게 욕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분들이 욕하던 이유는 독재군부 시절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잡혀갈 수 있다는 공포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다가 이제 스스로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모임에서 그냥 나라에 대한 불만을 조금이라도 발성하면 주변사람 모르게 남영동 지하고문실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히던 세상이다. 당시 대통령은 그런 일들을 벌이는 자의 딸이었으니, 얼마나 오랜 시간을 두고 국가라는 이름을 지닌 공권력에 두려움을 지니고 살았을까? 2017년 혁명은 독재의 청산이 정치권력이란 시스템을 넘어 사람들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망령으로부터 벗어난 셈이다. 그러면 1987년의 혁명은 어떤가?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망령을 모든 시민들이 도전한 시기다. 가리워진 길은 내 눈앞에 펼쳐진 안개 속만이 아니다.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영혼의 상흔조차도 가리워진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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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2-24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건 좋아요 한 200개는 눌러야 되는 글인데 말이지요.....

만화애니비평 2018-02-24 13:15   좋아요 0 | URL
아쿠쿠 감사합니다용~
 

아버지의 유품은 거의 없다. 옷가지 몇 벌과 노트, 그리고 거의 쓸모없던 노트북 하나와 외장하드 디스크 하나 정도이다. 옷이야 반 이상 처분했고, 몇 벌 양복이 큰 방의 장에 있다. 키가 나보다 크고, 다리도 나보다 길어서 내가 입을 수 없었다. 나도 다리가 내 키와 유사한 사람과 비교하여 긴 편(대신 목이 짧다)이나 아버지의 바지를 입을 수 없었다. 만일 조카가 장성하거나 뒤에 결혼하여 내 자녀가 아들이라면 1번이라도 그 옷을 입혀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렇게 아버지의 물품을 정리하면서 최근 외장하드 내용을 찾아보았다. 아버지는 배를 타고 다닌 외항선원이기에 항상 남는 시간에 뭔가 했어야 했다. 지나간 드라마나 영화들이 안에 있었다.

 

그리고 조카들의 사진과 아버지가 일에 사용한 업무자료와 아버지가 작성한 문건이 있었다. 참으로 슬픈 유언이 있었다. 아주 예전부터 정리한 글이다. 배를 타고 멀리 나가면 언제 어디서 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배를 타며 먼 나라에 가면 몇 개월 심지어 1년 넘게 해외에서 고생하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는 한국이란 사회에 회의감이란 절망에 벗어날 수 없었다. 보수라고 말하는 존재들은 노동자의 권리를 지나가는 개만도 못하게 보고, 진보라는 말하는 입들은 밑바닥의 세상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입만 두둥실 떠다니는 현실에서 과거의 비참한 일들은 아직도 계속 되는가?

 

언제 일을 하면서 해양과 관련된 종사사와 대화한 적이 있다. 한국이 발전한 이유는 국가가 제대로 도와준 것이 아니다. 이런 형태를 갖춘 것은 선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기름 1방울도 나지 않는다. 자동차는 수천만대이나 기름 하나 나오지 않고 있으니 그 모든 원유가 배를 타고 태평양과 인도양, 대서양을 지나 우리 영해로 들어온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지만 한국은 반도지형의 국가이고, 바다를 끼고 살아가는 세상이다. 바다에 얼마나 많은 원혼들이 슬피 울고 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성을 상실한 적이 있었다. 인간이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이 오면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나에게 집에 가고 싶다고 외쳤다. 내가 물었다. 집은 어디냐고? 영도에 있는 집이냐고 물으니 아버지는 시골 쪽을 이야기했다. 배고프고 가난하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보낸 그곳, 아버지가 자라고 태어난 곳은 전남 강진군이다. 겨레의 역사 조선의 마지막 등불인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살이를 한 곳이 강진군 도암면 귤동마을이다. 아버지는 귤동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도 어린 시절부터 강진에 오고갔기 때문에 매년 집안제사로 찾아간다.

 

언제 부모님을 모시고, 작은아버지와 고모부 내외, 그리고 고모댁 사촌누나와 같이 가우도 옆의 식당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강진군의 슬픈 이야기를 해주었다. 가우도 인근에 접안시설이 있는데, 일제시대 일본들이 전남지역의 쌀을 약탈하기 위해 만든 부두라고 이야기했다. 강진은 생각보다 아픔이 많은 곳이다. 다산의 유배 오는 것도 있지만, 다산이 바라본 농민들이 겪은 고난도 지켜본 곳이다. 그 이전에 가면 조선의 최고위기인 임진왜란의 여파가 있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전후로 침공할 때, 왜적들은 조선인에게 공격당한 원한을 갚기 위해 해남군 주변 민가를 약탈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칼을 베고, 그들의 귀와 코를 베어 일본으로 들고 갔다. 해남에 수군우수영이 있고, 해남 옆의 강진군은 그런 곳이다. 강진군 병영면(兵營面)이란 지역명이 있을 정도로 수군과 깊은 관계성이 있고, 이순신을 지원하던 고을 중에 강진군과 해남군이 있었다. 게다가 의병과 근왕병 중에서 해남과 강진 출신들이 많았다. 정유재란 당시 전남지역의 많은 의병과 근왕병들은 이순신 장군을 위해 군을 일으키다 수없이 전사했다. 마침 오늘 인터넷으로 진도에서는 매년 임진왜란 전몰자를 위한 굿판이 열린다고 한다.

 

해남군 우수영관광지는 대한민국에서는 국민관광지이나, 그 마을 주민입장에서 본다면 400년이나 더 지난 과거의 슬픔을 아직도 후손들이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죽는다. 생각하면 아버지가 태어난 곳도 바다 앞의 마을이고, 바다를 돌아다니며,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곳도 대마도가 보이는 절영도 앞바다에 위치한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올해 2018년은 임진왜란이 끝이 난지 7갑자(420) 되는 해이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서거한지 같은 해이다. 임진왜란이 시작하여 정유재란이 시작된 해를 기념해서 계속 한국 조선역사와 관련된 학계에서 많은 발표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나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서적을 읽기 시작했고, 이래저래 보다보니 서애 유성룡 선생이 저술한 <징비록>을 읽고, 거기에 더해 <소설 징비록>을 읽었다. 소설을 읽기 전에 이순신역사연구회에서 저술한 <이순신과 임진왜란> 4권을 읽었다. <징비록>을 읽어도 1가지만 읽은 것이 아니라 4가지 정도 읽었다. 작가의 상상력도 필요하나, <난중일기><선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사료들을 모은 내용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이야기하자면 이순신 장군을 벗어날 수 없으나, 그것은 일본 수군과 해전에 대해서이지 그 이상의 전쟁을 보자면 서애 유성룡을 볼 수 밖에 없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순신 장군의 대사에서 늘 무서운 적은 나에게 덤벼드는 적이 아니라 내 마음 속의 두려움이라고 했다. 하지만 두려움을 느껴야 할 대상이 분명 내 안의 두려움이 아니라 내 앞의 인간일 경우가 많다. 다행히 내가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란 책을 읽어서인지 <징비록>과 관련된 도서는 잘 읽혀갔다. <징비록>은 이미 전에 1번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읽은 이유는 현대사회 한국이 처한 현실과 역사적 맥락이다. <징비록>과 그리고 소설로 만들어진 징비록의 이야기들의 차이점을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해 어느 도서출판사가 뛰어난지 어느 번역가가 탁월한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류성룡과 임진왜란>이란 도서를 읽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와 인문학자가 나와 논문을 소개하고, 담화로 통해 여러 가지의 이야기를 탐독할 수 있었다. 우선적으로 율곡 이이의 10만 대군 양병설이다. 율곡의 학문은 뛰어나나, 조선 최고의 영의정 중에 하나인 이준경은 이이에 대해 경계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명유대신(名儒大臣)들도 이이의 강직함에 비판을 했다. 이이가 보여준 학문의 깊이와 도량은 뛰어나지만, 그가 말하는 바는 현실의 상황을 다소 간파하지 못한채 이상적인 길만 제시했다.

 

동고 이준경은 임진왜란 이전에 을묘왜변을 토벌한 인재이고, 훈구대신을 몰아내고 사림세력을 조정으로 부른 신료였다. 그 역시 청렴하고 강직하나, 기본적으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영의정으로 정치적 조율을 제시하던 입장이었다. 율곡의 제자들은 후에 율곡 사후 그의 호를 다시 만들어진 후 율곡이 10만 대군양병설을 기입했다. 쉽게 생각하면 다산 정약용 선생이 다산(茶山)이란 호를 사용한 것은 1808년 다산초당에 들어가면서이다. 그 전에 삼미(三眉), 내지 사암(俟菴)이란 호를 사용했다. 다산 정약용이 1800년 이전에 다산이란 명칭을 사용할 수 없으며, 정약용 선생 사후 그런 명칭이 나왔다면 후대가 붙인 내용이다.

 

<류성룡과 임진왜란>에서 그런 내용이 나온다. 10만 대군일까? 물론 이이의 국방정책은 좋았지만, 임진왜란 당시 대부분 분전했던 세력이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동인은 기축옥사를 계기로 송강 정철에 대한 복수심에 따라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었다. 북인으로 정인홍, 곽재우, 김면, 김우옹 같은 남면 조식 선생의 제자들이고, 남인은 류성룡, 김성일 같은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었다. 북인의 영수인 이산해는 동인으로 처음 류성룡과 친분이 있었지만 기축옥사 이후 정철의 처분, 임진왜란의 과정에 따라 결국 류성룡을 파직하게 만든다. 그때 등장한 인물로 이이첨과 남이공 같은 세력이다.

 

사실 동인의 적인 서인이나. 북인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북인은 광해군 집권 전후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고, 대북은 인조반정과 함께 몰락하고, 소북계열도 이괄의 난에서 억울하게 사라진다. 동인의 후예가 몰락하니 이제 남은 것은 서인들의 세계이다. 서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광해군을 역사의 대역죄인으로 모는 것이고, 그가 한 업적을 되돌리는 일이다. 정조시대로 가면 <호남절의록>이 간행되는데, 이책은 매우 재미있는 형국을 남긴다. 이름하며 혼군이삼(昏君李三)이란 단어가 나온다. 여기서 혼군은 광해군을 말하고, 이삼은 이원익, 이덕형, 이항목을 말한다.

 

이원익은 선조가 매우 아끼던 신하였다. 인척으로 말할 정도로 이원익을 아꼈고, 광해군 역시 이원익을 집권 초기 영의정으로 모셨다. 이덕형은 일본과 통상수교를 재개할 때 책임자고, 이항복은 이덕형의 친구로서 병조업무에 매우 밝았다. 전시업무를 수행하면서 재조산하를 이끈 재목이었다. 하지만 붕당의 갈등과 내정 및 외교적 파란이 결국 파국으로 이어졌다. 광해군이 가장 탁월한 업적은 임진왜란의 분조와 무군사, 그리고 명청교체시기의 외교전략과 군사보강이었다. 하지만 명나라에 대한 충성과 청나라에 대한 배척은 인조반정으로 이어지고, 광해군의 전략을 인조가 계속 유지했다고 하나, 막상 광해군이 펼친 외교를 부정해서 일으킨 반정이다.

 

광해군에게 문제가 없는 아니나, 그때나 지금의 역사학자의 논변에 참 모순이 많았다. 광해군이 성을 재건축에 많은 재물을 소비했다고 하나, 인조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들어간 재정이 30% 이상이라고 한다. 이것을 두고 보자면 어디가 문제가 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이런 광해군을 두고 <호남절의록>에서 2가지 측면이 나온다.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 그리고 이인좌의 반란까지 이어진다. 광해군을 두고 병자호란 시기에 혼군이라 칭하지만, 임진왜란에서 동군 내지 분조라고 칭한다. 의병들이 광해군의 교지와 명령서를 받들고 전장을 나가 공을 세운 이야기를 한다.

 

임진왜란과 병조호란을 두고 이래 차이가 난 이유는 무엇인가? 게다가 임진왜란 최고 공신은 이순신과 류성룡이고, 의병장으로 김덕령과 곽재우가 있다. 이책에서 곽재우보다 김덕령을 더 많이 기록했다. 정인홍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을 정도이다. 당쟁의 효과가 임진왜란 역사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서거하고, 선조는 충무공이란 명칭도 내리지 않고, 오히려 뒤에 삭탈관직을 해버렸다. 나중에 좌의정으로 추증했으나, 그의 사당을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순신의 사당은 백성에 손에 이루어지고, 그의 시신은 광해군이 돼서야 고향인 아산으로 이장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순신의 사당이 만들어진 시기도 광해군 시기였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외에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이 있었다. 이순신이 노환으로 죽자 광해군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고 한다.

 

전쟁의 상흔을 잃은 것은 과연 누구이고? 전쟁에서 고통 받은 자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징비록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보았다. 일본 왜구가 참으로 나쁘나, 소서행장을 비롯한 종의지, 평조신 같은 부류는 계속 전쟁을 막으려 했던 것, 대마도란 곳이 아픔이 진하게 스며든 곳을 말이다. 대마도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중간에 끼여 곤혹을 당한 것을 보고 그들도 많이 힘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풍신수길이 죽고, 가등청정이 덕천가강에게 협력하여 풍신수길 세력을 모조리 제거하자, 소서행장 역시 죽었다.

 

소서행장의 딸은 대마도 도주 종의지의 아내였다. 대마도주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패권이 덕천가강에게 가자, 자신의 아내와 이혼하고, 조선에 대한 외교를 다시 추진했다. 전쟁은 침공당한 자에게도 침공한 자에게도 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살기위해 침략자가 될 수밖에 없던 운명을 보면서 참으로 기구했다. 대마도주는 순수 일본인이 아니라 선조 중에 조선인이 있었다. 전쟁은 막을 수 있었고, 전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기회는 여러 차례 있어도 활용하지 못했다.

 

전쟁이 나자 왕과 대신은 도망가고, 목숨을 건 의병들은 지원도 못 받고 사라져갔다. 그나마

왜적은 총에 쓰러진다면 덜 억울하다. 선조의 질투는 조선의 운명을 계속 어둠으로 몰고 갔다. 한양에 돌아오자 피난갈 때 없던 자들이 이제 변방의 의병과 군관들을 모함했다. 김덕령 장군은 고문으로 죽고, 진주성을 버려지고, 이순신은 백의종군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 과거의 아픔을 잊었다. 선조가 전쟁보고를 받아야할 때 그는 아침이 지나도록 정무를 보지 않고 공빈 김씨의 처소에 있었다. 의주에 가서도 공빈 김씨의 치마 바람에 쌓이니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소설에서 내시들은 전쟁상황을 보고하러온 당상관에게 임금은 씨름하고 있다는 말을 한다. 남자와 남자가 씨름이라면 운동이나, 남자와 여자가 씨름을 하면 무엇이랴? 게다가 의주나 한양에 오니 대신들은 전략과 전투의 방식도 모르고, 입만 살아있다.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참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린 아이가 배가 고파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데, 이상하게 젖이 나오지 않았다. 어미는 전쟁에서 죽었고, 아이는 그것도 모른 채 계속 젖을 빨고 있었던 것이다. <징비록>에서 가장 슬픈 대목 중에 하나였다. 먹을 것이 없어 고통 받은 백성들이 밤새 울부짖다 아침에 일어나 나가니 모두 죽고 말았다.

 

류성룡은 백성을 하늘로 보았고, 류성룡과 이순신을 모함하던 이들은 권력을 하늘로 보았다. 천출이 의병장이 되어 왜적을 막자 류성룡이 그를 관군으로 승격한 후 전쟁이 끝나자 그를 다시 천출로 만들어버렸다. 너나 할 것 조선의 백성인데 누구는 자기 살길과 재물만 챙기고, 백성들에게 목숨과 양식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백성이 없는 국가는 의미가 없지만, 그들의 존재는 들판에 널린 돌멩이처럼 이리 차이가 저리 차이는 신세였다. 토끼를 잡으면 개를 잡는다고 했던가? 전지재상 류성룡은 전쟁이 끝나자 파직되었다. 그가 나라를 일으키는데 제일 필요한 것은 개혁이다. 개혁에서 늘 난관은 기득권과의 대립이다. 기득권의 눈에는 류성룡은 제일 미운 대상이다.

 

대동법의 전신인 수미법은 양반지주가 반대하고, 이것을 먼저 주장한 정암 조광조 선생은 기묘사화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조선의 군왕과 권력가는 이렇게 무능하고 한심한데, 그래도 지조 있는 선비와 이 땅의 백성들은 적이 나와도 죽음이 두려워도 가장 먼저 맞서 싸우고 순국한다. 집안에도 조카와 5촌 당숙이 기묘사화를 당해 뜻을 버리고 낙향하고, 심지어 그렇게 만든 이들이 정국을 장악해도 을묘사변이 일어나자 왜적과 싸운 사람도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생각하면 이들의 미련함은 기축옥사에서 엿보인다. 동인들이 남인으로 관군으로 활동하고, 북인으로 의병으로 활동한다.

 

기축옥사에서 정여립과 관계되었다고 남명 조식 문하의 제자들이 크게 다쳤다. 명망 있는 선비 최영경과 정개청은 아무 죄도 없이 죽었고, 정여립을 동인으로 입당하게 한 이발과 이길 형제는 살점이 사라질 정도로 고문을 당했고, 이발의 노모는 압슬형에 어린 아들은 장을 맞아 머리가 터져 죽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괴롭히던 세력이 서인이다. 장군은 당쟁과 관계없으나 남인의 영수 류성룡의 지지가 있었고, 류성룡을 견제하던 서인의 세력에 늘 정치적 죽음을 당해야 했다. 원균이 서인 영수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인척에서 절대 절명의 상황에서 당익을 노리던 자를 보면서 한숨이 나올 수가 없었다.

 

기축옥사로 선조와 권력가에 대한 분노가 있어도 기축옥사 희생자의 인척들은 전쟁에 나와 왜적과 싸워 전사했다. 소설 징비록이나 혹은 여러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처럼 왜적과 싸우는 이유는 군왕이 아니라 이 나라 백성을 구원한다는 말이 너무 가슴에 와 닿는다. 국가가 토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병기와 군수를 제대로 관리하여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하고, 병사들은 날래고 용맹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되려면 먼저 부정부패가 없어지고 지휘관들은 청렴하고 자신에게 엄정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군대 생활을 하나, 막상 <징비록>을 읽어도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순신 장군이 승리하면 제일 먼저 했던 일이 소설에서 인상 깊다. 가장 먼저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로 격군들이었다. 선창 아래 노를 저는 그들은 천민들이었다. 조선에서 천민은 양반이 시켜 때려죽여도 아무런 대응조차 할 수 없는 약자들이다. 그런 그들을 찾아와 고맙다고 말해주는 상관이 있으면, 세상 어디라도 따라갈 것 같다. 군에서 말단 병사들은 언제나 곤궁한 처지에서 2년 정도 시간을 빼앗긴 채 군복무를 한다. 집에도 가고 싶고, 친구들도 보고 싶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군율은 엄하지만 백성들과 격군에게 매우 친절한 목민관이기도 했다. 조선은 이순신을 영웅인 것을 알아도 권력들은 눈에 가시였다.

 

류성룡의 <징비록>을 읽으면 마지막은 이순신의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건천동 친구인 2사람은 민족의 구원자로 태어나 오명의 이름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날의 기록에서 다시 태어나 한국의 인물을 넘어 세계의 인물과 문화재로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은 국가의 국보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국보라는 문화재로 남아서 안 될 것이다. 늘 우리가 기억하고 새기야 할 숙제이고 과제이다. 징비록에서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인구는 반으로 줄었다.

 

그리고 그런 슬픔은 병자호란에서 일어나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이어진다. 역사의 이야기는 엔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이야기를 이어나갈 시초에 불과하니 어찌 슬프지 않을까? 돌아가신 아버지와 주변 친척어른이 나에게 말했다. 나의 할아버지 형제들은 일제 징용에 끌려가고, 한 분은 돌아오신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한국전쟁 당시 할아버지는 인민군과 한국군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밤에 시골집 근처 저수지 갈대밭에서 숨어 지냈다고 말이다. 만일 잡혔다면 나는 할아버지의 얼굴조차 볼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징비록>의 계속 새겨야 하는 것이다. 430년 전 기축옥사의 슬픔이 집안에 새겨져 있는데, 하물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은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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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과 임진왜란
이성무 외 엮음 / 태학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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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월을 보내 이제 20181월이 왔다. 2017년은 지금으로부터 420년 정유재란을 7번 갑자를 돌았던 해였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침공하는 왜구, 그들의 입장에서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이라고 한다. 일본은 한일강제병합을 이루기 전에는 풍태합조선역(豊太閤朝鮮役)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치룬 전쟁에서 이제는 일본 내부의 전쟁 수준으로 임진왜란을 다루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일본에서 임진왜라은 여전히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이란 시선이다.

 

전쟁에서 보여준 참혹하고 잔인한 행위를 숨기고, 마치 전국시대 열도내부의 통일전쟁을 하는 것처럼 단어를 바꾼 것이다. 중국에서는 아예 조선을 원조했기에 인심을 써준 것처럼 생각한다. 420년 전의 일이 아직도 한중일 삼국 관계에서는 쉽지 않은 양상을 보여준다. 피해자 입장인 조선과 조선의 후예인 한국인으로 보자면 참으로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조선의 역사를 두고 지나간 과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 참 바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아직도 이런 문제가 국가별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나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할 때 중국 최고수석은 난징대학살 기념을 위해 행사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난징학살이 일어난 지 100여년이 되어 가는데, 현재까지 중국에서 깊은 상처와 분노를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1945년 핵폭탄 투하에 따른 피해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한국에서 한국전쟁에 희생된 장병을 위령하고 있다. 국가의 존재에서 결국 그 국가는 역사의 의의를 찾지 않으면 현재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 국가란 역사란 중요하다. 국가에게 역사가 없다면 그것은 국가의 정체 그 자체가 없다고 똑 같은 것이다.

 

대통령이 중국방문 시 일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곳을 찾아갔다. 한국정부가 제헌을 한 시점인지 아니면 그 이전인지를 말이다. 어찌 보면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민주주의국가 체계를 가진 것이 100년인지 아니면 70년이지 가늠할 수 있는 계기이다. 우리가 민주주의 이념을 토대로 만든 국가가 100년을 유지했다면 한국이란 민주주의 국가는 비록 국토를 일제에게 박탈당해도 인민의 의지와 유지는 남아 국가는 그 모든 것은 그 나라의 사람에서 시작되고, 민주주의 국가야말로 인간이 우선이라는 보편적 이념을 보여준 것이라 여긴다.

 

역사를 다시 찾고 역사를 다시 읽은 후 해석하는 것은 지나간 일로 마무리 짓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시작되는 내일을 맞이하는 길인 것이다. 헬조선이란 단어가 시작된다. 헬조선이란 단어가 비로소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일 것이다. 백성이란 존재는 그저 착취당할 존재이고, 위정자는 국가의 존위보다 자신의 안전과 이익만 생각한다. 이순신이란 영웅이 등장하지만, 그 영웅주의적 논리를 앞세워 독재의 논리를 위해 이용했다. 최근 덕수 이씨 문중이 시끄럽다.

 

덕수 이씨에서 배출한 인물로 한국 성리학의 대가인 율곡 이이 선생도 있지만, 최고의 인물은 성웅 이순신일 것이다. 이순신 종가의 종부님이 숙종 임금이 내린 액판 현충사(顯忠祠)를 다시 내걸기 원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 시기 현충사의 휘호를 대통령이 한글로 적어 보냈지만, 사실 종부님의 말씀대로 이순신장군은 일본 왜적을 상대로 목숨 걸고 싸운 분이다. 그런데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일본군장교 출신이 이순신의 사당을 두고 항일정신을 논할 수 있는 가이다.

 

금송나무와 관련하여 한국의 전통수목인 육송이나 박달나무도 아닌 일본에서 아끼는 나무가 자리 잡아 왜색으로 얼룩진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역사란 바론 이런 것이다. 이순신 종가의 종부님은 원래 현충사의 현판을 되찾길 바란다. 숙종 임금이면 300년 이전이고,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420년 전의 것이다. 난중일기는 국가의 국보이면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현재 살아가는 대한민국이란 존재만 아니라 범인류적으로 가치가 높은 물건이다. 그렇기에 역사를 다시 보고 판단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에 대한 나침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 만일 이분이 없으면 조선은 없었다. 아마 대한민국은 현재 같이 평화롭게 살아가지만, 일본어가 국어가 되고, 일본사가 국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분이 정읍현감인 이순신 장군을 수군 절제사(節制使)로 임명 후 당상관인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병조판서가 아니지만, 선조에게 건의하여 지방하급수령을 사령관으로 승진시킨 것이다. 같은 정3품이라 해도 당상관과 당하관은 큰 차이가 있다. 당상관이 되면 임금의 어진에 들어가서 회의에 참석하고, 정책적으로 큰 제안을 할 수 있다. 지휘권과 관련하여 수사(水使)의 지휘권은 병력을 통송하고, 군정을 세우고, 민간인가지 통제할 수 있다.

 

류성룡이 만일 왜란대비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류성룡과 임진왜란>을 보면 서애 선생에 대한 활약상을 후대 역사학자들이 연구하고 소개한 서적이다. 다시금 역사의 기록이 현재만 그렇지만 당대 혹은 그 중간의 관점 역시 중요하다. 선조시대는 당파싸움이 가장 치열하게 시작된 시기다. 기축옥사에서 동인을 학대하자, 후에 동인에서 북인과 남인이 나온다. 동인과 서인에서 당이 남인, 북인, 서인으로 활동한다. 이때 남인에 속한 류성룡은 서인보다 가까운 북인과 같이 일을 하기도 하나, 생각보다 북인의 반발이 심했다.

 

류성룡은 왜적에게 화의를 요청한 것을 두고 북인의 탄핵에 의해 실각한다. 이때 대부분 남인들이 실각하고, 정세는 북인으로 옮겨간다. 임진왜란을 보면 북인들은 의병이 많고, 서인들은 선조를 호종하는 부류가 많았다. 책에서 광해군에 대한 인조반정이 호종공신들이 선무공신에게 권력이 밀린 것에 대한 반발반응이란 것이 옳다. 광해군이 분조활동을 하고 의병을 독려하고, 무군사로 활약하여 전쟁을 지휘했다. 선조는 전쟁이 나자 북으로 몽진하고, 전쟁의 책임을 자신이 아닌 학봉 김성일, 광해군, 류성룡에게 돌린 것이다.

 

북인과 광해군의 뜻이 맞아 류성룡은 탄핵되고, 류성룡은 평생 안동에 은거하고, <징비록>을 저술한다. 류성룡이 전쟁을 지휘할 자리에서 남인출신 정승과 판서를 앉혀 실무를 보았다. 사실 전투를 수행할 때 무관을 싸우기만 하면 되나, 무관이 아닌 문관, 그것도 고위관료층은 정치적으로 내정을 이끌고 외교를 정리하고, 무관들이 싸울 수 있도록 행정적 조치를 해야 했다. 병조가 군사업무를 맡지만, 인구를 차출하고 식량을 대려면 호조의 업무가 필요하고, 물자를 가공하려면 공조의 업무가 필요하다.

 

이런 업무를 맡을 수 있는 인재를 박탈하기 위해 이조의 업무가 필요하다. 이런 많은 일을 하려면 뛰어난 행정조율가가 필요하고, 류성룡은 어김없이 그 능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류성룡은 북인에 의해 탄핵되고, 그 중심에 이이첨 같은 세력이 있다. 선조수정실록에서 류성룡에 대한 비판은 참으로 난감하다. 아주 못나고 간사한 인간으로 표현했다. 이에 반해 이이첨은 뛰어난 인물로 표현된다. 실록의 사관이 있는 그대로 적기는 하지만, 사견이 들어갈 경우도 많고, 뒤에 실록으로 편찬할 때 그 정치적 세력이 누군가에 따라 왕의 평가와 당시 인물의 평가조차 다르게 된다.

 

최근 논란이 많은 광해군의 경우 그의 일기가 완본 이전의 수정본에 많은 교정이 나타났고, 그 교정된 부분을 읽으면 광해군이 완전한 혼군이 아니란 점을 알 수 있다. 류성룡에 대한 평가도 선조실록보단 그가 남긴 <징비록>과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많은 점을 찾을 수 있다. 류성룡에게 지워진 주화오적(主和誤國)이란 오명은 단순히 생각할 일이 아니다. 조선의 병력은 일본보다 못하고, 조선의 군사는 조선 자치통솔권이 아니라 명나라의 통솔권에 움직였다. 게다가 명나라의 횡포는 정말 심각했다.

 

명군도 세력이 나누어져 서로 실적을 올리고, 다른 군세는 적의 수급이 부족하자, 조선인들을 살해하고 목을 잘라 성과품으로 바쳤다. 조선의 사내는 앞머리를 밀지 않으니 죽은 사람의 머리를 조롱하니 그 얼마나 참혹한 일인가? 하다못해 명나라 본국에서 조사관리관을 파견할 정도이니 그들의 민폐가 지독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많은 고통을 받는 것은 백성이다. 류성룡은 서울에 살면서도 지방에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현실을 보았다. 주자의 성리학인 조선에 다른 학문을 같이 수용하여 실질적인 안목을 높여 정책에 활용했다.

 

하지만 제일 심각한 문제는 기득권과의 투쟁이다. 서애 선생은 양반가문이고 재상의 반열에 올라갔으며, 그분의 부인은 왕실가문의 후손인 전주이씨이다. 광평대군의 후예로 재산과 권력 모두 가지고 있지만, 그 힘을 자신을 아니라 국가와 백성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징비록>을 읽으니 서애 선생은 치질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제대로 걷지 못해 기어서 어전에 나가 정사를 펼치고, 아픈 와중에도 정책안을 내놓았다. 류성룡의 적은 열도에서 침범한 왜적만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서인과 북인하고 갈등을 빚었고, 외교적으로 명나라와 여진족까지 닥쳤다.

 

특히나 광해군이 펼쳐준 활약으로 명나라에서 선조보단 광해군이 임금으로 있기에 적합하다는 말을 계속하였고, 이 때문에 선조는 양위소동을 일으켜 대신들의 충성심을 시험했다. 이런 소동 중에 가장 먼저 선조를 달래준 사람은 류성룡이었고, 전방의 이순신까지 정치적으로 지원해준 것 역시 류성룡이다. 당파적인 계략에서 학봉 김성일이 임진왜란의 조짐이 없다고 선조에게 보고했다고 하나, 선조는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를 받고, 류성룡에게 전쟁대비를 하라는 분부를 내린다. 이순신이 수사로 발탁된 이유는 바로 일본에 사신으로 간 외교관의 이야기에서 시작했다.

 

당쟁의 역사에서 무관의 임용과 배치에서 입김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니, 배설이란 장수가 수사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어찌 저런 인물이 수사로 올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 있다. 배설은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할 때, 왜적에게 이길 가망성이 보이지 않아 자신의 배를 데리고 숨다가, 추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기용될 때 그 배를 이용하여 명량해전에서 대승한다. 하지만 배설은 이 와중에 군영을 이탈하여 전쟁이 끝난 후 체포된 뒤 참수된다. 추후 공적을 인정받아 벼슬이 증직되지만, 그가 탈영한 죄로 참수형을 당한 것 자체에서 장수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다.

 

이런 자들이 즐비하게 경상도 수군지휘관으로 오고 있다는 점에서 이순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참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진왜란 배경과 전개는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알지만, 이번에 읽은 책에서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15~18세기 사이 지구는 외계의 영향, 즉 간빙기로 인해 기상조건이 악화된 점이다. 현대과학에서 기상학은 지진, 해일, 홍수, 가뭄, 태풍 등 다양한 기상현상을 다룬다. 그러나 당시 과학지식으로서 저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다른 이유로 원인을 찾으려 했다.

 

서구사회에서 가장 마녀사냥을 활발한 시점이 16~17세기이다. 15세기부터 시작한 마녀사냥이 19세기까지 진행된 원인은 농업의 문제였다. 상업이 발달하고 산업사회가 도래하기 전 대부분의 경제구조는 농업이다. 농사를 지어 수확을 해야 하는데, 이상기후 때문에 농작물의 수확이 저하되고, 게다가 기상이변은 신체적으로 질병을 일으키기 좋았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이 병에 시달려 자주 눕는 내용이 나온다. 류성룡 역시 병으로 앓는 모습이 나온다. 식량문제의 해결은 물류의 이동밖에 없고, 이런 세계화 흐름에서 대항해시대가 열린 것이 주요 세계흐름이다.

 

임진왜란이 조선과 왜적만이 아니라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 포르투갈과 서구의 국가까지 개입된 시점에서 이미 세계는 크게 변화하고 있던 셈이다. 이런 시점에 백성들을 구휼하는 선책보단 이익을 생각하는 지배계급층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를 잃게 될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군사력의 보강이다. 왜적을 막으려면 날랜 군사가 필요하고,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건강한 장정이 필요하다. 조선시대 노비를 군역에 동원하지 않았다. 노비를 사적인 재산으로 여긴 양반들이 노비까지 군사에 동원하면 자신의 이익에 손해 보니 반대를 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당쟁과 사화, 그리고 흥망성쇠를 보면 양반 기득권 세력과 개혁자간의 대립구도에서 개혁자의 실패로 결론난다. 기묘사화의 원인이 조광조의 개혁안이지만, 중요한 원인은 훈구대신 내지 공신들의 권력을 침해했기 때문이다. 류성룡의 탄핵이 된 이유도 역시 그렇다. 전쟁이 승리로 돌아가고 전후공상을 따지게 될 상황에서 류성룡은 파직당하고, 어린시절 친구 이순신은 전사한다. 류성룡이 내놓은 정책은 전시행정만 아니라 일반 행정상황에도 큰 도움이 되는 방안이었다.

 

양반계급의 권력을 감축하고, 백성의 삶을 향상시키며, 군병력을 강화하는 정책은 결국 물거품이 된 셈이다. 고향 안동에 내려간 서애 선생은 선조가 계속 종용해도 끝내 조정에 나가지 않았고, 결국 역사의 큰 빛줄기로 사라진다. 서애 선생을 모신 병산서원은 광해군이 직접 지시한 곳이었다. 광해군은 대북의 세력을 받고 올라갔지만,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문무관을 여전히 챙기고 있었다. 2017년 가을, 나는 안동에 위치한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신 도산서원과 서애 선생의 위패를 모신 병산서원을 다녀왔다.

 

낙동강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그곳에서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느낌이 참으로 달랐다. 도산서원은 약간 높은 구릉지에서 아래로 강줄기와 농경지를 바라본다면, 병산서원은 강줄기 뒤로 높은 절벽이 보였다. 절벽 아래 강줄기는 참으로 멋진 경관을 연출했지만 한편으로 답답하고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서애 선생이 느낀 전쟁에서 고생한 것도 모자라 억울하게 재상의 자리에서 내려와 전쟁의 아픔을 다시 반성하는 그 심정을 과연 어떤 것일까? <징비록>을 읽고, 임진왜란과 관련된 연구도서를 보면서 류성룡이란 인물의 위대함을 느꼈지만, 다시금 느껴지는 것은 서애 선생이 가진 실질적인 정치 감각이었다.

 

류성룡 선생은 소재 노수신 선생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게다가 선조를 임금으로 만드는데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영의정 이준경과 가까웠다. 이준경이 죽기 전에 붕당의 문제를 예감하여 유고를 남긴다. 율곡 이이 선생이 매우 뛰어난 인물은 알지만, 그가 너무 극단적이고 현실보다 이상적인 요소만 말하기에 이준경 선생은 생전 이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봤다. 이에 정철과 율곡 이이의 주변사람들이 이준경을 비난하자, 류성룡 선생은 노신이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고, 그가 틀린말을 하면 그것이 틀렸다고 하면 되지 왜 벼슬까지 빼앗으려 하느냐고 했다.

 

신속, 정확, 명쾌한 정치적 안목이 있지만, 그것을 내놓기 전에는 처음부터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그 상황에 맞는 대답을 내놓은 것이 류성룡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류성룡의 방식에 비난을 하지만, 만일 처음부터 그 방안을 내놓았다면 그대로 올곧게 들었을 리가 없었다. 정말 그런지 모르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류성룡이 임진왜란 온갖 고생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선조가 삼도수군통제사를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바꾸고, 이순신을 고문하고 백의종군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원균이 칠천량해전으로 패하고, 왜적이 다시 침공하자, 수군을 맡을 자가 이순신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이순신을 다시 부를 수 있는 인물은 류성룡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고, 류성룡은 선조의 입에서 이순신을 다시 부르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라마라는 속성이 따르지만, 적어도 이순신과 류성룡의 관계에서 류성룡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게 조선의 조정이었다. 물론 류성룡도 실책이 있었다. 선조가 이순신을 무고하여 역적으로 만들어 죽이려 할 때 류성룡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오리 정승 이원익이 목숨을 걸고 이순신의 죽음을 막았다. 이원익은 태종의 왕자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4세손으로 왕실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선비로 늘 백성을 아끼는 진정한 군자였다. 류성룡이 파직당할 때 이원익이 옆에서 변호하다 같이 파직되었다. 류성룡의 몰락은 남인의 몰락이기도 하지만, 전시행정을 이끈 관료들의 몰락이었다. 왜냐하면 많은 백성들은 선조보다 이순신, 광해군, 류성룡의 활약에 더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무관이나 정쟁의 중심에 있던 남인의 영수인 류성룡은 평가 절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조시대에 오면서 류성룡의 가치는 다시 원위치로 올라가고, 20세기 국사학을 배우면서 류성룡이란 인물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재상이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많은 손실을 입었으나, 전쟁보상금이 나간 것도 토지 하나 잃은 것이 없었다. 물론 국토는 유린되었지만, 그런다고 모두 사라진 게 아니었다. 역사는 너무 간단한 조건에서 보면 안 된다. 전후사정과 다른 국가의 역사기록까지 참고해야 한다.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에 와서 선조와 조정대신에 대해 많은 비난을 날렸다. 시문놀이 하는 습관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로지 류성룡에 대해서만 칭송을 했다고 한다.

 

류성룡 선생이 <징비록>을 집필할 때 피눈물을 흘리는 마음으로 붓을 들었을 것이다. 그 기나긴 전쟁의 아픔, 추위와 배고픔에 죽어나가는 백성들, 전투에서 사라져간 친구와 장병들, 이 많은 고통들이 21세기 우리에게 큰 유산이 되었다. 당시보다 비교하여 현대사회가 평화롭지만, 그 평화는 단순히 좋은 세상이기에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는 것이 각 국가마다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휴전,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한반도는 늘 전쟁위기 속에 평화가 숨을 쉬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애 선생의 <징비록>의 정신을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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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1-06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칸트가 평생을 보낸 쾨니히스베르크가 2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로 넘어가면서 칸트를 러시아인으로 만드는 역사왜곡이 행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행태를 보면 역사에 대한 이해당사자들의 입장이 차이가 나는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 뿐 아니라 동서고금 공통된 일인 것 같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1-06 22:18   좋아요 1 | URL
아독일 그 동네를 치보니 갑자기 스탈린그라드가 나오는 겁니다. 거기가 독일의 땅이 되고 칸트의 동네가 러시아의 관광지가 되었다니!

동북공정과 관련하여도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보더라도 역사는 과거의 것이 결코 아니죵

2018-01-06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6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재 윤두서, 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선구자 조선의 화가들 2
박은순 지음 / 돌베개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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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족보를 보면 나의 가계도가 나와 있다. 족보를 보면서 이상한 점은 딸과 아내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으나, 딸이 시집간 집안에서 자녀의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집에 족보를 보면 할머니가 시집을 오시면 할머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더 나아가 외할아버지의 이름까지 기재했다. 우리집안의 족보는 1702년 임오보(壬午譜) 숙종 때 창간된 것이고, 지금 원판은 강진군 덕정동 추원당에 보관되어 있다. 2017년 유시민 작가와 다른 학자들이 알쓸신잡 시리즈 열풍과 그리고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등의 재발간 및 활동으로 전남 강진과 해남 일대를 소개하게 되었다.

 

강진에 가면 다산초당이고, 해남에 가면 고산 윤선도 종택이 있다. 강진 도암면 강정리에 위치한 추원당은 고산 윤선도 선생이 직접 만드신 한옥이고, 그곳에 보관된 해남윤씨 목판 족보는 고산 선생의 외손자 심단 선생이 마무리했다. 심단 선생의 아버지는 젊은 날에 요절했기에 심단 선생은 고산 선생의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고산 선생이 진행하던 집안족보를 비로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추원당에 그 족보가 300년 넘게 자라잡고 있다. 그리고 심단선생은 심득경 선생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심득경 선생은 고산 윤선도 선생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의 친구 겸 친구이시다. 위에 집안 족보를 이야기한 이유는 한국 국보 240<자화상>을 처음 본 것은 집에 보관된 족보에서 봤기 때문이다. <자화상>이란 작품은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조선시대에서 새로운 화법이었다. 영화 <관상>에서 송강호 씨의 얼굴 포스터가 바로 저 자화상을 본 떠 만든 것이고, 기존 동양의 그림과 다르게 서양의 사실주의적 화풍을 그림에 담았다. 선비의 글과 그림은 선비의 마음과 정신이 드러난 것이다. 화려한 그림과 과도한 허례의식보단 간결하고 소박하고 정확한 이미지를 그림에 불어 넣은 그림이 이제 한국역사 조선에서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집안이 남인이었고, 우리 직계할아버지와 형제분들도 인조 이후로 거의 출사하지 않았다. 그나마 출사한 것은 영조와 정조 시대 정도이다. 정약용 선생의 친구이면서 사돈인 윤서유 선생 역시 순조 이후 조정에 출사했지만, 다산 선생이 직접 묘비명을 새긴 글을 보면 여전히 남인이란 이유로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참고로 윤서유 선생은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날 때 정약용 선생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관아에 갇혀 고초를 겪었다. 사림의 일원에서 시작한 집안이나, 기묘사화부터 화를 당하기 시작하여 붕당의 정쟁에서 늘 변두리에 진전하는 집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산과 공재, 그리고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학문의 세계는 당연히 송학(宋學)이라고 불리는 성리학에서 탈출하여 고학(古學)을 추구했고, 정약용 선생의 경우 고학을 추구하기 위해 다시 공맹의 학문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공자와 맹자가 2,500여년 전 사람이라고 해도, 그 시대는 지금과 달라도 정치와 사회에 대한 견해는 지금 민주주의 사회에 비추어 봐도 다소 납득이 된다. 백성이 근간이 되는 정치,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이다. 그렇다면 백성에 대해 어떤 관점을 봐야 하는가?

 

예전에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성호 선생은 자신의 둘째 형님이신 이잠 선생이 숙종 때 경종을 옹호하고, 상대 당파 노론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다, 숙종의 분노를 사게 되어 죽음을 당했다. 숙종이 직접 친문하여 장형을 당한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잠의 동생이 이익은 물론이고, 옥동 이서 역시 정치와 연이 닿지 않은 시골로 내려와 평생을 학문과 예술에 몰입했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어느 한 개인의 고통은 다른 누군가에게 큰 동력이 되었고, 현세에 이르러 민족의 훌륭한 기록과 유물로 남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성호 이익의 학문은 그대로 정약용 선생에게 이어져 12서라고 불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여유당 전서> 수백권이 탄생했다. 이런 성호 선생도 사숙하던 이가 있으니 공재 윤두서 선생이다. 공재 선생이 태어날 때 고산 윤선도 선생은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증손자를 본 것을 기뻐하며, 해남윤씨 어초은공파(귤정공댁)의 장손으로 삼았다. 예나 지금이나 양자제도는 이루어졌지만, 당시 조선시대 양자제도는 많이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고산 선생도 원래 장자가 아니지만, 양자로 들어갔고,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 섬기며 살아갔기 때문이다.

 

소학(小學)을 필두로 실천적인 자세를 임하는 모습은 조선 중기 북인의 학맥과 유사하다. 북인이 인조반정에서 모두 몰락하자, 일부 북인들은 남인으로 유입된다. 실천적 학문이 돋보인 것은 경세에 대한 관점이고, 경세해야 될 대상에 대한 관찰이다. 그리고 그 대상을 관찰하는 것을 넘어 삶 그 자체로 넘어가는 것 역시 소중하다. 고산 윤선도 선생은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를 짓는다. 세종대왕이 한글훈민정음을 창제해도 양반사대부들은 우리의 글을 무시했고, 한문만 사용했다.

 

한글과 한문 모두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한문을 모르면 과거를 볼 수 없고, 모든 문서를 이해할 수 없다. 지식의 독점이야 말로 권력의 독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른 책에서 보니 고산 선생은 어부사시사를 지을 무렵, 직접 어민의 배를 타고 노를 같이 움직이고, 그물도 같이 들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백성의 삶에 들어가 그들의 애환을 노래로 담아 한글로 된 가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종손 윤두서는 글이 아닌 그림과 시로 백성의 삶을 담아내었다. 박은순 교수가 저술한 <공재 윤두서>란 책의 표지를 보면 윤두서의 자화상이 묵묵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들어가는 말 부분 옆에 어느 아낙네가 낫을 들고 잠시 서 있는 모습이 나온다. 위에 윤두서의 시가 적혀 있다.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려져 있으니, 오가는 사람이 모두 흙으로만 알고, 옥인 줄은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니, 흙인 듯이 가만히 있거라.” 백성의 삶을 관망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삶이란 형태적 요소까지 접근한다. 그림을 보면, 단순히 농사짓는 아낙네만 그린 것만 아니라 나무를 깎는 백성의 그림까지 그린다. 그의 학문은 성리학을 넘어 의학, 천문, 지리, 수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고 넘었다. 고산 선생 역시 의약과 지리학 등 다양한 학문에 능했다.

 

박학다식하면서 옛것을 좋아하는 마음,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많이 보급하는 방식, 실학자들의 사상은 이렇게 맥을 이어간다. 게다가 공재 선생의 아내가 되는 분은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 선생의 종손녀이시다. 지봉유설에 관한 서적을 읽으니 단순히 시문놀이나 하던 양반사대부의 허위의식을 지나 다양한 이야기가 책에 나온다. 지리와 민족, 식물과 동물 등까지 말이다. 조선시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의식이다. 그러나 고학을 넘어보며, 현실을 생각하며,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보면서 역사관도 새롭게 등장했다. 조선의 역사는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조선의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의식이다.

 

20세기를 지나 21세기로 도래하면서 헬조선이란 신종단어가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맥락이지만, 한편으로 사대주의 발상조차도 조선시대에서 이어진 맥락이다. 민주주의 역사는 20세기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시대에 도래해도, 민주주의 사상의 근간이 되는 민본주의는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리뷰를 적는 본인도 한국의 현실에 대해 상당히 회의감을 품고 있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희망을 조금이라도 가지는 이유는 조선시대부터 이미 헬조선화 시키는 부류에 대항하는 지식인이 분명히 존재했고, 그들이 비록 역사 앞에서 좌절한 채 사라졌지만, 그들의 의지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어도 제대로 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이다. 그들은 한국에서 민주주주국가 주인이라고 하나, 사실 재력이란 권력 앞에 너무 약한 자들이다. 이런 나쁜 마인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단어에서 결국 상업(商業)이 제일 앞으로 가고, 사인(士人)들이란 정치가들이 재벌가와 손을 잡으며, 결국 농사짓는 사람과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착취를 당하게 되는 구조로 되었다. 공돌이 공순이란 단어가 있듯이, 비정규직 노동자나 가난한 직장인들은 현대판 노예인 것이다. 노예에 대한 처우를 보면 조선시대 역시 슬프기 그지없다.

 

공재의 기록에 보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노비를 재물로 본다. 채찍질하고, 포학하게 대하여 소나 말보다 못하게 대한다. 저 소와 말도 그 임무를 하지 못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팔지 못할까 봐 잔인하게 상처를 내거나 얼고 굶주리게 하지 않는다. 오직 노비에 대해서만은 이러한 우려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얼고 굶주리게 하여, 해치고 상처 내어 살아서는 그 집안을 파괴하고, 죽어서는 그 재산을 몰수하는데 이로니 슬프구나. 나는 이러한 까닭에 이 기록을 남겨 잘 대우하라고 하였다. 이로써 스스로를 경계하여 반성하고, 또한 자손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다.”

 

어느 대기업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가 직업병으로 암으로 죽었는데도 여전히 현실의 벽은 막혀있다. 수많은 건설노동자 매주 죽어나가는데도 안전관리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죽음이 기업들의 책임과 잘못에 있는데도 오히려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현실이다. 민주주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민본주의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이유가 이렇다. 공재 윤두서는 노비를 매입할 때 재미있는 방법을 사용했다. 어느 누군가 노비를 구매했는데, 알고 보니 한 가족이었다. 노비로 태어난 것도 억울하고 가족까지 떨어지게 만드는 것 역시 잔혹했다. 어느 노비에게 합법적인 절차를 수행하여 면천시켜주기도 했다.

 

한국사회에서 누군가 자신이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에 있으면 아랫사람에게 욕설을 마구 내뱉으며 하대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공재 공은 하인들에게 말을 걸 때 웃으면서 대했다고 한다. 그런 성품은 당연히 그림으로 드러나고, 억지스러운 화법보단 있는 그 자체에 대한 사실성으로 드러난 것이다. <유화백마도>를 보면 하얀 말의 근육 하나하나까지 묘사했고, 친구 심득경이 사망하자, 그의 초상화를 그려 심득경의 가족에게 전할 때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그려 넣었다.

 

권력의 횡포에서 관직을 포기하고, 은둔의 생활을 지향했으며, 백성의 삶에 관심을 가진 점이 곧 근기남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아버지가 살아생전 나에게 우리집안의 내력을 이야기할 때, 고산 윤선도 선생의 고조부이신 어초은 윤효정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초은공은 내 직계 할아버지의 막내 동생 분이었다. 백성들이 흉년이 되어 나라에 세금을 내지 못해 관아에 갇혀 있을 때 자신의 사재를 털어 옥문에 갇힌 백성을 집으로 보내게 한 점을 말이다. 3번이나 했다고 했으니 얼마나 많은 재물이 백성을 위해 사용되었는가?

 

조선시대 실제 양반의 수는 10%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의 성을 보면 모두 양반의 가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중요하지 않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국가이고, 누구의 위에 있어서도 아래에 있어서도 안 되는 주권국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국가라고 해도 민본주의적 근간은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집안은 당쟁의 시기 몰락한 양반이라 높은 벼슬에 오른 분은 많지 않다. 어느 집안에 정승이 몇 명이고, 판서와 참판이 몇 수십 명인 것보다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을 아껴준 것이 더욱 훌륭한 것이다.

 

현재도 당시도 정치가의 책무란 무엇을 생각하면 국가를 위해 살아가야 했고, 조선시대라면 왕도정치를 실행해야 했다. 그러나 왕도정치보단 권력만 지향하니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가 있을까? 백호 윤휴를 찾아보면 그는 양반도 농민처럼 세금을 내야한다고 주장했고, 그것은 노론에 막혀 버렸고, 경신환국에서 죽음을 당한다. 강한 국가를 위해서는 가진 자가 너무 가지게 하면 안 되고, 백성들이 어느 정도 먹고살만해도 부국강병의 초석이 된다고 본 것이다. <공재 윤두서>는 미술사학자적인 관점으로 제작되었으나, 공재 윤두서의 인간을 모르면 작품 자체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실 백호 윤휴는 고산 윤선도와 친했고, 윤휴와 인척이 되는 미수 허목은 윤선도의 묘비명을 지어주었다. 성호 이익의 가족은 공재 윤두서 집안과 친척관계이니 그들의 관계성을 보지 않으면 작품을 알 수 없고, 그 작품성에 선비정신이 담겨있으니 당연히 역사적 맥락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선비화가로 그가 남긴 작품은 국가의 국가와 보물이 되어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새로운 화풍과 조선시대의 역사적 유물로서 현세에 이른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저자 박은순 교수가 확실하게 밝힌 것처럼 시대에 좌절한 그였지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자신의 뜻이 전달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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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12-31 1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집에도 족보가 있었습니다. 노란 족보를 아버님이 신주단지 모시듯 했는데
이사가 잦다 보니 분실했네요. 족보 보는 맛도 재미있을 텐데 말입니다.
만애비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려..

만화애니비평 2017-12-31 14:08   좋아요 0 | URL
족보를 보면서 생각이 드는건, 2000년 되기전 한국의 것들은 낡고 유치한 것이 되고, 이제는 다른 식으로 가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요소가 이상히 흘러가는구나 하고 생각됩니다.

족보는 소중하나, 족보로 모든 것을 결정지으면 안되고, 족보를 보면 한가족의 역사만이 아니라 그 역사로 통한 과거의 기록이기도 하니, 참으로 오묘한 이치가 다가옵니다.

가끔 생각합니다. 과거에 살던 자는 과거라면, 내 자신도 언젠가는 과거가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집에서 아버지가 족보를 소중히 대한 것은 가진게 아무것도 없어서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올 한해 다 지나갔습니다. 내년에 MB가 구속되는 좋은 새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곰곰발님도 감기 조심하고 좋은 새해를 보내세요~

2017-12-31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31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7-12-31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두서 자화상은 해남에 있는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해남윤씨 종택, 윤선도 무덤, 고산 사당을 두루 둘러봤던 기억이 새롭네요. 고산의 무덤이 워낙에 천하명당에 자리잡고 있어서 해남윤씨가 고산 사후 400년 가까이 굳건하다는 설명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산사당 안내판에 ‘불천지위(不遷之位)‘를 모신 경위가 나와 자세히 있던데, 고산 사후 56년이나 지난 영조 3년(1727년) 때더군요. 제가 태어난 고향 마을에도 종갓집 뒷편에 선조가 내린 사액 현판이 걸려 있고,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운 조상의 위패를 모셔 두고 아직까지도 집안 어른들이 해마다 불천위 제사를 모시고 있답니다. 어릴 때 고향에서 자랄 때만 하더라도 그 할아버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를 가끔씩 공부했던 듯한데, 이제는 까마득한 옛추억일 뿐이네요.

만화애니비평 2018-01-01 20:00   좋아요 0 | URL
고산공의 무덤까지 못가고, 고산의 고조부인 어초은공은 녹우당 뒤편 가까운 산기슭에 모셔져있습니다. 어초은공과 고산공은 불천위의 제사를 받들게 된 분이나. 개인적으로 진도 굴포마을 주민들이 고산공을 기리는 제사가 뜻이 깊다고 봅니다. 자신의 조상도 아니나. 가난한 백성을 위해 간척지를 메워 농지를 나누어준 것이 진실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대안이라고 봅니다. 요새 조선시대 운운하면 촌스러워 하는 분이 많으나. 그분들이 해외에 가서 유명 문화유산을 보고 좋다고 여길 때 참으로 한심스러워 보입니다. 이런 문화적 유산이나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이나 별로 다를게 없는데 말이죠.

겨울호랑이 2017-12-31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애니비평님 2017년 한 해동안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내년에도 좋은 글 부탁드리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만화애니비평 2018-01-01 19:57   좋아요 1 | URL
아 요새 유성룡선생에 대한 책을 보는데 기축옥사 당시 이발과 이길 형제의 죽음, 그리고 그 노모분이 압슬형으로 참혹하게 죽어 원성이 높자, 호남의 안방준이 정철의 혐의를 유성룡에게 덮어씌우는 내용이 있어서 이 덧글을 보자말자 놀랐습니다.

이발의 어머님은 귤정공 윤구의 따님인데, 윤구 선생의 동생으로 행당공 윤복이란 분이 계십니다. 저 유명한 다산초당의 주인 윤단의 선조입니다. 윤복 선생은 자재분을 퇴계선생에게 보내 가르침을 받게 합니다.

남인에서 유성룡이 퇴계선생의 수제자인데, 어찌 동문수학하던 사촌누이의 아들 학우가 친구의 어머니를 팔아먹겠습니까? 아무튼 이책도 재미있어 보이니 조만간 서평이 올라갈겁니다.

겨울호랑이 2018-01-01 20:10   좋아요 1 | URL
^^: . 역사를 보면, 광산 이씨 가문과 해남 윤씨 가문이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깝게는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렇지만요. ㅋ 조선 역사와 관련한 만화애니비평님의 글은 좋은 자극이 되어 항상 기대가 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1-01 20:13   좋아요 1 | URL
아하하하 그런 것이라니...
겨울님이 광주 주변에 사는 것으로 아는데
광주에 문중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고, 그래서 518 당시
많은 분들이 희생당하기도 했죠....
아마 호랑이님 어머니도 어초은공의 후손인듯 하네요? ㅎㅎ

겨울호랑이 2018-01-01 20:20   좋아요 0 | URL
^^: 저는 지금 용인에 살고 있지요. 다만 부모님께서는 강진에 사셨구요. 제게는 해남윤씨 가문이 외가쪽이라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외할머니 산소를 강진군 도암면에 쓰셨다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만... 조만간 여쭤봐야겠네요^^: 만화애니비평님께서는 참 자세히 알고 계십니다!

2018-01-01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1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8-01-0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만화애니비평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만화애니비평 2018-01-02 10:53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감사합니다.
올해 좋은 일이 항상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언제 카스피님과 가족분들이 건강하시기 바라겠습니다.
 

1.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영화 <강철비>를 보면서 나는 순간 놀라운 것을 보았다. 작품 내 새로운 대통령이 1권의 책을 들고 있었다. 분명 제목은 영어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저자의 이름이 어렴풋이 보였다. 저자의 이름은 브루스 커밍스 교수, 미국에서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은 사람이다. 최근에 현실문화연구 출판사에서 나온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을 읽어보았다. 책을 보면 아주 복잡다양한 한국전쟁에 대해 소개했다. 한국전쟁은 미소냉전의 이데올로기의 격돌로 이루어진 전쟁이기도 하나, 그 전쟁의 뿌리에는 깊은 원망과 증오가 숨어있었다.

 

전쟁의 역사는 단순히 타국과의 갈등이 아니라 오히려 내부에서 발현된 갈등이다. 한국전쟁은 두고 남침 내지 북침이라는 다양한 표현도 있지만, 이데올로기를 넘어 다시 생각해보면, 매우 비극적인 전쟁이다. 한국전쟁은 20세기 최고의 내전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두고 광복후에도 전쟁에서 보여준 참혹한 복수극 내지 학살은 이미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내재되어 있었다. 광복절 이후 미군정은 친일세력을 정부세력을 편입하고, 이들은 역사의 청산 대신 권력의 총을 받았다. 독립군들은 대부분 미군정보단 자치적으로 활동하거나 혹은 중국 내지 소비에트와 연계했다.

 

독립군 대부분이 대종교 신자인 점에서 민족주의자 내지 사회주의 또는 무정부주의자도 많았다. 일본 패망 전에는 미군의 입장에서 공동전선을 이끌 군세이나, 일본이 물러간 한반도에서 보자면 앞으로 신탁통치에 방해될 존재이다. 그런 갈등에서 친일의 잔재는 우리 사회에 그렇게 흘러갔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을 두고 냉전을 넘어 민족 내부에서 보여준 증오와 공포에서 학살극이 이어졌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친일파에 대한 조선 민중의 증오, 그런 민중으로부터 공포를 느끼는 친일세력의 대립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2. 내전, 끝나지 않은 비극

친일과 군부의 정권장악, 영화 <강철비>에서 곽철우는 북에서 내려온 엄철우에게 자신의 정치철학관을 말해준다. 분단된 나라에서 살아가는 국민들은 분단으로 인한 고통보단 그 분단된 것을 이용하는 자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고 말이다. 에릭 홉스봄이란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는 19세기를 두고 혁명의 시대라 말하며, 그에 따라 넘어가면서 자본과 폭력의 시대로 연계된다. 혁명의 시기에서 18세기 말 프랑스대혁명을 필두로 유럽은 노동문제와 인권문제로 혁명이 일어나고 수많은 민중들이 권력에 의해 압박당한다. 그리고 20세기 민주주의가 도래해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 민주주의가 아니라. 국가권력이 주도적으로 움직인 민주주의이다. 20세기는 전쟁의 시기이고, 전쟁은 자본의 경쟁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한국전쟁은 민족 내부 갈등과 더불어 자본의 논리에 의해 일어난 전쟁이기도 하다. 대부분 식민지 시절 친일세력은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장악하고, 억압받은 민중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착복을 당했다. 그런 와중 북한에서 소련의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가 전시공산주의로 변모되었고, 한국은 미국의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도래되었다. 자본주의 구조적 문제는 자유주의 내지 민주주의와 상관성을 가지지만, 결코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는 자본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지만, 자본으로 자유를 파괴하는 것은 분명 자유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북한과 남한의 차이점은 자유라는 슬로건은 모두 내걸지만, 한 쪽은 자본을 국가권력에 의해 장악하고, 다른 한쪽은 국가권력과 유착하여 장악했다.

 

위쪽은 정치권력이 없으면 피지배계급이고, 아래쪽은 경제력이 없으면 피지배계급이 되었다. 21세기에 도래하면서 역사와 경제학적 구조에 의해 전시공산주의보단 자본주의가 더 효율적인 정치경제구조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영화리뷰 하면서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바로 영화 <강철비>를 이해하려면 역사적 맥락과 정치, 사회, 경제적 흐름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강철비>는 상당히 어려운 영화이다. 기존 한국의 블록버스터 체계에서 상당한 도전을 보여준 작품이다. <쉬리><공동경비구역 JSA> 등 북한과의 갈등을 빚는 영화에서 북한의 어느 개인은 인간적이지 모르나, 북한이란 정치적 체계 그 자체에 대해 악의 축이란 이미지를 강하게 부여했다.

 

물론 폭력국가 내지 테러리즘이 강한 곳이 북한인 것은 사실이나, 이 문제는 상당한 딜레마로 작용한다. 어느 정권이든지 통일이란 주제에 항상 눈여겨보고, 북한과의 외교안보전략이 정권에서 제일 큰 과제이기도 하다. 보수정권조차 북한과의 외교정책을 중요하게 여기고, 한편으로 북한과의 외교적 갈등을 군사적 대응체계로 보여주기도 한다. 북한은 정치경제적으로 실패한 나라이다. 하지만 실패했다고 해도 북한이란 정치적 체계는 붕괴하지 않았고, 붕괴의 위험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적 붕괴보단 숙청이란 단어가 우리에게 익숙하다. 정치와 군사세력이 일치하면 그 국가는 군사력을 통솔할 수 있는 장성들이 최고 권력자가 되나, 한편으로 가장 먼저 죽어줘야 하는 대상이 된다.

 

3. 차가운 머리를 가진 영화 <강철비>

영화 <강철비>는 매우 담담한 영화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로 꺼내기 힘든 부분을 있는 그 자체의 사실을 영화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외교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나라는 항상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국가로부터 간섭을 받는다. 사람들은 한국의 최고 우방국을 생각하면 미국을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은 최고의 우방국을 한국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이 여기는 우방국은 일본이다. 일본과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는데, 주한미군보다 주일미군의 세력이 더 강대하다. 오키나와에 미공군 내지 미해군이 대기중이고, 그 외로 괌에 위치한 기지에도 주둔한다.

 

일본 훗카이도에 미공군기지 역시 주요 군사력 중에 하나이다. 아마 올해 들어 한국의 밀리터리마니아에게 가장 인상적인 영화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이 영화라고 볼 것이다. 물론 미국에 비하면 비교하기 힘들지만, 군사작전과 전략, 무기체계와 첩보전은 상당히 잘 짜여진 연출이었다. 감독 양우석이 <변호인>으로 흥행할 때, 그에게 무기는 오로지 송강호 씨의 흡입력이었다. 송강호 씨가 보여준 <변호인>에서 그가 차지한 비중이 너무 거대했다. 그러나 송강호 씨는 그 거대한 모습을 감춘 듯 작품 속을 유영했다. 그렇기에 송강호 씨의 연기는 더욱 중요했다. 하지만 <강철비>에서 주인공인 곽도원 씨와 정우성 씨의 연기배분을 잘 정리했다.

 

작품에서 샷과 샷의 전환에서 치밀한 상황을 아주 명쾌하게 전환해 나갔다. 첩보전이나 심리적인 요소에서 시간을 끌기보단 그런 요소들을 빠르게 진행하여 작품의 긴장감을 더욱 상승시켰다. 작품 중간의 격투나 전투장면은 억지로 길게 끌지 않았고, 특히나 <군함도>처럼 영웅 캐릭터가 잘 죽지도 않고, 다쳐도 금방 회복되는 무리한 연출을 넣기보단 오히려 첩보전에 어울리는 장면으로 위기를 넘긴 게 좋았다(북한군 특수부대원이 넘버1을 암살하려 할 때 시신과 넘버1를 바꿔치기한 장면).

 

4. 영화 시작점인 쿠데타 요소는 무엇을 말하는가?

북한에서 정권이 바뀌면 그전에 승승장구하던 자를 숙청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번 북한정권에서도 자신의 형제나 숙부조차 처형하고, 많은 군부세력이 바뀌는 일이 뉴스지면에 나온다. 어제까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나누며 웃었던 자들이 어느 순간 어둠으로 사라진다. 영원할 것 같은 권력의 좌, 하지만 눈 밖에 나는 순간 차가운 감옥에 갇히거나 고통스러운 고문과 죽음이 기다린다. 그들이 죽음에서 무슨 죄를 지었는가? 라는 의문보다 무엇을 위해 사라져 가는가? 라는 권력의 관계성을 봐야 한다.

 

영화를 보면 이중교란이 나온다. 반역자를 제거하라고 말한 자가 반역을 저지른다. 그가 반역을 저지른 이유를 본다면, 계속되는 군부와 당 내 권력자의 숙청, 그동안 자신들이 살아온 인생과 국가 자체의 이데올로기가 그렇게 만들었다. 현실과 이상, 그리고 권력과 미래의 관계성에서 극단적 선택을 택한 것이다. 단지 영화에서 본다면 북한군이 쉽게 남한으로 넘어올 수 있는 비밀통로가 있다는 설정은 무리수이기도 하나, 영화는 하나의 설정이란 조건에서 본다면, 그들이 처음부터 노린 전차의 탈취, 군병원의 습격은 첩보전의 긴박함을 보여준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아니라면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이상에 갇혀 몰락할 때, 권력이란 이름은 그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다. 문제는 권력은 내부의 문제이기도 하나, 그 권력의 중심부가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주변국가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북한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문제는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고, 핵전쟁이 일어나면 전후복구비만 아니라 많은 인명이 손실되고, 특히나 남북 간의 화해는 전혀 진정될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 장기전이 되면 국가 내부적으로 큰 소란이 일어나고, 전쟁에 따른 인명과 재산손실 역시 만만치 않다.

 

5. 역사는 현실과 과거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의지에 따라 전쟁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미국에 의한 작전통제권이 이루어지고, 더 크나큰 위협으로 중국과 일본이 크게 관여한다는 점이다. 20세기 한국전쟁에서 모택동은 17세기 병자호란 때 개망나니 같은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를 가진 자가 결국 조선에 침입한 적을 막아내었다는 논리다. 모씨의 역사는 350년 차이가 나는데, 아직 중국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두고 우리는 왜놈의 난을 부린 최악의 상황이라면, 중국은 항왜원조(抗倭援朝)라 부른다. 왜국에 저항하여 조선을 돕는다. 201712월 중반에 한국대통령은 중국에 방문했다.

 

이때 중국 주석은 난징대학살 기념행사에 갔다. 난징대학살 정도의 사건이라면, 일본에서는 자위적인 행위인 원폭투하 희생자를 기리는 날이고, 한국에서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과 맞먹는다. 그 나라에서 가장 빼놓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날에 타국의 대통령이 방문을 하자, 중국 주석은 바로 만나지 않고, 행사 후 만났다. 만일 한국의 대통령이 중국의 행사장에 갔다면 일본은 항의했을 것이고, 자국에서는 중국에 너무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을 것이다. 반대로 주석을 바로 만나지 못해 외교적으로 무시당하지 않았냐는 말을 나오기도 한다.

 

한국전쟁 기념일에 대통령이 UN묘지에 참석하지 않고, 외국정상이 왔다고 그들을 만나러 갔다면 그것이 더욱 문제가 아닌가? 정상은 자국민과 자국의 이익이 우선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역사란 계속 되풀이 되고 비극은 제2 내지 제3의 배우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것이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영화 <강철비>에서 잘 나오는 게 바로 일본과 한국의 관계에서 미국의 입장이다. 영화가 그렇다고 하나, 사실 말을 하지 않아도 미국은 한국보다 일본의 편을 들어준다.

 

아베를 비롯한 일본 권력가들이 지금 노리는 것을 일본헌법 개정이다. 일본의 군사력은 자위대라 하지만, 자위대는 군사조직이 아니다. 군사조직이 일본에 생기면 그들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된다. 전쟁이 다시 할 수 있는 것은 한반도에 전시상황 무력개입이 가능하다. 한국전쟁으로 일본에 난민이 오면 인도적인 대우보단 사살 내지 감금이란 비인도적 행위를 할 것이란 기사를 보았다. 미국이 우리의 절대우방이라면 일본에 간 우리 한국인 전쟁난민이 인권유린당해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나, 사실 주한미군조차 우리나라 법규자체에 상당히 큰 면책권을 가지고 있다.

 

6.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미국이 우방이라 하나, 그들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우리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 미국과 동맹을 맺고 교역을 하는 것이다. 영화리뷰를 쓰면서 미국경제학자 책이 생각난다. 미국의 재정은 감축되고, 국민 대다수는 빈곤계층으로 몰려간다. 부익부 빈익빈이 미국을 병들게 한다. 문제는 부자들의 증세 아닌 감세는 국고를 비게 하고, 그 국고는 간접세로 빈곤한 자들의 주머니를 노린다. 직업이 1개 아니라 2~3개 가지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미국인들의 현실에서 암울한 이유는 미군의 군비는 엄청나다는 점이다.

 

군비의 확장은 단순히 평화유지만이 아니라 방위산업체와 계약을 맺고 상당한 액수의 무기를 구매한다. 무기체계는 독점적 구조이기에 독점시장이 형성되고, 그 세금은 미국 국민 대다수가 부담하고, 나머지는 이윤은 상위계층에게 몰린다. 전쟁의 경제학이란 말이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하고 난 뒤 이라크를 경비를 보던 군사세력은 미군이 아니라 블랙워터라는 군수경비업체였다. 이들을 고용한 미국은 엄청난 예산을 투입했다. 군인이 아닌 민간이 이라크를 지킨다는 방식으로 움직이나, 군방산업체와의 계약은 결국 독점으로 이어진다.

 

이라크전쟁은 테러국가 내지 불량국가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뒤에 에너지 자원, 경제 등의 효과가 동원되는 전쟁이다. 기업의 이윤인지 국가의 이윤인지 몰라도, 결국 누군가 이익을 보고, 단지 그 이익을 더 많이 보는 기업이 속한 국가는 이익을 볼 수 있는 게 정치적인 전략이 될 수 있었다. 전쟁나면 가장 이익 보는 것은 2종류이다. 그 나라에서 이데올로기로 정치적인 입지를 굳힐 수 있는 사람, 전쟁무역으로 매출을 올리는 무기상인이다. 하지만 그런 이익은 강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노릴 수 있는 조건이다.

 

7. 약자에게 선택은 없다.

중국이 임진왜란을 두고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 부르면, 위에서 언급한 모택동이란 인물은 한국전쟁을 무엇이라 불렀는가? 항미원조(抗美援朝)라고 불렀다. 영화 <강철비>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군수뇌부가 중국 외교군사라인과 연락을 취할 때, 그가 이렇게 말한다. 중국과 조선은 형제의 나라라고 말이다. 중국과 조선이 형제의 나라로 불린 것은 조선이 홍타이지에 의해 침략당한 정묘호란 시기이다.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낸 후 이괄의 난을 겪은 후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서인정권은 17세기 명·청 교체시기에 전략을 잘못 세워 결국 정묘호란을 맞이하고 후에 병자호란으로 이어진다.

 

명나라와 조선은 군신의 관계 내지 아버지와 아들이라 한다면, 청나라는 조선에게 형제의 나라가 될 것을 종용했다. 물론 조선의 아버지가 사라진 후 청나라는 조선에게 아버지 노릇을 하기 위해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인조를 남한산성에서 내려오게 만든다. 그 이후에 조선은 청나라를 엄청 무시하고, 명나라 만력제 이후 자신에게 벼슬의 칭호는 필요 없다는 선비들이 많으나, 그들은 배고픔과 가난으로 죽어가는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았다. 명이 중원 누비든 청이 누비든 조선의 백성이 가장 소중한 게 당연한 일이나, 그렇지 않았다. 지나간 명분에 사로잡힌 채 망령의 굴레에 계속 집착했다.

 

영화 <강철비>는 선조-광해군-인조로 넘어가는 조선의 모습이 생각난다. 북한은 중국, 한국은 미국을 의지하나, 결국 마무리는 우리의 몫이다. 핵무기 여파가 일본 이지스함에게 미치자, 미국은 한국정부 편에서 벗어나 일본의 입장을 대변한다. 미국CIA 한국지사장도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게 아니라 일본에서 대기를 한다. 한국정세를 보고 일본과 같이 처리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전략방침이란 점을 보여준다. 정말 그럴까? 아닐까? 하지만 어느 정도 현대사회에 국내 정치를 넘어 외교, 안보, 군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약간 의식하고 있는 부분이다. <강철비>에서 그 요소를 너무 대놓고 밝힌 것이 묘미이다.

 

한반도의 상황이 너무 위급해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딜레마, 전쟁의 집중화이냐 아니면 조금 더 대화를 나눌 것인가? 정권의 대변자 내지 권력자 중에 현재를 유지하느냐 아니면 변화를 주는가에서 새로운 상황이 도출된다. <강철비>에서 곽철우는 자신의 소신을 이야기한다. 한반도에 강력한 핵을 가져야 한다고 말이다. 핵무기를 가질 수 있는 국가는 강대국으로 한정되어 있고, 한국은 가질 수 없는 나라로 되어 있다. 핵무기를 가진다는 점은 최악의 상황에서 국토를 유린하면 상대편을 모조리 말살할 수 있는 대안을 가진 것이다.

 

영화에서 재미있는 대사가 나온다. 북한은 20년 전에 밟아야 했다고 말이다. 핵무기가 나오기 전에 모조리 섬멸했다면, 지금 북한은 핵무기체계를 완비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핵무기의 위력은 같은 무게라도 1945년 일본 본토를 강타한 2개의 핵폭탄보다 더 강력하고 위험하다. 게다가 핵폭탄이 터지면 화염, 폭풍, 방사능만 문제가 아니다. 폭발이 일어나면 연쇄적으로 폭발물 내지 인화물 역시 타격을 입어 연쇄반응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서울 경기권에 대다수 국민뿐만 아니라 모든 자본과 인프라가 밀집하고, 후방인 전남과 경남지역에는 핵발전소가 포진한다.

 

핵무기가 한반도 아무 곳이나 타격해도 무사할 수 없다. 전쟁을 막기 위해 외교안보 군사력이 중요하나, 영화에서는 그 이상의 군사력을 원한다. 영화를 보면서 한국의 우방으로 미국이 가장 중요한 위치이나, 한편으로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이 무시를 못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한국과 비교하여 더 중요한 국가이다. 일본 자체가 극동아시아에서 소비에트연방과 중공을 견제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써 성장했고, 그것을 토대로 일본은 산업경제를 발달시켰다. 일본 극우는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을 부정하면서도 받아들인다. 야스쿠니 신사에 전범들은 미국의 핵투하 이후 국제재판 이후 사형당하고, 거기에 봉인되었다. 그들의 후손은 야스쿠니에 가서 전범을 기리고, 미국의 편을 들어 일본헌법을 개정하려 한다.

 

영화 <강철비>에서 이런 국제 정서속에 2명의 철우가 나온다. 우리는 영화에서 2철우의 한자이름에서 북한의 鐵友는 강한 친구이고, 한국의 哲宇는 생각하는 공간으로 나온다. 정말 2명의 철우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이 힘든 국제세계에서 강한 힘을 가져야 살아남을 수 있지만,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게 정말 어렵다고 말한다. 북한의 철우는 가족과 같이 살지만, 한국의 철우는 가족과 떨어져 산다. 남북이 통일되기 전에 한국의 철우조차 자기 가족과 다시 결합하지 못한다.

 

곽철우의 막내아들이 말한다. 아빠 엄마하고 다시 살면 안 되냐고 말이다. 우리 한국 사회조차 곽철우의 모습처럼 살아가는데, 그 이상의 길을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그렇게 같이 가야 하는 것이다. 곽철우와 성형외과 의사는 부부였으나, 그들은 이혼했다. 부부는 헤어져도 그들의 자식, 즉 우리의 미래는 그들이 다시 결합하는 것을 원한다. 어느 누군가를 적으로 보거나 대화의 상대로 보지 않으면 그들과 다시 결합할 수 없고, 미래의 우리들은 다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영원한 아픔을 가지고 가야 한다. 안타까운 사실은 무뚝뚝한 엄철우 역시 딸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아버지란 점이다. 2명의 철우가 만나 그들이 하고자 하는 사명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2명의 철우가 원하는 것은 그들의 자녀,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 살아가려는 것이 아닐까?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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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2-1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언론에선가 <강철비>가 <JSA> 이후의 남북관계를
그린 최고의 영화라고 하던 차에, 궁금증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멋진 리뷰로 만나 보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적대적 공생이 일상화된 시절을 뒤로 하고 함께 하게
될 날이 과연 올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12-19 09:38   좋아요 0 | URL
한명기 교수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보면서 현재 우리나라 상태가 그 당시와 유사사례로 이어진 점, 그리고 외교적 군사적 파워게임에서 여전히 밀리고 있는 점에서 이 리뷰의 기초단서가 되었습니다.
어느 글을 보니 이때까지 북한이란 적으로 나오거나 암묵적으로 적이라 규정하나, 여기서는 무조건적 적이기보단 그 안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 점에서 기존 북한과의 갈등을 그린 작품에 비해 더 나은 길을 보여준 게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