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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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은 언제나 이 세계가 태어나면서 아니 이 세계가 계속 유지되어 그 멸망의 순간을 맞이하는 날까지 맹신(盲信)이란 단어는 유효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자신이란 존재를 단체에 존립할 수밖에 없다.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라고 했을까? 따지고 보자면 인간은 혼자일 수 없기에 그리고 언제나 무리를 이루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기에 그렇지 않은가 싶다.

 

하지만 인간이란 완벽하지 못할 존재뿐만 아니라 유한한 존재다. 자신의 유한성을 무한성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유한적인 것이 아닌 영속적인 가치로서 매기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국가, 종교, 민족이라는 커다란 존재이다. 이들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으나 눈앞의 존재감이라고 하기에 그렇다. 국가의 조직에서 인간의 존재는 매우 미약하고, 종교 앞에서는 인간은 무력하고, 민족 앞에서 인간은 하나의 톱니바퀴와 같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을 원하고 바라고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다. 자신의 존재적인 가치를 뒤로 한 채 개인의 영역을 무시하여 그저 조직적인 단체에 몸담기를 바라는 인간의 심리란 역설적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옳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이성적인 존재가 되기보다는 그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도구로 삼아 수단화 시킨다. 칸트가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이라고 하나, 그 목적의 대상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칸트는 비판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기본적인 요건은 인간의 교조주의적인 요소다.

 

칸트가 주변 오솔길을 따라 항상 산책을 하는데, 하지 못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17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프랑스혁명이었다. 칸트는 그 혁명을 두고 잘 되었다는 판단보다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프랑스혁명의 빚이 루소에게 있고, 그 루소의 철학을 받아들인 칸트가 왜 프랑스혁명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이었는가를 상기해보면 바로 저런 교조주의적 요소다. 인간의 행위가 이성과 논리로서 이루어진 역사가 아니라 항상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순간적인 파도로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기존 부당함과 문제점을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심의하여 개혁으로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으로서 움직이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는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라는 이런 문구가 있어서 아닐까 싶다. 사실 그렇지 아니한가? 언제나 그 시대의 부조리와 부당함이 극단적으로 이어질 때 항상 폭력현상이 일어난다. 문제는 그 폭력현상은 국가나 사회가 너무 강압적인 상황이 아니라 너무나 무력하고 통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력이란 하나의 극단적 수단이 평화를 위해 안정을 위해라는 말로서 오용된다.

 

독재자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평화와 안정이란 말이 있는데, 독재자가 통치하는 동안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내국을 잘 유지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독재자가 통치하면 항상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독재자는 언제나 자신의 입장을 앞세우고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항상 상징물들을 만든다. 그러다보니 국민들에게 쏟아야할 예산이 왕권상징에 사용되고, 내부의 불만을 제거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군대를 동원하고, 그 이상 무리가 되면 전쟁으로서 해결한다. 문제는 전쟁이란 것은 이겨도 본전이고, 지게 되면 완전 손해라는 것이다. 전쟁 후의 어지러운 정국과 정치적 영향이 줄어들 경우 항상 사변이 일어나게 될 마련이다.

 

맹신자들의 활동은 비로소 큰 빛을 발휘하게 되는 점이다. 그런다고 맹신자라고 일컫는 자들은 무식하고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대중들만을 지칭하는 말도 아니다. 맹신자는 엘리트적이고 인텔리하며, 상당한 지식을 소유한 지식인 역시 피하지 못할 존재다. 그들의 맹신과 대중의 맹신을 비교하면 대중은 자기 존재를 단체나 조직에 속하려고 하는 것이고, 지식인과 엘리트, 인텔리들은 그런 대중들을 자신들의 이상 내지 이념 그리고 이익과 사욕으로서 좌지우지 되는 것이다.

 

가령 여기서는 20세기의 폭풍과 같은 현실을 비교하여 분석한다. 예를 들어 20세기 위대하면서 실패한 혁명은 러시아의 10월 혁명 즉 볼셰비키혁명이다. 이때 혁명가로 명성을 날린 레닌과 트로츠키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맹신자였기는 하나 대중과 달랐다. 대중들은 오로지 빵과 안정을 원했고, 레닌과 트로츠키의 경우 차르의 전복과 1차 세계대전이 팽창되어 가는 자본주의의 욕망에서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 물론 그때의 혁명은 폭력을 종식하기 위한 폭력이었다.

 

이에 반해 레닌 사후 트로츠키가 후계자로 지명되나, 아쉽게도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정치적 암수에서 추방된 후에 암살까지 당했다. 그의 죽음에서 트로츠키의 실수는 대중을 하나의 무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인영역으로 보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기반세력인 지지자들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맹신하기보단 자신의 이상으로 통해 하나의 개인으로 되기를 바란 것이다. 주체적이고 개인의 사고와 판단력을 중시하였기에 그는 혁명 이후 스탈린에게 물려나게 되었다. 스탈린이 취한 방법은 간단한다.

 

집단화한 무리로서 그들을 하나의 무기로 만든 것이다. 겉으로는 프롤레타리아와 쿨라크의 세상을 위해라는 슬로건이나 알고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러시아민족이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빠진 것이다. 스탈린이 펼친 공포정치에서 러시아인들은 스탈린의 비밀경찰에 의해 겁먹은 강아지가 되었고, 스탈린 밑의 조직원들은 그저 분산된 하나의 겁쟁이였다. 그런데, 독일 나치와 전쟁을 펼치며 그들은 용감한 전사가 되었다. 그들은 스탈린의 부하로서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인이란 큰 민족적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뭉치고자 하는 저 심리는 어쩔 수 없다. 대중운동이 반드시 혁명과 전쟁이 아니라 폭동과 시민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여기서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여성들이 왜 시민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는가에서 기존에 그들은 개인의 영역이었으나, 결혼하면서 기존 가족단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로 맺고, 거기에 안주하지 못함에 따라 사회현상에 적극적인 활동을 한다는 점이다. 가령 지금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는 높다. 그런다고 그들 전체가 나는 모두 긍정적인 영향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심각한 광적인 요소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원인을 찾아가면 기본적으로 사회구조적인 부분과 문화적인 요소 역시 비판의 대상에서 피할 수 없다. 맹신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사회의 큰 난쟁인 수구세력과 급진세력에서 이들은 서로를 욕하고 할퀴고 있으나, 막상 그들의 본질은 같다. 그들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추구하기보단 자신의 존재를 투영하기를 바란 것이다. 극좌에서 극우로 가고 극우에서 극좌로 가는 원인과 유럽에서 어느 청년이 당신은 지금 공산주의자로 될 것인가? 아니면 나치로 갈 것인가? 라는 선택권이 있었다고 한다.

 

하다못해 공산당으로 가서 초반에 파시즘에 대항해도 결국 그는 몇 달 내로 다시 나치로 돌아오게 된다는 나치의 지도부의 말처럼 무엇이 옳은가 아닌가라는 철학적인 질문 대신 그냥 무엇이 자신에게 당장 마음에 드는 것이다. 흔히 정치에서 선거를 할 경우 정치인들과 사회적인 쟁점에 대해 논리적으로 윤리적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하기보단 그저 자신이 속한 정체성에 확인한다고 한다. 보수적인 공간에서 최상의 계급과 최하의 계급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사회를 바꾸는 것은 최상의 계급과 최하의 계급이다.

 

최상은 자신이 가졌던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권력에 집착하고, 최하의 조직은 범죄자 내지 사회 부적응자, 그리고 정신적 공황을 가지는 이방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그 중간에 있는 사람 역시 맹신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로지 맹신하지 않은 종류는 아주 철학적이고 논리적이고 사유의 깊이가 매우 깊은 지식인 내지 철학자일 것이다. 그나마 이들에게는 양심이나 있지만, 양심을 권력과 결탁할 경우 그 사회는 피지배계급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권력에 맹신한 자들이 그 권력에 대해 맹신한 지식인들까지 섭외할 경우 지식인들은 그 세계가 왜 존립되어야 하는지를 일반 대중들에게 아니 군중들에게 설파하기 때문이다. 지식을 소유하지 않으면 왜 그 사회가 잘못되었는지 조차 판단할 수 없다. 따라서 중세의 유럽에서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오로지 교회와 귀족에게만 공개된 내용이었다. 만약 거기에 그 외의 존재들인 자국어로 볼 경우 마녀사냥이 되어야할 운명이었다. 지식이어야말로 권력을 생산하는 하나의 재생산 체계였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적인 흐름에서 지금 한국이나 세계나 맹신자들의 우위싸움이 바쁘다.

 

나 역시 맹신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적어도 같이 휩쓸려 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의 존재로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의지로 다가갈 수 있는 맹신이 되었으면 한다. 이 책에서는 간디와 링컨을 탁월한 맹신자로 지정한다. 모든 사람이 맹신자라도 그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따지고 본다면 이 책은 인간의 실존주의적인 요소를 부정하는 것이 강렬하게 느낀다. 왜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외치고 있을까? 신은 정말 형이상학적 인식과 관념의 신이 아니라 인간의 군중심리에서 태어난 신이다. 결국 무지와 무의지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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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력비판 대우고전총서 24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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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칸트라고 하면 우리 지구 인류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하나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칸트가 무엇을 적고, 무엇을 논했는가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칸트라는 사람이 엄청난 철학자란 사실만 알지 그 이상으로 알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칸트에 대해 작년부터 본인은 마음을 굳게 다지고 칸트의 서적들을 읽기 시작했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이번에 <판단력비판>까지 읽게 되었다.

 

칸트의 3대 비판으로 널리 알려진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이 세 가지의 비판을 읽으며, 솔직히 이해하는 것은 후자로 두더라도 책 자체를 읽는 것 자체가 지독한 악몽이었다. 문구가 매우 난해하고, 낱말의 전개나 단어의 해석, 그리고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내용들이 이때까지 내가 본 서적 중에 가장 난해한 도서 베스트로 올라갈 정도로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전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솔직히 칸트의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정식으로 칸트를 배우지 않고서는 힘든 작업이란 것을 이번 <판단력비판>을 읽으면서 더욱 느꼈다.

 

그런다고 해도 배움의 길에는 끝이 없고, 모른다고 하여 그냥 그대로 지나갈 수만은 없다. 언제 다시 한 번 3대 비판을 다시 읽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때까지 3가지의 비판을 보면서 난이도가 <순수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실천이성비판>이었다. 책의 두께가 굵거나 혹은 서적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난이도가 높았다. 그런데 이 3가지의 서적을 보면서 느낀 점은 칸트의 3대 비판을 읽으면 같이 서로 비교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판단력비판의 경우에는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이해하지 않으면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책 자체 내용만으로 어려우나 순수이성비판의 사전지식의 누락은 이 책에서 다루는 진실한 의미를 놓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래의 문구는 판단력비판에 제시된 내용을 적어 놓았는데,

 

마음의 능력 상위 인식능력 선험적 원리 산물
인식능력 지성 합법칙성 자연
쾌·불쾌의 감정 판단력 합목적성  기예
욕구능력 이성

동시에 법칙인 합목적성

(책무성)

윤리 

 

1부터 4까지의 능력과 원리, 대상별로 어떤 점들이 인간의 내부의 의식을 작용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일단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판단력비판은 단순히 인간이 가지고 있는 판단능력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력이란 자체가 판단할 수 있는 대상을 토대로 그것을 보고 있는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것 자체에 대한 정신활동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보다시피 판단력비판은 판단과 비판이 같은 의미로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하는 능력 자체를 비판하고 있기에 비판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순수이성비판이 중요한가에서 그 판단해야할 대상에 대해 인식하거나 사고할 수 있는 인식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떤 원리들이 숨어있는지 말이다. 어떻게 보자면 물리학적인 요소가 많이 통용되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칸트의 철학은 순수철학인 형이상학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미적으로나 감성적으로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취미능력 판단에서 우선 그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것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바로 지성이 필요한 이유가 그러하다. 만약 지식이 없다고 해본다면 어떻게 될까? 지질학을 배워 암석에 대한 구조와 더불어 건축학을 알지 못하면 건축미학을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리고 조경학을 모르고서는 공원미학을 알 수 없다.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 있어야 하는 점이다. 미학(美學)이란 미를 공부하는 학문이기는 하나, 미학 자체에 대한 학문적 배움은 없다. 단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 잡다한 것들을 습득할 수밖에 없다.

 

물론 미학이란 것은 철학이란 칼로 예술을 찌르거나 잘라보는 학문이니, 기본적으로 철학이란 토대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철학만으로는 그것을 다 정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철학적인 영역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런 인간의 사고로서 취미에 대한 감성적 판별을 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알아가는 것에서 과연 단순히 자연에 대한 미만 존재하는 것일까? 칸트의 미는 단순히 자연의 숭고함이나 위대한 신앙심을 담은 건축물만도 아닌 것 같았다.

 

본문과 주석을 잠시 찾아보면 <나는 인민의 땀을 그처럼 불필요한 것들에 소비하는 권력자들의 허영을 꼭 루소와 같은 투로 꾸짖을 수 있다 - 아마도 “굶주린 다수에게는 필수품도 없는데 한 줌의 사람에게는 사치품이 넘친다.”의 끝 대목을 염두에 둔 말 같다. ⌈인간학 강의⌋>처럼 칸트가 직접적으로 루소가 언급한 문구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글을 전개하지 않으나, 적어도 앞의 문장들을 보고 있자면 칸트의 미적인 감각에서 아름다움을 눈에 당장 보이거나 귀에 들리거나 냄새를 맡거나 피부에 닿거나 입 안에서 맛을 느끼는 것처럼 개인이 직접적으로 신체의 오감을 통해 대상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가령 칸트의 <판단력비판>이라고 해도 결국 인간의 미의 가치를 논하므로 그 미라는 것이 단순히 개인이 가지는 감각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순수이성비판>을 읽어야 이 책이 어느 정도 연결되듯이 한편으로 <실천이성비판>까지 파악하는 편이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야할 사항이다. 루소의 문구처럼 루소의 주장은 결국 가난한 자들은 당장 생계에 곤란하여 큰 위기와 고뇌로 슬퍼하고 있는데, 어느 소수의 인간들은 사치품으로 장식하여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점이다.

 

따라서 저 문구를 보자면 칸트가 루소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처럼 프랑스나 혹은 가난한 유럽의 가난한 사람이 어려워하는 것을 공감하는 셈이고, 그것은 정치가나 혹은 권력자들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함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지시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미라는 것은 <순수이성비판>처럼 선험적인 이성 안에서 지성을 통해 판단하여 그것에 대한 원리와 논리를 찾는 것도 좋으나, <실천이성비판>처럼 인간의 선(Goods)을 베푸는 것 역시 중요한 미라는 점이다.

 

결국 미라는 것은 진과 선의 영역에서 접점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단지 그것이 예술이란 하나의 체계에서 다루고 있으나, 예술 역시 인간의 삶과 밀접하고, 인간의 정신과 상당히 밀접하다. 인간이 가진 사고가 그대로 예술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술을 광학으로서 삶을 보고 만드는 것이다. 그런 만큼 판단력비판에서 인간의 지성을 쌓고 판단하여 그것에 대한 윤리적 이성으로 그 대상을 판단하는 것 자체까지 재비판하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칸트는 인간의 교조주의적인 관념과 논리라는 것은 합리적으로 만드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 논리를 위한 논리가 아니라 윤리가 아닌 논리라는 점이다. 칸트의 인간에 대한 가치란 인간은 수단이 되는 대상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대상이란 점이다. 즉 인간의 존재는 고귀하고 그것에 대해 우리는 존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 <실천이성비판>에서 자기의 이성적인 가치 아래 자신의 선을 남에게 건네어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목적의 대상이기 때문이란 점이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남에게 선을 주거나 혹은 남의 선을 빼앗아 간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전자의 경우 쾌감을 남에게 주는 것이고, 후자는 남에게 불쾌감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럼 점에서 위에서 보이는 4개의 세로와 4개의 가로로 이루어진 도식에서 1번 라인은 명제를 구분되는 셈이고, 2번은 <순수이성비판>으로 연결되고, 4번은 <실천이성비판>으로 연결된다. 결국 판단력의 비판은 자신이 사물을 보는 것도 그러하나 자신이 하는 판단하고 실천하는 행위 자체 역시 인간의 이성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학에 대하여 적은 <판단력비판>에서 정말 아름다움 것들이 무엇으로 봐야 할 것인가? 일단 우리가 예술가 중에 유명한 인물을 상기시켜보라고 하면 보통 파블로 피카소가 생각날 것이다. 미적 감각을 다루는 점에서 보편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것에서 천재화가 피카소의 거명은 매우 적절하다. 하지만 피카소는 우리가 다 알고, 그가 무슨 그림이 있는지 대략 몇 가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가 무슨 삶과 사고를 가지고 있는가이다.

 

일단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좋은 예술은 천재만이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천재만이 남이 만들지 않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의 예술에 대한 담론에서는 진짜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천재의 창조성이었다. 그 뒤에 그 누구든지 완벽하게 따라 해도 그것은 원래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할 모조품이고 복제품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무리 인간이 아름다운 새의 울음소리를 잘 내어도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 자체 역시 자연적이고 이루어지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나는 피카소를 예로 들었을까? 어느 책에서 재미있는 피카소의 일화가 등장한다. 피카소가 아주 어릴 때 그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너는 정치를 하면 대통령이 되고, 신부가 되면 교황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피카소가 말 한 마디를 더 붙이어 문구를 완성했다. “나는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리고 나는 피카소가 되었다.” 천재화가 피카소의 탄생이란 이렇게 되었다. 피카소가 어떻게 하여 큐비즘으로 혹은 초현실적으로 그린 그림들을 만들었을까?

 

그는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보았고, 제2차 세계대전 시의 나치의 포로로 잡혔으며, 그 외에도 프랑스 자체의 정부로부터 억압도 받았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위로하고 싶었고, 그들의 슬픔을 일그러진 이미지로서 그림판으로 내세웠다. 웃기게도 그는 자본주의 체계에서 부르주아적인 가치관으로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던 마르크스주의였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엄청난 거액이 붙여질 정도로 높은 가격이 되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자신의 예술로서 저항했으나, 결국 자신의 예술품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엄청난 상품이 되는 반전을 겪었다.

 

문제는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그는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인간의 가치관이 상실하는 것을 매우 걱정했다. 그리고 보니 피카소의 그림들은 결국 전쟁과 기아, 분쟁이 원인이었다. 권력을 지닌 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독재자의 최후의 목표는 대부자라는 점에서 물질만능주의자들의 탐욕에 희생되어간 자들을 그렸는데 말이다. 어째든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예술이 왜 천재로부터인가에서 피카소의 예로 보면 된다. 일단 천재가 기존에 없던 것을 보고 만들고 했으니, 천재만이 예술을 크게 기여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예술에서 창조하는 것은 모방이란 말이 있다. 비록 제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것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와 지식이 없으면 불가한 것이다. 피카소가 그림을 아주 훌륭히 그려도 그가 처음에 미술가가 되지 않았다면 그가 만든 위대한 작품은 없었다. 단지 다른 방면으로 예술이 나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예술에서 칸트가 최고로 보는 것은 미술이었다. 미술에 인간의 감성과 의식이 가득하며, 그것을 보는 인간으로 하여금 왜 저렇게 되었을까? 라는 사고와 그 사고에 대한 판단을 주게 되면, 그 판단으로 통해 삶에 대한 윤리적인 사고로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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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보는 눈 - 왜 통일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이들을 위한 통일론 세상을 읽는 눈
이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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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어보았던 에티엔 발리바르(파리10대학 교수)의 <정치체에 대한 권리>라는 책을 보면서 세계 정치흐름을 조금 파악한 적이 있었다. 시장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소비에트연방의 추구한 전시공산주의)의 대결에서 결국 시장자본주의의 승리로 결착이 났다. 그 조짐이 보인 것은 독일 베를린 장벽의 허물어진 것에서 볼 수 있다. 스탈린이 동유럽을 점령하면서 서유럽과 동유럽은 자본주의의 경계선상에서 대립하고 있었다.

 

물론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이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나라에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에게 사상이념은 하나의 학문적 영역으로 변모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독일통일 이후 소비에트연방 해체는 상당한 큰 세계적인 여파로 몰려왔다. 이른바 탈(脫)이데올로기라는 명제가 생겼다는 점이다. 세계 흐름에서 국가 간의 대립구도는 냉전 시대의 좌우 이데올로기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탈(脫)이데올로기가 도리어 더 심각한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했다.

 

즉 원시의 신화세계가 계몽이란 억압 속에서 새로운 신화로 태어나서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듯이 스펙타클의 전복은 새로운 스펙타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런 스펙타클의 전복에서 등장한 것들은 기존 체계에 대한 정치적 이념을 고수하거나 혹은 변모되어도 인간사회에 펼쳐진 정치적 가치관은 오히려 저조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국제사회로 넘어오면서 정치적 극단적 수단인 전쟁이 예전에는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이제는 경제적 이익에 대한 전략으로 바뀌었다.

 

전쟁이란 한 마디로 과거 유럽에서 신세계를 탐험하듯이 큰 시장과 재원을 확보하는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무기와 병력은 적을 죽인다는 명제 아래 실재적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 세계적인 흐름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물어 본다면 참으로 난감하다. 우리는 남에게 침략을 수도 없이 받으면서 침략하러 가는 것은 별로 사례가 없다. 게다가 이제는 제일 가까운 적대국이 예전에는 같은 편이었는데, 지금은 최악의 존재로 변했다.

 

내가 어릴 적 그러니깐 초등학교에 다닐 시절에 이 노래를 정말 많이 부른 기억이 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이다. 심지어 가사에는 꿈에서도 찾아와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할 정도니 통일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통일은 과연 제대로 될 가능성이나 보이는가? 솔직히 말하여 지금 나는 통일에 대해선 반대의 입장이다. 당장 통일이 되면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이질감으로 인해 오히려 혼란은 야기할 뿐이다. 그런다고 통일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방법론적인 영역이 문제인 것이다. 통일을 보는 눈에서 과거 북한정치에 대한 전략적 외교업무를 담당하던 이종석 한반도평화포럼 상임이사가 자신이 가진 정보력과 세계 흐름과 앞으로의 문제를 토대로 책을 내었다. 이 책을 보면서 대부분 내가 가진 생각을 이종석 상임이사가 많이 언급했고, 거기에 대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영역으로 설명했다. 방금 위에서 세계가 탈(脫)이데올로기가 되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통용되지 않을 나라는 진짜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극소수다. 특히 북한과 같은 경우 전 세계적으로 무역을 할 수 있는 국가도 정해져 있으며, 고립된 공간 속에서 더욱 자신을 고립하는 독재정치체계를 가지고 있다.

 

독재적인 정치수단은 어느 국가라도 가지고 있으나, 북한의 경우 겉으로는 공산화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으나, 일본 대표적 문학평론가 및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서적 <근대문학의 종언>을 참고하면 북한은 오히려 공산화라기보다는 그런 슬로건을 내세운 이씨 조선의 연장이라고 했다. 사실 겉으로 그러하나 주체사상에 따른 3대 부자 세습은 독재정치의 정형적 모습이다. 그런다고 하여 우리가 여기에 그저 넋만 잃고 바라볼 수만은 없다.

 

매년 국방군사 예산이 국가예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이산가족 문제와 북한과의 외교마찰이 국내 정치, 경제, 사회에 큰 여파를 미친다. 과거 김일성의 사망에는 라면과 생수 사재기라는 혼란사태를 빚었다. 결국 그 일은 해프닝으로 끝났으나, 약 20년 전의 한국사회에서 그 사건은 매우 큰 충격인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김정일의 사망으로 국내 정치사회가 어지러운 것이 아니었나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이번 일은 조용히 잘 넘어갔다. 그런다고 화약고 앞에 라이터는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켤 수 있기에 방심은 금물이다.

 

그런다고 언제까지 이런 긴장사태를 유지할 수는 없다. 군대생활을 하는 남자라면 누구나 북한과의 외교문제가 발발하면 모두 두려움으로 가득해지고,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동안 그들의 가족들은 심한 우울증 및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예전에 북한 잠수함이 강원도에 침투할 때 내가 알던 사람이 그 근방 부대에 근무했다고 한다. 이때 장병들은 모두 유서를 작성하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봉투에 동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전쟁이란 극단적 행위는 결국 인간의 존엄한 생명과 동시에 재산을 망가뜨리고, 게다가 그 사망자 주변 사람들의 생활까지 파괴해 버린다. 과거 연평해전을 돌아보면 그들의 죽음은 너무 허무하고, 그들의 가족들은 오열에 분노했다. 그들에겐 북한군사정권은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이나, 문제는 그런 일들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면 더욱 심각한 일이 될 것이다. 젊은 생명이 사라질 경우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매우 손실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북한과 조율을 할 것인가? 통일과 한반도 평화란 말은 과거 정부부터 시작된 언어이다. 한반도 안정으로 통해 국민들의 안정된 생활과 외교적으로 안정된 정세로 외국인 투자자가 국내에 투자할 수 있고, 주식이나 자본의 유통도 원활하게 한다. 그런데 그 방법은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북한의 인권은 매우 심각하고, 기아와 질병 역시 심각하다. 여기서 모순이 북한의 인권이 심각한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주민들이 기아로 고통 받는 것도 안다. 그러면 그런 주민의 인권을 어떻게 개선해 나가는 것이다.

 

사회의 시민단체로 할 수 없고, 적십자사 활동에도 제한이 있다. 언제까지나 중국이나 미국의 외교수단에 밀릴 수 없는 노릇이다. 주민들의 인권을 생각한다면 결국은 주민들의 정치적 통치권을 지닌 북한정부와의 소통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으로 매우 어렵다. 극단적인 양국의 대치와 그 대치로 인해 양국의 국민들마저 서로에 대하여 증오하기 때문이다. 통일을 추구하고 한반도평화를 추구하는데, 그런 슬로건은 대립에 의해서는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을 뿐이다.

 

통일이 제일 불가능한 것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구조도 있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문화적 영역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서로 간의 정보와 대화도 없이 그저 대립의 각을 세운다는 것만으로 통일이 오히려 독이 되는 셈이다. 그런다고 전쟁으로 무력통일을 할 경우 국내 영토가 피폐해져 심각한 국가위기를 맞이할 수 있고, 인권문제 역시 최악의 상황으로 갈 수 있다. 아니라면 우리는 1등 국민, 너희들은 2등 국민으로 차별대우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 무력적인 대치에서 무력적인 방법을 동원하면 제로섬 게임처럼 답은 없어지는 것이다.

 

현재 국제정세에서 미국과 중국이 최고의 강대국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최고이고, 중국 역시 많은 인구로 통해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국이 우리와 외교와 무역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북한과의 외교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이란 국가가 결국 중간에 북한과 한국을 조율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란 국가는 겉으로 정치체계가 공산당을 유지한 것처럼 보이나, 실리적으로는 시장경제주의를 충실하게 걷고 있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서 동북공정이나 외교문제를 끊임없이 우리 정부와 국민을 도발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반드시 전쟁이란 것은 무력수단이라는 극단적 정치적 수단이 아니라도 충분히 많다는 점이다. 그런다고 하여 여기에 우리가 극단적으로 대처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갈 수 있고, 그런다고 하여 못 보는 채 외면할 수 없다. 국내에서 자원이 부족하여 원자재 수입으로 통한 재가공 수출이 주된 국가경제구조로서 세계흐름을 충분히 이해하여 거기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걸림돌이 되면서 가장 전환점이 되는 것은 북한이다. 그런데 우리는 상황이 어떠한가? 단순히 좌우 이데올로기의 프레임에 넘어가서 거기 안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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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늄의 밤
하나무라 만게츠 지음, 양억관 옮김 / 씨엔씨미디어 / 1999년 4월
평점 :
절판


 

 

게르마늄의 밤을 우연히 내가 아는 분에게 선물로 받았다. 집안에 초등학교 자녀들이 있어서 혹시나 보면 정신적인 영향이 있을 것 같아 받은 것이다. 책 제목에서 게르마늄이라 하여도 금속성 원자이고, 인간의 몸에는 게르마늄이 좋은 것으로 안다. 건강에 좋으면 멸종위기 동물이라도 잡아먹는 한국사회에 게르마늄이란 단어를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이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표지를 보니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란 점에서 상당히 문학적으로 높은 작품을 느꼈다.

 

그리고 표지 우측 상단에 붉은 글씨로 18세 미만 구독 불가라고 적혀 있었다. 또한 표지는 엄청난 표정으로 일그러진 인간이 자신의 몸을 부둥켜안고 절규하듯 외치는 표정이었다. 한 마디로 고통과 좌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거기에 메인 자였다. 책 제목과 표지도 그렇고 목차에서 마광수 교수와의 대담 역시 잊을 수 없을 것이리라. 마광수 교수하면 한국사회에서 외설과 예술의 경계에서 외설로 낙인찍힌 자로서 그의 성적 도착적인 유희는 많은 논란을 한국사회에 불러 일으켰다.

 

아직까지 유교적인 문화에 몸이 젖어버린 한국사회에 게다가 서구 기독교문화 유입으로 과다 망상적으로 심각한 결백증들은 이 사회의 병적인 존재로 되었는지 모른다. 전에 어느 책에 이런 문구를 보았다. 성심리학자인 빌헬름 라이히는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많이 친한 학자인데 그가 남긴 말로는 "성의 억압이 파시즘 낳는다."와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가장 음탕한 사회에서 금욕주의가 싹튼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야말로 한국과 가장 어울리지 않을 단어가 아닌가? 성적욕망을 무리하게 억압하고 부정하고 뭔가 죄를 부여하는 한국사회에서 변태적이고 관음적인 욕망이 꽃피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오히려 억압을 하기에 그 억압적 충동이 역으로 변태적인 존재를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엔트로피라고 하여 인간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욕구불만이 쌓여만 간다. 문제는 그 불만사항은 아주 작게 조금씩 해소하기 보다는 더욱 더 압박을 가한다. 마치 조금이라도 눈에 띄면 죄인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종교적인 가치관이 중요시 되는 세계에서 그것은 모든 것으로 부정된다. 하나의 성(聖)적인 체계가 잡힌 곳에는 그 모든 것이 부정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기야 말로 더욱 더 부정과 부패 악이 처참하고 잔혹하고 때로는 승화되기도 한다. 이 책 게르마늄의 밤에서는 더욱 심각한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작가인 하나무라 만게츠는 아주 독특하게도 짧은 학력과 제대로 된 세상살이를 보지 못한 듯하다.

 

오히려 왜곡된 세상과 어려운 삶에서 그의 필력은 매우 현실적인 것을 지나 추함과 더러움으로 가득했다. 그런 부정적인 삶의 관조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을 알게 된다. 인간은 추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추함은 추하다고 인정해서 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한 주제에 추하지 않고 그것을 가면으로 씌운 채 성(聖)스러운 이데올로기에 매여 모든 것을 회피하는 것이 추한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로우는 그런 성(聖)스러운 것을 변태적 성(性)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에게 차라리 거룩하고 아름답다고 외치는 성당 안의 이야기는 한낱 위선과 오만이었다. 이 책의 배경을 보니 일본이 태평양 전쟁 이후라는 점이고, 주인공 로우가 중학교 시절이 미군의 창고에서 나온 식량으로 목숨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1일 1인당 생활금액 120엔, 1945년 지나도 120엔 역시나 작은 돈인가? 미군이 주는 통조림, 전분으로 목숨을 부지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미군이 준 음식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어떤 비스켓을 열어보니 구더기가 나왔다고 한다. 유통기간이 지난지 몇 년이나 지난 것이었다. 모든 미군들이 주는 음식은 음식이 아니라 음식폐기물이었다. 폐기물을 먹고 살아가는 로우에게 희망과 꿈은 없다. 현실의 일그러진 모습에 그저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학대하고 때로는 그 날카로운 복수의 화신은 남에게 이어진다. 집단이지메, 동성애, 변태적인 성적 유희 등등 말이다.

 

남자가 남자에게 침과 가래를 요구하여 먹이고, 남자가 남자의 성기를 손으로 잡고, 입으로 애무하여 끈끈한 액체가 나와 변태적인 모습으로 등장할 때 그들은 처음에 거부했으나, 잠시 후에는 그것에 맛을 들어버렸다. 인간의 어두운 감정과 비극성을 기저까지 내려간 것이다. 그런 로우가 사회에 나가 살인을 했다. 하지만 그는 살인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살인 동기가 여자와 남자 중에서 여자가 자신의 성적인 부분을 농락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의 깊은 공간에 자기를 담구지 못한 채 남자의 동성애에 더렵혀져 있었다. 아니 이제는 오히려 거기에 쾌락과 불쾌함의 알 수 없는 모순에 빠졌다.

 

그래서 여자를 죽이고, 그 여자와 관계있던 남자도 죽였다. 그런 후에 다시 성당이 있는 고아원에 온 것이다. 그는 와서 농장 일을 도왔다. 그는 와서도 어두운 과거에 붙잡혔다. 원장 신부에게 변태적 성적 유희를 도와야 했고, 그 덕분으로 몸을 숨겼다. 그렇지만 여자에 대해 몰랐다. 어느날 아스피란트 1호(수녀가 되기 위해 수련하는 여자)가 우연히 로우와 만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녀는 하얀 블라우스를 둘러도 유방의 관능적인 매력을 숨기지 못했고, 타이트 스커트와 잘룩한 허리는 매우 요염했다.

 

어느 부잣집의 딸로 수녀가 되기 위해 온 그녀는 마치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듯했으나, 그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매우 성적으로 도착적이고 강렬하고 격렬했다. 로우는 그녀의 고통과 아픔을 듣다가 그녀를 안았으나, 사실 그녀는 안아주기를 바란 것이다. 로우는 일반적 나체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의 몸매가 부각해주는 의상을 거친 여성에게 성적인 자위행위로 만족했다. 그것은 나체의 여성보다는 뭔가 페티시한 요소에 끌리는 남성의 성적 도착에 가깝다.

 

두 사람의 성교에서 그는 여자와 동정임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여성의 성적 쾌락에 따라 갔다. 입과 입에 서로 맞추고 혀를 주고받으며, 한손은 가슴에 한손은 은밀한 샘에 가져가고 있었고, 아스피란트 1호의 팬티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온갖 기교와 성적 도발로 로우를 본능적 인간으로 만든다. 그녀는 정녕 사랑을 원할까 아니면 여자이기를 바랄까? 책을 읽으면 그녀는 본래 수녀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원래 사랑하던 남자와 눈이 맞다가 임신했지만, 부모의 강압 아래 아사피란트 1호는 소파수술을 했다.

 

즉 자신의 자궁 내막들을 기구로 긁어내어 강제로 낙태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자궁에 상처를 입었다. 결국 그녀는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여자로서 결혼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녀는 인생의 좌절과 더 이상 자신이 여성으로 살 수 없으며, 죄를 지었다는 원죄적 의식을 더욱 강하게 느끼고 싶었다. 죄를 지어보고 싶은 것은 결국 자기가 살아있음을 알고 싶은 것이다. 로우와 성교에서 과연 그녀는 음탕한가 아니면 불결한 여자라고 생각할 수 있냐는 말에 대답은 아니라는 점이다.

 

상황에 닿으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 인간이나,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한 존재성을 확인하기 위해 변태적 섹스를 원했다. 로우는 그녀의 마수에 빠진 것인가? 아니면 풀린 것인가? 로우는 동성애적인 경험을 했고, 끝에는 프랑스계 미국인과 일본인 혼혈아 잔에게 성적인 변태적 행위를 부탁받는다. 잔은 남자이고, 그는 마음이 어리나 로우의 충동적이고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모습에 동경한다. 남자이면서 잔은 로우의 성기를 애무하고 로우는 부끄러워한다.

 

중학교시절 로우는 미우라라고 하는 상급생에게 강제로 동성애를 눈뜨게 되었다. 그때 강요받은 로우가 처음에 거부하다 끝내는 미우라에게 더 변태적인 요구를 했고, 그 제안의 좌절은 미우라의 음낭이 터지는 사건까지 연결된다. 그의 변태적인 성적행위는 아스피란트 1호에 의해 풀린 것일까? 아니면 다른 길로 들어간 것일까? 마지막 모습에서 더욱 더 심각한 변태로 되는 것일까? 하지만 끝을 보면 로우는 자신의 어둠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인다.

 

그것이 마치 일상이라도 되듯이 말이다. 인간의 어둡고 부정한 모습을 인간들은 거부한다. 오히려 자기들이 그러면서 남에게 하나의 올가미를 덮어씌우고 한다. 로우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치 있는 그대로 분출했다. 로우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고 존경하던 모스카 신부가 죽기 전에 로우는 모스카 신부의 휠체어를 이끌고 고해성사를 한다. 그가 고백하는 것들은 모두 부정하고 더럽고 추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추하고 더럽고 동물보다 더 전투적인 존재임을 고백한다. 모스카 신부는 그를 오히려 더 세속적 인간보다 위에라고 한다. 게다가 그런 말을 다른 수도사로부터 나온 말이다. 더럽고 추하고 난폭하고 성적인 본능으로 뭉친 로우가 왜 고귀할까? 인간의 더러움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숨기기보단 오히려 돌발적으로 행동하는 그가 인정하고 그 사실조차 거부하지 않는다. 단지 생각해보면 극단적이기는 하다.

 

아스피란트 1호와 성교 이후 테레시아 수녀가 그 일을 물어보자, 그는 대답으로서 테레시아 수녀에게 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바지 안의 강력한 욕망을 내보였다. 30대 수녀의 옷을 양파처럼 벗기고, 수녀 역시 벗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물처럼 숨을 나누며, 로우의 본능의 상징물에 붉은 피와 임파액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기 몇 일 전에 모스카 신부에게 테레시아 수녀에게 자신의 아이를 낳게 할 것이라고 했다.

 

생명을 낳고 싶어도 낳을 수 없는 아스피란트 1호, 생명을 낳을 수 있는데도 낳을 수 없는 테레시아 수녀, 여기서 많은 모순이 오고간다. 그런데도 로우는 죽음과 불능, 그리고 부패하여 죽어버린 것들을 부정하지 않았다. 사이레지, 소가 겨울철 여물과 같이 먹는 영양제를 만들면서 그것이 부패하고 발효되나 그것을 먹은 소는 큰다고 했다. 음식물폐기물이 있는 곳에 썩어가는 음식을 넣으며, 그것으로 농작물을 키우고, 돼지도 키운다고 했다. 그리고 쓰레기로 가득한 것으로 키운 것을 우리가 먹는다고 했다. 우리는 결국 쓰레기를 만들고 먹지 않는가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추한 것은 무엇인가? 성적인 변태적 욕망과 행위 그리고 폭력적이고 살인적인 행위, 그런데도 그것보다 더 추하고 더럽고 끔찍한 것은 무엇일까? 물론 종교를 비하할 생각은 없으나(물론 일본과 한국의 종교나 사회적 관념은 다르나), 인간의 본능을 억누르고 그것을 성스러운 존재로서 마치 없는 것처럼 속이는 위선이 아닐까 싶다. 행동적 죄는 가벼울지라도 그 죄에 대한 외면과 회피에서 인간은 더 큰 죄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로우가 존경하고 사랑한 모스카 신부는 마르고 늙은 노인이다. 그는 다리를 사용하지 못한다. 2차 대전에 스파이에게 고행성사를 받고 난 뒤에 일본군에게 잡혀 고문 받다가 그래 된 것이다. 그래도 그는 고해성사를 알리지 않은 채 그 비밀을 지켰다고 한다.

 

로우의 눈에는 모든 것이 얼간이고, 병신이고, 변태고, 욕망덩어리고, 어리석은 존재로 여겼으나 오로지 모스카 신부만이 사랑스럽고, 모스카 신부의 죽음에서 난폭한 로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내린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과 진정한 성스러움은 타인의 악적인 부분까지 다 안고 갈 수 있는가이다. 차라리 안고 가지 않으면 자신이 표출할 수밖에 없다. 로우의 난폭한 폭력과 변태적 성적도착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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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8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송무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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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어디선가 많이들 들어본 소설 이름일 것이다. 그 말로만 들어본 위대한 개츠비를 나를 비로소 접해 보았다. 물론 이 책이 아닌 많고 많은 좋은 소설이 있겠으나, 이 책을 읽은 후에 나하고 친분이 있는 분이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미국의 1920년을 알려면 위대한 개츠비를 보는 것이어야 하고, 미국의 1930년을 알려면 앵무새 죽이기를 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앵무새 죽이기를 물론 나는 읽어볼 예정이다. 그러나 적어도 1920년 미국시대를 보면서 개츠비란 인물을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을까 말까는 또 다른 재미일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닉이란 인물은 미국 동부에 위치한 명문대학 예일대학을 졸업한 수재다. 게다가 경영학까지 전공하여 증권에 대해 잘 아는 엘리트적인 도시남이다. 그런 그가 개츠비를 통해 본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일단 닉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는 점이고, 그 곳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전사란 점이다. 그리고 닉에게 자신의 집에 초대한 개츠비는 1차 세계대전에 같은 사단에 있었던 장교였다. 닉은 개츠비에 대해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았으나, 왠지 이상하게도 닉 주변에 있던 닉의 사촌인 데이지, 데이지 주변 인물 베이커, 데이지 남편인 톰 등은 끊임없이 개츠비에 대해 경계, 흥미, 애정, 분노 등의 감정을 두르고 있었다.

 

개츠비란 인물은 매일 밤 많은 사람들이 놀러 와서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도록 파티를 주선한다. 그는 엄청난 재산과 부드러운 매너, 그리고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제시함으로 그의 주변에 인파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니 수많은 루머와 그를 다룬 신문기사까지 나오니 개츠비란 정말 유명인사라는 점을 여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 개츠비가 아무리 예일대학 출신인 닉이라도 그토록 그에게 정중하고 특별하게 대우해주는 이유는 있었다. 닉은 난폭한 부자인 톰의 아내인 데이지와 친척 관계였다. 초반에 그가 찾아간 곳은 톰과 데이지가 있었던 곳이다. 거기서 데이지도 만나고 톰도 만나고, 덤으로 베이커를 만났다. 이들에게서는 미묘한 냄새가 났다. 당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였고, 한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었으며, 게다가 금주령이 내리진 시기였다.

여러 가지로 사회적인 변화가 있었고, 여러 가지로 세계적으로 정신이 사나운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인 느낌이 이래저래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기회의 제국인 미국에 대해서 말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 개츠비란 인물은 자기 자신에게 매우 철저하게 관리하였고, 수 많은 노력과 인내를 감수했다. 그는 처음에 가난한 청년이었다. 그가 장교로 있을 때 데이지를 만났으나, 데이지는 미국 중상류계층의 아가씨로 사교무대에 정신이 팔려있었고, 그런 데이지를 좋아하던 개츠비는 군인이었으나 가난하여 그녀를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개츠비가 놓치게 되자 데이지는 톰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으며, 하녀를 고용하여 딸의 보모로 사용할 정도이니 그녀의 남편인 톰은 정말 부자였다. 하지만 그는 난폭하고 거만하고 한편으로 이기적이었다. 개츠비가 예전에 자신의 아내가 좋아한 사람이라 알자 그의 과거를 알아보고 폭로하고, 아내 몰래 정비소의 부인을 정부로 만들었으니 이중적인 인간성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그런 개츠비가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과연 그가 무엇을 위해 이토록 뛰어다니고 살아왔냐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의 인생은 불행이다. 그는 가난으로 사랑하는 데이지와 멀어지고, 게다가 전쟁터에 가서 소령까지 달고 제대했으나, 너무 가난하여 군복에 훈장을 단 채로 다녔다. 전쟁은 끝나고 모두 전쟁이란 위험은 생각에서 사라지고, 유흥과 사교에 빠진 미국이었다. 브로드웨이의 거리에서 재즈와 뮤지컬 공연은 흥청망청한 사회상을 보여주고, 그 속에서 발버둥 치려는 데이지, 그 속에서 유명세를 누리려고 부정한 경기와 온갖 이기심으로 뭉친 미녀 베이커양, 그런 여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제왕적 권위를 내세우는 톰에서 미국의 1920년은 그야말로 위선과 가식으로 가득함을 알 수 있다.

 

물론 90년 전후의 이야기를 도출한 것이라고 하나,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그다지 차이 없어 보인다.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 꿈을 접는 청년 개츠비, 그런 꿈을 찾기 위해 금주령 시기에 술을 팔아 거부가 되었으나, 그에게 과거의 절망은 이별을 고하지 않았다. 그리고 난 뒤에 비극적인 톰의 정부의 죽음, 그 죽음에 대한 복수로 개츠비는 아무런 꿈도 이루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어간다.

 

닉은 개츠비를 처음 만나 그가 죽고, 죽고 난 뒤의 일들을 정리해간다. 개츠비의 아버지가 닉에게 찾아오자, 개츠비의 아버지는 가난한 아들이었으나, 자신의 매사에 열심이었고, 그런 개츠비가 아버지의 잘못된 습관을 말하자 폭력을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는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고 개츠비가 얼마나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아꼈는지 알았다고 한다. 게다가 몇 년 전에는 가난한 자신에게 집을 사주었다고 한다.

 

자신은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였고, 결국에는 집을 나간 아들이 말이다. 개츠비란 인물이 금주령 시대에 밀주를 하여 부를 불린 것은 결코 용서받을 일이 아니나, 개츠비란 인물 자체를 보자면 그는 인간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부를 찾아 헤매어도 결국 데이지를 찾을 수 없었고, 이 세상에서 뼈만 남기가 사라졌다. 성공의 미국이란 1920년이란 사회상이었으나 막상 그 사회란 차갑고 냉정하고 겉과 속이 다른 사회였다.

 

허무와 위선은 과대하게 포장했으나, 원조 상류인 톰은 개츠비를 인정치 않았으며, 여자 역시 상류층만 보고 따라갔다. 그래도 개츠비는 몸부림을 치었지만, 닉이 보고 있는 안타까운 사연들은 그저 멍하니 떠나가고 있었다. 이 책에서 조금 재미있는 부분은 왜 미국의 기회의 땅이라고 해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을 보면 가정부로 필란드 사람인 점이었고, 그녀가 평소에는 일은 열심히 하고 있으나 미국이란 사회문화에 그다지 적응하지 못한 점과 즐겁지 않음을 나타난다.

 

미국이란 기회의 나라라고 했으나, 당시 사회상은 이미 그렇지 못했다. 개츠비와 예전에 같이 밀주를 했던 사람을 찾아갈 때 어느 고급승용차에 흑인 3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닉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을 일상적인 시선으로 보기보단 왠지 경계하고 못마땅하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초반에 원조흰둥이가 아니면 안된다는 편견을 가진 인종주의 발언을 톰이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겉으로 사교사회의 화려함을 쫓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많은 상실된 꿈과 희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개츠비가 위대한 것은 그런 사회에서 낙오된 채로 살아야 할 그가 그것을 뛰어넘으려 안간힘을 펼친 것이다. 물론 사다리에 오르려다 결국 떨어지었으나, 그가 떨어졌다고 해도 우리라고 그 길을 올라가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그 길은 닉이 보는 사회와 일상처럼 모순으로 얽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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