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해석 - 헤르만 헤세 인생론
헤르만 헤세 지음, 배명자 옮김 / 반니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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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을 다시 꺼내들어 필사로 만나는 동안 이번에야 제대로 데미안을 제대로 만나고 있구나 싶었다. 난해하고 복잡하게만 느낀 인물 관계도 이젠 내 주변에서 찾아보거나 내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 그래서 나는 내가 온전히 데미안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내 경험에만 비추어 오해한 부분들이 많았다는 것을 이번 책 헤르만 헤세의 인생론 / 인생의 해석을 통해 절실히 알았다. 이 책을 함께 읽지 못했으면 어쩔뻔 했어~ 안도했다.

인생의 해석은 생의 주기에 맞추어 엮인 헤세의 에세이라고 보면 된다. 헤세가 원래 이렇게 구분해서 썼는지 나중에 이렇게 엮인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으나 헤르만 헤세의 모든 책을 관통하는 글이라는 것을 지금 느끼며 이상한 전율을 맛보았다.

♡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어린시절, 학창시절, 청년기는 그야말로 데미안을 품은 이야기였다. 오늘 데미안을 필사할 때만해도 데미안 속의 아버지를 구종교와 관습의 대표자로 도덕적이고, 관습적이고 엄하고, 넘지 못할 벽이기도 해서 다소 일그러진 모습으로 바라본 나였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헤세의 가족 이야기들을 만났고 그게 아닌걸 알았다. 이렇게 따뜻할 수가 있다니~

'밝은서계'에 대한 명확한 그림이 없던 나는 싱클레어가 두 세계 사이에서 겪는 고민이 조금 이해 되지 않았던 부분이 없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책 인생의 해석 <아버지를 기리며> 부분에서 헤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고서야 이해가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품이 얼마나 따뜻하고 밝았는지 보게 된 것이다. 정말 따뜻하신 아버지셨고 언 손 위에 포개어진 아버지의 손은 싱클레어를 영원한 평온으로 이끌만 했다.

이 아버지를 거역하고 다른 종교와 악의 세계를 탐닉하던 싱클레어의 마음에는 얼마나 큰 죄책감이 들었을지 이제 많은 이해를 해본다.

크로머에게 시달리다가도 집으로 돌아와 맛보는 평안의 세계가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집안에 걸린 아버지의 모자만 보고서도 안도하던 싱클레어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럼에도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인생의 순환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깨달아 본다.

데미안에서

'인도자가 나를 떠났어. 나는 완전한 암흑 속에 서 있어. 혼자서는 한발자국도 뗄 수 없어. 도와줘!'를 속으로 외치던 싱클레어의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보낸 헤세의 마음 같았다.

인생의 중반, 어두운 숲에 있는 단테의 모습이기도 했다.

나빠지는 경기, 치솟는 물가, 갑자기 앞날이 캄캄하게 느껴지는 중년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아의 신화를 잊지 않았고, 내 소명이 무엇인지를 끝까지 찾아가보고 싶어 하는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헤르만 헤세는 훌륭한 안내자가 되어 주고 있다.

헤르만 헤세, 이제 겨우 만났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를 통해 알게 되는 독서, 음악, 식물, 나무들이 아직 가득하다. 그의 안내에 기대어 나의 많은 이야기들을 찿아가 보고 싶어진다. 중년이후, 노년과 죽음에 대한 것들도 말이다.

나는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살고자 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P 131

우리의 영혼은 표면 아래의 무한 하게 넓은 부분을 보지 못한다.

의식에 의해 계속 거부를 당하게 되고, 의심과 우려의 대상이 된다. 해롭다고 인식되는 것은 표면 위로 올라올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모든 도덕의 본질이다! 하지만 해로운 것도 이로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선하거나 중립적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에게 이롭지만 표면 위로 올라와서는 안 되는 자신만의 고유한 것들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 그런 것들이 위로 올라오면 불행이 따른다고 도덕은 가르친다. 하지만 오히려 행복을 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표면 위로 올라와야 하고, 어쩌면 도덕에 복종하는 사람만 불쌍해지리라.

내가 지난 몇 년 사이에 체험한 것을 이런 비유로 표현하자면 나는 밑에서 위로 올라오는 길이 차단된 호수와 같았고, 그래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괴로운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위와 아래의 물이 서로 자리를 바꾸어가며 흐르고 있다. 아직은 부족하고 충분하게 활기 못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 데미안을 통해 물었던 인생의 물음들을 이 책에서 더 선명하게 느낀다. 이런 책이 꼭 필요했었던 시점에 내게 운명처럼 다가온 책이라는 오묘함을 느낀다.

♡ 이젠 헤세의 시를 조금씩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p 144

시든 나뭇잎

모든 꽃은 열매가 되려 하고

모든 아침은 저녁이 되려 하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변신도, 도망도

가장 아름다운 여름조차

언젠가 가을과 시듦을 느끼려 한다

나뭇잎을 움켜쥐리라, 끈질기게 조용히

바람이 너를 앗아가려 한다면

너는 네 할 일을 할 뿐, 방어하지 마라

일어날 일이 조용히 일어나게 하라

너를 부러뜨리는 바람이

너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라.

헤르만 헤세

늦가을의 산책

가을비 잿빛 숲을 뒤덮고

아침 바람 추위에 떠는 계곡

딱딱한 알맹이를 떨어트리는 밤나무

벌어진 밤송이가 웃는다, 축축하게 갈색으로

가을이 내 삶을 헤집어놓았다

바람이 잎사귀를 찢고 가지를 흔들고 -

나의 열매는 어디로 갔는가?

나는 사랑을 꽃피웠고 그 열매는 고난이었다 나는 믿음을 꽃피웠고 그 열매는 증오였다 바람이 내 메마른 가지를 찢는다

나는 바람을 조롱하고, 폭풍에도 아직 끄떡없다

나의 열매는 무엇인가? 나의 목표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꽃을 피웠다

꽃을 피우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이제 나는 시들었다

시드는 것만이 나의 목표일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마음에 담긴 목표들은 짧기만 하다

신은 내 안에서 살고,

내 안에서 죽고, 괴로워한다

내 가슴속에서, 그것이면 내 목표는 충분하다

길 혹은 미로, 꽃 혹은 열매

모두가 하나이고, 모두가 그저 이름일 뿐

아침 바람 추위에 떠는 계곡

밤나무에서 떨어진 딱딱한 알맹이

딱딱하고 환하게 웃는다. 나도 같이 웃는다.

헤르만 헤세




(책은 출판사로 무터 무상으로 제공 받아서 감사히 읽고 주관적으로 쓴 리뷰입니다.)

죽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사랑하고 낯설어했던 이 세상에서 그럼에도 나는 길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슈바벤 땅의 축축한 갈색 무덤에서 나는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다. 성숙의 길을 걷는 사람은 오로지 얻기만할 뿐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언젠가 그가 철창이 열린 것을 발견하고, 마지막 심장박동이 멎어야 다가갈 수 있는 그곳으로 탈출할 순간이 올 때까지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죽은 사람을 위해 성경이나 다른 책에서 좋은 글귀와 명언을 찾는다면, 많은 얘기를 하고 싶지 않고 많은 얘기를 하지 않고도 죽음의 소중한 광채를 반영하고 싶다면, 어디에서도 다음의 시편 구절보다 더 좋은 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올무가 끊어졌고,새는 자유로워졌다!"

- P98

새로운 삶의 시작​


대부분의 인생이 그렇듯, 내 인생에도 특별한 변화의 시점이 있다. 놀람, 암흑, 혼란, 외로움 그리고 처음 겪는 무감각과 공허함의 날이 있다. 그런 날 밤이면, 하늘에 새로운 별이 뜨고 우리 안에 새로운 눈이 뜬다.



그때 나는 얼어붙은 채, 내 청춘의 폐허 속을 걸었다. 무너진 생각과 엉뚱한 상상, 왜곡된 꿈들 위를 걸었고, 내가 보았던 것들은 먼지가 되어 살기를 그만두었다. 아는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나를 부끄럽게 했던 친구들이 나를 지나쳐갔고, 내가 엊그제 했던 생각들이 나를 빤히 보았다. 마치 100년이 지난 것처럼, 내 소유였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아주 멀어지고 낯설어졌다. 모든 것이 나를 떠났고, 나는 곧 거대한 공허와 정적에 휩싸였다. 내 곁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사랑도 이웃도 없었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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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5 2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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