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비극이 40주년이 되었다. 40년이란 시간이 인간 개인에게 보자면 기나긴 시간이고, 역사라는 큰 틀에서는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으로서 40년을 보면 이제 중년의 반열에 든 사람이라면 참 길지만 짧게 지나간 시간이고, 젊은 층에게는 아주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이다. 518 당시 나이가 40살이던 사람들은 이제 노인이 되어 삶을 마감하거나 또는 마감하기 위해 마무리를 준비할 것이다.

 

518에 대해 생각하면 E.H.Carr<역사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역사는 현재의 인간이 과거와 끊입 없이 대화하는 것이라 한다. 대화하는 것은 무엇인가? 죽은자는 말이 없고, 오로지 기록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기록을 가지고 후대의 평가를 두고 우리는 계속 고민하게 된다. 한국의 대표인 사례가 바로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이다. 누군가에겐 정부에 반기를 든 폭도, 혹은 반자유주의 세력이라고 말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에게 민주화에 대한 열망, 죄 없는 양인학살 사건, 2가지가 복잡하게 묘하게 엮여있는 비극일 수 있다. 전에 같은 인터넷카페와 블로그 이웃 분이 적은 글을 보았다. 영화 <김군>에 대한 리뷰였다. 아직도 518에 대한 아픔이 끝나지 않으나, 극우대표 논객이 계속 518을 두고 왜곡하는 점에 대해 현실적 증거 또는 북한군이라고 지명된 사람을 찾아 그가 주장한 바가 틀렸음을 보여준다.

 

분명히 말하지만 51840년이 이미 지났고, 국방부 자료나, 광주 및 주변 사람들의 증언, 하다못해 외국기자와 미국극비문서까지도 518은 북한과 무관하다고 나온다. 오히려 헬기사격을 비롯한 폭격계획을 숨기려 한 자들이 북한개입설을 계속 주장한다. 그들에게 518은 부정하고 싶은 기록이고, 한편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이기도 한다. 여러 책을 읽다보니, 왜 그렇게 군인들이 518에서 잔혹한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여러 가지 서적에서 제시하고 있으나, 군부대 특성상 진압부대원인 육군은 일반병사들이 많으나, 병사를 지휘하고 통제하는 장교 이상으로 살펴볼 존재가 부사관 집단이다. 이들 중 부사관 계급 중 상위계급인 상사 직급자는 대부분 베트남 전쟁을 경험해보고, 베트남 전쟁에서 잔인한 전투를 수행한 자가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런 자가 상관이라면 군기를 잡히는 것 이상으로 광기로 잡을 것이다.

 

충정훈련, 단순히 진압훈련을 넘어 진압해야 할 대상에 대해 증오심까지 부여했다. 즉 진압되어야 할 대상은 단순히 진압을 넘어 죽이거나, 또는 죽음 그 유사성까지의 폭력행위를 휘둘러야 했다. 518 사진전을 인터넷을 보면 너무 슬프고 무서운 사진이 많다. 머리가 깨지거나, 얼굴이 아예 없거나, 목이 잘린 시신도 있다. 내장이 터져 나온 그림, 아버지 영정을 들고 멍하니 바라보는 어린상주 등등 이들만 그런가?

 

더운 날 친구들이랑 물놀이하기 위해 저수지에서 놀던 애들은 계엄군의 총에 맞고 머리 반쪽이 날라 갔다. 차갑게 식어가는 아이를 부여잡은 어머니의 통곡은 직접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렇게 518은 죽은 자의 비명으로 시작하여 40년이 지난 지금도 죽은 자를 기억하며 살아남은 자들이 비명을 지른다. 그들의 죽음보다 더 슬픈 것은 그들의 죽음이 은폐되어야 했고, 조롱당해야 하던 것이다.

 

누구는 말한다. 연평해전이나 군사훈련 중에 죽은 군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말이다. 물론 작전 중이나 또는 교전 중에 죽은 이들은 국가의 신으로 현충원에 모시고, 그들을 기려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적어도 우리에겐 영웅의 모습으로 남아있지, 그 이상으로 왜곡되지 않는다. 그들은 나라를 지켜야 할 의무로서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518 희생자는 나라를 지키는 사람으로부터 보호를 받은 게 아니라 오히려 죽임을 당했다.

 

같은 민족, 그것도 같은 국가의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게 비극인 것이다. 그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는 추모행사가 올해도 어김없이 광주에서 열었다. 이날 대통령이 연설할 때 광주시민만 아니라 전남도민도 같이 언급했다. 518의 희생자는 거의 대부분이 광주 안에서 나왔지만, 왜 전남도민까지 포함한 것일까? 그것은 전북에서 전주, 경북에서 대구과 같은 것이다. 지방의 작은 시군에서 대구 또는 광주 등과 같은 광역도시에 많이 이주하기 때문이다.

 

서울이나 경기도, 지방에서 울산과 부산은 토박이 주민보다 외지 사람들이 이동이 잦다. 교통이 발달되고, 인구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주나 대구 같은 도시난 전남과 경북지역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전남이나 경북 지역의 가족이 많이 분포하기 때문이다. 이는 공업이나 상업이 중심이 아니라 농업과 어업이 중심되었기 때문이다. 소규모 핵가족보다 대가족의 문화가 아직 마을사회에 남아있는 점, 2차 또는 3차 산업보다 1차 산업이 중심이다. 1차 산업의 특성이 제법 개인화 되었다고 하나, 적어도 마을단위의 협조문화는 남아있다.

 

그래서 그런 도시에 무슨 문제가 일어나면 주변지역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나마 대구의 경우 경부선의 중심역사도 있고, 교통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광주의 같은 경우 다르다. 대구는 경북과 경남 중심적 교통교두보인 KTX를 비롯하여 각종 교통인프라가 갖추어졌지만, 광주는 조금 다르다. 광주의 교통인프라는 전남지역 군 단위 지역의 교통을 분산하는 기능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남지역의 주민들이 학업이나 병원진료를 위해 광주를 찾는 경우가 많다. 광양과 순천 같은 지역은 조금 다르지만, 그 외의 지역은 광주가 중심이다.

 

518 당시 광주시민만이 아니라 전남지역의 주민들이 참변을 당한 이유가 그러하다. 전남지역 상권과 교육권 역시 광주가 중심이었고, 광주에 업무를 보러 주변지역사람들도 오고, 또한 광주에 전남지역 도민의 친척들이 많이 살았다. 그래서 518의 아픔은 광주만이 아니라 전남지역 전체의 아픔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러하다.

 

1980년대 광주전남은 아직까지 농경사회에 가깝다. 지금도 전남지역은 농축산업이 기반이다. 1980년대 전남지역에서 농업은 현대처럼 하우스나 트랙터를 이용하지 않았고, 농민들이 손이나 또는 농우(農牛)가 직접 논과 밭을 갈던 시절이다. 농경산업이 만연한 사회는 마을이 집성촌 또는 씨족부락이 근간이었다. 제사를 지내면 멀리 친척들도 찾아오고, 대규모 제사가 모이면, 촌수가 상당히 먼 사람들도 모인다.

 

518의 비극이 전남지역에 큰 아픔을 준 이유는 바로 이런 사유이다. 제사를 지내면 촌수가 먼 사람들이라도 어느 곳에 모여 다 같이 얼굴을 마주한다. 그런 시간은 1980년대 이전부터 시작했다. 조선시대부터 시작한 그런 행사에서 촌수가 10촌을 넘어 20촌을 넘는 사람들도 서로 알고 지내는 시대이다. 다 같은 고향사람들이고, 누구의 친구, 누구 아버지의 친구 등등 이런 인간관계가 매우 깊이 연결된 세상이다.

 

게다가 광주나 전남지역 인구는 다른 지역에 적었으며, 늘 일상에서 얼굴을 보던 사람들이 많았다. 광장에 나가니 어디서 많이 본 녀석이 계엄군의 몽둥이에 맞고, 총에 맞아 쓰러진다. 광주에 살던 친척이 그렇게 맞거나 죽음을 당했다. 광주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되고, 전남지역에도 그 비극이 퍼진 것이다. 지금도 518에 대한 이야기를 전남지역 친척들에게 물으면 당연히 날이 서는 이유는 그러하다.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으나, 외할아버지가 별세하고, 외갓집 문제로 시골에 갔다. 엄마시골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으나, 다행히도 옹벽 아래에는 어머니 사촌오빠가 사시고, 그 옆집에는 엄마 친구의 어머니가 사셨다. 광주 요양원에 있다가 고향집에 살고 싶어 내려오신 것이다. 어머니친구는 현재 광주에 사시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여동생, 고모도 광주에 사신다. 그래서 518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부산에 살아도 계속 접할 수밖에 없던 일이다.

 

광주전남에 518이라면, 제주지역에는 43학살이 있다. 언제 기념식을 보니 어떤 할머니가 외손녀가 전하는 사연을 들으며 통곡하고 있었다. 제주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방 어망이라 한다. 그 할머니의 사연은 43 당시 부모님이 군인에게 수장을 당해 죽었다. 그래서 그 할머니 그 이후로 바다생선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제주에서 43은 이제 70년이 지난 일이다. 70년이 지나도 그 할머니의 마음에 아방과 어망의 죽음은 늘 그늘이었고, 그 할머니의 외손녀에게도 학살의 비극은 계승된다.

 

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도, 외손녀는 할머니의 비극을 기억하고, 외손녀가 결혼하여 자녀와 손자손녀에게도 그 비극을 전할 것이다. 인간의 비극에 대해 518의 고통이 40년이 지나도 지울 수 없는 것은 그보다 더 오래된 학살의 비극을 지켜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는 광주 망월동 묘역은 총 3번을 갔다. 처음에 친구가 광주에 볼 일이 있어 같이 갈 때, 친구는 거래하는 분과 회의할 때 홀로 찾아갔다. 2번째는 결혼 전 와이프와 연애할 때 가보고, 3번째는 광주에 엄마를 엄마친구분집에 모셔드릴 때 가본 적이 있다.

 

1번째와 2번째 당시 묘역 위로 가지 않았지만, 3번째는 묘역에 잠든 사람을 찾아갔다. 아버지가 알고, 시골 작은아버지도 알던 사람이 거기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분의 이름을 꺼내니 작은아버지는 조금 슬픈 목소리로 만일 망월묘역에 갈 일이 있다면 자기 대신 그 사람의 묘에 가달랐고 했다. 40년이 지났지만, 직접적으로 겪지 않고 주변 제3자의 입장에서 멀리 보던 이들도 518이란 여전히 아픔 일인 것 같다.

 

40주년 연설에서 조금 신경 쓰이는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대동세상이다. 대동(大同)이란 말은 자주 사용된다. 행사나 축재 때 대동제(大同祭)를 사용하는데, 대동세상(大同世上)은 조금 다르다. 이 말은 지금으로부터 약 430년 전 선조시대에 나온 단어이다. 기축옥사의 원인이 된 정여립이란 인물이 있다. 정여립이 만든 대동계(大同契)가 있고, 그는 대동세상을 부르며, 기존 권력에 맞서다 자살을 인물이다. 정여립 모반사건은 동인선비를 몰살시킨 사건이다. 어떤 책에서는 기축옥사를 두고 조선시대의 518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을 주장하던 귀족적 민주주의 이후 대중적 민주주의를 논한 것은 최근 300년 전 유럽이다. 공화정을 영국에서 주장했다고 해도, 진정한 민주주의, 즉 시민들에 의한 민주정을 논한 시점은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일 것이다. 하지만 신분과 성별 등 여러 차별에 관계없이 인간 그 자체에 평등을 주장한 것은 아마 정여립이 최초이지 않으냐는 글귀를 봤을 때 솔직히 나는 많은 충격을 받았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살고 싶다. 그것은 무엇인가? 타인 위에 군림하지 않고, 타인을 밟지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주에서 인간적 삶, 더 나아가 민주주의란 어떤 것인가?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지식인과 대학생은 많이 있었으나, 광주의 518은 그런 정신보다, 오히려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야지. 사람이라면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게 시작인 것 같다. 광주전남지역은 친구와 친척 관계가 끈끈하고, 농경사회 특성상 이웃과 잘 지낸다. 지금 시골에 가면 담벼락은 콘크리트나 창살이 아니라 낮은 돌담이 아기자기하게 쌓여있다. 대문은 열려있고, 잠긴 것처럼 보여도 살짝 밀어도 문이 열린다.

 

가족이거나 가족이 아니더라도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던 이들, 그리고 그렇지는 않아도 가끔 지나가면서 보던 이들이 길에서 수난을 당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에는 민주화라는 이상적 가치보단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라는 감정이 우선이다. 민주화란 가치는 이성적 판단이 중요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직접 실천할 수 있는 인간의 행동력이다. 논리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것, 어떻게 보면 민주화란 가치는 이상적 가치고, 이성적 판단이 중요하나, 인간의 감정이 참으로 중요한 것 같다. 민주주의 운동과 관련하여 프랑스대혁명은 제 아무리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자코뱅일원이 있었다고 한들, 프랑스 민중들의 분노가 없었다면 이룰 수 없었다. 물론 그런 분노가 제대로 통제되지 않아 프랑스혁명은 실패했지만, 적어도 인간의 감정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에너지가 된다.

 

논리로만 움직이면 자신의 이해관계에 치중하나, 감정으로 움직이면 이해관계보단 인간적으로 움직인다. 타인의 고통은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해결될 수 없다. 오히려 감정적으로 바라볼 때 가능하다. 민주화운동은 거대한 이상과 방향을 주지만, 그 시작은 이상보다 인간의 본연적 감정에서 시작된다. 왜 그렇게 투쟁하느냐 왜 그렇게 남을 위해 스스로 고생하느냐에 그들의 답변을 무엇일까? 거창한 연설보단 그저 어떻게 사람에게 그럴 수가 있냐고 말할 것이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의 진정한 시작점과 힘이 아닌가 한다.

 

물론 잘못된 인간성을 가진 인간이 가진 감정이라면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지만, 순박하거나 또는 선량하거나,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리 말할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졌기에 518에 대한 아픔과 상처는 더욱 큰 것이다. 어떻게 사람을 그리 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그렇게도 하고서도 아직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냐고 말이다. 하물며 주변에서 그런 일이 있다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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