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와이키키 뱀파이어>를 처음 제목을 봤을 때 문득 <와이키키 브라더스>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물론 영화와 웹툰은 서로 다른 내용이고, 추구하는 방향도 다르다. 하지만 와이키키에 대해 전혀 모르던 나에게 와이키키가 무엇인지 정확한 의미를 알게 해 준 것이 <와이키키 뱀파이어>이다. 와이키키는 미국 화와이를 가리키는 말이고, 하와이는 아름다운 섬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휴양지다. 미국 땅에 내가 가 본 곳은 군부대 내 미군이 주둔하던 곳을 지나간 것 밖에 없던 나에게 하와이는 머나먼 영토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를 위안은 있었다. 형님과 형수님이 결혼하고 허니문 여행지가 바로 하와이였다. 영화 <친구>에서 하와이로 가라는 말이 유행했지만, 막상 하와이 가는 길은 쉽지 않으니 말이다. 웹툰에서 왜 와이키키를 두고 그 뒤에 명사를 붙인 것일까? 주인공은 김샛별과 최행복이다. 하지만 웹툰을 보면 진정한 주인공은 최행복이고, 김샛별은 최행복 주변에 있는 사람 중에서 큰 동기부여를 전달해준 인물이다.

 

그러나 <와이키키 뱀파이어>란 제목처럼, 하와이에 있는 흡혈귀이니, 제목적 의미로는 김샛별이 주인공처럼 보인다. 작품의 시놉시스는 간단하다. 흡혈귀 소년 김샛별은 어디에도 제대로 머물지 못한 사회적 외지인이고, 최행복은 주어진 환경에 좌절하고 자신을 책망하던 우울증 걸린 여성이다. 특히 공황장애라는 무서운 정신병에 시달렸고, 손목에 칼로 긋은 흔적이 보일 정도로 삶에 의미를 잃었다.

 

이 작품에서 인간이 살아가는데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질문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많은 것들이 있다. 작품에서 김샛별과 최행복의 형편을 보듯이 돈이 필요하다. 따듯한 집에서 굶지 않고, 머물 수 있는 생활 여건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표의식이 필요하다. 단순히 먹고 자는 것만으로 인간은 즐겁다고 생각할 수 없다. 물론 당장 생명의 위기가 닥친다면 오늘 하루밤도 먹고 자는 것조차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오늘 밤이 금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그 며칠이고 몇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육장에 갇힌 가축처럼 늘 비참한 삶이 될 것이다. <와이키키 뱀파이어>는 바로 그런 고통의 순간에 내몰린 김샛별과 최행복이 서로를 믿고, 주변에 있는 이웃의 도움으로 세상 앞에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모든 내러티브에서 갈등은 존재하고 그 갈등의 해결은 곧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이는 역경은 큰 고통이다.

 

TV에서 나온다. 연예인 누군가가 공황장애로 연예활동도 접고, 정신적 고통으로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가족과 친구조차 대하는 게 어려운 일도 많다. 그것을 극복하는 계기는 무엇인가? <와이키키 뱀파이어>에서 그 치료방법은 스스로에게 그 고통의 근원에 다가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한다. 상당히 정신분석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했는데, 자기를 억눌린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통을 제공하는 시작점과 마주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최행복에게 2가지를 정해 놓았다. 1가지는 가족이고, 다른 1가지는 선생이란 직원이다. 가족은 인간이 태어난 순간부터 가지게 되는 존재이고,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존재이다. 선생이란 직업은 자신의 선택이 필요하고, 그 선택에 따라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선천적 고통과 후천적 고통이 이렇게 최행복에게 닥친 것이다. 선생이 되고 싶은 최행복은 자신이 존경하던 분이 선생이었고, 그분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현실이란 자신의 의지와 상황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운도 따르고, 심리적 상황도 따른다. 전반적으로 최행복에게 가족이란 큰 마음의 짐이 있었고, 시험 때마다 꼭 안 좋은 일들이 터졌다. 그런 최행복에게 불행을 안겨준 것은 가족이란 굴레이다. 가족은 혈연적으로 DNA를 후손에게 남겼지만, 가족의 기능과 역할에서 최근에 들어 생물학적으로 유지하기 보다는 사회적, 경제적 유지를 위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즉 가족관계에서 자녀에 대한 사랑은 부모와 자식 간의 순수한 마음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이해득실로 가족관계를 만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성공은 무엇일까? 출세는 분명히 인간에게 성공하게 만드는 큰 발판 중에 하나이다. 자신이 출세해서 자식들도 출세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자식이 성공하는데 있어 출세하는 일은 분명 좋은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같을 수 없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 최행복의 아버지는 대기업의 임원(부사장)이고, 어머니는 변호사였다. 사회적으로 큰 명성과 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만으로 최행복에게 상처를 주었다. 동생 최슬기는 똑똑하고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한다.

 

모든 게 기계처럼 완벽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누군가로부터 해야 하는 것만 잘 하여도, 자신이 어떻게 해야 갈 것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즐거운 일이 모르고, 단지 누군가의 기대감을 맞추어 살아가는 몸집만 큰 어린아이였다. 어찌 보면 우리 사회가 가장 요구하고 원하는 인물은 최슬기이다. 자신의 개성이나 의견은 필요 없고, 사회적으로 원한 도구로써 완벽한 인간이다. 남매는 그렇게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최행복의 삶은 여기서부터 불행의 시작이다. 이름은 행복인데 삶은 불행이다. 이름과 삶의 대비되는 지점에서 작품은 최행복이 불행하여 자신의 이름처럼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김샛별은 밤하늘의 처음을 말한다. 밤이 오는 것은 외로움이지만, 샛별이 왔다가 밤이 온 것이 아니다. 샛별은 낮과 밤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양지를 꿈꾸는 인간이나 흡혈귀라는 속성 때문에 낮에 움직이지 못한 채 밤에만 살아간다.

 

그것도 자신의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아 배신당했다고 여긴다. 그래서 늘 그는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배신당할 수 있다며, 절망한다. 절망에 빠진 김샛별과 최행복이 만나 서로 누군가에게 필요하고, 자신도 희망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워간다. 물론 그 길을 쉽지는 않다. 주변의 반대와 음모가 늘 살아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살아가는데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기 힘들다. 자신이 원해도 주변의 상황과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기존 사람들이 가진 편견은 더욱 그렇다. 가진 것이 없기에 몸부림치는 김샛별이나, 모르는 사람에게 보자면 학교도 안나오고 불량한 애처럼 보일 뿐이다. 막상 그를 대하면 착하고 순수한 영혼이나, 그곳까지 도달하기가 너무 힘든 점이다. <와이키키 뱀파이어>는 그런 사람들이 서로 모여 다독여주는 작품이다. 김샛별과 최행복만이 아니다. 국밥집하는 할머니는 자식들이 자신을 부모로 보기보단 돈줄로 보는 점, 윤성(김샛별을 도와주는 동네형)은 학창시절 부모님이 여의고 자퇴할 때 아무도 자신을 제대로 봐주지 않은 점, 치킨집 여사장님은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은 일 등 많은 상처들이 이 작품에서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장면은 김샛별이 윤성과 대화에서 사람을 대할 때 아무 것도 모른 것까지 그렇지만 마치 낙관론을 말하면서 현실에서 도피하지 말라는 부분이다. 아주 흔하고 많이 보는 이야기가 있다, 누군가 최악의 상황에서 어려울 때 그 고충을 말하면 도와주지 못할망정, 상대방의 자존심을 뭉개거나, 아니면 꼰대처럼 말도 안 되는 충고를 해준다. 오히려 많이 힘들었겠구나하는 작은 위로를 해 주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힘들 때 받고 싶은 도움도 있지만, 더욱 절실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 꺾이지 않도록 하는 작은 용기와 위로이다. 그 후로 작고 작은 도움이 모이고 모여 어려운 상황에서 비로소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 과정은 우리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마음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자만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무의식적으로 무시하여 상처를 주게 된다. <와이키키 뱀파이어>에서 김샛별은 최행복에게 공부를 받으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최행복은 김샛별에게 공부를 가르치면서 자신의 원하던 존재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선생이란 이름은 단순히 학교 안에서 학생만 가르치는 일만이 아니었다. 선생은 다른 누군가를 그 어떤 곳에서도 가르치고 다독거리는 것 역시 가능한 일이었다. 최행복이 원한 선생은 학교 안이 아니라 학교 밖에서도 가능했고, 자신이 선생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선생이란 직업이 아니라 선생이란 역할을 통해 누군가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고자 한 것이다.

 

<와이키키 뱀파이어>를 보면서 이제 아버지란 이름을 가진 게 2년도 안 되는 나에게 늘 내가 생각하는 내 아이다. 자식이 크면 어떤 어른이 되면 좋을지, 그럴 때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를 말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최행복에게 지옥이 되었다는 점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감을 가져야 할 부분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최행복의 부모는 딸보고 행복하게 살아라고 하면서 이름을 지어 줬지만, 가족관계는 불행으로 이어진다.

 

행복의 기준을 자녀가 즐겁게 하루를 보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맞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작품 후반부에 가면 최행복은 아버지에게 가족관계를 단절하는 증명서를 3번이나 보낸다. 그 덕분에 자신은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고, 무사히 정신과에서 진료를 받는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상처가 가족이었고, 그 가족을 마주 보고 끊어낼 때 비로소 우울의 바다로 침수되지 않고, 바다 위의 파도에 몸을 맡기게 된다. 어린 시절 최행복은 하와이에서 길을 잃을 때 일몰의 바다를 본다. 하지만 바다를 보는 게 아니라 이제 큰 바다 위를 누비게 된 것이다.

 

작품을 보다시피 우리의 삶에서 행복을 찾는 일은 매우 쉽지만 어렵다. 우리는 무엇이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지를 알지만, 그것을 넘는 것을 두려워한다. 혼자서 그 상처를 끌어안고 나가기가 너무 힘들다. 옆에서 그것을 알아주고 조금씩 같이 밀어준다면 극복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희망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은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야 하고, 같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게 어려울 뿐이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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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정부의 가장 큰 실수이면서 억울한 점은 아마 코로나일 것이다. 세계 각국을 보아도 코로나로 인한 영향은 심각하고, 전체인구 대비 확진 및 사망률을 보면 한국이 낮은 편이다. 그러나 수치가 그렇다고 하도 막상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를 것이다. 한국에서 군대 갔다 온 남자들은 모두 힘들고 괴롭다고 한다. 솔직히 목숨을 걸어야 하는 특전사, CCT, UDT 등(부사관 이상만 해당)은 훈련하다 실제로 사망하는 일이 많다. 그래도 병사로 간 사람들도 무척이나 자신이 힘들었다고 한다.


남의 척도는 객관적일지라도 본인이 느낀 감정과 경험 역시 자신에게 최악인 것이다. 나 역시 군생활이 힘이 들었다. 육체적인 요소보다 정신적인 요소이다. 몇 천억짜리 국가사업을 두고 관공서에 협의다니면서 받은 압박이나, 일개 하사 주제에 공군본부에 가서 원스타에게 보고해야 할 상황도 있었다. 자대에서는 공군 감찰실장(대령)에게 독대로 보고한 적도 있다.


대위정도 되는 장교도 힘든 자리에 일개 하사가 보고해야할 일이 있던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주관과 객관이 입장과 처지에 따라 바뀐다. 이번 대선도 그런 것이다. 자영업중들에게 이번 대산은 보급로가 막힌 상황에서 정권 교체를 외쳤다. 민심은 천심이고, 천심은 민중의 소리이다. 문제는 민심이란 존재감은 바람이 오기 전에 부는 것처럼 그들이 생각하는 바가 어떤 결과로 초래할지 알 수 없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최저임금제 제도를 손을 본다는 공약이 있지만,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뭔가 최저임금이 바뀌면 문제가 생긴다. 자영업자들에게 최저임금이 부담스럽다고 한다. 게다가 코로나 이후 영업에 문제가 생겨 폐업이 늘어난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영업을 연장하더라도 손님이 처음부터 가지 않으면 그 외침은 모순이다. 즉 사회적 현상에 따른 손해를 타인에게 전가하고, 그 모든 게 정부의 처사라고 보는 것이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정부만으로 보는 것도 한계점인 이유가 그래도 영업이 잘 되는 식당과 가게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경제구조에서 60~70년대를 찾는 것은 바보라고 생각든다. 그때는 1차와 2차 산업시스템이 전환되던 시기이고, 여전히 수공업에 머물다가 80년대 이르러 중공업이 발달한다.

90년대 말과 2000년에 이르러는 3차 산업이 우세한다. 4차 산업이 정보사회라고 해도 정보쪽 경제활동보다 여전히 서비스업종인 3차에 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영위한다. 코로라로 식당과 관광업종이 타격이 큰 이유는 대부분 3차 서비스쪽에 많은 국민들이 생업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제로 인한 노동자에 대한 월급에서 급여가 오를수록 자영업을 하는 사람에게 이익이 적게 가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게 그들이 반대하는 이유이고, 그들 스스로 자충수 되게 하는 원인이다. 보급로와 퇴각로에서 보급이란 개념은 영업점을 찾아오는 손님이고, 퇴각로는 영업점이 폐업 후 생각해야 하는 지점이다.


만일 작은 식당과 가게를 운영하는 점주가 장사를 접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도 다시 누군가의 밑으로 가야 하고, 수많은 가게를 접었고, 그들은 누군가 밑에서 일을 해야 한다. 주말에 집근처에 있는 대학가 근처에 이삭토스트 가게로 갔다. 다행히도 토스트는 식당보다 테이크아웃 폼이 많으니 잘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양옆으로 가게들을 보니 반 정도가 다 문을 닫았다.

이들이 문을 닫으면 어디로 가는가? 과거 대기업과 정년이 끝이 나면 치킨가게 사장이 된다는 말이 있었다. 할 일이 없으면 치킨집이나 하자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말도 옛날 말이 되었다. 아니라면 배달을 위주로 판매하는 가게로 노선을 정할 수 있다. 코로나 이후 배달위주 식당과 배달원, 그리고 택배운송원이 크게 늘었다.


일부 또는 처음 일을 접한 사람은 거기로 갈 확률이 높다. 하지만 식당을 다시 새로 연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모험이다. 그 모험자들이 보급로가 끊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뒤로 퇴각해야 하는데, 퇴각로는 다시 취직이다. 하지만 퇴각로마저 끊기면 어떻게 되는가? 직업이 없는 백수가 될 것이다. 자영업자들이 이렇게 아우성 치는 것은 어찌 되면 퇴각로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한국의 사회는 이미 1차와 2차 산업이 컴백할 수 없다. 식량안보라는 명제 아래 시골로 가서 농사짓는 일이 녹녹치 않다. 참 어려운 일이다. 정권을 바뀐다고 해도 코로나로 인한 문제는 여전히 난제다. 단지 그들에게 원망의 화살을 날리고 싶었고, 그 화살들로 의해 다른 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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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 정말 오랜만에 글을 남긴다. 육아의 세계에서 취미생활을 고사하고, 허리디스크 증세로 계속 치료를 받고, 입원도 하고 했으니 그럴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적어보는 이유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본 다산 선생이 만일 21세기로 회귀하여 대통령이 되면 어떨까라는 책이 있었고, 그것이 영화드라마처럼 된다는 사실이다.



필자를 보니 윤종록 작가, 분명 나하고 같은 성씨는 분명하나, 반듯이 잡아 고친다면 그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외가라기보단 외가의 일족의 후예이다. 다산 선생의 어머니는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고, 공재 선생은 고산 선생의 증손자이다. 고산 선생의 증조부는 귤정공 윤구이고, 윤구 선생의 동생인  행당공 윤복이란 분이 계시는데, 이분이 바로 윤종록 작가님의 직계조상일 것이다. 


윤복 선생은 안동도호부사로 있으면서 안동항교를 재건하고, 퇴게 이황 선생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게다가 아들과 사위를 문하생으로 들여 퇴계학을 전남에 뿌리게 된다. 해남윤씨 일족이 남인이 된 사유, 그리고 기축옥사에서 희생당한 뿌리는 여기다. 윤복 선생의 자제분은 임진왜란 당시 의용군으로 나서, 많은 문중 사람들이 의병으로 활동하다 사망했다. 


군부를 보면 주로 이순신 장군이나 이억기 장군 수하에 많았다. 남인의 특성이 반영된 점이다. 아무튼 윤복선생이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 일원에 터를 잡고, 귤동마을의 윗산인 만덕산으로 다산초당이 있다. 다산초당의 주인은 윤복의 후손인 윤규로의 것이고, 윤규로의 아들들은 다산의 제자로 활동한다. 이책 소개에서 청년미래포럼 18인에 대한 거론인데, 이것은 다신계18제자를 따온 것이다. 다신계에 대해 논하자면 한국 최초의 차모임이고, 200년 넘게 활동한다. 


매년 다산선생 제삿날에 헌다례를 올리는데, 다산선생의 후손과 다산선생의 제자의 후손이 남양주 묘에 와서 제사를 올린다. 따님은 해남윤씨로 갔는데, 윤복선생의 사촌의 후손에게 갔다. 그리고 나도 그 사촌분의 후손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다산 선생의 외손자인 방산 선생님과 상당히 먼 가계이다. 


그래서 윤종록 작가님의 다산의 외가라고 하기엔 그렇다고 한 것이다. 나도 다산 선생의 외손자 일족이니 친척이라 엮을 수는 없다. 하지만 다산 선생이 해배되기 전 직계할아버지가 배를 타고 강진만을 건너 다산초당에 가서 학문을 같이 논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다산계 찻집 주인인 전 강진군수도 우리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를 안다. 


잡담이기도 하나, 합수 윤한봉 선생의 일대기를 읽으면 그분이 강진에서 위대한 성인인 다산 선생이 계셨고, 그분의 사상에 엄청 흠모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518과 관련하여 합수 선생은 늘 마음의 빚을 졌고, 귀국해서는 결국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청년미래포럼 18인을 다신계에 배치한 점에서 마음에 들지 않은 게 그런 것이다. 


윤동환 강진군수는 학생시절 민주화운동을 할 때 수배가 걸려 도망칠 때 다산초당 안에 숨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서 청년미래포럼 18인 청년을 다산 선생 제자18인의 다신계에 비유하는 것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글을 자유이고, 의지이나,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산선생의 책은 일제시대에도 노론의 후예에게 박해받았다고 한다. 노론의 정신적 후예를 다신계18 제자로 배치하는 건 조금 그렇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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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밀려와 달이 되는 곳
윤정현 지음 / 헥사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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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현 시인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놀란 나는 시골에 삼촌에게 문자를 보냈다. 삼촌도 당연히 이분을 알고 있었다. 같은 향촌파 집안이고, 게다가 시골집이랑 걸어서 10분도 되지 않은 곳이다. 명발당, 다산 선생의 애한과 기쁨 그리고 추억이 새겨진 곳, 누가 그를 대신하여 살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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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비극이 40주년이 되었다. 40년이란 시간이 인간 개인에게 보자면 기나긴 시간이고, 역사라는 큰 틀에서는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으로서 40년을 보면 이제 중년의 반열에 든 사람이라면 참 길지만 짧게 지나간 시간이고, 젊은 층에게는 아주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이다. 518 당시 나이가 40살이던 사람들은 이제 노인이 되어 삶을 마감하거나 또는 마감하기 위해 마무리를 준비할 것이다.

 

518에 대해 생각하면 E.H.Carr<역사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역사는 현재의 인간이 과거와 끊입 없이 대화하는 것이라 한다. 대화하는 것은 무엇인가? 죽은자는 말이 없고, 오로지 기록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기록을 가지고 후대의 평가를 두고 우리는 계속 고민하게 된다. 한국의 대표인 사례가 바로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이다. 누군가에겐 정부에 반기를 든 폭도, 혹은 반자유주의 세력이라고 말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에게 민주화에 대한 열망, 죄 없는 양인학살 사건, 2가지가 복잡하게 묘하게 엮여있는 비극일 수 있다. 전에 같은 인터넷카페와 블로그 이웃 분이 적은 글을 보았다. 영화 <김군>에 대한 리뷰였다. 아직도 518에 대한 아픔이 끝나지 않으나, 극우대표 논객이 계속 518을 두고 왜곡하는 점에 대해 현실적 증거 또는 북한군이라고 지명된 사람을 찾아 그가 주장한 바가 틀렸음을 보여준다.

 

분명히 말하지만 51840년이 이미 지났고, 국방부 자료나, 광주 및 주변 사람들의 증언, 하다못해 외국기자와 미국극비문서까지도 518은 북한과 무관하다고 나온다. 오히려 헬기사격을 비롯한 폭격계획을 숨기려 한 자들이 북한개입설을 계속 주장한다. 그들에게 518은 부정하고 싶은 기록이고, 한편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이기도 한다. 여러 책을 읽다보니, 왜 그렇게 군인들이 518에서 잔혹한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여러 가지 서적에서 제시하고 있으나, 군부대 특성상 진압부대원인 육군은 일반병사들이 많으나, 병사를 지휘하고 통제하는 장교 이상으로 살펴볼 존재가 부사관 집단이다. 이들 중 부사관 계급 중 상위계급인 상사 직급자는 대부분 베트남 전쟁을 경험해보고, 베트남 전쟁에서 잔인한 전투를 수행한 자가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런 자가 상관이라면 군기를 잡히는 것 이상으로 광기로 잡을 것이다.

 

충정훈련, 단순히 진압훈련을 넘어 진압해야 할 대상에 대해 증오심까지 부여했다. 즉 진압되어야 할 대상은 단순히 진압을 넘어 죽이거나, 또는 죽음 그 유사성까지의 폭력행위를 휘둘러야 했다. 518 사진전을 인터넷을 보면 너무 슬프고 무서운 사진이 많다. 머리가 깨지거나, 얼굴이 아예 없거나, 목이 잘린 시신도 있다. 내장이 터져 나온 그림, 아버지 영정을 들고 멍하니 바라보는 어린상주 등등 이들만 그런가?

 

더운 날 친구들이랑 물놀이하기 위해 저수지에서 놀던 애들은 계엄군의 총에 맞고 머리 반쪽이 날라 갔다. 차갑게 식어가는 아이를 부여잡은 어머니의 통곡은 직접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렇게 518은 죽은 자의 비명으로 시작하여 40년이 지난 지금도 죽은 자를 기억하며 살아남은 자들이 비명을 지른다. 그들의 죽음보다 더 슬픈 것은 그들의 죽음이 은폐되어야 했고, 조롱당해야 하던 것이다.

 

누구는 말한다. 연평해전이나 군사훈련 중에 죽은 군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말이다. 물론 작전 중이나 또는 교전 중에 죽은 이들은 국가의 신으로 현충원에 모시고, 그들을 기려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적어도 우리에겐 영웅의 모습으로 남아있지, 그 이상으로 왜곡되지 않는다. 그들은 나라를 지켜야 할 의무로서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518 희생자는 나라를 지키는 사람으로부터 보호를 받은 게 아니라 오히려 죽임을 당했다.

 

같은 민족, 그것도 같은 국가의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게 비극인 것이다. 그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는 추모행사가 올해도 어김없이 광주에서 열었다. 이날 대통령이 연설할 때 광주시민만 아니라 전남도민도 같이 언급했다. 518의 희생자는 거의 대부분이 광주 안에서 나왔지만, 왜 전남도민까지 포함한 것일까? 그것은 전북에서 전주, 경북에서 대구과 같은 것이다. 지방의 작은 시군에서 대구 또는 광주 등과 같은 광역도시에 많이 이주하기 때문이다.

 

서울이나 경기도, 지방에서 울산과 부산은 토박이 주민보다 외지 사람들이 이동이 잦다. 교통이 발달되고, 인구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주나 대구 같은 도시난 전남과 경북지역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전남이나 경북 지역의 가족이 많이 분포하기 때문이다. 이는 공업이나 상업이 중심이 아니라 농업과 어업이 중심되었기 때문이다. 소규모 핵가족보다 대가족의 문화가 아직 마을사회에 남아있는 점, 2차 또는 3차 산업보다 1차 산업이 중심이다. 1차 산업의 특성이 제법 개인화 되었다고 하나, 적어도 마을단위의 협조문화는 남아있다.

 

그래서 그런 도시에 무슨 문제가 일어나면 주변지역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나마 대구의 경우 경부선의 중심역사도 있고, 교통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광주의 같은 경우 다르다. 대구는 경북과 경남 중심적 교통교두보인 KTX를 비롯하여 각종 교통인프라가 갖추어졌지만, 광주는 조금 다르다. 광주의 교통인프라는 전남지역 군 단위 지역의 교통을 분산하는 기능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남지역의 주민들이 학업이나 병원진료를 위해 광주를 찾는 경우가 많다. 광양과 순천 같은 지역은 조금 다르지만, 그 외의 지역은 광주가 중심이다.

 

518 당시 광주시민만이 아니라 전남지역의 주민들이 참변을 당한 이유가 그러하다. 전남지역 상권과 교육권 역시 광주가 중심이었고, 광주에 업무를 보러 주변지역사람들도 오고, 또한 광주에 전남지역 도민의 친척들이 많이 살았다. 그래서 518의 아픔은 광주만이 아니라 전남지역 전체의 아픔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러하다.

 

1980년대 광주전남은 아직까지 농경사회에 가깝다. 지금도 전남지역은 농축산업이 기반이다. 1980년대 전남지역에서 농업은 현대처럼 하우스나 트랙터를 이용하지 않았고, 농민들이 손이나 또는 농우(農牛)가 직접 논과 밭을 갈던 시절이다. 농경산업이 만연한 사회는 마을이 집성촌 또는 씨족부락이 근간이었다. 제사를 지내면 멀리 친척들도 찾아오고, 대규모 제사가 모이면, 촌수가 상당히 먼 사람들도 모인다.

 

518의 비극이 전남지역에 큰 아픔을 준 이유는 바로 이런 사유이다. 제사를 지내면 촌수가 먼 사람들이라도 어느 곳에 모여 다 같이 얼굴을 마주한다. 그런 시간은 1980년대 이전부터 시작했다. 조선시대부터 시작한 그런 행사에서 촌수가 10촌을 넘어 20촌을 넘는 사람들도 서로 알고 지내는 시대이다. 다 같은 고향사람들이고, 누구의 친구, 누구 아버지의 친구 등등 이런 인간관계가 매우 깊이 연결된 세상이다.

 

게다가 광주나 전남지역 인구는 다른 지역에 적었으며, 늘 일상에서 얼굴을 보던 사람들이 많았다. 광장에 나가니 어디서 많이 본 녀석이 계엄군의 몽둥이에 맞고, 총에 맞아 쓰러진다. 광주에 살던 친척이 그렇게 맞거나 죽음을 당했다. 광주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되고, 전남지역에도 그 비극이 퍼진 것이다. 지금도 518에 대한 이야기를 전남지역 친척들에게 물으면 당연히 날이 서는 이유는 그러하다.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으나, 외할아버지가 별세하고, 외갓집 문제로 시골에 갔다. 엄마시골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으나, 다행히도 옹벽 아래에는 어머니 사촌오빠가 사시고, 그 옆집에는 엄마 친구의 어머니가 사셨다. 광주 요양원에 있다가 고향집에 살고 싶어 내려오신 것이다. 어머니친구는 현재 광주에 사시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여동생, 고모도 광주에 사신다. 그래서 518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부산에 살아도 계속 접할 수밖에 없던 일이다.

 

광주전남에 518이라면, 제주지역에는 43학살이 있다. 언제 기념식을 보니 어떤 할머니가 외손녀가 전하는 사연을 들으며 통곡하고 있었다. 제주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방 어망이라 한다. 그 할머니의 사연은 43 당시 부모님이 군인에게 수장을 당해 죽었다. 그래서 그 할머니 그 이후로 바다생선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제주에서 43은 이제 70년이 지난 일이다. 70년이 지나도 그 할머니의 마음에 아방과 어망의 죽음은 늘 그늘이었고, 그 할머니의 외손녀에게도 학살의 비극은 계승된다.

 

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도, 외손녀는 할머니의 비극을 기억하고, 외손녀가 결혼하여 자녀와 손자손녀에게도 그 비극을 전할 것이다. 인간의 비극에 대해 518의 고통이 40년이 지나도 지울 수 없는 것은 그보다 더 오래된 학살의 비극을 지켜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는 광주 망월동 묘역은 총 3번을 갔다. 처음에 친구가 광주에 볼 일이 있어 같이 갈 때, 친구는 거래하는 분과 회의할 때 홀로 찾아갔다. 2번째는 결혼 전 와이프와 연애할 때 가보고, 3번째는 광주에 엄마를 엄마친구분집에 모셔드릴 때 가본 적이 있다.

 

1번째와 2번째 당시 묘역 위로 가지 않았지만, 3번째는 묘역에 잠든 사람을 찾아갔다. 아버지가 알고, 시골 작은아버지도 알던 사람이 거기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분의 이름을 꺼내니 작은아버지는 조금 슬픈 목소리로 만일 망월묘역에 갈 일이 있다면 자기 대신 그 사람의 묘에 가달랐고 했다. 40년이 지났지만, 직접적으로 겪지 않고 주변 제3자의 입장에서 멀리 보던 이들도 518이란 여전히 아픔 일인 것 같다.

 

40주년 연설에서 조금 신경 쓰이는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대동세상이다. 대동(大同)이란 말은 자주 사용된다. 행사나 축재 때 대동제(大同祭)를 사용하는데, 대동세상(大同世上)은 조금 다르다. 이 말은 지금으로부터 약 430년 전 선조시대에 나온 단어이다. 기축옥사의 원인이 된 정여립이란 인물이 있다. 정여립이 만든 대동계(大同契)가 있고, 그는 대동세상을 부르며, 기존 권력에 맞서다 자살을 인물이다. 정여립 모반사건은 동인선비를 몰살시킨 사건이다. 어떤 책에서는 기축옥사를 두고 조선시대의 518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을 주장하던 귀족적 민주주의 이후 대중적 민주주의를 논한 것은 최근 300년 전 유럽이다. 공화정을 영국에서 주장했다고 해도, 진정한 민주주의, 즉 시민들에 의한 민주정을 논한 시점은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일 것이다. 하지만 신분과 성별 등 여러 차별에 관계없이 인간 그 자체에 평등을 주장한 것은 아마 정여립이 최초이지 않으냐는 글귀를 봤을 때 솔직히 나는 많은 충격을 받았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살고 싶다. 그것은 무엇인가? 타인 위에 군림하지 않고, 타인을 밟지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주에서 인간적 삶, 더 나아가 민주주의란 어떤 것인가?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지식인과 대학생은 많이 있었으나, 광주의 518은 그런 정신보다, 오히려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야지. 사람이라면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게 시작인 것 같다. 광주전남지역은 친구와 친척 관계가 끈끈하고, 농경사회 특성상 이웃과 잘 지낸다. 지금 시골에 가면 담벼락은 콘크리트나 창살이 아니라 낮은 돌담이 아기자기하게 쌓여있다. 대문은 열려있고, 잠긴 것처럼 보여도 살짝 밀어도 문이 열린다.

 

가족이거나 가족이 아니더라도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던 이들, 그리고 그렇지는 않아도 가끔 지나가면서 보던 이들이 길에서 수난을 당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에는 민주화라는 이상적 가치보단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라는 감정이 우선이다. 민주화란 가치는 이성적 판단이 중요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직접 실천할 수 있는 인간의 행동력이다. 논리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것, 어떻게 보면 민주화란 가치는 이상적 가치고, 이성적 판단이 중요하나, 인간의 감정이 참으로 중요한 것 같다. 민주주의 운동과 관련하여 프랑스대혁명은 제 아무리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자코뱅일원이 있었다고 한들, 프랑스 민중들의 분노가 없었다면 이룰 수 없었다. 물론 그런 분노가 제대로 통제되지 않아 프랑스혁명은 실패했지만, 적어도 인간의 감정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에너지가 된다.

 

논리로만 움직이면 자신의 이해관계에 치중하나, 감정으로 움직이면 이해관계보단 인간적으로 움직인다. 타인의 고통은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해결될 수 없다. 오히려 감정적으로 바라볼 때 가능하다. 민주화운동은 거대한 이상과 방향을 주지만, 그 시작은 이상보다 인간의 본연적 감정에서 시작된다. 왜 그렇게 투쟁하느냐 왜 그렇게 남을 위해 스스로 고생하느냐에 그들의 답변을 무엇일까? 거창한 연설보단 그저 어떻게 사람에게 그럴 수가 있냐고 말할 것이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의 진정한 시작점과 힘이 아닌가 한다.

 

물론 잘못된 인간성을 가진 인간이 가진 감정이라면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지만, 순박하거나 또는 선량하거나,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리 말할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졌기에 518에 대한 아픔과 상처는 더욱 큰 것이다. 어떻게 사람을 그리 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그렇게도 하고서도 아직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냐고 말이다. 하물며 주변에서 그런 일이 있다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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