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작가 10주기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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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를 모르던 백지장 같은 마음에 가볍게 시작했었다. 책 속의 일화 <엉뚱한 오해> 처럼 작가의 일상속에 숨은 이야기들을 듣는 재미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작가의 온 생을 함께 하며 묵직한 마음이 되었다.

박완서님이 써오신 글에 비해서는 아주 작은 부분과의 만남이었지만 이제는 어느 순간에 박완서의 글을 만난다해도 가슴이 벅참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길잡이가 되지 않았나 감사해 본다.


내 얘기를 보태기가 죄송스러울만큼 마지막 즈음에는 경건해진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쓰신 글, 따라 죽을 만큼의 용기가 없었다지만 남은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따라 죽지 못하는 마음, 남편을 먼저 보내야 하는 마음, 그뒤에 남겨진 아픔, 담낭암으로 타계하시기 전의 심정들과 함께 자신의 삶을 그러모아 정리해가시는 글들을 보며 이렇게 조금 만났을뿐일지라도 내내 먹먹하다. 필사하며 천천히 읽은 만큼 감사한 시간이었다.


추모하는 마음으로, 어머니를 보내드리는 마음으로 꽃을 따라 그리고, 꽃띠를 둘렀다. 이런 과정이 없이는 쉽게 책을 놓기가 힘들어서 나름의 의식을 치르고 있나보다.

박완서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남기신 것이 당신에게도 위안과 안녕이 되시길 바래본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이 멋진 책 제목을 잊을 수 없을것 같고, 다른 이름으로도 박완서의 삶을 만나보려 한다.





불꺼진 방, 갓등 하나 당당히 켜지 못하고 남편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갓등에 이불까지 씌우며 써내려간 박완서의 글이다.

이 삽화 한 장의 울림이 커서 보고 또 본 것 같다.

나에게도 어느 순간 작은 책상이 하나 필요했었다. 거기서 읽기 시작했고, 쓰기도 했고, 시간의 터널을 얼마나 거슬러 다녔는지 모른다. 유년시절을 떠올려 내고, 지금을 이해하고 앞으로를 내다보는 일이 모두 작은 책상, 노트 하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 삽화가 너무도 아름답고 숭고해보였다.









될 수 있으면 단순 소박하게 사느라 애 썼지만 내가 남길 남 루한 여행가방을 생각하면 내 자식들의 입장이 되어 골 머리가 아파진다.

​그러나 내가 정작 두려워해야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 가방 안에 깃들어 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 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이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 P247

내몸의 진액을 짜 내어도 짜 내어도 고 작은 것은 허기져 있고, 날마다 포동포동 살이 찌는 내새끼를 내 손으로 씻기며 날로 굳쎄고 아름다워지는 몸을 보면서 느낀 사랑의 기쁨을 무엇에 비유할까.

그런 내 새끼중에 하나가 봄의 절정처럼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이세상에서 돌연 사라졌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나도 곧 뒤 따라갈테고 가면 맛난 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 P276

내 마음은 너무 오래 정처 없이 떠 돌았다. 나도 임의로 할 수 없었던 내 마음이 언제부턴가 유턴을 해서 시발점으로 돌아 가려 한다는 걸 요즘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

​내 유년의 뒤란에 아무렇게나 피고지던 꽃들처럼 그 자리에서 저절로 꽃든이 돋아나게 되었다. 씨 떨어진 자리가 져 있을 자리려니 그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피고 지는 것에서 유년의 뒤란을 닮았다. - P270

내 둘레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 창이 허락해 주는 한 조각의 하늘, 한 폭의 저녁 노을, 먼 산 빛, 이런 것들을 순수한 기쁨으로 바라보며 영혼 깊숙이 새겨 두고 싶다.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고 싶다. 태초의 남녀 같은 사랑을 나누고 싶다. 이런 찬란한 시간이 과연 내 생애에 허락 될까.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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