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연대기
박인주 지음 / 타이피스트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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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하고 거친 그림, 이야기.

그림이 취향이랄 순 없지만 이야기와 딱 붙는 그런 느낌이다.

가정과 사회에 희생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날개라는 상징을 더해 풀어냈다.
조금 철 지난 이야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아직은 이어져 오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여자에게 좋은 시절...이라는 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위치를 바꾸어가며 아주 조금씩 개선되거나 달라지는 것뿐.

- 왜 같은 인간인데, 여성에게만 날개가 달렸는지요? - 6

- 우리의 날개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가 문제인데......
나는 낭만이 입혀지는 대상이 될 수 있음과 동시에 그 대상을 벗고 수많은 이상으로 가닿을 수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해.
기능 없는 기관에는 어떤 가능성이라도 부여할 수 있다는 말이구나. - 131

- 그곳에서 둘은 치열하게 공부했고
같은 출발선에 서서 시공을 겹쳐 가며 서로를
세계를 이해하는 법을 공유해 나갔다.
열악한 환경에서 내리는 선택지가 얼마나 덧없을 수 있는지와
그렇기에 서로를 지지할 수 있다는 기적도 이해할 할 수 있었다. - 134

2025. oct.

#날개연대기 #박인주 #타이피스트 #그래픽노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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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깃든 산 이야기 이판사판
아사다 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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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케 산꼭대기의 유서 깊은 신사, 그곳에서 들려주는 갖가지 기담이다.
고풍스러우면서 잔잔하고 다정한 시선이 느껴진다.

잠들기 전 친척 이모의 옛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촌 아이들의 모습이 정감있게 다가오지만,
과연 그 이야기의 소재들이 애들 잠들게 하는데 적합한가는 좀 의문 ㅋㅋㅋ

2차대전 후의 풍경이라 어쩔 수 없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 가끔 모호한 불쾌의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감상의 와중에 후반의 <산이 흔들리다>는 이 책을 위해 집필한 에피소드로 그런 께름칙했던 제국주의에 대한 느낌, 그런 위화감을 주는 대화나 묘사 같은 장치들이 의도적이었음을 드러내는데,
꾸준히 타국의 침략에 대한 일본 비판을 견지해온 작가라고 하니(철도원 말고는 읽은 작품이 없음) 그렇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자면 109페이지의 외숙의 훈계 '사죄하지 마라. 너는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고개를 숙여서는 안 돼.'라는 대사가 피침략국의 국민인 나로서는.. 당장 현실에서 사죄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이 연상되면서 과민반응을 이끌어낸달까. 물론 맥락상 국가적인 의미를 부여한 대사가 아니지만... 그야말로 과민반응일 것... ㅋ

역사적 사건들 위에 얹어진 세속과는 서너 걸음 먼 신사에서의 기담이다.

-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삶은 불행하지만, 없어야 할 것을 가지고 있는 삶은 더욱 불행하다. - 90

- "그렇다면 이타루 씨, 어째서 그런 흑색선전이 퍼지는 거요?"
신관 하나가 물었다.
"천재지변은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겠죠. 신령님 탓이라고 한다면 신사가 불타더라도 어쩔 수 없겠지요."
이 한 마디는 역시 흘려들을 수 없었다. 신관들이 흥분하여 저마다 이타루를 비난했다.
(...)
"조선인 탓으로 돌리느니 차라리 신령님 탓으로 돌리는 게 낫습니다. 아닙니까!"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사람들은 이타루가 내놓은 주장의 정당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 367

- 생사관을 바탕에 둔 불교에는 시제가 있지만 애초에 생명이란 개념과 인연이 없는 신도에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곳에서 체감한 '신들의 편만', 즉 어느 한 곳 예외 없이 신이 깃들어 있다는 공기는 결국 그런 것이었다. - 394

2025. oct.

#신이깃든산이야기 #아사다지로 #이판사판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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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미래 - 편혜영 짧은소설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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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 같은 건 전혀 없는 그것이 어른의 미래라고 말하는 것 같아 씁쓸하게 웃게 된다.
그런 점이 무척 편혜영 답다.

짧은 소설 모음집인 건 알고 샀지만 정말 짧다.
금방 후루룩 읽어버릴 수 있을 정도.

건조하게 삶의 불운들이 펼쳐지니 공기마저 바삭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신발이 마를 동안> <아는 사람>이 특히 좋았다.

- 세상의 어떤 일은 속수무책으로 닥쳐온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 10, 냉장고

- "아까는 친구 따라 수학 학원을 옮겨도 되느냐고 물었어."
아내의 말에 기명 역시 짧은 안정감을 느꼈다. 자신의 기쁨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의 친구 때문이라는 사실이 조금 어색했지만, 기명은 모처럼 찾아온 평온함을 불확실한 두려움으로 바꾸고 싶지 않아서 더는 남자 얘기를 하지 않았다. - 34, 어른의 호의

- 그런 개들만큼이나 인생이 안 풀리는 사람이 있었다. 말하자면 황인수 같은 사람. 실패가 삶을 나아가게 할 때도 있지만 대개의 실패는 삶을 바닥에 처박았다. 황인수가 겪은 일들이 죄다 그런 식이었다. 그러다보니 들개처럼 침을 흘리고 눈을 치켜뜰 일이 많이 생겼다.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처박힌 삶이라 할지라도 삽질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진짜 삽질 말이다. - 114, 비닐하우스

- 며칠 뒤 유미에게서 연락이 왔다. 퇴근하고 시간이 있느냐고 묻는 메시지였다. 승주는 자신이 동창이 아니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곧이어 유미에게서 이미 알고 있다는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유미는 또다른 말도 했다. 동창이 되기는 늦었지만 동창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말.
승주는 그 메시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누구에게나 차라리 거의 모르는 사람과 어울리는 게 낫다고 여겨지는 시기가 있는 법이었다. 지난 일들이 긍지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그럴 터였다. 그런 점에서 자신 역시 유미가 동창이 아니어서 좋았다. 어쩐지 유미를 알 것 같다는 착각 속에서, 승주는 천천히 답장을 보냈다. - 183, 아는 사람

- 잠을 설친 그녀는 날이 밝자마자 옥상으로 부리나케 올라갔다. 그녀는 화분 앞에 앉아서 어제와 조금씩 달라진 식물들에게 일일이 눈길을 주었다. 전날보다 잎이 살짝 누레졌거나 조금 자랐거나 꽃송이가 벌어진 식물이 위로가 되던 때가 있었다. 사소하지만 꾸준한 변화는 그녀에게 시간이 평화롭게 흐른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자랄 것은 자라고 시들 것은 서서히 시들어갔다. 이제 그녀는 자라고 시들고 열매 맺고 죽는 것이 모두 제각각임을, 무질서가 삶의 유일한 질서임을 알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운이 나빠서 궂은일을 겪는 게 아니라는 생각. 사람은 그저 운이 좋은 경우에나 겨우 궂은일을 피할 수 있었다. - 216, 모든 고요


2025. oct.

#어른의미래 #편혜영 #짧은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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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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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대서사시인데....
기대에 못 미치는 이야기다.

계급 차이가 명백한 매력적이고 똑똑한 여자아이와 불구의 신체를 가졌으나 위대한 조각가가 될 남자아이와의 평생에 걸친 동화랄 수 있겠다.

몇 번째 말하게 되는지 모르겠으나 공쿠르상 수상작은 결이 안 맞는다.
늘어지는 세부 묘사가 이유일까...라고 짐작해 보지만 딱히 그것뿐만은 아닌 것 같다.
격변의 세계를 묘사하는데 어울리지 않게 느린 템포의 문장이 걸림돌일까?

일단 아름다운 서사이긴 한데 특이할 만한 신선함이 전혀 없는 클리셰의 향연...
길고 상세하게 서술한 것이 좋은 작품의 조건이 될까?

어쩌면 프랑스어로 읽는다면 좋은 점이 더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정도의 두꺼운 이야기를 끝까지 읽는 데는 크게 무리 없는 쉬운 독서였다.

-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이상하다. 나는 불행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혼자였고,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다. - 42

- 그 지역에 버글대는 명문가들은 지저분한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진 그곳을 매력적이라고 여겨 예로부터 거기를 영원한 휴식의 장소로 선택해 왔다. 보잘것없는 묘지들과 나란히 늘어선 호화로운 능들은 자신의 거주자들이 누리는 막강한 권력을 찬양했지만, 어쨌든 그 거주자들 역시 살아생전 가졌던 가장 소중한 것을 상실한 뒤였다. 그 누구도 그러한 모순에 개의치 않았다. 죽은 자들은 기만적이다. - 70

- 그 애는 마치 내가 미친 사람이라도 된다는 듯이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내가 죽은 사람 같아?
지금은 아니지만요.
어쨌든 말도 안 되는 소리. 왜 죽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어...... 죽은 사람들이니까?
전쟁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길가에 매복하는 사람들이? 너를 강간하고 네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은 우리 친구들이야. 산 사살들을 두려워하는 게 더 나을걸.
나는 입을 헤벌리고 그 아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었다. - 92

- 비올라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렇게, 관습과 계급의 장벽이 파놓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을 한걸음에 건너뛰면서. 비올라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 누구도 말한 적 없는 위업이자 말 없는 혁명. 비올라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바로 그 찰나에 나는 조각가가 되었다. - 103

- 공부는 해야 하고 너의 부모님은 원치 않는다면, 어떻게 날겠다는 거야?
내 부모는 늙었다고.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들은 다른 세상 사람들이지. 그들은 앞으로 우리는 말을 타듯이 날게 되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여자들은 수염을 달고 남자들은 보석으로 치장하리라는걸. 내 부모의 세계는 죽었어. 넌 좀비를 무서워하지만 네가 무서워해야 할 건 바로 그 세계라고, 그 세계는 죽었는데도 여전히 움직이거든. 누구도 그것을 보고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바로 그런 까닭에 그건 위험한 세계야. 그 세계는 저절로 무녀져. - 145

- 드디어 나는 탐나는 존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내게 침을 뱉으며 무시했고, 나는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 평생 간청해야만 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꼭 소유해야만 하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말을 하나 배웠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이 세 음절의 말이 갖는 권력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내가 거절할수록, 심지어 차갑게 거절할수록, 사람들은 나를 오르시니 가문의 조각가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나의, 즉 오르시니 가문의 조각가가 만드는 작품을 더더욱 원했다. - 336

- 비올라는 이 기념물 혹은 저 기념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에 얽힌 역사를 설명했고, 나는 곧 내가 관광객이 가이드를 따라가듯 비올라를 따라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장서의 힘을 과소평가했지만 사실 장서 덕분에 무지몽매에서 빠져나왔고 심지어 약간의 위안을 누렸었다. 나는 배은망덕했다. 죽도록 취해서는 진정한 삶은 여기, 나를 중심으로 미친 듯이 돌아가는 이 영원의 도시에 있다고 되뇌면서 얼마나 많은 밤 시간을 파티로 흘려보냈던가? 자신의 거처에서 멀리까지 나온 비올라가 새로운 교훈을 내게 줬다. - 진정한 삶은 책 속에 있었다. - 441

2025. aug.

#그녀를지키다 #장바티스트앙드레아 #공쿠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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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창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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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의 신작이라니 지체할 일인가. 바로 읽었다.

최근작들이 판타지나 신화적 요소들이 있었는데, 이런 결은 조금 취향의 범위를 벗어났다.
앞으로 나올 작품들은 이제 이런 길로 가나? 싶은 마음에 조금 서운해하면서
이번 작품은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읽었는데!

돌아왔다. 취향의 그 구병모.

파과의 무드랄까.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보이는 아가씨의 존재에 집중해서 따라가다가 확장되는 이야기에 더더욱 빨려 들어갔다.
외로운 인간 사이의 불가해한 동행이라고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상처에 접촉해 타인을 읽어내는 능력이란 게 생각해 보면 이런 범죄의 분야에서나 유용할 법한 능력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면서...

그렇게 공허해지는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이 독서, 책을 읽는 일이 된다는 것이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라고 여겨졌다.

오랫만에 책에 푹 빠져든 독서였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 칼로 당신에게 구애하고
상처 입혀서 사랑을 얻어냈지 -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

- 비단보로 감싼 은수저도 시나브로 닿은 공기에 검게 변해버리듯이, 사태는 굳이 그것을 훼손할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펜을 들어 글을 쓰는 순간부터 재구성이라는 명분으로 변질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와 심장이 그리 안전하지도 무결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온 우주에서 제일 불안정한 공간임을 상기하면, 뭐라도 말하거나 쓰는 편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거나 쓰지 않기보다는 한 발자국만큼이나마 낫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로도 하고 글로도 써내려가겠지만 가능한 한 저의 해석과 감정이 그 일들을 덜 변색시키기를 바라는 마음에 몇 겹의 문장으로 감싸게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진실은 은닉과 착란 속에서 뒹굴 때 비로소 한 점의 희미한 빛을 얻기도 합니다. - 9

- 말하기와 듣기, 쓰기와 읽기란 비록 그것으로 인해 변하는 실재가 없음은 물론 그것이 거쳐가는 길이 모순의 흙과 불화의 초목으로 닦이고 마침내 도달하는 자리에 결핍과 공허만 남아 영원한 교착상태를 이룬다 한들, 그 행위가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의 영혼이 완전히 부서져버리지 않도록 거드는 법입니다. 언어의 본질과 역할을 두고 명멸하는 무수한 스펙트럼 가운데 그것만큼 괜찮은 구실이 또 있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 41

- 바람직하지 않음이든 재미없음이든 간에 이렇게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것, 상대방을 읽고 해석한다는 것은 동음이의어나 관용구, 나아가 표정이나 억양으로도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 있고, 거듭된 곡해 속에 난파된 말들의 바다 한 가운데서도 뗏목의 파편 하나를 발견하여 올라타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사람 사이, 즉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 63

- 천만에, 오히려 반갑지. 그보다 안 하긴 뭘 아무것도 안해, 책을 읽잖아. 지적인 무리는 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난 지성에 대해서는 허영이란 말 붙이는 거 찬성하지 않아. 그건 뭔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을 위축시켜. - 164

- 솔직히 고용된 입장에서는 돈 준다는데 뭘 따질 이유가 없기도 하거니와, 그보다 인간에게는 과잉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무언가를 초과하고자 하는 마음, 잉여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다르게 만듭니다. 하물며 배움의 과잉은, 무엇을 배우는지가 때로는 관건이겠습니다만 인간에게 시간이 남아 있는 한 아무리 넘쳐도 해로운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학을 위해, 승진을 위해, 그 어떤 실용적인 목적만을 위해서라면 배움은 얼마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되겠습니까. 보스가 애호하는 듯싶은 셰익스피어를 빌려오자면 <리어왕>의 2막 4장에는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필요에 대해서는 이유를 따지지 말라. 아무리 비천한 거지라고 해도 하찮은 물건일지언정 필요 이상을 가지게 마련이며, 자연이 인간에게 필요 이상의 것을 허용치 않는다면 인간의 삶은 짐승의 그것보다도 가치가 없어진다. - 166

- 책을 읽었다 하여 훌륭한 인간이 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때로는 뱀의 몸통을 손으로 붙잡는 식으로 책을 이상하게 읽고서 오히려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인간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보통은 책을 읽고 난 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일어나기 쉬운 일입니다. 무용하면 무용한 대로 다만 이어가는 것, 그것이 읽기 아닐까요. - 205

- 한편 이야기를 익고 나면 그 뒤에 존재하지 않는 속편을 나름대로 생각해보게 되는 재미가 잠깐은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건 그만두었어.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속편을 없애버리는 데 가담한 사람이니까. 내 이야기 또한 속편이 없어야 마땅하니까. - 274

- "신이라는 건 있잖아, 그냥 하나의 오래된 질문이라고 생각해."
경전을 읽고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신을 응답의 존재로 간주하며 신이 대답을, 특히 그중에서도 축복에 가까운 무언가를 내려주지 않으면 멋대로 증오하거나 부정하기 일쑤인데 질문이라니, 그건 좀 사고의 전환같았어. - 285

- 한 권의 책을 펼칠 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세상의 코어를 이루는 것이 반드시 희망 내지 사랑만은 아니며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인간들과 혹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나 자신과 필연적으로 상종하거나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자 태초부터 운명지어진 비극이라는 사실이지. 그리고 그 비극을 견디는 게 인생의 거의 전부야. 그렇다면 인생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인생의 목표라는 게 다 무슨 소용인지 되물을 필요는 없다. 자연은 우리에게 목표를 부여하지 않았고, 우주는 우리의 의미 따위 알지도 못할 뿐더러, 신은 우리에게 별 관심 없으니까. 동양사상으로 예를 들자면, 노자의 <도덕경> 가운데 한 줄을 불러줄 테니 이건 받아 적으렴. 일단은 수업시간인데 한 줄이라도 남겨야지.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하늘과 땅 같은 자연은 그냥 존재할 뿐이지 딱히 어진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인간 따위 만물의 입장에서는 짚으로 엮은 개만도 못하다는 뜻이야. 그러니 너의 눈앞에 있는 한 권의 소설은 그 무의미의 운명에 어떻게든 의미 비슷한 걸 부여해보고 죽으려던 예술가들의 오랜 싸움과 필연적인 패배의 흔적이야. - 302

- 상처 없는 관계라는 게 일찍이 존재나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며, 이제 나는 상처를 원경으로 삼지 않은 사랑이라는 걸 더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 상처는 필연이고 용서는 선택이지만, 어쩌면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 인해, 상처를 만짐으로 인해, 상처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 344

2025. oct.

#절창 #구병모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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