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향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했을 때에 우리는 사랑이라고 답하게 된다.
먼 친척이라서 돌본다지만 특별한 애정이다. 중년이 넘은 남자와 이제 곧 여인이 될 소녀이기에 서로에게 누가 되지 않기위해 가까운 거리이지만 편지로 주고 받은 54통의 편지로 이 소설이 이렇게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이 놀라웠다.
바르바라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필요한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은 마카르 제부스킨이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된다. 바르바나를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극도로 행복했다.
그렇게 봄에 시작한 편지는 질은 가을로 넘어가며 좌절과 절망을 얘기해야 했다.
부성애적인 사랑으로 끝없이 서로를 걱정하고 돕고자 하는 마음에 반해서 지독하게 가난한 현실은 아프다. 가난한 사람들이 당하는 수모와 수치는 참 이상하다.
바르바나 역시 그저 살기 위해 작은 일이라도 맡아 열심히 해야했지만 몸이 점점 약해져서 일마저 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진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까?
누구의 잘못 입니까?
돈은 대체 무엇입니까?
누가 우릴 귀히 여겨주고
존중이란걸 해준단 말입니까?
200년이 지난 현대의 우리의 모습과도 멀지 않은 익숙함이 올라와 책을 읽는 나는 아직도 슬프다.
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라는 권유에, 차도 못마실 형편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것을 죄스럽게 스끼는 어느 장면이 있는데,
자신에게 베인 가난의 찌질함을 미안해 하는 인물의 모습이 너무 아팠다.
마카르 제부스킨은 자기가 이미 절박한 순간임에도 더 절박해보이는 그를 도우려 자기가 가진 적은 돈이지만 전부를 주고 만다.
서로의 위기에 도움이 되었던 사람역시 형편이 더 나아서 돕는 것도 아니었다. 더욱이 가난이 주는 질병까지 늘 함께 하여서 점점 약해지는 몸과 야윈 모습으로 그려질 때는 그 가난이 가슴을 찢고 들어왔다.
18세기, 페스트에서 보았던 광경들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축축하고 눅눅한 거리에서 옷은 헤어져 여기 저기 덧대어져 있고 부츠도 밑창이 훤히 뚫여 살이 드러나고 진창에 굴러 더러워진 채로 마지막 자존심과 체면을 잃지 않으려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의 연민과 사랑이 이 소설을 고전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게 깊은 한숨을 남겨버린 가난한 사람들은 그 내용에 관해서라면 무수히 많은 글이 있으니 생략하더라도 문장이 준 가난의 묘사를 만나고 나면 좀 달리 보이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쉽게 걸리는 감기로 잃는 사람들을 보며 그 절망감이 또 온 도시를 뒤덮고 있음에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