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규신데렐라 1
눈미 유 글 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결국 신데렐라에 대한 신화적 욕망이다. 인간에게는 여전히 욕망이란 무의식적인 구조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기 마련이다. 왜 그런가? 신데렐라 신화와 관련하여 한국에서는 콩쥐팥쥐 동화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콩쥐팥쥐 동화이야기가 배경적 요소로 따지면 조선시대다. 게다가 농경사회의 요소에서 분명 근대화 시기의 외국문물이 들어오지 않았던 시기다. 그런 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신데렐라 신화는 유효하다. 아니라면 일본 만화 및 애니메이션 중에서 <캔디 캔디>와 같은 작품도 좋은 사례다. 한 때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캔디 열풍이 일어났다.

 

테리우스라는 미남이 캔디라는 순수한 소녀를 사랑하는 이야기, 그래서 탄생한 언어가 캔디 이데올로기다. 캔디 이데올로기와 신데렐라 신화는 비슷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신분상승의 꿈을 노리는 여성이 가지는 환상이다. 지금의 환상을 가지고 논하자면 <캔디캔디>와 같은 고전 만화를 보는 것이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 없으나, 그런 구조적인 서사는 계속 돌고 돈다. 단지 스토리텔링의 구성에서 다른 이야기나 소재를 집어넣어 다르게 보일 뿐이다.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신화적 요소는 같다. 지금이나 몇 십 년 전에 흥행한 <캔디캔디>나 구조적인 분석에서 별로 바뀐 것은 없다.

 

작품의 분석대상에서 그런 대상에 대한 구조적 배열은 중요하다. 통시적인 작품을 놓고, 공시적으로 같이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데렐라의 중요한 갈등은 아마 계모와 주인공인 소녀의 관계다. 기본적으로 신화라는 것은 동화로 나오고 신데렐라 이야기나 콩쥐팥쥐 이야기도 물론 동화책으로 나온다. 하지만 동화라는 것은 아이가 읽기 위한 이야기나, 그 이면에는 잔혹하고 끔찍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가령 콩쥐팥쥐에서 콩쥐가 부임한 관료의 아내로 되면서 동화가 아닌 신화의 은밀함을 밝힌 도서에서 팥쥐는 죽임을 당하여 온 몸을 갈기갈기 찢어 젓갈로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신데렐라의 이야기에서 실제 이야기는 신데렐라의 언니들이 신데렐라의 구두를 신기 위해 발등과 발가락을 도끼로 찍어 억지로 넣었다고 한다. 덕분에 유리 구두에서 피가 새어 그 거짓말이 탄로 나자, 동화책과 달리 계모와 언니는 도부수 손에 처형을 당한다. 잘 생각해야할 점은 도부수가 목을 도끼로 찍어 벤다는 점에서 기요틴이 보급되기 전의 이야기가 있었다는 증거다. 신데렐라 신화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고, 언어학적으로 신데렐라는 먼지 옷을 뒤집어 입은 소녀라고 한다.

 

신데렐라의 이야기에서 언어학적인 추적에서 밝힌 것처럼 신분이 매우 낮다는 것이고, 그 신분이 낮은 여자가 신분상승을 위해 남자와의 만남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가부장적인 가족체계에서 여성의 종속을 합리화하는 수단하는 남성지배체계와 더불어 자신의 노력보단 단순히 남자에게 의지하려는 속물근성의 여성들의 이해가 일치하는 것이 신데렐라 신화의 한계성이다. 이와 반대가 되는 신화는 온달신화가 있다. 평강공주가 내려와 바보온달은 대장군으로 만드는 고구려시대의 이야기는 신분상승구조에서 옛날에는 여성들도 만만치 않게 정치적 입지도가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현대사회는 자본주의와 더불어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권력의 왕좌나 신분 대신 자본력이 대체되고, 민주주의 요소의 증가로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들이 아예 차단된 것이 아니라 길가에서 우연히 스치기도 한다. 조선시대를 생각하면 높은 신분인 대관관료나 중세유럽의 봉건귀족이 지나가면 모든 농민이나 백성들이 머리를 숙이며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따라서 그런 통시적 조건에 따라 이야기의 구성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번에 읽어본 <절규 신데렐라>는 그런 기본적인 신데렐라 신화에서 보여주는 가난한 소녀와 억압된 자유가 기본적인 명제가 되었다.

 

단지 다른 점은 계모와의 갈등이 아니라 친부와의 갈등이다. 신화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에서 딸은 아버지를 아들은 어머니를 따르게 되어 있으나, 딸의 연적이 되는 어머니는 이미 돌아간 시점이고, 아버지가 모든 생계와 가계살림을 도맡는다. 편집적인 자녀들 관리가 지나치다 못해 정신병적이라고 볼 수 있다. 형제관계에서 언니가 2명이 아니라 오빠와 언니가 각각 있다. 게다가 나이도 15세란 점에서 14세의 중2병이란 질풍노도의 시기가 지나갔다. , 2차 성징기로 통한 심리적 내적 갈등이 없는 구조다.

 

이런 시기에 주인공은 자신의 내부보다 외부와의 관계에서 갈등한다. 자기만의 공간이 아니라 자기 외적인 공간과의 투쟁이고, 그 투쟁에서 아버지의 권위와 사회적인 도덕과 싸워야 한다. 그 사회적 도덕이란 윤리적 가치나 혹은 법적인 규칙이 아니라 유해인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나공주라는 소녀다. 미모도 그러하나 아버지의 배경에서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 작품을 보면 오디션의 우승은 전반적으로 나공주로 되어 있다. 바로 그것이 도덕이라고 하는 것이다. 도덕이라고 하여 반드시 사회윤리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적, 사회적 흐름을 쥐고 있는 하나의 세력이나 권력을 의미한다.

 

다라서 해인이의 적은 내부의 관계인 가족이 아니라 가족 외라는 것이다. 신데렐라 신화는 본래 가족 내부의 문제를 가족 외부에서 해결하고 기존 가족은 버리고 다른 가족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그 편입과정이 신분상승이란 점에서 <절규 신데렐라>는 기존 신데렐라 신화와 대조적인 부분을 보여준다. 여기서 또 다른 구조는 신데렐라를 구원해주는 존재이다. 작품 초반에 왕자는 작곡가 강동호로 나오고, 신데렐라의 조력자는 케빈이 된다. 문제는 강동호나 케빈 모두 신데델라인 해인이를 마음에 든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신데렐라 신화는 왕자가 1명에 그 왕자에 대한 구혼자는 다수이고, 여기서는 다르게 2명의 남자로 구성된다. 아직 1편만 봤기 때문에 서사적으로 어떻게 끝을 맺을지는 알 수 없으나, 작품에서 해인이 가지는 갈등은 아버지와의 갈등, 케빈과 강동호와의 삼각관계가 초반에 제시된다. 서사구조에서 발단-전개-위기-절장-해소 5가지 단계에서 이제 전개과정이 모인 것이다. 물론 그 사이의 위기는 있었으나 그 위기는 이야기 구조의 하나의 조건성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서사의 진행에서 아쉬운 부분은 초반에 케빈의 등장에서 너무 급진적으로 친하게 되었다는 점이고, 케빈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가게를 지나칠 때 역시 너무 우연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가게를 지나가기 전에 미리 사전에 하굣길에 쇼윈도에 비추어진 의상과 그 너머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뭔가 아쉽거나 혹은 자신의 용모를 조금 가꾸는 모습을 보였다면, 더 부드러울지 모른다. 작품에서 좋은 부분은 역시 표현력인 것 같다. 주인공 소녀가 아버지의 압박 아래 TV도 못보고, 라디오도 제대로 듣지 못한다.

 

낡아버린 워크맨 하나에 동요만 부르는 해인은, 오로지 마음속에 담고 있는 어머니와의 추억이다. 어머니 앞에서 부르는 노래란 아름다운 기억이다. 그 기억만을 담아 오디션에서 부르고, 오디션이 아니라도 길가에 흥얼거리면서 간다. 순수한 그 마음을 토대로 변하지 않으면서 꾸준히 빛나는 장면은 좋았다고 본다. 만화라는 것은 이미지의 세계다. 소리를 내지 않은 종이로 구성된 매체이다. 그 종이에서 소리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작가의 그림체는 좋았다. 빛이 나듯 음표가 주위를 돌아가는 것과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열중하는 모습은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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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3-25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입니다. ㅎㅎ. 눈미가 감동하겠어요.
순정만화를 새롭게 보도록 만드는 힘이 느껴지는 리뷰였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3-03-25 19:21   좋아요 0 | URL
그것이 리뷰하는 사람의 임무죠.
눈미가 님에게 칭찬받고 싶어한데 이참에 칭찬을..ㅋㅋ

제 블로그에 올렸어요! 그리고 눈미도 블로그에 덧글을..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