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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 - 감정의 연대기 1929~1939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6월
평점 :
이 책에 대한 개인적 느낌은 퍼즐에 비유하게 된다. 너무나 좋아하는 분야의 스페셜 한정판 10000ps짜리 퍼즐을 맞추고 싶은 욕구에 이제 막 포장지를 뜯은 느낌이다. 한동안은 퍼즐 하나하나가 헷갈려 어디쯤 두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익숙해지면 이 퍼즐 조각 하나를 큰 그림의 어디쯤 넣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아주 많은 시간과 애정이 필요하겠지만 과정이 주는 즐거움이 클 것이다. 이 책 <증오의 세대, 광기의사랑>이 전 세계 20개국 번역 출간의 성과가 그 기쁨의 증거이지 않을까.
이 책을 만난 계기는 이렇다. 세계 고전문학을 틈나는 대로 읽어보면서 20세기의 변화들을 흠모했던 내게 이 책은 눈에 뛸 수밖에 없는 책이었다.
없던 것이 생기고 있던 것의 정의도 뒤집히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그런 마력의 순간들을 많은 사상과 예술 사조 그리고 문학 작가들의 이름으로 만나는 시간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현대라 부르기도 하고 모더니즘이라 말하기도 했다.
저자 플로리안 일리스, 11년 만의 후속작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책이 나오기 전에 전작 <1913년의 여름>부터 부지런히 만나보았다. 그동안 책으로 만난 인물들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글이 긴 호흡보다 잡지의 지면이나 라이오 사연 듣듯이 만나는 것 같았다. 당대의 주요 인물들의 사적이고 공적인 이야기들은 뭔가를 엿보는 기분이기도 했다. 시대를 풍미한 유명 인사들 개개인의 자서전이나 평전을 꿰차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을 책 한 권으로 만나다니. 문학 속에 녹아들어 있는 시대의 모습과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시간은 생생했다. 전작 1913년 여름은 이들이 동시에 숨 쉬고 움직이고 작품을 발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 때문에 더욱 미묘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후대에 미친 영향을 모르고 있지만 우린 알고 보는 셈이다. 그들의 삶을 연애편지나 사진, 신문기사 등으로 되짚어 보는 경험은 얼마나 특별할 것인가.
이번 책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은 전작의 흐름을 유지하고 있어서 낯설지 않았다. 다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내가 모르는 게 많아 예술, 미술, 음악 분야의 주요 인물들의 이름은 낯설었다. 조금 생경했지만 기쁘다. 이제 또 하나의 10000피스짜리 퍼즐을 내 앞에 쏟아둔 셈이다. 1929~1939년의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에 대한 퍼즐을 맞춰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베를린, 지중해와 스페인, 유럽 문화사의 특별한 이야기였다.
1929 세계 대공황
1939 제2차 세계대전
폭염의 연속
세계의 역사는 적어도 그 절반은
사랑의 역사이다
로베르트 무질
저자는 일기나 잡지, 신문, 그림,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베를린의 황금기의 끝자락인 192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39년까지 격동의 10년 동안 문화 예술사의 중요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풀어간다. 1920년대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사랑이었다.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자유연애시대에 동성애가 넘치는 시대. 끝을 예고하는 시작. 내가 알던 사랑과는 사뭇 다른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이 시간 잠시지만 장폴 샤르트르의 자유연애를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받아들이고 힘들어했던 보부아르가 되어보려 한다.
이 책을 퍼즐에 비유했을 때 정말 많은 퍼즐 조각을 가지고 있다. 퍼즐 조각 중에는 비슷해 보이는 주변 퍼즐과 구분하기에 유용한 퍼즐 조각이 있기 마련이다. 나의 인식에 기반해 길을 찾기 유용했던 도입부의 퍼즐 조각 몇 개를 나열해 본다면 이렇다.
피카소는 아직도 가끔 올가, 자기 아내를 그려야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쉼 없이 올가를, 그 가냘픈 발레리나 몸매를 그렸지만 지금은 마리테레즈 발테르가 가장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 "버림받은 여자가, 내 그림을 자세히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리고 올가는 이 교체되었다는 느낌을 거의 미친 사람처럼 표현한다. 그러나 올가의 분노는 피카소의 창작력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그 창작력은 죄책감과 고집으로 유지된다.
이제 남은 것은 갈라와 달릴 뿐이다. "갈라는 내 인생에 소금이 되었고, 내 인격에 경화제, 내 등대가, 내 도플갱어가, 바로 내가 되었다."라고 달리는 환호하며 기뻐한다. 두 사람은 딱 한 번 함께 자는데, 왜냐하면 달리는 여성의 성기에 공포와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갈라와 처음 만났을 때 달리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는데 아직 숫총각이었다. 달리가 안전함을 느끼는 것은 오직 엉덩이까지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소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