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희 컬렉션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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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것.

포장없이 날 것 그대로이기도 하고, 새는 나는 것이니까.

기대한 뭔가는 부족했다.

우리는 모두 매일매일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중이지. 너는 지금의 내가 되기 전의 나야. 아니면 내가 되어가는 중인 너라고 말해야 하나? 그래서 나는 너희들을 보는 게 무서워 견딜 수 없어. 감자 눈을 파내면서 그 여자가 내게 해준 말이었다. - 77

2018.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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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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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올 해 처음 마음에 꼭 드는 소설.

문장 한줄 한줄이 너무 아름답다.

2차 세계 대전을 다룬 문학은 너무나도 많지만 오스트레일리아 포로의 시점의 책은 처음이었고,

독일군이 아닌 일본군에 대한 이야기는 아시아 작가가 쓴 경우 외엔 읽은 기억이 없다. (확신은 못하겠네...)

플래그를 붙이며 읽다보니 책 옆면은 플래그가 빼곡하게 붙어 버렸는데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포로들을 학대하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던 나카무라는 하이쿠를 즐겨 외웠는데, 포로를 죽이는 동안에도 잇사의 하이쿠를 암송하며, 포로들에게 통역하게 했다.

고통의 세상
벚꽃이 피면
그 세상도 꽃을 피운다.

얼마나 역설이고 모욕인지. 그 아름다운 싯구를 입에 담고 저지르는 만행은...

포로와 일본군과 일본군에 가담한 또 다른 아시아인들과, 그들의 고향, 가족들이 흩뿌려놓은 카드들 처럼 펼쳐져 있다.

물론 화자인 도리고 에번스의 이야기도.

문장의 유려함에 넋을 잃어 흩뿌려진 이야기들의 (약간의) 산만함은 잊어버렸다.

전범들이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르지 않는 에필로그들을 보며, 세상 어디나 있는 불의를 실감한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게는 과거만 있다. 노인이 된 뒤 도리고 에번스는 이것이 어디서 읽은 말인지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낸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만들어냈다가, 이것저것 뒤섞었다가, 다시 부숴버렸나? 가차없이? 바위가 자갈이 되고, 자갈이 흙이 되고, 흙이 진흙이 되고, 진흙이 바위가 되는 식으로 세상은 굴러간다. 그가 세상이 왜 이러저러한 모습인지 설명해달라고 다그칠 때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 그대로다. 세상은 그냥 그런거야. 원래 그래, 아들. - 15

도리고 에번스는 미덕을 싫어하고, 미덕이 찬양받는 것도 싫어하고, 그에게 미덕이 있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도 싫어하고, 덕이 있는 척 행세하는 사람들도 싫어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덕이 있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들을수록 그는 미덕이 더욱더 싫어졌다. 그는 미덕을 믿지 않았다. 미덕은 잘 차려입고서 갈채를 기다리는 허영이었다. -75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도리고에게는 거대한 속임수 같았고, 도리고 자신은 여기서 가장 잔인한 역을 맡은 사람이었다. 사실은 아무 희망도 없는 곳에서 희망을 내미는 사람. - 298

콜레라의 전염을 막기 위해 환자의 소지품은 모두 불에 태웠다. 사람들이 새로 가져온 시체 세 구와 그들의 소지품을 장작더미 위로 올리는 동안, 인부 한 명이 토끼 헨드릭스의 스케치북을 들고 도리고 에번스에게 다가왔다.
태워. 도리고 에번스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인부는 기침을 했다.
결정을 내리기가 힘듭니다, 대령님.
왜?
이건 기록이라서요. 보녹스 베이커가 말했다. 헨드릭스의 기록입니다. 미래에 사람들이 이걸 보고 이곳에 대해 알고 기억하는 것, 그것이 토끼의 소망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사람들이 기억해주는 것이요.
기억?
네, 대령님.
결국은 모든 것이 잊히게 돼 있다, 보녹스.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해.
보녹스 베이커는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보녹스 베이커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령님?
그렇지, 보녹스. 주문처럼 외우기도 하지. 어쩌면 그건 상당히 다른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걸 남겨두어야 합니다. 이곳이 잊히지 않게요. - 303

나는 하느님한테 아무런 이의가 없다. 도리고 에번스는 보녹스 베이커와 함께 장작을 밀고 쑤셔서 시체들이 불길에 골고루 감싸이게 하며 말했다. 하느님의 존재를 놓고 다른 사람들과 논쟁하는 것도 귀찮아.
내가 지긋지긋하게 싫은 건 바로 나 자신이니까. 이런 식으로 끝을 내는 게.
이런 식이라니요?
하느님 방식. 하느님이 이랬네 하느님이 저랬네 하는 것.
사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씨발 놈의 하느님이었다. 이런 세상을 만든 씨발 놈의 하느님. 그 씨발 놈의 이름. 앞으로도 영원히 씨발. 평생 동안 씨발 놈. 우리를 구해주지 않은 씨발 놈. 여기를 돌아보지 않고, 저 씨발 놈의 대나무 위에서 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구해주지 않은 씨발 놈. - 312

순간적으로 그는 무서운 세상의 진실을 본 것 같았다. 끔찍한 공포에서 도망칠 길이 없고, 폭력이 영원한 세상, 세상이 창조한 문명보다 폭력이 더 위대하고 유일한 진실이며, 폭력만이 진실한 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숭배하는 어떤 신보다 폭력이 더 위대한 곳. 마치 인간은 폭력의 세력이 영원히 유지되도록 폭력을 전달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폭력은 항상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결코 뿌리 뽑히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끝나는 날까지 다른 사람들의 부츠와 주먹과 끔찍한 행동 아래에서 죽어갈 것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폭력의 역사였다. - 365

2018.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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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그려야 한다
리카(Licar).피즈(Piz) 지음 / 미니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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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만 보이면 참질 못하고 그만....

그려야 한다면서 나 이렇게 그렸다를 보여주는 ㅋㅋ

그래도 고양이들은 참 예쁘지. :)

2018.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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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 -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남성, 남성성, 그리고 사랑
벨 훅스 지음, 이순영 옮김, 김고연주 / 책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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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 않게 쭉쭉 읽어 나갈 수 있는 페미니즘 이론.

요는 “같이 갑시다”인데, 그저 이상적인 이야기일 뿐 아닌가 싶은 마음이 우선 들고,

지침을 핑계로 “버리고 간다”라고 말해버리고 싶은 이야기들이었다.

어쨌든 남성이 지고 있는 짐들은 “제국주의, 백인 우월 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시스템이 만들어낸 이른바 맨박스라는 것인데, 이에 대해 논해보자... 라는 것.

“하나의 완전한 성으로서 남성들에게 전혀 가망이 없다고 느끼는 여성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사실이 나는 몹시 두렵다”(페미니스트 사상가, 바버라 데밍)는 상황에서 어떻게 나아져야 하는지 고심한 끝에 이런 저런 원인과 결과를 이끌어 냈는데, 결국 남성들 자신이 “제.백.자.가”(제국주의 백인우월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또 다른 피해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변화해야 한다는 그 사실은 이미 알고 있고, 페미니스트가 뭘 어째야 하나 싶은 그런 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고, 이런 사회학적 고찰을 모두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지만...

결국 이 책은 여성이 읽어야 할 책이 아니었다라고 체념에 가까운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사람들 대부분이 부인하고 싶어 하는 가부장제의 진실이다. 특히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여성 사상가들이 남성 폭력이라는 이 사회에 만연한 문제를 이야기할때 마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남성들이 폭력적이지 않다고 열을 내며 주장한다. 그들은 많은 남자아이들과 성인 남성들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자신이 남성임을 증명하기 위해 심리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폭력적이 되어야 한다고 믿도록 태어날 때부터 프로그램화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테렌스 리얼은 이처럼 어린 시절에 가부장적 사고에 세뇌당하는 것을 남자아이들의 ‘평상시 외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처음 성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폭력이 남성의 어린 시절 사회화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들과 그들 가족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어보고 나서, 나는 폭력은 남성의 어린 시절 사회화 그 자체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남자아이들을 남자가 되게 하는’ 방법은 상처를 통해서다. 어느 연구에서는 우리가 남자아이들을 지나치게 일찍부터 어머니에게서 단절시킨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들이 느끼거나 그 느낌을 표현하지 못하게 하며 다른 이들에게 세심하게 마음을 쓰지 못하게 한다. ‘남자가 된다’라는 바로 이 말은 모든 걸 받아들이고 계속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관계의 단절은 전통적인 남성성의 결과가 아니다. 단절 그 자체가 남성성이다.” - 116

모든 남성이 여성을 혐오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순수한 형태에서 가부장제가 여성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를 조장한다는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의 주장은 정확했다.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놓고 가부장적 남성성을 따르는 남성은 그 문화에서 여성적이고 부드럽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증오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성들은 가부장제라는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삶과 믿음, 행동을 지배하도록 의식적으로 선택하진 않았다. 그들은 가부장 문화에서 태어나고 또 그 시스템을 받아들이도록 사회화되었지만, 자신들 삶의 모든 분야에서 소소한 방식으로 그 시스템에 반항해왔으며 가부장적 사고와 실천을 완전하게 따르는 것에도 저항했다. 그들은 가부장제가 개인의 욕구에 방해가 될 때면 분명하게 저항하려 했다. 하지만 가부장제에 도전하고 그것을 바꾸고 결국 끝낼 운동으로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려 하지는 않았다. - 190

대중매체는 남자아이들과 남성들에게 가부장적 사고와 실천에 관한 법칙들을 가르치면서 끊임없이 그들을 세뇌하는 역할을 한다. 가부장제에 도전하고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페미니즘의 주장이 남성들에게 그처럼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그 이론이 주로 책에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페미니스트 책을 사거나 읽지 않는다. -217

2018.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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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 사전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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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 시인 김소연의 사전.

한 글자로 응축된 말들.

시인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여백이 주는 안정감이 좋은 책이다.

덜 : 가장 좋은 상태. - 98

명 : 기계는 너무나도 쉽게 단종되고 인간은 너무나도 오래 산다. - 145

시 : 1. 이미 아름다웠던 것은 더 이상 아름다움이 될 수 없고, 아름다움이 될 수 없는 것이 기어이 아름다움이 되게 하는 일.
2. 성긴 말로 건져지지 않는 진실과 말로 하면 바스라져버릴 비밀들을 문장으로 건사하는 일.
3. 언어를 배반하는 언어가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
- 242

재 : 얼마나 덩치가 크든 얼마나 무겁든 얼마나 대단하든 얼마나 소중하든, 그 무엇이든 다 타고 나면 한 줌. - 302


2018.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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