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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2disc)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 / 대원DVD / 2005년 11월
평점 :
타카하타 이사오는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활동하는 감독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와 더불어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중에서 아주 오랜 기간동안 작품을 내논 감독이다. 그의 작품으로 반딧불의 묘, 추억은 방울방울, 바람계곡의 나우사카, 천공의 성 라퓨타, 엄마 찾아 삼만리 등 주로 어린이나 어린 청소년들이 볼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미야자키 감독과 같이 만든 바람계곡의 나우사카와 이번에 필자가 리뷰하려는 평성 너구리전쟁 폼포코는 자본주의 사상에 따른 환경문제와 인간의 가치론적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다. 필자가 이 애니메이션을 리뷰하게 된 동기는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라는 애니메이션을 인문사회학적 관점에서 만든 서적을 보고 결심하였다,
우선 이 애니메이션의 발단을 알아보면 일본은 태평양전쟁 패망 이후 미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한다.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경제가 발전하고 산업은 부흥하지만 그 반대로 인간이 밥벌이가 가능한 공장과 인간이 잠을 잘 수 있는 아파트가 들어서면 설수록 기존에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 인간의 욕구로 인해 망가져 간다.
자연과 공존이 무너지면서 도시가 개발 되는 곳에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잃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너구리들에게도 닥치기 시작했다. 너구리 무리들은 인간의 지나친 개발활동으로 인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생태계가 무참하게 사라지는 장면을 바라보게 된다. 작품 내의 배경은 도쿄시가 거대한 도시로 가면서 도시 밖의 있던 사람들까지 몰려오게 되자 도시개발이 가속화된다.
이런 가속화된 도시개발에 국가정부에서는 개발사업을 국책사업으로 내세우면서 이 이야기의 갈등이 시작된다. 그것은 작품 내에 등장하는 너구리들은 기존에 자신들의 생태계에서 만족하면서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터전인 산을 개발하자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과 자연파괴에 대한 인간들의 인식변화에 대한 대사가 나온다.
"인간은 예전에 우리와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하느님이나 부처님보다 위대하구나"라고 말이다. 여기서 인간은 예전에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은 원래 인간은 너구리와 같이 자연 안에 머물고 살아가는 단순한 생명체라는 것인데, 어느 순간 하느님이나 부처님보다 위대하다는 뜻은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의 일부가 아닌 그 이상으로 자연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일본의 민속신앙은 토테미즘, 애니미즘과 같은 동물신 숭배와 샤머니즘과 같은 눈메 보이지 않는 정령을 숭배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풍습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물론 한국도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사상으로부터 시작했다,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은 샤머니즘, 어머니 웅녀는 토테미즘 종교를 가진 부족이고 두 부족이 연합하여 생긴 것이 고조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는 서양종교철학은 인간은 신의 대리 혹은 신이란 존재 아래라는 것으로 안다. 그러니깐 신의 전지전능 다음으로 인간이 탁월한 이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합리론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의 이를 위해서라면 자연은 희생 되도 상관없다는 논리나 사고이다. 그래서 그런 사고는 고스란히 동양의 국가와 민족으로 넘어오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하는 동양사상에서 경제지배논리사상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왜 많고 많은 동물 중에서 너구리일까? 필자는 솔직히 일본 문화에 대해서 잘 모른다. 애니메이션 보는 것과 애니메이션 관련 서적을 보는 것과 대학교 시절 우연히 신화학을 듣고 나서 약간 이해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 너구리는 한국이나 일본의 전설에서 인간으로 둔갑할 수 있는 동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것으로 우리 주변에 아주 흔하게 등장하는 동물인 것이다. 전설에서 둔갑술이 유능한 동물로는 여우, 학이 있는데 이 작품에서나 한국 고대전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로 애니메이션 코스프레 컴플렉스에서 주인공의 코스프레 동호회에서 산으로 수련 갈 때 그림병풍에서 학의 사랑이야기가 나오는데, 학이 사람으로 둔갑하는 것이나 한국에서도 이런 비슷한 전설이 존재하는 것과 우리 집의 여우신령님이나 한국에서의 구미호전설을 생각해보면 일본과 한국의 전설은 겉은 다르나 속 내용이나 흐름이 비슷한 점이 많다. 너구리와 같은 경우 예전에 개그맨이 나온 영화에서 여자배우가 너구리요괴가 인간으로 둔갑하여 나온 이야기가 있듯이, 필자는 이 너구리전쟁 폼포코에서는 많은 동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너구리전쟁 폼포코에서 필자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경제개발에 따른 기존 사상과 마찰이다. 아무리 너구리들이 힘을 모아서 인간의 개발행위를 저지하여 오늘 일하고 있는 인부가 떠날지는 몰라도 다시 새로운 인간들이 산으로 찾아온다. 세상이 변화하는 것을 아무리 막아하고 멈추려 해봐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의 개발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너구리들은 신적인 힘을 가진 너구리원로 3마리를 초대하는데, 이 신적인 힘을 너구리는 기존 일본인들이 가진 전통적인 사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기호이다.
이 원로 너구리 3마리 중에 하나는 붉은 후광에 칼은 들고 있는 것은 마치 부처님을 호위하는 사천왕처럼 보이고 다른 하나는 마치 절간에서 중생을 너그러이 바라보는 석가모니 부처님 보이며, 마지막 하나는 칼집 안에 칼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치 고대부족의 수장같은 느낌을 준다.
아마 일본의 기존 종교사상이 도교, 불교, 애니미즘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인듯하다. 원로 너구리 3마리의 등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작품 초반에 너구리들이 “인간은 하느님이나 부처님보다 위대해졌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대사를 인용하여 부처 모양을 한 너구리는 인간에게 대항하다가 법력을 너무 사용하여 죽게 되는 점다. 이 죽음의 의미는 인간의 경제지향주의에 따른 파괴는 자연에게만 영향 준 것이 아니라 기존 일본인들의 가치관마저도 변하게 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칼을 차고 있던 원로너구리는 본래 신사에 머물고 있는 신관너구리로 작중 대화에서 기존에 그는 인간들에게 존경심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도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어깨를 숙이게 된다. 하지만 이 너구리전쟁 폼포코를 보면 과연 너구리를 통해 자연생태계 파괴만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이상 그 이하가 존재할까? 사실 이 너구리전쟁 폼포코가 7세 이상이라고 하지만 내용적인 해석을 하려면 17세 이상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그건 작품 내에 담은 그냥 보기 쉽게 등장하나 막상 이 이야기들을 지켜보면 매우 깊이가 있고 의미심장하다. 작품 내에서 자연세계에서 쫓겨나는 너구리가 이런 말을 한다. “원래 인간은 너구리였지만, 너구리가 될 수 없었다고” 말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내용인가? 인간은 원래 인간인데, 그런데 그 인간이 처음에 너구리라니?
사실 너구리는 인간과 친숙한 동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런 인간들이 본래 인간으로 살아가기 보다는 비인간적인 존재가 되었다. 또한 본래 너구리가 너구리인데 너구리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그건 우리 인간들이 자연에 대한 존중심과 더불어 우리 마음 즉 인간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너구리가 살아갈 장소가 없어지는 것은 자연생태계 파괴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가치관까지도 상실했다는 뜻이다. 경제성장 중심 사고로 인해 인간은 일정한 척도와 기준을 정해 거기까지 올라오지 못하면 불순물이나 인간이하로 취급당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인간을 소외하는 근본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모든 인간의 가치와 기준을 다름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경계로 구분하여 달성되지 못할 경우 거기서부터 분류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교육정책을 보면 공부 못하면 선생이나 학우, 부모님마저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공부를 잘하는 어떤 사람이 사실 인격이나 성격 등이 많은 문제가 있더라도 공부만 잘하면 뭐든지 좋다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건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무한 경쟁사회 패배하는 순간 인생의 낙오자로 만들어버리는 이 냉정한 세계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인간성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이 작품에서 결론부로 진행되면서 너구리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살아갈 터전도 공간도 상실한 채 그냥 여기서 죽어야 하는지 아니면 새롭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런 상황에서 너구리들의 산을 개발하는 대표적인 회사 원더랜드 쪽에서 너구리에게 접촉을 시작한다. 여기 원더랜드 사장 옆의 유능한 비서가 한명이 등장하는데, 그는 사실 인간으로 둔갑한 여우였다.
여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으로 둔갑하여 인간 세상에 적응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경제구조에서 말이다. 그가 제시하는 것은 기존 가치관을 두고 있는 너구리(기존 일본인)에게 어려운 선택이겠지만, 살아남는 방법은 그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우리나 너구리들이 알고 있던 것이다. 생각나는 장면 하나가 만약 너구리들이 다 둔갑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우들은 어떻게 했는가?
여우는 이렇게 대답한다. 변신하지 못하면 그대로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만약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버리면 과거의 도태된 여우처럼 죽게 되거나 혹은 은밀한 곳에서 조용히 숨죽이며 살아가야할 운명이 된다고 말이다. 이 잔혹한 운명은 너구리도 거쳐야 할 필수적인 통과의례였다.
결국 너구리들은 죽음이 아닌 삶을 택하여 인간세계에 들어가서 힘들게 하루하루 살아간다. 너구리무리에서 할머니너구리는 식당에서 일하고, 어느 젊은너구리는 셀러리맨,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힘들게 이 세상에 살아간다. 결국 너구리들(기존 자연과 융화하며 살아가는 가치관을 지닌 인간)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현실사회에 맞추며 살아간다.
하지만 둔갑하지 못한 너구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아즈 먼 산으로 들어가 은둔하거나 혹은 도시를 떠나지 못한 너구리는 인근 농장에서 닭을 훔쳐 먹거나 혹은 훔쳐 먹다가 덫에 걸려 최후를 맞이하기도 한다. 또한 길거리를 서성이다가 지나가는 차에 부딪혀서 즉사하기도 한다. 짐승들이 도로에 배회하다가 차에 치어 죽는 것을 로드킬(load kill)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얼마나 많은 너구리들이 로드킬로 죽어가고 있는가? 그런 너구리로 통해 우리 인간은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내었는가? 인간 문명사회는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을 죽이고 그 동물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인간성마저도 죽이고 있다.
이런 절망스러운 세상에서 너구리들은 끝까지 좌절하거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폐허가 되어 버린 자신들의 터전에 모여 다시 모이고 만나 모두 같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한다. 이 모습은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망가진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인간의 진실한 가치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보내는 메시지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