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인간
알도 팔라체스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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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고전들이 다양한 해석을 품고 회자되는 중에 <연기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책 홍보 문구에 밀란 쿤데라 이전에 '가벼움'에 대해 이야기했던 작가라고 안내되고 있었고 그것이 연결고리가 되어 읽어 보게 되었다. 어쨌거나 '인간'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고 이상한 기대감이 생겼다.


운 좋게도 최근에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며 밀란 쿤데라가 그려낸 가벼움과 무거움을 만났었고 <연기 인간>을 이해하는 힌트는 되었지만 다르기도 하다. 가벼움을 정의하려던 의도는 아니다. 그것은 좋고 나쁘고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과, 우리 각자에게는 이 무게의 기준이 서로 다르다는 것 정도를 알았을 뿐 사실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가벼움과 무거움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며 결국 어느 쪽을 보느냐의 차이를 만든다. 하나의 진리와 그 반대의 진리라고 해서 모두 거짓이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이해해 보고 싶게 만들었다. 요즘으로 생각한다면 누군가는 가짜 뉴스라고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또 누군가는 확실한 진실로 믿고 있는 것과 비슷했다. 각자 나름의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가볍거나 무거운 기준을 부여하는 것 같다.



밀란 쿤데라가 영향을 받았을지 모른다는 이탈리아 작가 알도 프라 체스키(1885~ 1974) <연기 인간 >을 통해 본 가벼움은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그에게 가벼움은 연기가 되는 것 곧 존재의 '승화'일까? ( 사실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여전히 많다. '연기'에 대해서라면 소설 속 인물들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다. )

작가는 스스로를 미래파 소설가라고 불렀고 미래파 운동가들과 교류하며 평생 문학 여정을 이어갔고, 20세기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소설, 영화, 평론, 드라마 등 다양한 분야로 위기와 갈등에 대해 소통하길 원했다.

소설 자체가 어려운 내용은 아니지만 난해하긴 했다. 나로서는 희극 형식의 책을 읽은 적이 없다 보니, 몇 명이 나누는 대화인지 말장난 같은 대화들이 처음엔 버겁다가 적응되고 나서야 연극 무대 위에서 작은 배역에도 충실한 많은 연기자와 군중의 웅성 거림들이 들리기도 했다.



검은 자궁

누군가 아니 무언가가 검은 굴뚝에서 33년간 머물다가 세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굴뚝을 타고 아래로 내려와 인간 세상에 섞인다. 맨 처음 우연히 보인 장화를 신고서 인간이 되었다는 '연기 인간'이 진짜 연기로 만들어진 형상인지 아닌지 상상하는 것조차 어색하긴 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발'이 가진 의미가 크다는 것을 얼핏 접하긴 했지만 깊은 의미를 알긴 버거웠다. 은유적인 뭔가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알쏭달쏭 아직 잘 모르겠는 마음은 어둠을 헤치고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기분이었다.

검은 자궁, 검은 굴뚝 속에서 아직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있다가 곧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발견한다.


p 29

연기는 허공으로 흩어지지요. 벽난로 굴뚝 꼭대기가 막혀 있으니 허공으로 가지는 못했지요. 지극히 자연스럽다 봅니다. 그러니까 요컨대 당신은 연기가 뭉쳐서 만들어진 거 아닙니까? 사람의 태아가 굴뚝 꼭대기에 있었다니 자궁은 검든 하얗든 무언가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씨앗이 필요한 법이요. 굴뚝에서 씨앗은 곧 연기입니다.


대항해시대와 유럽의 역사, 여왕의 이야기, 산업혁명을 지나며 무수히 세워진 공장 굴뚝을 떠올리기도 한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농담>, 알베르 카뮈<이방인> 정도의 접점을 남기는 <연기 인간>을 통해 보는 것이라면 인간들이 쉽게 뒤집을 수 있는 논리와, 사상, 정치의 가벼움이기도 했다.


페렐라가 세상으로 나오고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여 왕에게 데려갔지만, 사실은 페렐라가 인간들을 발견하고 왕에게 이르른 셈이었다. 이런 시선의 차이와 해석의 차이가 <연기 인간>에서 중요해 보인다. 무언가를 우기는 군중이 모이면 대중의 여론이 되고 전후 사정 고려할 틈도 없이 사실이나 진리가 되고 만다.


연기 인간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그를 메시아처럼 고귀하고 신성하게 느끼며 추앙한다. 이는 '연기 인간'이 된 페렐라가 원한 바도 아니지만 귀족과 귀부인들은 마음대로 그를 한껏 드높인다. 여성에 관한 법이 아직 없고 새로운 법이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시점에 신성한 페렐라에게 새로운 법전을 만들어줄 것을 모두가 바라고 있다. 의심만 나부끼는 시대의 새로운 법전이 굳게 지지해야 할 목표는 만인의 평등한 이익 추구라야 하는데 그 계획을 실현할 적임자는 오직 페렐라 밖에 없다.



페렐라는 법전 만들기에 앞서 민생 시찰에 나선다. 시찰 도중 특히 정신병원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비일상적이고 기괴한 언행을 접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삶의 이면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 페렐라가 시찰에서 돌아왔을 때 궁정 하인 알로로가 지하 납골당에서 불에 탄 채 발견된다. 알로로는 자기 몸을 태우면 연기가 되어 모두가 숭배하는 페렐라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페렐라는 불에 탄 알로로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그저 그가 가벼워지고 싶었던 거라고 말한다.

이 말을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한건지, 정말 한없이 가볍게 들은 모양이다. 그 일로 페렐라에 대한 평가와 시선이 완전히 달라져버린다.


처음에 사람들은 페렐라를 이루고 있는 연기 천국으로 받아들였다. 연기 색깔의 옷을 입고 연기축제와 무도회를 개최하여 연기로 존재하는 가벼움을 칭송했지만 그 가벼움은 알로로의 죽음 이후 돌연 지옥으로 변질된다. 사람들은 한 사람의 죽음을 가볍게 정의하는 페렐라의 무관심에 분개한다. 페렐라의 가벼움을 세상에서 가장 비상식적이고 어리석으며 무능한 헛소리로 여기다가 마침내 모두의 안녕을 위해 페렐라를 사회에서 격리하고 제거하자는 발언이 쏟아져 나오고 그는 재판에 회부된다.

재판에서 당사자는 없는 채로 페렐라는 가장 높은 존재의 신성함에서 가장 낮은 혐오스런 죄인으로 낙인찍힌다. 유럽의 역사에도 있었던 종교전쟁과, 마녀 사냥 재판이 자연스레 연결된다. 의심만으로 시작해서 죄를 자백할때까지 무자비한 고문을 행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건들이 생각나서 답답했다.



페렐라가 자신에 대해 스스로 알기 전에 사람들이 그를 판단해 버리는 느낌이 좋지가 않다. 높이 들어 추앙했다가 곧 추락시키는 것을 보며 부조리를 느낀다. 알베르 카뮈 소설 <이방인>의 재판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시종일관 있는 그대로를 말하던 뫼르소를 재판하는 과정에서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냉혈했던 무자비한 살인자로 내몰며 사형선고 내린다. < 시지프 신화>로 만나는 부조리와 자살 이야기는 그제야 이방인을 더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연기 인간>만으로 이 소설을 이해가기보다는 다른 연결을 통해 점점 더 이해해나가지 않을까? 어디선가 다시 <연기 인간>을 떠올려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출판사를 통해 책을 무상으로 지원 받아 감사히 읽고 주관적으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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