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리미티드 에디션 - 도서(소설) + 500피스 직소퍼즐
신카이 마코토 지음, 박미정 옮김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1) 신카이 마코토 감독

신카이 마코토 감독을 이름을 대면 딱하고 생각나는 작품들은 <초속 5>이다. 어릴 적 서로 좋아하던 사람들이 결국 서로 재회하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가는 아련한 작품이다. 작품명처럼 초속 5로 내려오는 것은 벚꽃의 낙화(落花)이다. 높은 나무 위의 벚꽃 하나가 바람에 날려 계속 이동하여 결국 다시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멀어져 버린 것이다. 그의 로맨스적인 감각은 언제나 좋지만은 않다. <별의 목소리>에서 지구와 떨어질수록 소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친구와의 메시지를 늦게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막이 내린다.

 

하지만 그 믿음이란 솔직히 말하여 이룰 수 없는 믿음, 결코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어느 목적에 있다고 해도 그 목적 자체에 도달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도착하지 않는 서사이다. 서사의 결론은 뭐든지 마무리가 되어야 하는 점이고, 그 서사의 마무리라는 종점에서 새로운 서사가 탄생한다. 서사 자체가 끝이 나도 이어지지 않는 서사, 신카이 마코토 감독 작품은 그래 왔다. 모든 작품은 아니지만, 대표적인 <초속 5>에서 엇갈리는 2사람 속에서 계속 더 많은 시간이 스쳐가는 것이다.

 

작품 속에 반영된 인물의 설정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충돌의 재회 대신 미끄럼의 회피로 이어진 것이다. 끝이 나지 않는 고민을 안고 말이다. 작품에서 나오는 이야기에서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주는 영상미학은 감독과 작가의 마인드를 반영해줄 수밖에 없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 작품은 항상 빛과 하늘의 영상미를 강조하다. 붉은 노을에 강렬한 햇빛 한줄기가 비추더니 어느 순간 지고 마는 장면, 그렇게 어둡지 않은 검정색을 띠는 파란하늘에 별빛이 흘러간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보여준 하늘의 이미지는 사실 게임에서도 보여준다.

 

2) 애니메이션 영상미학(映像美學)적 관점

샤프트 회사에서 만든 <ef>라는 애니메이션은 원래 게임을 기반으로 만든 작품이고, 그 게임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제작스텝을 맡는다. 애니메이션은 신보 아키유키라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주도로 만들었지만, 그 감독 역시 게임의 원래 감각을 살려 하늘의 색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하늘의 색에서 중요한 점은 영상에서 여백공간의 설정이다. 가령 영화라는 실사영상에서 배우나 소품, 배경 등을 촬영할 때 공간의 설정 중 인물과 소품은 존재성을 가진 유형의 존재이다. 하지만 뒤에 보이는 하늘이나 빈 공간들은 무형의 존재, 즉 죽어버린 세계이다. 살아있는 세계의 존재와 죽어있는 세계의 이중적 결합에서 영화는 삶과 죽음, 유형과 무형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애니메이션 영상은 다르다. 빈 공간인 하늘, 심지어 땅과 바다마저 그들이 원하는 색으로 입힌다. 하늘이란 공간이 영화처럼 죽어버린 공간이 아니라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에 의해 새롭게 구축되는 공간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인물들이 나온 애니메이션 세계는 파생실재의 영화와 다른 미학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 공간의 설정에서 자연 그 자체로 통해 연출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무대세트장이 있어도 결국 표현의 한계성이 오고, 최근 영화들은 컴퓨터 애니메이션 그래픽 차용으로 영화의 연출을 극복한다.

 

현실부재라는 속성인 애니메이션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존재로 등장하나, 이에 반해 실사영화는 파생실재(Hyper real)라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가상으로 만들어가는 세계이다.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반 리얼리티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영상에 등장하는 존재들이 현실에 존재했던 자가 아니다. 그런다고 실사영상에 등장하는 인물이 현실에 있다고 해도 그 인물 그 자체는 아니다. 리얼리티를 부여해도 결국 현실이 아닌 가상의 이야기로 흘러갈 뿐이다. 대신 리얼리티를 부여한 점에서 현실의 세계들을 차용하여 보여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른바 키치적 요소나 일상생활 등을 말이다.

 

애니메이션 세계는 이런 키치적 요소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최근 애니메이션에도 현실에서 등장하는 물건이나 세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화면만 애니메이션이지 실사영상에서 보여주는 인간생활하고 큰 차이점이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히려 실사영상에서 담을 수 없는 미세한 장면과 디테일한 연출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은 전형적으로 이런 요소를 잘 반영했다. 공간적 설정에서 현실의 배경과 현실의 물건, 심지어 현실 속의 여성들이 즐기는 인증사진 촬영장면도 집어넣었다.

 

3) 현실적 감각과 비현실적 감각 속의 <너의 이름은>

<너의 이름을>을 보면 상당히 현실적 요소가 강하다. 도시나 시골의 배경이나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 심지어 코토하의 아버지가 본래 신관일족의 데릴사위였으나, 코토하의 어머니 별세 후 정치계에 뛰어들었고, 토목건설업자와 결탁하여 선거에서 이기려고 하는 장면에서 상당히 현실적인 세계관을 반영했다. 왜냐하면 일본은 최근 인구가 감소하고, 토목건설사업은 도시 쪽에 실시했으나, 도시의 개발은 결국 포화로 이어지고 나머지 공간은 시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미츠하의 아버지가 보여준 선거 전략도 그러하나, 농촌경제구조에서 더 이상 발전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은 미츠하의 가정생활에서 갈등이 되고, 마을사람들과 학교급우들 사이에서 갈등으로 이어진다. 도쿄에 살아가는 타키는 전형적인 고교생이다. 하지만 집안에 어머니가 없다. 미츠하는 어머니는 안계시고 아버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에 반해 타키는 아버지와 단 둘이서 살아가지만, 나름 잘 지내는 부자관계를 보여준다. 타키는 자신의 집에 여자가 없기에 그리고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 미인 상사가 있기에 그녀에게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

 

인물의 설정도 그렇고, 배경의 설정 역시 현실적 감각을 잘 살렸다. 하지만 이에 반해 비현실적 요소도 강했다. 신카이 마토코 감독이 주술적인 세계관을 직접적으로 차용한 것은 나도 이번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시간의 존재성은 비가역적 존재이다. 비가역적이란 다시 되돌릴 수가 없으며, 한 번 지나가는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어 그것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역사라는 시간적 축척은 현재를 만들고, 현재는 미래로 이어진다. 서사의 흐름에서 비가역적 시간을 뒤트는 것도 그렇고 그것을 하고자 하는 제작자의 의도는 단순히 바라볼 게 아닌 점이다. 시간을 비트는 것은 비현실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20세기 말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름을 다시 오타쿠 앞에 내놓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서구의 이성중심 가치관을 부정 혹은 보완, 추가 등 다른 가치관으로 이어진 사상이다. 모더니즘 사상은 어떤 하나의 큰 서사 내지 휴머니즘이란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적인 가치로 움직이지 않으며, 모든 것이 하나의 의미로 판단할 수 없다. 대신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성은 가치관과 시야는 다르다면 최소한의 윤리성을 배제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윤리성을 배제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일본처럼 군국주의 망령이나 독일의 네오나치 사상이 대두하게 만들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누구나 자신을 대변을 할 수 있지만, 그 대변의 논조에 이성과 윤리성이 부재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망각한 점이다. 다행히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그런 점을 버리지 않았다.

 

4) 후쿠시마 발전소 비극

일본의 많은 작품을 보면 극우적인 요소가 많으며, 과거로 돌아가 2차 세계대전을 바꾸어 세계 권력을 바꾸거나, 미래공상 세계에서 우주를 누비는 모험가로 등장해 식민지 건설에 대한 무의식적인 욕망을 표출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런 극우성향보단 인간의 보편적 가치에서 맞선다. 이토모리라는 마을은 지구를 지나간 혜성 파편 하나로 완전히 파괴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일본 후쿠시마 발전소 폭발로 상처 받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싶다고 말한다.

 

후쿠시마 발전소의 비극은 일본정부의 무능, 기업들의 이기심, 그리고 국민들의 무관심에 의해 만들어진 학살극이다. 발전소 폭발 후 제대로 처리하기보단 오히려 보도통제하려는 정경유착의 일본, 국민들은 그런 피해를 두고 무관심하게 반응한다. 정말 몰라서 혹은 관심이 없기보단 일본인들의 특유의 반응성이다. 일본에서 분위기라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이른바 공기(空氣)를 읽으라는 말이 종종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분위기를 읽는 것은 뭔가 좋지 않은 상황이 놓일 때 거기에 동조하거나 경망히 행동하지 않고, 조용히 눈치를 보며 스쳐가듯이 피해가라는 의미이다.

 

문제가 있어도 해결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관여하지 않아 자신들만 피해보지 않으면 된다는 집단이기주의적 발상이 숨겨있다. 일본에서 이른바 이지메 문화가 있다. 학교에서 학생 1명이 왕따가 되면 그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지만, 주변에선 그것을 보지 않은 것처럼 무시하거나 방관한다. 거기에 엮이는 순간, 추가로 엮이는 사람에게도 큰 곤혹을 치르게 한다. 학교라는 것은 사회의 축소판처럼 일본사회는 기성세대의 세상이다. 기성세대는 학교 안보다 더 심하게 모순되어 있다. 공기를 읽어야 하는 일본에서 이 영화는 후쿠시마 발전소 사건 이후, 재난이란 사태에서 상황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

 

운석이 떨어지자 마치 거대한 폭탄이 주변을 초토화 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보여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상처를 드러내서 치유해야 한다. 정신적 상처는 담고만 있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드러나서 감정으로 표출해야 한다는 점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작품에서 운석에 의한 재해를 영상으로 통해 관객에게 전달한다. 한국인과 달리 일본인에게 그 장면은 매우 거슬린 장면이었을 것이다. 운명에 의해 파괴된 마을과 증발된 사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그 상처를 가슴에 담고 살아갈 수는 없다.

 

5) 부분적 세카이계

20세기 전후로 일본은 세카이계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작품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있고, <최종병기 그녀> 등이 있다. 세카이계의 특징은 세계를 멸망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점이다. 그러나 당시 세카이계 특성은 모든 세상이 망하는 것이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기에 인간은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며, 감정적이게 되며, 각자의 마음에 이끌리게 된다. 윤리성보단 개인성에 치중하게 되는 마련이다. 그러나 <너의 이름은> 세카이계 요소를 담고 있지만, 모든 것의 멸망이 아니라 단지 미츠하가 살아가는 마을의 멸망이다. 부분적으로 세카이계 요소를 집어넣은 것이다.

 

작품은 연애와 드라마적 요소, 세카이계 요소를 다중적으로 집어넣는다. 세카이계가 되어 여기서 망하는 것보다 망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서사의 방향을 다르게 제시한다. 지구의 멸망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미국이란 나라가 세계를 구한다는 속성이 많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지구의 위기가 터지고 도쿄에서 출동한 특공대원들의 활약으로 지구는 위기에서 모면하는 이야기가 많다. 위기의 순간 누가 가장 강한 나라이냐를 두고 미국은 할리우드 실사영화로 일본은 애니메이션으로 종종 보여주곤 한다.

 

자신들이 주도가 되려면 어느 누군가가 강력한 영웅이나 지도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위기를 넘어 지구의 평화는 지켰다는 전형적인 영웅서사는 안 봐도 비디오란 말을 듣겠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왜 일본 특수촬영 장르가 몇 십 년동 안 인기를 잃고 있지 않은가? 왜 할리우드 교과서적 작품이 계속 나오고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가?). 그러나 <너의 이름은>에서 그런 점을 다르게 표현한다. 영웅이 아닌 일개 학생들이 서로 상대방을 보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이토모리 마을 사람들을 살리는 것도 목적이 있다.

 

6)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비신카이 마코토적인 요소

하지만 이토모리 마을주민들이 몰살되면 미츠하와 타키는 만날 수 없게 된다. 그들이 선택하는 것은 지구의 특공대원이 되는 게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된 자들을 죽음에서 도망치게 해주는 것이다. 자연적 재앙이나 인위적인 재난은 어떻게든 개인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그런 남은 수단은 대피시켜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전 세계는 망하지 않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망할 수 있다. 대신 이 위기를 벗어나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세카이계적 요소에 비세카이계적인 요소를 반영한 것이다. 누군가 이 작품을 두고 신카이 마토코의 감독의 비신카이 마토코적 요소를 반영했다고 한다.

 

작품을 보여주듯이 거대한 운명 앞에 행동하는 인물들은 세상의 운명을 바꾸지 못해도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 자체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결정적으로 위기를 모면해준 것은 미츠하가 만든 술이다. 미츠하가 만든 술을 신의 재단이 있는 곳에 바치고, 그 술을 마신 타키는 시간의 결계를 뛰어넘는다. 황혼이 오는 저녁, 낮도 밤도 아닌 시간, 그 시간의 틈에 저승과 이승이 순간적으로 경계성이 무너지고, 그것을 이용하여 두 사람은 이때까지 서로 인지하지 못한 자신들의 존재성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 방법은 과학성이 아니라 주술성에 의지했다는 점이고, 일본 무녀가 보여주는 주술적 요소는 전형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때까지 신카이 마코는 실사는 아니라 실사적 요소, 과학적 근거 등을 잘 반영했다. <별의 목소리>에서 조종사로 된 소녀가 멀리 지구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메일을 보낼 때 우주의 거리와 시간개념이 나오고, 우주의 시간과 지구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봇 그 자체는 현재 없는 기술력이라고 해도 우주라는 공간에선 하나의 법칙을 제시한 점이다.

 

또한 신카이 마코토는 연인적 관계를 충돌적으로 부딪히는 게 아니라 엇갈리는 길을 택하는 쪽이 많았다. 엇갈리게 되면 계속 시간에 지남에 따라 만날 수 없고, 만나는 것으로 서사가 끝이 되어야 하나, 또 다른 서사조차 이어지지 못하게 만드는 서사를 선택한 것이다. 스포일러성이 있으나 <너의 이름은> 마지막에서 미츠하와 타키는 서로의 이름을 모른 채 왠지 모를 그리움과 아련함에 의해 마주하게 되고 그리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물론 마지막은 너의 이름은? 하는 대사가 나온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나도 관객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름을 서로 찾아다니며 방황하던 이들이 다시 재회하여 서로의 이름을 알아가고, 이름을 알아간다는 것은 서로의 존재를 알아가는 점이다. 남녀의 존재성을 알아가는 것은 연애를 의미하며, 그들의 연예관계를 맺으며 다시 러브스토리로 이어질 것이란 또 다른 서사성을 관객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든다. 하지만 작품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7) 재회의 상징과 한국관객

그들이 처음 각인할 때는 미츠하가 중학생이고, 타키가 고교생이었을 때이다. 시간적으로 이들은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지 않았다. 무려 3년의 틈이 있었으며, 3년 후 타키의 몸에 미츠하가 살았고, 3년 전의 미츠하의 몸에 타키가 살았다. 이들은 아직 어린 학생, 즉 어른이 되지 못한 자들이었다. 이들이 만난 것은 타키가 이토모리에 간지 7년 정도 흐른 후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여 일을 해야 하는 어른이다. 어른이 되었다는 점에서 과거의 있었던 아픈 기억과 상처를 해결해야 할 과제였던 것이다.

 

타키와 미츠하는 서로를 찾아 헤매는 것은 분명하나, 그들 마음속에 가려진 지난날의 상처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의 존재를 찾아낸 것은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이었던 셈이다. 지난 과거 아픈 기억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같이 공유한 그 누군가와의 동질화하는 것이다. 관객들이 그것도 한국의 관객들이 이 작품을 보고 나름 재미있었다는 것은 연애적 발상이나 사실은 연애 이상의 세계가 담겨 있었다. <너의 이름은>을 관람한 관객을 보면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른바 오타쿠 계열만 아니라 영화나 영상물을 좋아하는 평론가 및 애호가, 그리고 일반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인들도 <너의 이름은>을 보고 좋은 반응이 나왔다. 연애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나는 작품을 보면서 한국영화 중 2편이 생각났다. 하나는 <체인지>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동감>이다. <체인지>는 우연히 번개를 맞은 두 남녀 학생이 서로 몸이 바뀌었고, 서로 알아가는 도중 마지막에 다시 번개를 맞아 원래 몸으로 돌아가려 한다. <동감>2000년의 20세 남대생과 1979년의 20세 여대생의 교감으로 시작한다. 서로는 같은 학교에 다니나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다. 만나기로 한 날에 남자는 비만 맞고, 여자는 시위현장을 진압하던 경찰에 의해 봉변을 당한다.

 

1979년은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학생들이 시위를 많이 하던 시절이고, 2000년은 군사정권과 거의 멀어진 시기였다. 구식 무전기로 통해 서로의 목소리를 들은 남녀는 이룰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영화는 끝이 난다. 물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체인지><동감>을 직접 관람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영화의 모티브나 소재를 본다면 유사한 교착점이 보인다. 그래도 다른 점은 <체인지>는 같은 공간과 시간에 존재했었고, <동감>은 공간은 같으나 시간이 달랐다. 그래서 아마추어 무전기로 연락하던 2남여는 서로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강의실 옆에서 청년을 지나치는 여교수의 모습으로 끝날 뿐이다.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가 연애만인지 연애 이외에도 다른 것인지에 따라 관람자의 반응은 다를 수밖에 없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쉰P 2017-01-14 1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고 계시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ㅎ 공부에 열중하느라 서재에 잘 들어오지 못하네요(이건 변명 ㅋ 사실 공부도 제대로 안 하면서 서재에 못 들어오고 있어요 ㅋ 이쿠)

아!!! 역시나 이 아름다운 글...읽으며 막히지 않는 물 흐르는 것 같으 문장의 흐름과 내용의 풍성함에....침을 흘리며 읽게 되네요.

정말 이 영화 보고 싶어지네요 훗. 만화애니비평님이 글 쓴 것 중에는 안 읽고 안 보고 싶은 것이 없어요. 리뷰만 읽고 느꼈을 때 약간의 느낌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향도 나는 것 같아요.

일본의 원전사고나, 우리의 세월호나 참으로 어딜가나 국가라는 이름의 폭력은 그 모양과 매커니즘은 매우 흡사하구나 생각이 들어요. 리뷰를 읽다가 아! 일본도 원전사고가 있었지 하며 느꼈네요.

전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란 책을 사 볼려구요. 두꺼우니 틈틈히 읽으면 좋을 것 같고, 공부하다 보면 자꾸 책을 사고 싶어지는 병이 도지는데 이 책을 사면 볼 때마다 그 욕구가 사라질 것 같아요 ㅋㅋㅋ

새해도 더 좋은 글 부탁드려요. 읽으니 스트레스 사라짐. 감사해요 좋은 글 ㅎ

만화애니비평 2017-01-15 10:20   좋아요 0 | URL
루쉰님 새해 복마니~~~
열공도 좋지만 감기도 조심해야 합니다 후후후

그런데 제 글에서 침이라니..아이고..ㅎㅎㅎ 모니터 망가집니다....무라카미 하루키 느낌이 드는 이유는 하루키가 일본의 전공투시대의 향수를 비틀어버린 글귀라 그런 가봅니다. 이 작품도 은근히 비틀어서 보여주는 스타일이다보니 그렇죠...

다카시 서재라 ....님 책만 읽는 것 아닌가요...ㅎㅎ
조금은 환기를 해서 마음을 즐겁게 우후후

stella.K 2017-01-15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거의 한편의 논문 같군요.
저도 지금까지 세 편 정도 본 것 같은데
신카이 마코토는 영상은 좋은데 스토리가 영 시원치 않아
굳이 봐 지지는 않더군요.
소설도 그닥 좋으려나 싶어요.
영화는 시나리오가 좋아야 한다는 인식이 점점 확산되는 느낌인데
애니는 아직 그런 인식이 덜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01-15 10:18   좋아요 1 | URL
신카이 감독 서사는 조금 시원치 않게 흘러가는 게 특징입니다. 목소리도 뭔가 모르게 잠겨 있다는 느낌이 강하죠..
영화는 시나리오 즉 서사성이 좋으면 작품이 되는 것이죠. 애니는 영화보단 서사성이 더 좋을 수도 아니면 나쁠 수도 있습니다. 영상미적 감각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죠.

리뷰가 논문 같은 것은..아마 제가 애니메이션 논문을 3편을 투고하여 학회지에 실렸기에 그런 조류가 들지 않았나 싶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