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낙엽
토머스 H. 쿡 지음, 장은재 옮김 / 고려원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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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가려진 채로 가족 구성원의 내면에 불안과 의심이 자라나는 과정이 숨이 막혀왔다.
특히나 엄마의 반응이 좀.... 과하다는 감상.

'에이미 사건'으로 촉발된, 모든 것에 대한 의심.
첫 가족과 지금의 가족 모두 모래성 위 집 같은 위태로움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범죄물인가 싶었는데 심리물. 서스펜스가 확실히 있다.

가족 안의 온갖 부정적 감정과 상황이 과연 어디서 촉발된 것인지,
진실을 외면하며 살아오다 안온하고 충만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자까지 붙여 닥쳐오는 불행의 이야기.



- 또 한 해가 간다. 키이스는 거의 너만큼이나 키가 컸고, 메러디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활짝 피어 있다. 따스한 만족감이 너를 감싸며 내려앉고 너는 깨닫는다. 너를 성취감으로 뿌듯하게 채워주는 것은 집이나 사업이 아니다. 네 삶에 깊이를 주고 중심을 잡게 해준 것은 가족이다. 가족으로부터, 조용히 뿌리를 내린 느낌과 안온한 행복을 결코 얻은 적이 없었음을 그 여름의 막바지에 깨달았던 네 아버지와 달리, 너는 너의 가족을 통해 일생 최고의 승리를 거두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 12

- 이제 나는 안다. 우리가 그토록 조심스럽게 구축해놓은 삶 아래에 아주 깊은 틈이 입을 벌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총성을 듣고, 체념의 중얼거림을 듣는다. 그리고 그런 소리들 속에 내가 몰랐던 모든 것이 밝고 분명하게 번쩍거리고 있다. - 45

- "일이 망가지는 시점은," 메리디스의 말투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죽은 사람을 애통해 하는 사람처럼 분노와 슬픔이 어우러져 알아듣기 어려웠다.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할 때예요." - 72

- 당시에 나는 그 희망은 정당화될 수 없는 환상이고, 그리 오래 버틸 수 있는 문제도 아니라는 점을 알았어야 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인생의 절반이 부정이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에서조차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본 체하기로 결정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 74

2025. aug.

#붉은낙엽 #토머스H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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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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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층위로 이야기가 나누어 진행된다. 정말로 물리적인 세 층위.. ㅎㅎ

그렇다고 읽는데 까다롭지도 않고, 어떻게 무엇부터 읽어나가도 크게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

하나의 상황이 시선의 차로 흐르기 때문.

그러나 개인적으론 원고 부분이 가장 흥미롭고, 두 사람의 이야기는 조금 질린다?는 느낌이 있다.

누가 승자랄 것도 없을, 늙은 남자, 중년 남자, 젊의 여자의 심리를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

인종적, 사회적, 계층적, 젠더적 측면에서의 갈등 서사가, 작가의 인문학적인 시선으로 세탁? 되어 흥미롭게 이어지는 이야기.

- 민주주의는 민주적인 시스템 밖에서의 정치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전체주의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민주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시대에 당신이 민주주의에 대해 문제를 삼으면, 당신은 현실과의 접촉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 접촉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국가 공무원의 입장에서 국가(민주국가든 혹은 여타의 다른 것이든)와 상대하는 것이 어떤 것일지 스스로에게 환기시켜야 한다. 그런 다음에 스스로에게 물어라. 누가 누구를 섬기는가? 누가 하인이고, 누가 주인인가? - 23

-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인문과학을 전공한 별로 똑똑하지 못한 졸업생들은 자기들이 배운 문학 이론과, 강의실 밖에서 쓸모가 있을 듯싶은 분석 도구, 그리고 아무것도 겉으로 보이는 것과 같지 않다고 주장하는 능력이 어떤 자리를 잡게 해 줄지 모른다는 직감을 갖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 도구들을 그들의 손에 쥐어 준 것은 우리 시대의 지적 변절(trahison des clercs)이다. "당신은 나한테 말을 가르쳤다. 내가 거기에서 배운 건 욕을 하는 방법이다." - 44

- 정치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그것은 공기와 같고 공해와 같다. 공해와 싸울 수는 없다. 무시하든 익숙해지든 적응하는 게 최고다. - 46

- 며칠 전, 나는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5번 연주를 들으러 갔다. 음악이 마지막 마디에 가까워지면서, 나는 악보가 이끌어 내고자 했던 것처럼 정확히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걸 경험했다. 나는 거의 한 세기 전에 헬싱키에서 그 교향곡이 처음 연주되었을 때, 청중 속의 핀란드인이 그걸 듣고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궁금했다. 자랑스러워했을 것 같았다. 우리 중 하나가 그렇게 음들을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을 것 같았다. 그 느낌을 우리가, 우리 인간들이 관타나모를 만들었다는 치욕과 대조해보라. 음악적 창조가 한편에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과 모욕을 가하는 기계가 다른 편에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과 최악의 것. - 56

- 내가 왜 이 이야기를 당신한테 하는 걸까요?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에요. 경찰서장은 아주 동정적이고 좋은 사람이었죠. 그런데 그가 우리한테 이러더라고요. '당신들, 정말로 이렇게 하고 싶은가요?(그 말은 이런 이야기가 밖으로 나가는 걸 원하느냐는 의미였죠.) 치욕, 인파미아(infamia)라는 것은 풍선껌 같아서 어느 곳이나 닿기만 하면 들러붙죠.'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이렇게 말했어요. '경찰서장님, 지금은 20세기예요. (당시는 아직 20세기였어요.) 20세기에 남자가 여자를 강간하면 그것은 남자의 치욕이에요. - 116

- 고등 동물만이 지루해할 수 있다. 니체의 말이다. 내 생각에 이런 발언은 고등 동물 중 하나인 인간에 대한 찬사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삐딱한 찬사다. 즉, 이런 말이다. 인간의 마음은 들떠 있다. 그것은 뭔가 할 일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달하고 불안해하며 결국 사악하고 분별없는 파괴로까지 치달을 것이다. - 237

2025. jul.

#어느운나쁜해의일기 #JM쿳시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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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연대기
박인주 지음 / 타이피스트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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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하고 거친 그림, 이야기.

그림이 취향이랄 순 없지만 이야기와 딱 붙는 그런 느낌이다.

가정과 사회에 희생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날개라는 상징을 더해 풀어냈다.
조금 철 지난 이야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아직은 이어져 오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여자에게 좋은 시절...이라는 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위치를 바꾸어가며 아주 조금씩 개선되거나 달라지는 것뿐.

- 왜 같은 인간인데, 여성에게만 날개가 달렸는지요? - 6

- 우리의 날개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가 문제인데......
나는 낭만이 입혀지는 대상이 될 수 있음과 동시에 그 대상을 벗고 수많은 이상으로 가닿을 수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해.
기능 없는 기관에는 어떤 가능성이라도 부여할 수 있다는 말이구나. - 131

- 그곳에서 둘은 치열하게 공부했고
같은 출발선에 서서 시공을 겹쳐 가며 서로를
세계를 이해하는 법을 공유해 나갔다.
열악한 환경에서 내리는 선택지가 얼마나 덧없을 수 있는지와
그렇기에 서로를 지지할 수 있다는 기적도 이해할 할 수 있었다. - 134

2025. oct.

#날개연대기 #박인주 #타이피스트 #그래픽노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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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깃든 산 이야기 이판사판
아사다 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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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케 산꼭대기의 유서 깊은 신사, 그곳에서 들려주는 갖가지 기담이다.
고풍스러우면서 잔잔하고 다정한 시선이 느껴진다.

잠들기 전 친척 이모의 옛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촌 아이들의 모습이 정감있게 다가오지만,
과연 그 이야기의 소재들이 애들 잠들게 하는데 적합한가는 좀 의문 ㅋㅋㅋ

2차대전 후의 풍경이라 어쩔 수 없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 가끔 모호한 불쾌의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감상의 와중에 후반의 <산이 흔들리다>는 이 책을 위해 집필한 에피소드로 그런 께름칙했던 제국주의에 대한 느낌, 그런 위화감을 주는 대화나 묘사 같은 장치들이 의도적이었음을 드러내는데,
꾸준히 타국의 침략에 대한 일본 비판을 견지해온 작가라고 하니(철도원 말고는 읽은 작품이 없음) 그렇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자면 109페이지의 외숙의 훈계 '사죄하지 마라. 너는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고개를 숙여서는 안 돼.'라는 대사가 피침략국의 국민인 나로서는.. 당장 현실에서 사죄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이 연상되면서 과민반응을 이끌어낸달까. 물론 맥락상 국가적인 의미를 부여한 대사가 아니지만... 그야말로 과민반응일 것... ㅋ

역사적 사건들 위에 얹어진 세속과는 서너 걸음 먼 신사에서의 기담이다.

-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삶은 불행하지만, 없어야 할 것을 가지고 있는 삶은 더욱 불행하다. - 90

- "그렇다면 이타루 씨, 어째서 그런 흑색선전이 퍼지는 거요?"
신관 하나가 물었다.
"천재지변은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겠죠. 신령님 탓이라고 한다면 신사가 불타더라도 어쩔 수 없겠지요."
이 한 마디는 역시 흘려들을 수 없었다. 신관들이 흥분하여 저마다 이타루를 비난했다.
(...)
"조선인 탓으로 돌리느니 차라리 신령님 탓으로 돌리는 게 낫습니다. 아닙니까!"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사람들은 이타루가 내놓은 주장의 정당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 367

- 생사관을 바탕에 둔 불교에는 시제가 있지만 애초에 생명이란 개념과 인연이 없는 신도에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곳에서 체감한 '신들의 편만', 즉 어느 한 곳 예외 없이 신이 깃들어 있다는 공기는 결국 그런 것이었다. - 394

2025. oct.

#신이깃든산이야기 #아사다지로 #이판사판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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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미래 - 편혜영 짧은소설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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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 같은 건 전혀 없는 그것이 어른의 미래라고 말하는 것 같아 씁쓸하게 웃게 된다.
그런 점이 무척 편혜영 답다.

짧은 소설 모음집인 건 알고 샀지만 정말 짧다.
금방 후루룩 읽어버릴 수 있을 정도.

건조하게 삶의 불운들이 펼쳐지니 공기마저 바삭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신발이 마를 동안> <아는 사람>이 특히 좋았다.

- 세상의 어떤 일은 속수무책으로 닥쳐온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 10, 냉장고

- "아까는 친구 따라 수학 학원을 옮겨도 되느냐고 물었어."
아내의 말에 기명 역시 짧은 안정감을 느꼈다. 자신의 기쁨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의 친구 때문이라는 사실이 조금 어색했지만, 기명은 모처럼 찾아온 평온함을 불확실한 두려움으로 바꾸고 싶지 않아서 더는 남자 얘기를 하지 않았다. - 34, 어른의 호의

- 그런 개들만큼이나 인생이 안 풀리는 사람이 있었다. 말하자면 황인수 같은 사람. 실패가 삶을 나아가게 할 때도 있지만 대개의 실패는 삶을 바닥에 처박았다. 황인수가 겪은 일들이 죄다 그런 식이었다. 그러다보니 들개처럼 침을 흘리고 눈을 치켜뜰 일이 많이 생겼다.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처박힌 삶이라 할지라도 삽질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진짜 삽질 말이다. - 114, 비닐하우스

- 며칠 뒤 유미에게서 연락이 왔다. 퇴근하고 시간이 있느냐고 묻는 메시지였다. 승주는 자신이 동창이 아니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곧이어 유미에게서 이미 알고 있다는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유미는 또다른 말도 했다. 동창이 되기는 늦었지만 동창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말.
승주는 그 메시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누구에게나 차라리 거의 모르는 사람과 어울리는 게 낫다고 여겨지는 시기가 있는 법이었다. 지난 일들이 긍지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그럴 터였다. 그런 점에서 자신 역시 유미가 동창이 아니어서 좋았다. 어쩐지 유미를 알 것 같다는 착각 속에서, 승주는 천천히 답장을 보냈다. - 183, 아는 사람

- 잠을 설친 그녀는 날이 밝자마자 옥상으로 부리나케 올라갔다. 그녀는 화분 앞에 앉아서 어제와 조금씩 달라진 식물들에게 일일이 눈길을 주었다. 전날보다 잎이 살짝 누레졌거나 조금 자랐거나 꽃송이가 벌어진 식물이 위로가 되던 때가 있었다. 사소하지만 꾸준한 변화는 그녀에게 시간이 평화롭게 흐른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자랄 것은 자라고 시들 것은 서서히 시들어갔다. 이제 그녀는 자라고 시들고 열매 맺고 죽는 것이 모두 제각각임을, 무질서가 삶의 유일한 질서임을 알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운이 나빠서 궂은일을 겪는 게 아니라는 생각. 사람은 그저 운이 좋은 경우에나 겨우 궂은일을 피할 수 있었다. - 216, 모든 고요


2025. oct.

#어른의미래 #편혜영 #짧은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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