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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ㅣ 쏜살 문고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평점 :
작가의 젊은 시절, 불법이던 임신 중단 시술에 대한 기록.
왜 이런 기록을 남겨야 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지금의 프랑스는 더 이상 임신중단이 불법도 아니고, 사회규범이 비교적 관대한 편이니까.
그럼에도 그 당시의 자신의 좌절감과 불안을 전하고 싶었을까? 너희가 생명은 소중하다는 공허한 주장을 할 때, 여성인 나는 전 생애와 그에 수반된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흔들린다고, 내 몸에 대한 결정권을 박탈당해 위험하고 보장없는 불법 의료행위에 몸을 맡겨야 하는 절망은 그 어느 누구도 더는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고.
인간적으로 모멸감, 당혹감, 낭패감에 휩싸인 채로도 시간과 돈과 그 일을 수행해줄 인력을 찾아 정신없이 뛰어야 한다는 사실은 읽는 내내 압박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보다도 후반부는 끔찍하다. 건조하게 서술했지만 모든 격정, 감정의 파도가 드러난다.
강력 추천!
- 피임법에 따르면 위험한 시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내 배속에 ‘그것이 생길 수 있다.‘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과 쾌락을 누리며, 내 육체가 남자들의 육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 16
- 계속 이어 갈 수 있으리라는 아무런 확신도 없이, 일주일 전에 이 글을 시작했다. 그저 그 사건에 대해 쓰고 싶다는 욕망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 년전부터 집필 중인 책을 쓸 때마다 그 욕망이 지속적으로 스며들었다. 그런 생각을 떨칠 수도 없으면서 저항했다. 그 생각에 빠져들면 끔찍했다. 한편으로는 이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면, 바로 그 일이었을 거다. 어느 밤, 나는 임신 중절 경험에 대해 쓴 책을 두 손에 들고 있지만, 서점 어디에서도 그 책을 찾을 수 없고, 도서 목록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꿈을 꾸었다. 책 표지 아래에 큰 글씨로 ‘절판‘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꿈이 책을 써야만 한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그런 경험을 글로 쓰는 일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의미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 18
- 내가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이 사건을 당시의 실재 속에서 과감하게 맞설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임신 중절이 이제는 금지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 20
- 막연하게 내가 태어난 사회 계층과 내게 일어난 일을 연관이어 생각했다. 노동자와 소상공인 가정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첫 번째 수혜자였기에 나는 공장이나 상점 계산대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칼로레아 합격도, 프랑스 문학 학사 학위도, 알코올 중독과 같은 취급을 받는 임신한 여자아이가 상징하는 가난이 물려주는 운명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섹스 때문에 나는 다시 따라잡혔고, 그 때 내 안에서 자라나던 무언가는 어떻게 보면 사회적 실패라는 낙인이었다. - 22
- 의사들은 감치 진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여자들을 죽게 방치하는 법을 위반하느니 차라리 당신들이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솔직하게 나서지 않는 한, 임신할 정도로 멍청한 젋은 여자의 아름다운 눈 때문에 자기가 이룬 모든 걸 잃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하나같이 여자들의 임신 중절을 막더라도, 그녀들이 알아서 방법을 찾아낼 거라 생각했으리라. 부서질지도 모르는 자기들 이력에 비하면, 여자들이 질 속에 뜨개질 바늘을 넣는 건 아무일도 아니었다. - 31
- 이제 ‘이념의 천국‘에는 다가갈 수 없어 보였고, 그 아래로 구토하며 진창에 빠진 내 육신을 질질 끌고 다녔다. 어떤 때는 내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다시 그런 것들을 고민해 볼 수 있길 바랐고, 또 어떤 때는 지식이란 습득해 봐야 결국엔 무너져 내릴 뿐인 허울같은 구조물처럼 보였다. 어쨌든 논문을 쓰지 못하는 상황은 중절을 해야만 하는 필연성보다 더 끔찍했다. 논문을 쓸 수 없음은, 보이지 않는 내 타락의 명백한 징표였다.(수첩에 이렇게 적혀 있다. ‘아무것도 쓸 수 없다. 공부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제 ‘지식인‘이 아니었다. -33
-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분노나 혐오감을 자극할 수도 있을테고, 불쾌감을 불러일으켜 비난을 살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이든 간에,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그 일을 쓸 수 있다는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한다.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진술을 끝까지 밀어 붙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데 기여하는 셈이며, 이 세상에서 남성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 38
- 어쨌든 그는 내가 패혈증으로 죽는 일만은 막고 싶어했다. 우리 중 누구도 임신 중절이라는 말을 단 한번도 입에 담지 않았다. 그것은 언어 속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 39
- 뭔가에 쫓기는 듯하던 그녀의 태도를 떠올리며, 어쩌면 그녀도 마찬가지로 두려웠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나의 임신 중절 의지를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듯이, 어쩌면 그녀도 자신의 일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돈 문제도 있겠지만, 어쩌면 여성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감정이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하루 온종일 환자나 신모의 변기를 비워댔을 그녀는 파사주 카르디네에 있는 방 두칸 짜리 집에서, 고작 인삿말이나 건넸을 의사들과 똑같은 힘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생각하며 비밀스러운 만족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까 위험부담을 고려하여, 결코 인정받지 못할 기술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그녀가 받게 될지도 모를 수치심까지 따져 비싼 값을 받아야 했으리라. - 52
- 또 다른 오후, 마른 대로 근처에 위치한 생파트리스 성당에 들어가서 신부에게 임신 중절을 했다고 고해했다. 이내 내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나는 광명을 찾았다고 느꼈는데, 그에게 나는 범죄자일 뿐이었다. 성당을 나오며 나는 종교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았다. - 76
2019. D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