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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늄의 밤
하나무라 만게츠 지음, 양억관 옮김 / 씨엔씨미디어 / 1999년 4월
평점 :
절판
게르마늄의 밤을 우연히 내가 아는 분에게 선물로 받았다. 집안에 초등학교 자녀들이 있어서 혹시나 보면 정신적인 영향이 있을 것 같아 받은 것이다. 책 제목에서 게르마늄이라 하여도 금속성 원자이고, 인간의 몸에는 게르마늄이 좋은 것으로 안다. 건강에 좋으면 멸종위기 동물이라도 잡아먹는 한국사회에 게르마늄이란 단어를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이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표지를 보니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란 점에서 상당히 문학적으로 높은 작품을 느꼈다.
그리고 표지 우측 상단에 붉은 글씨로 18세 미만 구독 불가라고 적혀 있었다. 또한 표지는 엄청난 표정으로 일그러진 인간이 자신의 몸을 부둥켜안고 절규하듯 외치는 표정이었다. 한 마디로 고통과 좌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거기에 메인 자였다. 책 제목과 표지도 그렇고 목차에서 마광수 교수와의 대담 역시 잊을 수 없을 것이리라. 마광수 교수하면 한국사회에서 외설과 예술의 경계에서 외설로 낙인찍힌 자로서 그의 성적 도착적인 유희는 많은 논란을 한국사회에 불러 일으켰다.
아직까지 유교적인 문화에 몸이 젖어버린 한국사회에 게다가 서구 기독교문화 유입으로 과다 망상적으로 심각한 결백증들은 이 사회의 병적인 존재로 되었는지 모른다. 전에 어느 책에 이런 문구를 보았다. 성심리학자인 빌헬름 라이히는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많이 친한 학자인데 그가 남긴 말로는 "성의 억압이 파시즘 낳는다."와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가장 음탕한 사회에서 금욕주의가 싹튼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야말로 한국과 가장 어울리지 않을 단어가 아닌가? 성적욕망을 무리하게 억압하고 부정하고 뭔가 죄를 부여하는 한국사회에서 변태적이고 관음적인 욕망이 꽃피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오히려 억압을 하기에 그 억압적 충동이 역으로 변태적인 존재를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엔트로피라고 하여 인간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욕구불만이 쌓여만 간다. 문제는 그 불만사항은 아주 작게 조금씩 해소하기 보다는 더욱 더 압박을 가한다. 마치 조금이라도 눈에 띄면 죄인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종교적인 가치관이 중요시 되는 세계에서 그것은 모든 것으로 부정된다. 하나의 성(聖)적인 체계가 잡힌 곳에는 그 모든 것이 부정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기야 말로 더욱 더 부정과 부패 악이 처참하고 잔혹하고 때로는 승화되기도 한다. 이 책 게르마늄의 밤에서는 더욱 심각한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작가인 하나무라 만게츠는 아주 독특하게도 짧은 학력과 제대로 된 세상살이를 보지 못한 듯하다.
오히려 왜곡된 세상과 어려운 삶에서 그의 필력은 매우 현실적인 것을 지나 추함과 더러움으로 가득했다. 그런 부정적인 삶의 관조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을 알게 된다. 인간은 추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추함은 추하다고 인정해서 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한 주제에 추하지 않고 그것을 가면으로 씌운 채 성(聖)스러운 이데올로기에 매여 모든 것을 회피하는 것이 추한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로우는 그런 성(聖)스러운 것을 변태적 성(性)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에게 차라리 거룩하고 아름답다고 외치는 성당 안의 이야기는 한낱 위선과 오만이었다. 이 책의 배경을 보니 일본이 태평양 전쟁 이후라는 점이고, 주인공 로우가 중학교 시절이 미군의 창고에서 나온 식량으로 목숨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1일 1인당 생활금액 120엔, 1945년 지나도 120엔 역시나 작은 돈인가? 미군이 주는 통조림, 전분으로 목숨을 부지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미군이 준 음식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어떤 비스켓을 열어보니 구더기가 나왔다고 한다. 유통기간이 지난지 몇 년이나 지난 것이었다. 모든 미군들이 주는 음식은 음식이 아니라 음식폐기물이었다. 폐기물을 먹고 살아가는 로우에게 희망과 꿈은 없다. 현실의 일그러진 모습에 그저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학대하고 때로는 그 날카로운 복수의 화신은 남에게 이어진다. 집단이지메, 동성애, 변태적인 성적 유희 등등 말이다.
남자가 남자에게 침과 가래를 요구하여 먹이고, 남자가 남자의 성기를 손으로 잡고, 입으로 애무하여 끈끈한 액체가 나와 변태적인 모습으로 등장할 때 그들은 처음에 거부했으나, 잠시 후에는 그것에 맛을 들어버렸다. 인간의 어두운 감정과 비극성을 기저까지 내려간 것이다. 그런 로우가 사회에 나가 살인을 했다. 하지만 그는 살인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살인 동기가 여자와 남자 중에서 여자가 자신의 성적인 부분을 농락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의 깊은 공간에 자기를 담구지 못한 채 남자의 동성애에 더렵혀져 있었다. 아니 이제는 오히려 거기에 쾌락과 불쾌함의 알 수 없는 모순에 빠졌다.
그래서 여자를 죽이고, 그 여자와 관계있던 남자도 죽였다. 그런 후에 다시 성당이 있는 고아원에 온 것이다. 그는 와서 농장 일을 도왔다. 그는 와서도 어두운 과거에 붙잡혔다. 원장 신부에게 변태적 성적 유희를 도와야 했고, 그 덕분으로 몸을 숨겼다. 그렇지만 여자에 대해 몰랐다. 어느날 아스피란트 1호(수녀가 되기 위해 수련하는 여자)가 우연히 로우와 만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녀는 하얀 블라우스를 둘러도 유방의 관능적인 매력을 숨기지 못했고, 타이트 스커트와 잘룩한 허리는 매우 요염했다.
어느 부잣집의 딸로 수녀가 되기 위해 온 그녀는 마치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듯했으나, 그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매우 성적으로 도착적이고 강렬하고 격렬했다. 로우는 그녀의 고통과 아픔을 듣다가 그녀를 안았으나, 사실 그녀는 안아주기를 바란 것이다. 로우는 일반적 나체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의 몸매가 부각해주는 의상을 거친 여성에게 성적인 자위행위로 만족했다. 그것은 나체의 여성보다는 뭔가 페티시한 요소에 끌리는 남성의 성적 도착에 가깝다.
두 사람의 성교에서 그는 여자와 동정임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여성의 성적 쾌락에 따라 갔다. 입과 입에 서로 맞추고 혀를 주고받으며, 한손은 가슴에 한손은 은밀한 샘에 가져가고 있었고, 아스피란트 1호의 팬티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온갖 기교와 성적 도발로 로우를 본능적 인간으로 만든다. 그녀는 정녕 사랑을 원할까 아니면 여자이기를 바랄까? 책을 읽으면 그녀는 본래 수녀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원래 사랑하던 남자와 눈이 맞다가 임신했지만, 부모의 강압 아래 아사피란트 1호는 소파수술을 했다.
즉 자신의 자궁 내막들을 기구로 긁어내어 강제로 낙태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자궁에 상처를 입었다. 결국 그녀는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여자로서 결혼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녀는 인생의 좌절과 더 이상 자신이 여성으로 살 수 없으며, 죄를 지었다는 원죄적 의식을 더욱 강하게 느끼고 싶었다. 죄를 지어보고 싶은 것은 결국 자기가 살아있음을 알고 싶은 것이다. 로우와 성교에서 과연 그녀는 음탕한가 아니면 불결한 여자라고 생각할 수 있냐는 말에 대답은 아니라는 점이다.
상황에 닿으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 인간이나,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한 존재성을 확인하기 위해 변태적 섹스를 원했다. 로우는 그녀의 마수에 빠진 것인가? 아니면 풀린 것인가? 로우는 동성애적인 경험을 했고, 끝에는 프랑스계 미국인과 일본인 혼혈아 잔에게 성적인 변태적 행위를 부탁받는다. 잔은 남자이고, 그는 마음이 어리나 로우의 충동적이고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모습에 동경한다. 남자이면서 잔은 로우의 성기를 애무하고 로우는 부끄러워한다.
중학교시절 로우는 미우라라고 하는 상급생에게 강제로 동성애를 눈뜨게 되었다. 그때 강요받은 로우가 처음에 거부하다 끝내는 미우라에게 더 변태적인 요구를 했고, 그 제안의 좌절은 미우라의 음낭이 터지는 사건까지 연결된다. 그의 변태적인 성적행위는 아스피란트 1호에 의해 풀린 것일까? 아니면 다른 길로 들어간 것일까? 마지막 모습에서 더욱 더 심각한 변태로 되는 것일까? 하지만 끝을 보면 로우는 자신의 어둠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인다.
그것이 마치 일상이라도 되듯이 말이다. 인간의 어둡고 부정한 모습을 인간들은 거부한다. 오히려 자기들이 그러면서 남에게 하나의 올가미를 덮어씌우고 한다. 로우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치 있는 그대로 분출했다. 로우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고 존경하던 모스카 신부가 죽기 전에 로우는 모스카 신부의 휠체어를 이끌고 고해성사를 한다. 그가 고백하는 것들은 모두 부정하고 더럽고 추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추하고 더럽고 동물보다 더 전투적인 존재임을 고백한다. 모스카 신부는 그를 오히려 더 세속적 인간보다 위에라고 한다. 게다가 그런 말을 다른 수도사로부터 나온 말이다. 더럽고 추하고 난폭하고 성적인 본능으로 뭉친 로우가 왜 고귀할까? 인간의 더러움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숨기기보단 오히려 돌발적으로 행동하는 그가 인정하고 그 사실조차 거부하지 않는다. 단지 생각해보면 극단적이기는 하다.
아스피란트 1호와 성교 이후 테레시아 수녀가 그 일을 물어보자, 그는 대답으로서 테레시아 수녀에게 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바지 안의 강력한 욕망을 내보였다. 30대 수녀의 옷을 양파처럼 벗기고, 수녀 역시 벗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물처럼 숨을 나누며, 로우의 본능의 상징물에 붉은 피와 임파액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기 몇 일 전에 모스카 신부에게 테레시아 수녀에게 자신의 아이를 낳게 할 것이라고 했다.
생명을 낳고 싶어도 낳을 수 없는 아스피란트 1호, 생명을 낳을 수 있는데도 낳을 수 없는 테레시아 수녀, 여기서 많은 모순이 오고간다. 그런데도 로우는 죽음과 불능, 그리고 부패하여 죽어버린 것들을 부정하지 않았다. 사이레지, 소가 겨울철 여물과 같이 먹는 영양제를 만들면서 그것이 부패하고 발효되나 그것을 먹은 소는 큰다고 했다. 음식물폐기물이 있는 곳에 썩어가는 음식을 넣으며, 그것으로 농작물을 키우고, 돼지도 키운다고 했다. 그리고 쓰레기로 가득한 것으로 키운 것을 우리가 먹는다고 했다. 우리는 결국 쓰레기를 만들고 먹지 않는가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추한 것은 무엇인가? 성적인 변태적 욕망과 행위 그리고 폭력적이고 살인적인 행위, 그런데도 그것보다 더 추하고 더럽고 끔찍한 것은 무엇일까? 물론 종교를 비하할 생각은 없으나(물론 일본과 한국의 종교나 사회적 관념은 다르나), 인간의 본능을 억누르고 그것을 성스러운 존재로서 마치 없는 것처럼 속이는 위선이 아닐까 싶다. 행동적 죄는 가벼울지라도 그 죄에 대한 외면과 회피에서 인간은 더 큰 죄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로우가 존경하고 사랑한 모스카 신부는 마르고 늙은 노인이다. 그는 다리를 사용하지 못한다. 2차 대전에 스파이에게 고행성사를 받고 난 뒤에 일본군에게 잡혀 고문 받다가 그래 된 것이다. 그래도 그는 고해성사를 알리지 않은 채 그 비밀을 지켰다고 한다.
로우의 눈에는 모든 것이 얼간이고, 병신이고, 변태고, 욕망덩어리고, 어리석은 존재로 여겼으나 오로지 모스카 신부만이 사랑스럽고, 모스카 신부의 죽음에서 난폭한 로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내린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과 진정한 성스러움은 타인의 악적인 부분까지 다 안고 갈 수 있는가이다. 차라리 안고 가지 않으면 자신이 표출할 수밖에 없다. 로우의 난폭한 폭력과 변태적 성적도착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