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이라는 거짓말 - 진정한 나를 찾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이유
앤드류 포터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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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현대사회에 오면서 우리는 진짜라는 의미에 많은 열정을 부여하게 되었다. 영화, 스타, 스포츠, 정치사회 이데올로기까지 말이다. 그러나 막상 거기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물어보면 뭔가 상세하게 답변하거나, A에게 질문에 답변내용이나, BC, 더 나아가 그밖에 사람에게 물어봐도 딱히 특별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대부분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란 보편성이 작용할 줄 모르나, 보편성이란 하나의 상식에 기인하나, 개성이나 자기 안의 열정은 보편적 상식에 의해 등장하는 게 아니다. 개성에 대한 보편성은 대다수 사람들 모두 자기만의 캐릭터를 소유하고 있는 점이다.

 

문제는 캐릭터라 불리는 개인성이 어느새 보면 개인성이 아니라 집단적인 관점을 띠게 되는 점이 많아졌다. 그래서 자신만의 세계관, 자신만의 가치에서 진정한 자신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의 사유는 자신에게 나올 수 없다.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여건, 그리고 교육적 특성과 사회적 변화 모두 개인의 인식과 행동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이들이 그런 비슷한 여건에 있다고 해서 다 같은 것만은 아니다. 결국 사회적 변화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분명히 존재하나, 개인성은 사회적인 영향만으로 다 성립되지 않은 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그런 요소가 잘 보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현대사회는 20세기와 달리 TV, 라디오, 신문 등을 통한 미디어 환경이 구축된 게 아니라 PC, 인터넷, 더 나아가 스마트 폰의 등장 아래 네트워크 시스템 및 모바일 세계로 확장되었다.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되었지만, 인간의 공간적 활동제약은 매우 축소되었다. 누군가의 소식을 듣기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는다. 침실에 누워 손가락으로 스마트 폰을 누르면 금방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최근 신영복 교수님의 <감옥으로부터 사색>을 읽는데, 한국 전통시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전통시장은 매일이 아니라 5일에 1번 열려 5일장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그 시장에 가는 사람들은 돈이 많고 적은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만 물건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가는 것일까? 늘 같은 생활과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5일장은 늘 새로운 이야기와 소문 그리고 거기서 피어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소통을 원하는 존재다.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하던 인간이 이제 인터넷 창으로 가상의 인물과 대화를 나눈다.

 

보이지 않기에 마음 속 깊은 것을 털어놓을 수 있다고 여기기도 하나, 정작 그것을 털어놓는 내 자신이 진심인지 아니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상대방이 진심으로 내 이야기를 수용하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진심을 알 수 없는 투명한 장벽에 자신이 만들어낸 진심을 만들어내고 있다. 앤드류 조터의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은 현대사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진정성에 대한 기만과 위선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인간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도서이다.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일화가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라 여겼다. 그런데 신전에서 신탁이 내려오길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소크라테스는 다른 이와 다르게 자신의 무지함을 알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현명한 인간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그것을 인식조차 못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기를 사람은 어느 지식을 알기 전에도 이미 자신은 알고 있다는 지성에 대한 오류를 지적했다. 인간은 모르고 알고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자신이 알고 있음을 알리고 싶은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가치 내지 진정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세대는 이런 문제가 심각하다. 어느 누가 일으킨 사회적 물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몰려 각종 덧글을 단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이버세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사이버공간이 아니라 일상세계를 파괴한다. 서울 시내버스 운전기사 하차대기 중, 뒷문에 어느 어린 아이가 뛰어내렸다. 그 아이가 뛰어내리고 엄마는 당황했지만, 버스기사는 다음 정류소에서 아이의 어머니를 내려주었다. 그게 인터넷에 소개되자, 버스기사의 삶은 파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CCTV로 통해 보호자의 문제라고 드러나자 이제 아이엄마를 욕하기 시작했다.

 

비판을 할 수 있어도 각종 욕설과 비난이 오고가는 사이버공간은 현실의 인간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험악한 발언을 날리는 자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정당하다 여긴다. 왜냐면 누군가 잘못했으니 자신()이 보기에 잘못된 사람이니 비난을 날리는 것은 당연한 권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전후맥락이 필요하다. 앞뒤를 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고, 최종적으로 문제를 지적하여 개선하는 게 이성적인 인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런 문제는 뒷전이고, 오로지 공격만 존재하고, 적나라한 욕을 통해 자신이 악인을 응징했다는 착각의 세계에 빠진다.

 

착각은 곧 진정성에서 기인한 기만이다. 왜 이런 식으로 전달되는 것인가? 현대사회는 정보가 망라된 첨단사회다. 소통의 장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열린 게 아니다. 자신만 아니라 자신 이외의 모든 이에게 열려있다. 과거 100년 선거할 경우 시장후보가 곳곳을 돌며 얼굴을 마주해야 하나, 이제 TV토크쇼에서 후보들을 볼 수 있다. 상대방의 정책안에 대해 관심 있게 듣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이 보는 것은 상대방 얼굴과 몸에 드러난 이미지다. 즉 겉모습에 나오는 분위기가 많은 선택을 좌우하는 것이다. 미국 선거에서 어느 후보가 어눌하게 말을 해서 혹은 말실수를 해서 지지율이 폭락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도 토론회에서 말실수를 하거나 지나치게 상대방을 몰아넣으면 역효과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이미지에서 보여준 모습에서 이성보단 순간적 감성이 따르고, 그 감성을 드러나는 이들에게 하나의 진정성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자신이란 이토록 감정적이고 순간적이며,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변화하는 것이란 말인가? 기 드보르가 저술한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매개로 하는 사회이다. 이미지라는 것은 자신이 아닌 미디어로 보여주는 방송매체 혹은 신문 또는 인간생활 그 자체만으로 스펙타클이다. 이미지가 매개되었다고 하니 우리의 주변은 이미지로 가득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이미지의 세계로 인간과 대화하는 것은 본질이 아닌 스펙타클로 구축된 이미지 왕국의 세계이다. 진정성이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어제 나온 최신유행인기가요가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하고, 그것이 길거리에서 들려야 한다. 본질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취향이나 성향보단 지금 억지로 고의적으로 은폐된 사실에 모두가 열광해야 한다. 열광 속의 스펙타클러는 자신이 의지가 아닌 미디어와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세계에 더 자신을 보여주려 한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그 시대에 흘러나온 이미지의 부산물에 같이 떠밀려가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사회도 20세기 중반과 후반은 민주주의와 노동투쟁으로 많은 진보를 일구어내었다. 하지만 21세기의 진보는 그렇지 않다. 이성적 판단력과 구체적 현실성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느낀다는 하나만으로 열광한다.

 

진정성의 의미와 사실적 관계, 사회에 대한 이성적 판단보단 그저 자신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만으로 신봉하는 진정성만 남게 되었다. 거짓만 넘치는 진정성은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가득하다. 어떤 사회적 문제가 일어나면 그 행동의 원인 사회적 연결성이 있지만, 그 자체가 사회를 대표하는 인식은 아니다. 결국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논리성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정당하게 만들 수 있는 상황을 인용하는 셈이다. 자신이란 존재가 사회적 조건에 기인하더라도 결국 거기에 너무 매몰되면 자신의 존재성은 사라지게 된다.

 

시대적 흐름은 읽고 변화를 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이란 홍수에 몸을 내맡기면 안 된다. 홍수에 휘말린 사람의 최후는 상상조차 하기 싫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루소가 소개되는 점에서 루소는 인간은 자연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당시 명사들의 오류처럼 인간이 숲에 들어가 곰처럼 사는 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세계인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루소는 낭만주의와 계몽주의, 그리고 자연주의자이기도 했듯이 실제 자연에 대해 예찬했다. 자연속의 인간은 본연의 모습이 되고, 인간사회의 인간은 본연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의해 살아간다. 그런다고 루소는 숲속의 곰이 되는 게 아니라 자연을 누비며 식물을 연구하여 자신의 세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루소처럼 자신의 본연으로 갈 수 있는 공간도 없다. 농촌은 이미 인구가 말라 황폐화되어가고 있고, 경치 좋은 곳은 펜션과 호텔, 그리고 카페들만 즐비하다. 자연이란 공간에서 인간은 하나의 존재성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감성을 충전하는 관광지로 변모된 것이다. 그나마 자연이 가득한 관광지를 가면 힐링이 되겠지만, 그곳조차 갈 수 없는 이들은 늘 일상의 빡빡함만 기다린다. 과거 인간은 자동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회였다. 민주주의 국가 이전에 왕국과 봉건영주국가였다. 게다가 교회세력이 왕족과 귀족하고 연합하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자신들의 결속력을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왕은 단두대 아래 사라지고, 귀족은 빈털터리가 되어 소부르주아로 되거나 심하면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된다. 이게 인간의 역사이다. 민주주의 가치가 도래하기에 바람직하나, 거기에 반해 문제점도 있다. 인간의 진정성은 각 개인과 국가적 관계로 대비한 근대국가로 이행되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은 붕괴했다. 한국사회도 농촌사회가 붕괴되고 대가족은 이미 사라진 문화제도이다. 일가족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은 거의 드문 케이스가 되었고, 그런 장소조차 관광문화지역으로 설정되어 버렸다.

 

강제소속이 없는 반면 자신의 정체성에서 모호하게 변질되었고, 정체성에 대한 심리적 빈곤은 진정성에 대해 감각적인 충동에 이끌리게 된다. 차라리 스포츠는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 약할 수 있다. 적어도 그라운드 위의 선수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은 사실 그 자체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사실이 아닌 이미지 메이킹으로 만들어진 존재들은 어떨까? 그래도 대중은 거기에 열광한다. 열광은 진정성이 아니라 허구성만 남을 뿐이다. 진보적 사회는 이성에 의해 사회문제를 과학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과학적 비판 없이 무비판적 열광이 남은 사회는 그저 같은 문제만 돌고 돈다. 진정성이란 참된 진실은 결국 이성의 눈이다.

 

근대화에 의해 인간은 사회적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부여받았지만, 인간 스스로는 이성에 대한 자율성을 완전히 부여받지 못했다. 탈근대화 시대는 감성과 소통의 세계는 맞다. 하지만 감성의 소통이 자신만의 세계가 아니라 타인과의 조우라면 문제가 발생된다. 타인의 존재는 자신이 아니기에 전혀 다른 관점이 존재하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무리하게 부여받은 동질성은 자신의 판단력이 아니라 기 드보르가 지적한 스펙타클된 사회이다. 군중 속의 고독은 우리가 피를 흘러 쟁취한 자유의 대가이다. 자유를 원했는데, 고독의 시간이 도래했다. 고독을 탈피하고자 계속 진정성을 내세우나 이 책에서 말하듯 그건 자신을 기만하는 거짓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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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산에 대하여 - 자크 비데 서문 동문선 문예신서 346
루이 알튀세르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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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은 도서이다. 요새 진보세력의 방향을 생각 후, 사회경제적 관점을 보면 참으로 답답해보인다. 생산의 조건은 ˝재생산의 기반˝에서 시작된다. 내일도 모레도 10년 뒤나 20년 뒤나 사회적 인프라를 없이 살 수 없으면서 정작 거기에 대한 방향성에 대해 다소 생각해야 할 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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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미래 (특별 보급판) -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쓴 시민을 위한 대중 교양서 노무현 대통령의 진보의 미래
노무현 지음 / 동녘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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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은 도서이다. 나는 진보적인 사상이 강한 분에게 이 책을 추천드린다.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고백하기에 노동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고 한다. 문재인 정권에 이르러 문재인 정부에 불만을 느낄 진보 내지 노동운동가분들이 많을 것이라 본다. 그런분들에게 이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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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5-24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무현, 문재인이 오른편 자유한국당보단 진보지만 진정한 왼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어려운 여건에서도 잘 하고 있는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8-05-24 22:35   좋아요 1 | URL
사실 저도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고, 금전적으로 안정적일 때 노무현 재단에 후원했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을 읽는 처지에 노동자의 슬픔을 어찌 모를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지금 이순간을 하나의 전환기라고 봅니다. 자본론을 읽어도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로 이향되는 것은 자본주의가 완벽한 조건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비에트 러시아의 실패는 그런 자본주의적 조건 즉 물질적 토대가 되지 않아 실패했습니다. 노무현이란 존재는 즉 전과정적인 존재라고 봅니다. 다들 목적지를 원하지만 그 과정을 싫어합니다.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2018-05-24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4 2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5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5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본론 공부 - 김수행 교수가 들려주는 자본 이야기
김수행 지음 / 돌베개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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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행 교수가 작고하신지 3년이 다 되어 간다. 한국 경제학과 학문에서 그 분이 보여준 업적은 정말 탁월하다. 특히 고전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자유주의 경제학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모두 알려주신 학자이니 일반 경제학자와 비교하여 그 기여도가 상당히 높지 않을 수가 없다. 김수행 교수님은 경제학을 전공했고, 영어 원문을 토대로 <국부론>을 번역하고, <자본론>은 독일어 원문이 아닌 영문 중역본으로 한국에 제시했다. 한국 마르크스 연구자로 <자본론>을 번역한 곳은 비봉출판사와 도서출판 길이란 곳이다. 비봉출판사는 김수행 교수님의 서적을 주로 출간한 곳이고, 도서출판 길은 강신준 교수님이 번역하여 출판한 곳이다.

 

한국의 <자본론>은 출판사 2곳에서 점유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 정도는 많은 서적업체에서 발간하나, 유독 <자본론>2곳에서 서로 대조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임승수 작가의 글을 봤다. 이분도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운동가이고, 그는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을 토대로 글을 썼다. 그가 적은 페이스북 글이 생각난 이유는 최근 진보언론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진보언론사나 보수언론사는 모두 엘리트직종이 많다. 엘리트의 이름이 문제가 아니라 엘리트로서 보여준 행동들이 일반 서민 내지 대중과 부합되지 않는다.

 

보수언론은 대중을 겨냥하여 프로파간다를 내세우는 엔터테인먼트 계열이고, 진보언론은 대중을 선동하기보단 계몽하려 드는 선민의식이 너무 강하다. 노 키드 존과 관련하여 보수와 진보는 서로 가게를 중시하거나 기혼여성의 권리를 중시하는 답 없는 게임을 했다. 하지만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 공부>에서 이미 그분은 알고 있었다. 진보라는 분들이 <자본론 공부>라는 간단히 정리한 이 책을 읽었다면 생각이 다르게 흘러갈 것이다. 최근 부동산 가격이 증가하고, 시장위축으로 인해 대부분 사람들이 부동산 시장으로 몰린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주변 다른 건물의 가격이 오른다. 문제는 주로 투기대상이 되는 아파트라도 아파트 단지 인근에 위치한 상가건물,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나가면 위치한 번화가 역시 투기의 열기에 의해 임대료가 마구 올라간다. 2년 임대한 가게주인이 수입이 2배가 오르면 임대의 가격은 그 2배가 아니라 그 이상이 된다. 잘 되는 가게 원래 계약자를 내보내고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를 세운다. 이미 그 건물의 식당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또 다시 찾아올 확률이 높다. 높은 가게세로 문을 닫거나 가게를 옮기는 부류가 많다.

 

지방도시 중하위층들이 많이 밀집한 주거지에서 가건물로 된 점포 한달 임대료가 70만원이 이른다고 들었다. 만일 아파트가 몰린 대규모 상가건물이라면 점포세가 수 백만원에 이르고, 고기 집은 천 만원 이상 호가하는 경우가 많다. 임금이 올라 아르바이트생을 해고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사장이 혼자 열심히 일해도 돈이 잘 벌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임대료의 고공행진이다. 편의점 한 달 임대료가 500만원이고, 아르바이트생 파트타임 고용은 100만원이라고 하자, 만일 임대료가 20% 오른 것과 이번에 최저임금 20%가 오른다. 아르바이트생은 2명을 이용한다.

 

임대료는 100만원이 오르고, 아르바이트생에 대한 월급은 40만원이 오른다. 사장은 수익에 빟해 지출이 많아 결국 아르바이트생 1명은 해고한다. 시간당 1100원 올라 일일 8시간 월 22 근무해도 20만원이 추가로 나간다. 임대료는 수 백만원이 나간 것은 아깝지 않고, 아르바이트생의 임금상승은 아깝다고 중소기업이 죽는다고 한다. 1달 공장 임대료는 고정비용이고, 사람들이 먹고사는 월급은 고정비용이 아니라 호혜를 베푼다고 생각한다. 임대료의 상승은 물가를 오르게 하고, 가게 점포가 스스로 물러나게 한다. 그러면서 고용노동자가 해고되고, 개인 사업가는 상가 문을 닫는다.

 

점점 갈수록 대규모 자본의 상점이 몸을 키우고, 개인사업자들의 자리가 없어지고, 이들 역시 고용노동자로 편입된다. 계속 되는 반복적인 오류에 경제는 어렵다. 물건을 생산하면 소비를 해야 한다. 소비를 하려면 경제적 여건, 즉 생계수단의 확립이 필요하다. 현재로 생계수단이 확립되지 않으면 누가 다른 사람의 상품을 살 것인가? 친구가 옻나무 액을 파는 일을 하다 접었다. 처음에 옻나무 액을 사는 부류는 적당히 먹고사는 중산층이다. 하지만 경기가 나쁘게 되니 옻나무 액을 팔리지 않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경제가 돌기 위해서는 생필품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필품에서 조금 더 나아가 약간의 여유를 소비할 수 있을 때 돌아간다.

 

휴일을 늘려도 사람들은 집에만 있는 이유는 생필품도 비싸지만, 여행경비는 더욱 비싸기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물가와 더불어 임금의 격차이다. 임금이 혼자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라면 가족부양이 어렵다. 최근 결혼문제와 관련하여 비혼자들이 늘어가는 추세이다. 자유주의적 발상도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물질적 토대가 결국 사회적 시스템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결혼을 위해서 집이 필요하나, 집값이 너무 비싸서 통상임금으로 도저히 청년들이 자기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없는 것이다.

 

집을 사기 위해서 대출을 해야 하나, 대출도 어느 정도 수준을 지녀야 가능하다. 물가의 상승에 비해 임금은 전혀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경기는 어렵고 최저임금에 대해 부정적으로 본다. 경제는 잘 안 돌아가고, 부동산 시장은 여기저기 몰리나, 실제 혜택을 받는 사람보다 아닌 사람들에게 그 혜택이 가고 있다. 하지만 이에 반해 대기업은 해마다 수익이 계속 증가하고, 거기에 더해 프렌차이즈 시장까지 점유하여 동네가게들을 모조리 문 닫게 만든다. 그러나 막상 고용하는 인력은 정규직보단 비정규직, 비정규직보단 인턴 내지 아르바이트생들을 추구한다. 임금의 가치가 낮을 뿐만 아니라 쉽게 해고될 수 있는 이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어떻게든 지켜야 하니 필요이상의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는 것이다.

 

취업시장에서 늘 고용자들은 불안해야 한다. 서로 경쟁을 하고, 불리한 일을 마다하지 않으면 계약조건이 고용주에게 유리해야 한다. 자본주의시장사회라면 계약조건의 그 목적은 이윤의 추가 창출과 임금의 추가 저감이다. 지금 언론과 여론이 참 한심한 수준인 이유가 청년실업과 결혼문제를 운운해도 그 모든 문제의 시작점은 임금과 고용의 관계인데, 그 문제를 사회적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려 하는 것이다. 정말 그 개인이 공부도 안 하고, 아무 준비 없이 취업노선에 뛰어든다면 개인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대학4년은 기본이고 토익에 자격증 심지어 어학연수도 다녀와도 쉽게 자리를 찾을 수 없다. 물론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경쟁자가 몰린 탓도 있지만, 그들의 노력에 비해 찾아오는 대가는 합리적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중소기업에 사람이 없어 문제라고 하지만, 실제 중소기업의 임금과 복지처우가 열악하기 때문이란 점도 이유다. 사실 임금문제 가지고 최저임금제를 부정적으로 보는 기자들이 받는 월급이 최저임금이라면 납득할 수 있지만, 그들은 그렇게 받지 않는다.

 

자본론에 대해 공부하면 사회적 시스템이 경제적, 물질적 구조에 의해 지배받고, 법과 제도는 바로 그런 기득권을 위해 체계화시킨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해고는 법적인 절차에 의해 존중받지만, 노조활동에서 비롯된 파업과 단체행동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 결국 가지지 못한 자들이 불리한 결과로 마무리된다. 다행히도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는 아직까지 군주정이 많았다. 프랑스는 민주정이 되다가 나폴레옹이 황제로 되고, 그가 몰락하지 부르봉왕가가 다시 집권하다 또 다시 나폴레옹3세가 집권하기도 했다. 독일이나 그 밖의 나라를 보면 왕이 없더라도 군사정권 내지 경찰세력을 지배하는 권력자들이 강력한 정치적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학적으로 자유가 있었지, 그것도 모두의 자유가 아니라 자본의 크기에 비례하여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현대사회는 그나마 선거제도가 어느 정도 확립되어 정부가 어느 정도 경영권자들에 대해 법적인 제재를 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쉽지 않다. 대한항공 회항사건을 두고 항공보안법으로 보면 분명 최소 1년 이상의 징역이나, 9개월 징역으로 끝난 재벌가의 모습을 보면 그 황당함을 알 수 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해결하려면 사회적 권력이 어떤 관계성에서 드러나는지 이해해야 한다.

 

자본주의 시장체계가 도입되기 전인 농업사회와 봉건시대라도 제물이 많은 영주나 또는 상인들이 많은 영향을 주변에 미쳤다. 화폐가 중심이 아닌 농산물이 중심일 때 상인은 영주에 비해 힘을 발휘하지 못하더라도 자금을 가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압력을 넣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 공납폐단이 심한 이유가 관리들의 부정도 있지만, 상인들이 중간에서 이윤을 챙기기 위한 작업도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제대로 행정조율이 필요하나, 왕조시대나 봉건사회, 독재 및 관료주의 사회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권력자들이 상인들과 담합하여 서로 이익을 나누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인은 국민의 투표권에 의해 결정되고, 추후 그 투표권으로 심판을 받는다. 물론 심판하는 자들이 어리석으면 더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 영주와 군주는 태어나면서 비리를 저지르게 되면 결국 반정이 따라올 수 있지만, 민주주의국가에서 국민의 투표로 선출되면 자신의 비리조차 하나의 정당성으로 부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론 공부>를 읽는다는 것은 최근 이슈화된 경제민주화가 제대로 통용되기 위해 자본주의란 과연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다. 모두 힘들다고 말하나, 왜 힘든지를 모르면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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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참으로 여러 가지 바쁜 시기이다. 55일 어린이날을 시작하여 58일 어버이날, 515일 스승의 날, 성년의 날과 부부의 날, 하다못해 음력을 기준으로 부처님 오시는 날 역시 5월이다. 5월의 푸르고 더운 봄은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여유와 더불어 의무감을 부여하는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5월은 그렇게 아름다운 일만 존재하는 달은 아니다. 5월은 언제나 슬픈 일도 있다. 523일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한 날이 다가오고, 그 이전 518일은 광주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이 떠오르는 날이다.

 

최근 지만원 씨가 지목한 광수73호가 사실은 광주시민군이었고, 그는 평생 조용히 아픔을 숨긴 채 살아가고 싶으나, 그분의 따님이 자신의 아버지가 전혀 상관없는 북한 특수부대란 오명을 지만원 씨에게 받자, 그 가족들은 과거의 아픔을 알리기 시작했다. 5월의 즐거움과 감사함이 따르는 이상으로 슬픔은 크다. 실제 광주518 망월묘역에 가면 유가족들이 한약 한복을 입고 묘비를 닦아주고, 기념전시관을 들여다보면 피가 묻은 옷들이 여기저기 전시되어 있다. 5월이란 그런 시기이다. 모든 생명이 움을 트는 시기라면 어느 생명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꺼져가는 것을 말이다.

 

5월의 시작은 May-day, 즉 노동절이다. 한국에서 근로자의 날이나, 외국에서 노동절로 통하고, 노동절이 되면 유럽의 선진 국가들은 국경일로 휴무를 취하고, 각종 노동운동 관련 행사가 길거리에서 일어난다. 노동이란 단어를 들으면 한국에서는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본인 자신도 임금을 받고, 5일에 8시간 근무하기 바라면서 왜 그런 것인가? 사회적 통념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자신은 힘든 공사장과 공장 같은 곳이 아니라 돈도 많이 받고 쾌적한 곳에만 일하기를 바라는 심리일 것이다.

 

어린 시절, 대부분 어른들은 공장에 가면 돈도 많이 못 벌고 힘든 일만 한다고 했다. 우리 세대의 부모들은 다들 공사장과 공장에서 몸을 축 내면 일을 했고, 그렇게 몸이 망가진 채 노년을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면 가는 경우가 많다. 안전도구와 지침은 필수적으로 착용하고 지켜야 하나, 막상 현장에서 그런 일들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최근 서해 쪽 고속도로 건설 중에 노동자 4명이 공사용 난간이 무너져 30m 가량 낙하했다. 그곳에 안전관리자와 공사관리책임자는 없었다. 건설노동자는 하루하루 일을 해야 임금을 받는다. 그들과 상대하면 매우 거친 인간이고, 보통의 상식으로 대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힘든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근무하는 중간에 막걸리와 소주를 마시며,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에도 언제나 반주이다. 담배를 마구 피며 던지지만, 사실 누구보다 인간적인 분들이다. 자신의 몸을 망가져 가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챙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분들의 마지막은 언제나 슬프다. 자신의 실수보단 안전문제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안전에 대한 관리기준은 결국 투자에 비례한다. 기업에서 수급한 공사금액에서 하도로 넘길 때 이윤을 챙기기 위해 안전관리를 소홀히 한다. 안전모와 안전화는 개인의 것을 사용해도 안전비계나 도구들 300만원 아끼려 할 때 사고로 그 수십 수백 배를 손해 보는 일이 많다.

 

그런데도 계속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사고의 확률은 전체 공사 진행과 대비하여 매우 적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목숨보다 고귀한 게 이윤이다. 이윤의 가장 큰 조건은 빠른 시간에 해당 공정을 정리하여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전 공정이 계속 발목을 잡으면 다음 공정까지 더 많은 시간을 소요되고, 그때까지 대출이자의 상환금은 높아지고 이윤은 축소되며, 다음 계약을 착수할 시간적 여유가 줄어든다. 결국 자본의 순환을 위해 인간의 생명과 건강은 무참히 밟히는 현실이 우리 사회의 슬픔이다.

 

이런 사회적 약자에 대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보장해준 시기는 얼마 되지 않는다. 과저 노동자 몇 명이 사고로 죽어도 뉴스조차 나오지 않았다. 건설로 통한 선진한국을 이룩하기 위해 부정적인 언론을 내보서는 안 되었다. 공장에서 어린 소녀들이 열악한 환경에 병에 걸려 피를 토하고, 폐가 손상되어 차가운 방에서 외롭게 생을 접어갈 때 세상을 그녀에게 따듯한 손을 내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여공소녀들이 먼지가 날리는 공장 닭장에서 울어야 했다. 우리는 그런 과거를 잊고 살았다. 오늘날의 한국을 이룩한 것은 한강의 기적이 아니다.

 

한강의 둔치에서 눈물을 흘리던 어린 소녀와 강변에서 홀로 외롭게 술을 마시며 달래던 많은 노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강은 기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라 기만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매우 짧다. 주권을 빼앗긴 것과 더불어 전쟁의 상흔이 아직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적으로 냉전이 지배적이었고, 자본주의 시장체계가 부흥하던 시절이다. 돈이 국가를 위해서라면 무조건 희생되던 시절, 막상 돈이 국가로 모여도 그것을 위해 일하던 사람들에겐 혜택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임금은 제자리고, 노동 강도는 더 강해졌다.

 

5월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저 행사에만 집중하지만, 5월은 저항과 혁명의 시기이다. 55일 현대철학과 경제학 그리고 문학과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친 카를 마르크스가 태어난 날이다. 200주년이 된 그의 탄생기념일이고, 그가 저술한 <자본론>이 세상에 알려진지 약 150년이 넘었다. 현대 경제학을 바라보면, 고전경제학의 시초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어도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제시한 자본주의의 문제는 지금 보아도 큰 괴리감이 없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속에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의 삶은 겨우 조금 나아진 점이다.

 

지금 한국이나 유럽에서 만 5세의 어린 아동이 공장 엔진에서 고된 노동을 하지 않는다. 방적기계를 돌리다 이제 중학교 되는 어린 소녀가 손가락이 잘리거나, 30세 정도 청년들이 폐암이나 폐질환으로 사망하지 않는다. 이 모든 일들이 마르크스가 150년 전에 목격한 일들이다. 마르크스를 두고 사람들은 그저 사회주의 사상가 내지 공산주의 이론가 창시자 정도로 알 것이다. 주변에 어느 누가 경제학과를 나와 내가 개인적으로 <자본론>을 읽어봤냐는 말에 대부분 아직이란 대답이 많았다.

 

경제학에서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으로 구분하여 배우고, 거기에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보단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 경제노선을 더욱 선호하는 한국 경제학이다. 문제는 사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도 엄연히 노동자의 자리로 들어가는데, 신자유주의 노선을 따르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사회적 문제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만 하라고 배우고 생각해도 막상 현실의 벽은 이론적 역량과 별개의 문제이다. 신자유주의에서 경쟁의 자유라고 해도 그건 공정한 조건이지, 대기업과 정부기관의 유착관계, 법과 도덕을 초월한 경제논리에서 스미스의 <국부론>은 결코 예상하지 못한 문제였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저술한 시기는 지금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자본론>을 읽으면 단순히 자본주의 문제점을 거론한 게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를 연구한 서적이다. 자본의 흐름과 유통만 아니라 자본의 시작과 탄생, 자본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역사와 정치, 더 나아가서 혁명과 사회적 헤게모니까지 이어진다. 마르크스는 기존 사회는 관념으로 통찰하는 것을 지나 물질적인 토대가 되어 움직인다고 보았다. 가령 한국에서 법을 제정하고 개정할 때 임금이나 아동정책, 그리고 교육정책을 보면 인구감소와 영아출생 그리고 결혼비율에서 조인한다.

 

물질적 토대, 즉 인구의 비는 관념적인 조건이 아니라 현실 있는 그 자체의 조건이다. 인구의 비례에 따라 시장체계는 변화하고, 정책도 바뀐다. 자본이 인구문제를 야기 시켰으니, 이제는 인구의 문제가 자본주의 체계를 위협한다. 사람들이 인구가 감소해도 오히려 기술발전이 되어 노동인력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분명 기술발전과 과학의 진보는 인력의 감축을 유발하고, 사람의 손을 기계로 대체할 수 있다. 하지만 기계로 대체하면서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진 상품의 수보다 기계에서 찍힌 상품의 수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말은 무엇이냐? 결국 고생산성이 인력이 감축하여 노동력의 투입을 감소시켜도 그 상품에 대해 구매해야 할 대상들은 더욱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구매자들이 부족하고, 상품은 나와도 팔리지 않는다.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기업은 이윤을 추구할 수 없고, 끝내는 기업을 접어야 한다. 인력의 감소는 경제활동에서 생산만 보는 게 아니라 소비의 대상까지 이어진다. 교육대학교 학생들이 과다선발로 인해 임용 후 대도시권 진입이 어렵다고 한다. 대도시권이 아닌 농촌과 어촌의 모든 학교의 필요교사 인원을 더해도 서울의 교사 수보다 적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수도권 초등학교 정원이 감축하고, 변두리지역은 폐교에 이른다. 폐교가 되는 순간 임용교사의 취업률은 저하되고, 결국 교육대학교 정원수는 감축된다. 학생 수가 감소되면 교육관련 업체와 학원, 각종 아동 생산품들의 소비가 감소되고, 그 아동들이 성장함에 따라 관련 생산품들의 소비 역시 감소된다. 인구의 감소, 노동력 감소로 외국인의 이민을 늘리면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한국에 정착하기 어렵고, 정착하기 위해 의식주에 많은 비용이 필요하며, 그 이상의 생산품을 소비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

 

정책의 방향에서 마르크스의 고찰과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연구는 거의 들어맞는다. 단지 마르크스가 부정적인 대상이 된 이유는 그의 예언이 일치하지 않았고, 제대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은 산업혁명이 이룩한 지 반 세기가 도래하던 시대다. 공장의 매연과 폐수는 강과 하늘을 덮고, 많은 하층민들은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렸다. 주간의 공장은 어느덧 24시간 체계로 바뀌었고,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에 오던 사람들은 아침에 가서 다음날 아침에도 공장에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마르크스는 그런 이들에 대한 연민감과 그들을 착취하는 부르주아를 경멸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은 국가체계 상 위협적이었고, 그는 환대받는 학자가 아니라 주의와 감시의 대상이었다. 마르크스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박사학위까지 받은 엘리트이다. 헤겔학파 청년이던 마르크스는 관념적인 망상을 떠나 실제적 현실을 보자고 했다. 라인신문을 다니다 폐간되고, 파리와 브뤼셀로 옮기면서 그는 새로운 사상을 연구하고 전파하려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만큼 대단한 인물이 있으니 그는 평생 마르크스의 친구이던 프리드리히 엥겔스, 마르크스의 연인이며 아내인 예나였다. 예나는 베스트팔렌 가문의 영애였다. 부유한 귀족집안 출신인 그녀가 평생 화려하고 품위 있는 귀족의 딸이 아니라 노동운동가의 아내로 살아야 했다.

 

가난과 배고픔, 질병과 추방이란 아픔에서 그녀는 마르크스와 평생을 나누었다. 영화 <청년 마르크스>에서 예나는 상당히 도발적이고 정열적인 여성으로 나온다. 마르크스가 홀로 영국에 가야할 때, 그는 고민한다. 아내와 어린 딸을 나두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르크스에게 예나는 오히려 그 길을 가라고 권유한다. 위대한 혁명사상가와 혁명가는 그 자신만으로 위대해진 것이 아니다. 그 옆에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던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적인 아버지 장 자크 루소는 테레사라는 여성이 있었고, 볼셰비키 혁명을 이룩한 레닌과 트로츠키 역시 자신과 함께 한 여성이 있었다.

 

영화에서 마르크스의 열정적 삶을 그릴 때, 좌절과 시련의 시간에서 예나가 보여준 용기, 그리고 예나와 마르크스가 서로 격렬한 애정행위를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마르크스가 나오는 점, 마르크스의 삶을 조명한 점에서 상당히 이 영화는 정치적인 이념이 가득한 작품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삶에서 예나의 모습은 없을 수가 없었고, 엥겔스의 옆에도 공장에서 노동하던 여성 메리의 모습 역시 지울 수 없었다. 혁명에 대한 열정과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무모하게 대항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예나의 모습에서 영화는 지겨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영상시간 100분이 금방 갈 정도로 영화 프레임은 갈등과 갈등 그리고 저항과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져 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마르크스가 프루동 박사와 대립하게 된 동기가 나온다. 프루동은 <빈곤의 철학>이란 서적을 내놓는다. 가난하고 소유물이 없이 평등하면 좋을 것이란 생각이다. 장 자크 루소의 사상에서 조금 틀어진 사고방식으로, 루소는 너무 가난해도 안 되고, 너무 부유해서 안 된다고 했다. 루소의 <정치경제론><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으면 마르크스의 사상가 매우 흡사한 게 많았다. 루소는 인간의 불평등이 자연적 원인이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란 것을 밝혔다. 단지 마르크스가 제시한 것처럼 그 수학적 원리를 내세우지 못했을 뿐이다. 산업혁명이 아직 제대로 태동하지 않았고, 농업과 수공업 중심이 되던 사회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착취의 개념을 시간과 노동력의 착취, 그리고 노동력과 생산수단 간의 관계, 임금과 물가 간의 관계를 연구했다. 실제 <자본론>을 읽으면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 물가가 상승하면 상품의 가격이 상승하여 자본가는 이윤을 확대하고, 물가가 하락하면 임금을 하락하거나 동결하여 지출을 감소하여 이윤을 확대할 수 있고, 또한 가격이 저하되면 상품이 박리다매하기에 이윤을 확대할 수 있다고 말이다. 어느 것이나 자본가가 손해 보는 일이 없다. 그 조건이 노동력의 착취가 계속 되는 조건 아래서 말이다.

 

영화는 마르크스가 라인신문 폐간에서 <공산당 선언>이 나오기까지의 여정을 그린다. 그가 다투던 대상은 권력을 가진 정부와 자본가만이 아니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던 이들이었다. 현실을 망각한 채 형제애를 외치는 바이틀링, 현실물질 조건을 경시하던 프루동과 바쿠닌, 그 외의 많은 사회운동가 역시 다투었다. 현재 이중에서 가장 신뢰하고 높은 가치를 지닌 인물은 마르크스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승리자가 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추구하던 사회는 영원히 올 수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생산조건이 어느 일정단계 이르면 더 이상 생산할 필요 없이 컨트롤하게 되어 노동착취가 일어나지 않을 생산단계가 목표였다.

 

러시아 소비에트의 실패는 생산조건에서 생산수단의 기술력 한계, 생산품에 대한 보급, 생산품이 사회에 끼치는 실용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소비에트가 존재해도 이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미래에는 지금과 비교하여 훨씬 더 좋은 생산품과 뛰어난 과학기술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이런 생산품을 대중에게 보급하기 좋은 수단은 자본주의 경제구조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 구조에서 대부분 시민인 노동자를 희생하지 않고, 더 나은 방향으로 삶을 보장하게 만드는 것이 마르크스가 남긴 업적이다.

 

마르크스와 많은 사상가들이 활동하면서 유럽의 19세기는 혁명의 시대를 만들었고, 유럽은 혼란의 시기를 보냈다. 어느 누구는 마르크스에 의해 일어난 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나, 다르게 생각하면 마르크스의 사상이 없이 계속 고된 노동을 많은 시민들을 괴롭혔다면 그들의 죽음 역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영화의 제작진이 프랑스계열이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대화는 독일어로, 마르크스가 유럽을 망명할 때 프랑스어로, 마지막으로 생을 마친 영국에서 영어로 대화한다.

 

하지만 영화제작진들이 프랑스이기에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간한 <공산당 선언>이 등장한 후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보여주며 마친다. 혁명은 참으로 달콤하면서 위협적인 단어이다. 실상 19세기는 유럽만이 아니라 남미에서 일어난다. 혁명이 있었기에 근대가 있었고, 근대가 있었기에 현대가 있다. 현대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권이다. 인권은 국가에 의해 생명과 재산이 보호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결합한 적에서 기업에서 노동자의 생명과 재산은 보호되는 게 아니고, 그저 관리되는 것이다.

 

노동자의 생명이 산업재해로 잃으면 막대한 벌금과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고, 때에 따라서 영업시설을 며칠 간 정지해야 한다. 운이 없을 경우 언론에 노출되어 기업이미지 훼손으로 영업 손해를 보기도 한다. 노동자의 재산은 오직 자신의 신체밖에 없다. 신체가 손상당하는 재해현장에서 기업은 그저 약간의 보상비와 노동관리청에 부과하는 세금만 더 납부할 뿐이다. 그나마 제대로 신고하면 모르지만, 산업재해가 발생되면 산업재해보험금을 더 납부해야 하기에 일반 진료로 돌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비정상적이고 무책임한 일이 있기에 마르크스의 사상이 소비에트 붕괴와 함께 사라졌다고 믿은 20세기 말의 사고방식은 틀렸다.

 

21세기 역시 인간이 소외와 착취는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 교묘하게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고 있었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은 자연을 착취의 대상물로 삼아 정복하기 시작했고, 그 정복이 끝이 나면 마지막에 인간은 인간을 착취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대해 많은 이들은 그 결과의 고통만 알지 그 과정의 흐름을 알지 못한다. 영화 <청년 마르크스>에서 마르크스는 그 과정을 찾아가며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마르크스의 삶을 알고 사상을 알아도 당장은 사회를 변혁하기 어렵다. 하지만 조금씩 변화하며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 모두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

 

나의 삶도 중요하지만, 미래의 후손에게 더 나은 삶을 물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미래가 더 이상 의미 없다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삶을 위해 우리는 투쟁을 한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평생 사회적 약자 극빈층 노동자를 위해 살았다. 우리는 마르크스와 같이 살아갈 수 없고 살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가 말한 인간의 가치와 삶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 마르크스>를 본다면 그가 위대한 사상가 이전에 한 여인을 사랑하고, 늘 현실에서 방황하고 좌절했던 청년이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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