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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의 혁명
라울 바네겜 지음, 주형일 옮김 / 이후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스펙타클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스펙타클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영어철자로 spectacle이며, 그 영어적인 풀이는 look on, remain a spectator이다. 즉 그저 방관하는 사람,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의미이다. 보통 스펙타클이라고 하면 대부분 스펙타클한 연출, 세계, 공연, 화려함을 말하지만 사실 스펙타클이란 그렇게 좋은 의미를 가진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스펙타클을 오히려 긍정적인 단어로 혹은 뭔가 있어 보인다로 생각한다. 흔히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뽀대가 난다”라는 것처럼 자신이 무엇을 알고 모르고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사용되는 단어가 바로 스펙타클이다.
사실 스펙타클은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같의 사회 관계를 뜻한다. 스펙타클하다는 것은 곧 이미지 인간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인간들 자신이 만들어 버린 각종 눈에 보이고 보이지 않은 존재에 의해 오히려 인간이 지배당한다. 그래서 스펙타클은 인간 자체가 능동적으로 살아온 것이 이제는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된다.
또한 스펙타클은 계속 인간들로 하여금 계속 재생산되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거대한 급류이다. 하지만 그런 스펙타클은 인간들을 지배하기도 하나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조장되기도 한다. 흔히 우리 현대사회를 소비의 사회로 불리기도 하고 혹은 시뮬라시옹(Simulation) 세계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는 정말 진실을 앞에 두고 보지 못하는 장님처럼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이른바 스펙타클이라는 인간을 수동적으로 변하게 하는 원인이라 볼 수 있다. 예전에 상황주의자 사상가이면서 전위예술 영화감독인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를 읽어보았다. 스펙타클에 의해 소외되어가는 사람들 그들은 이른바 사회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는 노동자였다.
그리고 지금 내가 보고 있던 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은 기 드보르와 함께 국제상황주의자에 소속된 인물이었다. 이들은 스펙타클을 분석하고 정리하여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이들은 인간 스스로에 대해 자기 존재감을 성립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것을 위해 투쟁을 하였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이 2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스펙타클로 작용하는 것을 우려하여 각자 다른 방법으로 살아간다.
기 드보르는 국제상황주의협회를 탈퇴한 뒤 시골 오두막에서 지내며 조용히 살아간다. 그는 자신의 서적처럼 자신이 군중들에게 스펙타클로 존재하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자신의 심장에 권총을 당겨 심장병에 대한 고통을 모두 해소한다. 여기에 반해 라울 바네겜은 최대한 자신의 모습에 미디어에 노출되기를 거부했다. 물론 그도 기 드보르처럼 스펙타클 요인으로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회는 이런 인물들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참으로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보는 순간 왜 그런가를 생각하고, 이들을 단순히 쫓아가기 바라는 것보단 이들의 생각과 의미를 돌아봄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 사회라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기도 하나 그것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정치적인가 아니면 타인의 속박에 의한 정치적인가가 중요하다. 이른바 헤게모니적인 요소로 어느 집단이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여 여러 인간들을 속박시키게 하거나 그런 속박을 위해 문화의 장치로서 스펙타클의 사회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는 노동자와 예술가가 자유로운 사고를 표출해야하나 오히려 표출할 수 없다고 한다. 이미 미디어에서 그런 자유로운 사고를 표출할 수 있는 수단을 통제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미디어에 의존하고 그것의 방향에 따라 우리도 변해간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보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생각나던 노래가 있었다. 가수 김종서의 플라스틱 신드롬(Plastic Syndrome)이란 노래였다. 이 노래는 예전 학창시절 김종서 노래를 자주 따라 부른 나의 추억의 노래다. 그런데 이 노래의 가사들을 보면 마치 스펙타클의 사회를 비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 모든 걸 다가지려 하지만 꿈은 꿈대로 남겨둬 오늘 늦은 밤 TV토크쇼 너를 천사로 만들 패션 매거진 세상은 슈퍼맨만을 기억해 거리엔 똑같은 얼굴의 사람들
나는 나 너는 너 서로 비교하려 하지마 나는 나 너는 너 모두 똑같이 살 순 없어
세상 모든 걸 다가지려 하지마 꿈은 꿈대로 남겨둬 세상 모든 걸 꾸미려고 하지마 지금 이대로 살면 돼
너의 화려한 겉모습보다 네안에 숨어 있는 향기를 사랑해 지갑속 가득한 신용카드가 영원한 행복을 줄거라 믿지마
스펙타클로 채우진 이 세상은 인간의 욕망이 그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으로 이어진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빌려본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책에서 자크 라캉 편에서 인간의 욕망을 이야기한 것이 있었다.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정말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가 아니라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여 자기의 존재는 거기에 맞추어야 하는가 말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에는 문화라는 것이 필수불가결적으로 따라 다닌다. 그런데 이 문화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이다.
현대사회는 이른바 소비의 사회라고 한다. 인간의 문화는 소비로 통해 이루어진다면 결국 인간이 소비할 수 있는 능력에 달라진다. 누가 어느 것을 시작한다면 대중들은 그것을 따라할 의무도 없이 따라한다. 그것이 곧 스펙타클이란 것이다. 그러나 그런 스펙타클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이른바 군중으로부터 소외되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스펙타클의 영향을 받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계속하여 타인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또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본인의 의지가 아님에 따라 계속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게 된다. 인간들은 자신의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 소비를 한다. 현대 사회에서 기호는 상품이고, 상품은 기호라는 말이 있다. 본래 상품적 가치는 본래 기능에 비해 반도 못 미치지만 그 상품을 산다는 것은 기호를 소비하게 되어 그 기호의 소비로 통해 군중은 문화의 소비를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스펙타클은 계속 인간의 욕망과 허영심에 의해 재생산되고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인간들은 다시 스펙타클로 이어지는 문화적 소비를 계속 하게 된다. 인간이 문화사회를 접하는 순간 스펙타클은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그 스펙타클이 인간 스스로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다.
이 책의 마무리 부분에서 역자의 말을 본다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청소년은 이미 스펙타클의 지배로 통해 이 사회에 길들어져 있다. 그는 아직 정신적으로 미성숙하나 육체적으로 어른 못지않다. 어른과 어린이라는 중간에서 그들은 소외된 부류로 되어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다. 그런 처지를 비관하여 어른으로 가고 싶으나 어른이 되는 순간 자신들은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는가에 고민한다.
왜냐하면 모든 어른들은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니고, 다시 소외가 더욱 심해지고 기계적인 인간생활로 전복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위치도 불안하나 내일의 미래도 더욱 불안하다. 군중 그리고 그 중에서 노동자의 삶을 방관하게 하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어떻게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가?
이 책은 프랑스에서 가장 큰 혁명 중에서 5월 혁명을 이끌어 낸 책이다. 1968년 프랑스 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여성들이 인권을 위해 일어섰다. 솔직히 말해 나는 5월 혁명은 잘 몰랐다. 프랑스하면 떠오른 혁명은 1789년 7월에 일어난 루이정권을 전복한 혁명이다. 역사책에서는 그 혁명이 성공했다고 하나 결코 성공한 혁명만은 아닌듯하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농민과 노동자는 계속 소외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재미있는 인물들이 소개된다. 이른바 아나키스트라는 반정부주의자이다. 이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는 별로 알 수 있는 부분이 없다. 그런데 이들이 왜 이렇게까지 목숨을 걸면서 싸울까? 물론 폭력이란 이름은 정당화 될 수는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이 “노예 없는 주인”이 되고 싶은 것이었다. 노예라는 것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노예제도를 넘어 인간 그 자체가 노예도 아닌 주인도 아닌 인격체로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인간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권력이란 이름이 정의의 심판으로 변질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책표지 뒷부분에 나오는 “우리가 얻을 것은 즐거움의 세계요, 우리가 잃은 것은 권태뿐이다!” 문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