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문(門)>이란 인간이 살면서 자기의 방이나 집이나 혹은 그 밖에 여러 건물이나 방과 방을 이동할 때 거쳐야 하는 하나의 통과해야 할 공간이다. 그리고 문(門)에 입(口)이 들어가면 문(問) 되고, 귀(耳)가 들어가면 문(聞)이 된다. 문은 분명히 우리가 지나가는 통과해야 할 공간이기도 하면서 과정이 되는 것이다. 문이 열리는 것과 닫히는 것에서 우리는 정말 통과하는 것은 내 방에서 다른 방으로 가기 위한 문인 것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문으로 되어야 하는 것일까?

 

작품을 읽으면 주인공 소스케는 평범한 남성으로 그 시대에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관공서 직원이었다. 그의 아내는 오요네로서 약간 병약한 몸이나 남편에게 헌신적이고 서로 사랑하며 보담아주는 여성이었다. 이들은 결혼 6년차 부부로서 어느 부부와 별 차이 없이 남편 월급이 생활하기에 조금 힘들다는 점과 기요라는 하녀가 3조(다다미) 짜리 방에 기거하는 점에서 특별한 조건이나 상황조차 부여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중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어보면 주인공 선생 집에 하녀가 하나가 기거한 것이 생각난다. 모든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이 그런 것이 아니나, 하녀의 등장은 은근히 재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인지 혹은 등장인물 중에 누가 건강에 문제가 있는지 꾸준히 보조역으로 등장하는 느낌이었다. 나쓰메 소세키 그 역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점에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주인공인 구샤미군의 위장병이 있다는 점과 영어교사를 맡은 점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서는 자신의 인생관을 반영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자신의 소재로 통해 여러 인간상을 들어다보고 거대한 이야기보다 거대하지 않은 이야기를 중시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는 구샤미군은 시대적으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지만, 그것에 대해 상당히 무심한 점과 <문>에서도 주인공 소스케는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암살당해도 무관심했다. <문>의 발표시점이 1911년이고,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한일병합이 되면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근대일본역사에 대해 시대적으로 마주보고 있으나, 시대적인 흐름에 따르지 않는다.

 

구샤미군이나 소스케는 러일전쟁이나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에 아무런 이유를 부여하지 않음이다. 단지 나쓰메 소세키는 그런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하면 우리나라 스포츠 선수가 외국 선수와 시합하거나 혹은 그 선수가 외국에 있는 기업에 들어가서 시합하여 우승해도 우리에게 당장 생활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우리의 심리적인 만족으로 이어진다. 물론 오요네의 오빠인 야스이라면 모르겠다. 야스이는 소스케의 셋방을 내준 사카이의 동생과 같이 몽골을 돌아다닌다.

 

그렇게 다닌 이유는 조선을 침략하여 점령하여 중국과 몽골에 가기 편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주인공 소스케에겐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다. 소스케에겐 지금 당장 월급의 액수가 올라 식사를 제대로 하고, 추운 날에 따뜻한 방에서 쉬고 싶을 뿐이다. 하다못해 지붕의 비가 방으로 새는 것도 막고 싶고, 자신의 치아 내부가 썩어 이가 아픈 것을 어서 빨리 치유하고 싶다. 마치 소스케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그런 살림 걱정과 아픈 치아로 고민하는 소스케에게 그저 인생이란 자신의 아내인 오요네와 옆에 하녀 기요와 오순도순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결혼할 때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비뚤어진 것이다. 결혼 6년 동안 소스케와 오요네 사이에 아이라곤 1명도 없었다. 그런다고 아내인 오요네가 임신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요네는 총 3번의 임심을 했으나, 아이들이 유산을 하거나, 출산해도 오래 가지 않아 모두 죽은 것이다. 3번의 실패는 부부의 마음을 어둠에 향하게 하고, 그 어둠 속에 서로 의지하던 것이다.

 

오요네가 건강이 좋지 않을 때의 모습에서 소스케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남동생인 고로쿠에게 큰 소리도 못하는 못난 형이었으나, 아내인 오요네가 아플 때 소스케는 남동생에게 아무런 망설임 없이 어서 의사를 불러오라고 지시한다. 평소 고로쿠는 행실이 좋지 않았다. 공부나 학업에 열중인 것도 아니며, 일을 할 생각도 없었다. 심지어 부잣집 도련님과 같은 대우를 받고 싶어 하여 소스케는 고로쿠에 대해 어릴 적의 자신과 같다고 한다. 소스케의 아버지가 생존할 당시 소스케는 경제적으로 매우 여유가 있었으며, 그런 점이 자신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산을 정리하던 중에 작은 아버지에게 맡기면서 자신의 가산이 점점 탕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1000엔이 지금의 1000만 엔이 넘는 가치라면 다소 의아할 것이다. 고로쿠가 아무리 돈을 많이 사용하더라도 그는 중고등학생에 이제 대학생이었다. 그에게 투여된 돈이 700엔이란 점은 소설을 보더라도 납득가지 않았다. 작은 어머니는 소스케 사촌이 경영하고픈 회사에 돈을 넣은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따지지도 못한 소스케는 그저 아버지의 유품인 병풍만 챙길 수 있었다.

그것도 처음에 골동품 가게 갈 때는 7엔에서 어느덧 35엔으로 늘었으나, 알고 보니 사카이는 그 병풍을 2배 이상의 가격으로 구매한 것이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보다는 세상이란 사회와 별개로 살아가는 소스케와 오요네 부부에게 조금 어둡고 소외된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어둠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소스케는 교토대학을 다녔을 때 오요네를 만났다. 그가 오요네를 처음 만난 시기는 야스이의 집에 가서 오요네가 야스이와 같이 있을 때였다. 야스이는 오요네를 두고 누이동생이라 했으나,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작품에서는 누이동생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 불륜이라고 한 것이었다. 소스케는 야스이 집으로 가끔 놀러갈 때 야스이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다고 오요네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야스이가 없을 때 번역자 해석처럼 소스케는 오요네와 같이 그림자 모습이 나올 때 이미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은 것이다. 만약 야스이와 오요네가 친 남매였다면 야스이에게 말하여 결혼식을 올리면 되는 것이나, 나중에 이 2사람은 모두 야스이를 피해 도망치듯이 사라진다.

 

덕분에 소스케는 학교에 퇴학을 당하고, 야스이 역시 학교에서 나쁜 대우를 받게 된다. 그런 야스이가 사카이의 남동생과 같이 일본 동경에 왔다는 것은 소스케에게 매우 고민되는 일이다. 그는 가마쿠라에 있는 절에 가서 문(問)을 들어가고 나갈 때 스스로 질문하고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하나(문(問)과 문(聞))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가 들어간 문이란 공간은 그저 시간적인 흐름에 따라 흘러간 것이 아닐까 싶다. 돌아와서 사카이에게 동생 고로쿠의 사회공부를 위해 부탁하는 것은 나오나 결국 그 맺음은 고로쿠 스스로가 사카이와 약속한다.

 

추운 겨울이 가고 이제 따뜻한 봄이 온다는 오요네의 말에 소스케는 다시 또 겨울이 온다는 불안한 암시를 던진다. 소스케는 자신의 가정경제의 파탄이란 문제도 있었지만, 결국 오요네와의 불륜관계가 평생 심리적 압박으로 온 것이다. 오요네가 한 번 기회삼아 점쟁이에게 점을 보러 갔을 때 오요네가 계속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유는 어떤 사람에게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것은 결국 소스케의 친구인 야스이에 대한 배반이었다. 과거에 대한 잘못과 회한은 평생 부부의 가슴을 누르고, 서로의 죄책감은 서로를 통해 극복하고 있다고 해도 그 극복은 현재상황이지 앞으로의 인생이 아니다.

 

극복해야할 지난날의 과오가 바로 문(門)이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들의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을 수도 혹은 없을 수도 있다. 그런다고 아예 없다고 하기에는 이 소설에 등장한 인물의 모습이 너무 우리 삶과 유사한 면이 많다. 시대적으로 1910년 전후 일본이고, 나는 2013년 한국이지만 인간이 가지는 공통적인 문제나 관심사는 유사하다는 점이다. 인간 개인에 대한 이야기로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관심과 반성을 보인다.

 

딱히 작품으로 통해 사회비판이나 혹은 시대정신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모순이란 굴레에 우리 스스로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 모순에 갇힌 채 속박 받는 것은 그 자신의 몫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그 자신의 몫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참 곤란한 경우도 많다. 예전에 읽은 <마음>에서 친구인 K를 배신한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에서 그 선생님은 지난 과거에 사로잡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죽이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사람 모두가 자신의 과오나 죄를 모르거나 혹은 속일 수가 있어도, 그 본인은 그 과오와 죄를 모르거나 속일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속이는 짓은 자신에 대한 오만과 기만일 수 있다. 그런 점으로 인해 소스케는 왠지 넋이 나간 사람 보이기도 하고 소심해 보이기도 한다. 그의 그런 어중간한 행동에는 과거에 대한 죄책감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자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門)을 여는 것은 본인인 것을 작중의 소스케나 우리 모두 안다. 하지만 그 열어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소스케는 보여준다. 인간이 자신의 잘못된 과거와 마주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문(門)은 현재의 자신이 잘못된 과거의 자신을 열어볼망정 끄집어낼 수 없는 벽이 존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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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8-11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허... 역시 항상 성실한 감상문을 올리시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3-08-11 17:34   좋아요 0 | URL
그것이 바로 오덕력의 기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