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
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 오월의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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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미루다가 안희정 판결에 뒷목을 잡으며 읽었다.

읽으려고 사둔지는 꽤 된것 같은데, 아마도 페미니즘 관련 책을 연달아 읽으면 오는 피로감과 이전 책에서 읽었던 저자에 대한 가쉽? 등등 때문에 미뤘던듯 싶다.

그러나 뒷목을 잡는 시점에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다.
뒷목뿐아니라 이마도 짚게 되니....

문장은 평이하고, 대체적으로 증언과 사례들로 이루어진 글이라서 가독성은 나쁘지 않다.
다만 그 가독성에 기여하는 부분인 문장의 마무리가 ‘강간하였다’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스트레스 요인이 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강간의 연대기는 차라리 알고 싶지 않은 테마이기도 하지만, 다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자료로서 읽어둘 가치가 있다.

이 책은 1975년 출간된 책으로 더 복잡하고 다양한 층위와 의미를 갖게 된 현대의 성범죄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아쉬운 면이 있다.

성경 속 강간, 신화 속 강간, 결혼이라는 허울 속에서 이루어지는 강간, 전쟁 통에 정복 심리에 기반한 강간, 미국 역사 안의 인디언, 노예 강간, 공권력의 통제하에 이루어지는 강간, 강간의 신화, 여러 사례 등을 다룬다.

70년대의 성과물로는 찬사를 받을 만한 기록물이나, 반백년의 시간차도 그렇거니와 백인 여성의 입장에서 다루어진 강간에 대한 견해는 한계가 분명하다.

그럼에도 아래 인용한 문장들은 바로 지금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과 부조리함을 그대로 반영한다. 관심이 있다면 길지만 인용까지 다 읽어보기를 권한다.

여성은 자기 신체의 온전성physical integrity을 침해하는 범죄를 당해도 드러내 말하지 못했는데, 말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을뿐더러 상당한 수치심을 떠안아야만 했다. 여성들에게 강간이란 두려워 말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너무나 어이없게도 여성의 신체적 자기결정권과 관련된 모든 것이 여성으로서는 말할 수 없는 주제였다. - 13, 서문

여성의 입장에서 강간을 정의하면 한 문장으로 가능하다. 한 여성이 어떤 남자와 성관계를 하지 않기로 선택했는데 남자가 그녀의 의사에 반해 행위를 계속하면 그것이 바로 강간이라는 범죄 행위이다. 여성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 문제인데도, 여성의 관점을 반영한 이런 정의가 법에 적용된 적은 현재까지 단 한번도 없다. 초기 서약을 모여서 작성한 고대 가부장들은 남성권력을 공고히 구축할 목적으로만 강간을 이용했다. 그러니 그들이 강간을 여성에 대한 남성의 범죄로 봤을 리 만무하다. 여성은 남성 소유의 부속물이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니 남성들이 강간을 여성의 동의 여부에 달린 문제로 생각할 리 없었을 뿐 아니라, 여성이 신체 온전성을 유지할 권리에 기반을 둔 강간 정의를 용납했을 리도 없다. 그리하여 강간은 뒷문을 통해서 법에 기입되었으니, 남성이 남성에게 저지르는 재산상의 범죄가 되었다. 물론 여기서 재산이란 여성이다. - 30, 태초에 법이 있었다

남성에게 지배자가 벌인 강간이란 정복당한 처지에서 겪게 되는 성불능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줄 증거가 된다. 여성을 소유하는 것이 남성으로서 성공을 보증하는 징표였듯, 여성을 보호하는 일 역시 오랫동안 남성으로서 자부심을 보증하는 징표였다. 그런데 점령군이 벌인 강간은 패배한 쪽 남성의 힘과 소유권에 대한 환상을 모조리 파괴한다. 강간을 통해 여성의 몸은 상징적인 전쟁터가 되며, 승리자가 개선식을 벌이는 광장이 된다. 여성의 몸에 가하는 행위가 남자들끼리 주고받는 메시지가 되는데, 한쪽에게는 승리의 산 증거이고 다른 쪽에게는 패배와 상실의 산 증거인 것이다. - 62, 전쟁과 강간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여성에게 자행된 여러 가지 학대 중 가장 악랄한 행위는 군인의 쾌락을 위해 강제로 여성을 붙잡아서 제도화한 수용소 성매매 시설과 강제수용소 내에서 벌어지는 강간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저항하지 않고 강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 100, 전쟁과 강간

역사의 매 막간마다 테러 작전이나 어떤 민족을 말살하자는 목표가 남성에게 강간 면허를 부여한다. 다른 남성의 소유물을 활발히 파괴하는 행위는 집단이 상대에게 품은 증오와 경멸을 상징하는 행위가 되었으며, 이때 다른 남성의 소유물이란 가구, 가축, 그리고 여성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집단을 이룬 강간범들은 피해자가 ‘매력적’이든 아니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사실은 성적 매력이 강간 행위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근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집단 속에서 강간은 힘과 지배를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남성 집단 내에서 서로 인정받기 위해 여성을 거의 무생물 같은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 190, 폭동, 포그롬 그리고 혁명

권력층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을 여기서도 볼 수 있는데, 노예가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성행위에 가담했다 해도 그녀의 행실을 탓했다. 노예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예가 수동적인 태도로 굴복하면 노예 쪽에서 첩이 되려고 자처했다거나, 매춘을 했다거나, 성적으로 난잡한 여자여서 그랬다는 식으로 말하기 마련이었다. 북부의 노예제 폐지론자들조차 노예제에서 자행되는 강제 성 학대를 강간 범죄로 인정하는 일을 회피했고, 사회통념에 어긋나는 열정과 욕정이라는 식으로 방어적이고 감상적인 표현을 쓰는 편을 더 선호했다. 그런데 현대 역사가들까지도 이와 다를 바 없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경향을 보인다. - 251, 미국 역사에 관한 두 가지 연구: 인디언과 노예제

경찰과 배심원은 여성 피해자의 말 - 특히 흑인 여성 피해자의 말 - 을 신뢰하지 않는 쪽으로 치우치는 편향이 있다고 입증되었으며, 이런 편향 때문에 연구로 다룰 수 있게끔 기록되는 사례의 숫자가 큰 폭으로 줄어든다. 경찰에 따르면 전국에서 평균적으로 경찰이 받는 신고 중 15퍼센트는 ‘근거 없는’ 고발로 여겨져 피상적인 조사로 그친다고 하는데, 이는 경찰이 그만큼 고발인을 믿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찰이 피해자를 정말로 믿는다고 해도 그중 범죄자가 실제로 체포되는 경우는 오직 51퍼센트뿐이며, 다시 그중에서 76퍼센트만이 기소되고, 그중 47퍼센트는 무죄판결을 받거나 소송이 기각된다. (어떤 지역에서는 체포된 숫자 대비 최종 유죄판결의 비율이 충격적이게도 3퍼센트에 머물렀다) - 269, 통계로 본 강간범 : 신화에서 과학으로

경찰 사건 기록부에 게재된 강간범의 85퍼센트는 반사회적 행위 스펙트럼 전반에 걸친 각종 추가 범행을 보여주는데, 이 중 강간살인까지 가는 경우는 극소수이다. 하지만 이 극소수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성범죄를 저질렀는데도 체포당하지 않고 잘 빠져나왔거나, 최소 기간의 형만 받았거나, 치료감호가 없는 형을 받는 등의 경험을 하면서, 이런 경험이 일종의 사회적 용인이자 ‘지원’으로 작용해 점점 더 거침없이 강력한 폭력을 휘두르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304, 통계로 본 강간범 : 신화에서 과학으로

여자가 추근거리라고 있는 존재는 아니지 않은가? 휘파람이나 “너 나랑 잘래?” 같은 말이 무해한 찬사는 아니지 않은가? 남부의 인종차별에 대한 보상의 짐을 백인 남성 대신 백인 여성이 특별히 져야만 했나? 이런 의문들이 마음속에 계속 떠올랐고,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까지 15년이 걸렸다. 틸의 휘파람에 내포된 모욕을 이해하고, 그런 행위에는 인종적인 요소가 있든 없든 ‘내가 너를 가질 수 있다’는 상대를 비인격화하는 도전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다. 오늘날 거리에서 그런 성적인 말을 들으면 내 속에서 순간적이지만 살인적인 분노가 끌어 오른다. - 381, 인종문제

모든 강간은 힘을 행사하는 행위이지만, 어떤 강간범은 신체적인 힘을 넘어서는 권력의 우위를 활용한다. 이런 부류의 강간범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제도적 환경을 이용하는데 비해, 그런 환경에서 피해자는 문제를 바로잡을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한다. 이뿐 아니라 강간범들은 피해자의 저항을 약화시키고 시야를 왜곡하며 의지를 교란하는 권위적인 위계 구조를 제공하는 정서적 환경이나 의존 관계도 활용한다. - 394, 권력과 성폭력

증언 : 그래, 사람들은 언제나 ‘시간이 다 치유해줄 것’이라든가 ‘나이가 들면 괜찮아진다’ 같은 말들을 하지. 나는 네게 그 일이 일어난 날보다 오늘 더 그 개새끼를 증오한다. - 568, 강간 말하기

증언 : 그들이 놓아주자마자 저는 거리를 달려 도망쳤고, 마주친 우유 배달원이 경찰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줬습니다. 저는 침착하고 논리정연하게 대처했습니다. 아마 너무 침착했던 것 같아요. 저는 경찰이 던진 질문과 마지못해 느릿느릿 타자를 치는 태도에 구역질이 나서 제가 직접 타자기로 신고서를 작성해도 될지 물었습니다. 경찰이 그러더군요. “아, 진짜 또박또박 자세히도 말하네. 당신 사회학자나 뭐 그런건가?” - 569, 강간 말하기

증언 : 그자들은 내 과거의 삶을 몽땅 들춰내고, 그 모든 굴곡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정작 그는 변호사들에 둘러싸여 아무 말도 않고 피고석에 앉아만 있었습니다. 물론 그건 법이 보장하는 그의 권리였지만, 마치 재판을 받는 피고는 그가 아니라 내 쪽인 것만 같았습니다. - 581, 강간 말하기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강간 범죄 개념은 정조 내지 순결에 관한 모든 전통적인 관념과 완전히 분리되어야만 한다. 정조라는 말 자체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게만 혼외 성관계를 자제할 의무가 있음을 상정하는 말이다. 여성이 성적으로 활발한 모습을 보인다고 ‘정숙하지 못하다’고 표현하는 사고방식은 여성을 순전히 남성이 쓰는 그릇으로 간주하는 남성 중심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조 관념뿐 아니라 ‘사건 전까지 지켜지던 정조’ 같은 표현 역시 ‘기소녀’처럼 원고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선동적인 표현으로 모두 법률 어휘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 604, 여성이 반격한다

성폭력 범죄 사건에서 사법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매 단계마다 남성 권위자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 남성들은 대체로 가해자의 입장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남성 중심적 편향과 가치관 그리고 두려움을 품고 있다. 강간과 관련한 가장 신랄한 역설은 유사 이래 남성들은 누군가가 강간 폭력을 당하는 것보다 자신이 허위로 고발당할 가능성을 더 두려워해왔다는 것이다. 이 두려움은 성경 시대 히브리인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 이야기를 위시해 여러가지 전승설화로 표현되어왔고, 프로이트와 그 추종자들의 정신 분석 교리로 새로운 생명과 의미를 부여받았다. 또한 강간 고소에 대항하는 법적 방어 논리의 가장 문제적인 핵심을 형성했고, 강간 사건에만 특수하게 적용되는 증거 구성 요건의 형태로 법의 지원과 방조를 얻었다. 이 특수한 증거 구성 요건(동의, 저항, 정조, 보강증거)은 오로지 하나의 집단 목표를 염두에 두고 설계된 것이다. 책략을 꾸미고 거짓말을 하며, 앙심을 품고 보복하려고 하는 여성으로부터 남성을 보호하자는 목표 말이다. - 605, 여성이 반격한다

강간은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이며 통제할 수 없는 욕정에의한 범죄가 결코 아니다. 정복자가 되고 싶은 남성이 여성에게 두려움을 주고 협박하려는 의도로 계획한 비하 및 점령 행위, 즉 의도적으로 여성을 적대하는 폭력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강간의 실체이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 문화 속에 그런 폭력적인 태도를 장려하고 선전선동하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문화에 내재한 그런 요소들은 남성들, 특히 잔재적인 강간 예비군을 형성하며 쉽게 외부의 영향을 받는 남성 청소년들이 폭력 행위를 저지르도록 심리적으로 부추기고 그들에게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면서도, 그런 행위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기는 커녕 처벌받을 수 있는 범죄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만든다. 강간범을 유혹에 성공한 남자로 보는 것부터 ‘자기가 원할 때 원하는 것을 거침없이 취하는 남자’로 보는 방식까지, 남자다움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조장하는 강간 영웅 신화가 어린 소년에게 주입된다. 남자가 된다는 것은 여자의 몸을 살 권리를 포함한 어떤 비밀스러운 통과의례와 특권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소년이 눈치채는 바로 그 순간부터 강간 신화가 주입되는 것이다. 젊은 남자가 여자란 가격만 적당히 치르면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배우거나 성행위를 하려면 가격을 불러야 한다고 배운다면, 돈을 내고 살 수 있는 것이니 금전 교환이라는 규칙을 무시하면 그냥 빼앗을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을 과연 막을 수 있을까? - 612, 여성이 반격한다

2018.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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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관의 살인 - 제22회 아유카와 데쓰야 상 수상작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
아오사키 유고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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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학원 미스터리 탐정물이라고 해서 가볍게 시작했는데, 의외의 정공법. 매우 클래식한 탐정물이다.

물론 그 클래식한 측면에 다채로운 캐릭터를 입혀 학원물로서의 매력도 잃지 않았다.

탐정이라기 보단 은둔형 외톨이에 만화광인 전형적인 구제불능의 자기도취 인간인 우라조메 덴마.

사건 해결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라서 캐릭터에 대한 친밀감을 쌓기에는 시리즈를 더 읽어봐야 알 것 같다.

전형적인 밀실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이고, 3시 3분 부터 3시 15분 사이의 이야기라서 압축률?이 매우 좋다.

이건 딴 소리지만, 오랫만에 매우 좋은(두툼하고 맨질하고 터치감좋은) 종이로 만든 책이었음.

2018.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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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8-08-17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진짜 표지가 좋은데요. 완전 모으고 싶어지는. 아~~~ 참아야 합니다. 😖 집에 안 읽은 책이 너무 많아요. 읽고 싶어요 살짝 눌러 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요 ㅎㅎ

hellas 2018-08-17 02:01   좋아요 1 | URL
저는 시리즈 계속 읽어보려고 해요. :) 짬 나시면 시도해보셔도:)
 
여름, 스피드
김봉곤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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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 사랑.

그것이 가장 중요한 어떤 것이라면 나는 좀 싫을것 같은데...

사람마다 가치판단이 다르니 그렇다 치고. 그들의 사랑이 너무 솔직하게 직구여서 여름, 스피드 같다고 생각한다.

즉물적인 계절에 스피드를 더하면 사랑인것도 같고.

좋아하는 스타일의 글이 아님이 분명한데도, 스쳐지나가지 않고 바로 보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연결되어 있는 잘 보이지 않는 점선을 예민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이런걸까.

나는 더이상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사실은 나를 자격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 13, 컬리지 포크

나는 형을 보면서 형의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그리고 나는 지금 무얼 보는 중일까?
열차를 뚫고 들어오는 빛다발에 눈이 아팠지만 흘러가는 풍경을 그저 바라보았다. 볼 것이 볼 수 있는 것이 오직 풍경밖에 없었으므로 풍경을 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신이 사라진 거리에 오직 풍경만이 남았듯, 기억 속에서라면 서로에게 몰두하느라 풍경이 없는 거리가 더 진실에 가깝지는 않을까. - 143, 라스트 러브 송

어쩌면 사랑은 영원히 정의되지 못한 채 부유하며 말할 수 없음, 으로 남을 지도 모른다. 혹은 그것을 느꼈다, 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소설가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책 한권을 써내며, 음악가는 선문답처럼 음악을 만들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춤을 추며 투박해지는 것에 저항한다. - 187, Auto

2018.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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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의 이상적 도서관
프랑수아 아르마네 지음, 김희진 옮김 / 문학수첩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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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에게 묻는다. 무인도에 간다면 가지고 갈 책 세권은?
이라는 책.

세권은 너무 적지만, 일단 성경과 셰익스피어전집은 제외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럼에도 너무 많은 작가들이 그 두 책을 원한다. 그리고 질문의 전제의 비인간적임을 구지 언급하며 세권 이상 고르는 작가가 부지기수다. 하여간 고집쟁이들 ㅋㅋㅋㅋ

대충 떠올려도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이 성경이다. 그리고 돈키호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수상록,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천일야화, 율리시스, 모비딕, 윌리엄 포크너, 발자크 등등등

그 외에도 정말 읽어보고 싶던 책이나 정말 재밌게 읽은 책들을 작가들의 언급을 통해 확인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인정욕구인가?

읽다보면 나도 그 책들이 너무나도 읽고 싶어지는 것. 가장 많이 언급된 것들 중 읽은 것은 안나 카레니나 뿐. 멀었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

무한대의 시간을 상정하고 고른 책들이라 대체적으로 볼륨이 있는데, 나라도 무인도에 고립이라면 아마 저 책들을 고르지 않을까 싶다.

종교적인 어떤 의지와 기대도 없으나, 성경, 불경 등은 언제고 꼭 접해보고 싶은 책이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시도한 적이 있으나 안 읽는 책 처분 할때 1,2 권을 처분하고 언제고 마음에 드는 판본이 나오면 다시 사야지 하고 있음)

그러나 높은 확률로 무인도에 고립될 일이 없을 것이고, 아마도 그렇다면 언제고 읽을 것이다라는 각오만 다질 뿐 읽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맞으니까.

그래도 돈키호테, 수상록, 전쟁과 평화 등등은 책장에서 대기 중이다.

이런 설문을 한국 작가들에게 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한다. 재밌을 것도 같고, 판에 박힌 말들을 할 것도 같고.
아니면 무인도 말고(무인도는 선정기준에서 볼륨의 무게를 이기기 힘들어 보이므로) 기상악화로 인한 항공편 결항으로 별로 할 것 없는 시골 소도시에 일주일 고립시 읽고 싶은 책이라던가....

인생은 기나긴 병상에 불과했으나, 영혼은 지상의 온갖 장애를 뛰어넘어 높은 곳으로 날아올랐던 작가의 사유들을 조금씩 맛보는 것보다 고독한 난파 생활에 더 위안이 될 만한게 있을까? - 37, 존 밴빌

어쩜... 책 골라달라는데도 존 밴빌 스럽게 말하다니...라고 느껴져서 남겨보는 구절. ㅋㅋㅋ

그 섬은 몇 주 머무를 수 있도록 설비가 잘 갖춰진 별장이 있는 관광지 무인도인가, 아니면 어떤 폭군이 우리를 없애버리려다 못해 완전히 유폐시킨 징벌적인 섬인가? 오랫동안 있어야 한다면, 대작인 데다 굉장히 복잡하며 가능하다면 읽는 김에 언어 공부도 할 수 있도록 두 개 국어로 된 책이 필요하다. - 52, 미셸 뷔토르

아무 백과사전이나 세 권, 아예 세 권짜리 백과사전이면 더 좋다. 시보다는 그게 낫다. 기억하고 있다면 시집을 굳이 가져갈 필요가 없고,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는 시들이기 때문이다. - 54, 안토니오 카발레로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 해변에서 야자나무 아래 앉아 세월을 보내면서도, 이토록 적은 분량 안에 담길 수 있는 모든 인생과 아름다움과 고통과 미스터리를 여전히 겪을 수 있다면 위안이 될 것이다. - 63, 마이클 커닝햄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돈키호테>, 프루스트 전집,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 에밀리 디킨슨의 시들을 가져가겠다. 규칙 위반이라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이 질문은 너무나 혼란스럽고, 그러니까 내가 왜 그렇게 유배되어야 하는지, 그 섬에 얼마나 오래 갇혀 있어야 하는지, 우리 가족은 내 행방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중이니...... - 79, 루이스 어드리크

물론, 물론 그렇다. 독서에서 정말 현실적인 괴로움과 열정, 즐거움을 느꼈고, 독소로 인해 삶과 시야가 한층 확장하는 것을 경험한 적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근본적으로 진정한 소설은 결국 단 한 권 존재한다는 말은 자명하며, 나아가 클리셰이기까지 하다. 그 소설이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프루스트는 이야기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를 창조했으며 그 세계와 더불어 지금껏 제작된 가장 위대한 모든 형태가 혼합된 예술 작품을 창조했다. 우리는 이 책을 단숨에 읽을 수도, 조각조각 읽을 수도, 작은 파편들로 읽을 수도 있다. 독서 방식이 어떠하든 이 작품은 가장 산만한 독자에게도 그 경이들을 드러내며, 평생을 무인도에서 보내는 동안 내게 양분이 되어주기에 충분하다. - 96, 로버트 굴릭

나는 설문조사에는 절대 답하지 않는다. - 108, 미셸 우엘벡

하지만 내겐 이 책들을 읽을 시간이 없을 것이다. 무인도에서 나는 빠져 죽기 위해 헤엄치는 법을 잊어버리려 애쓰기에 바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 없는 곳도 싫고 섬도 싫다. - 113, 레지스 조프레

몽테뉴의 <수상록>, 쇼펜하우어의 <의자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이런 식으로 나는 몽테뉴와 더불어 재구성되고 쇼펜하우어와 더불어 해체될 수 있을 것이다. 무한하게. 얼마나 웃긴 일인가! - 206, 윌 셀프

<돈키호테>, <신곡>, <복음서>를 가져가겠다. 아니, 나의 친애하는 페소아의 책은 사양이다. 그 셀 수 없는 이본들 때문에 뱃길이 막히고 섬이 너무 붐빌 테니까. - 222, 안토니오 타부키

타부키가 페소아를 고르지 않다니.....라는 충격에 남겨 보는 구절. ㅋㅋㅋㅋ

2018.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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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지는 중입니다
안송이 지음 / 문학테라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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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괜찮아지고 있는 저자의 이야기.

그녀가 지금은 훨씬 괜찮아져 있기를 바란다.

인생의 어떤 일을 지나가도록 만들기 위한 저자의 글쓰기를 책으로 엮었는데, 이런 몹시 개인적인 일기를 읽게 될 줄 예상을 못했기 때문인지 딱히 어떤 감상이라기 보다는 어찌저찌 알게 된 지인의 고민을 들은 기분이 되었다.

원하는 분위기의 글은 아니었으나, 여러모로 나는 괜찮은지 생각해 보게 된다.

아직, 한참 더 멀었나 싶은 기분이다가도, 이 정도면 뭐...라고 생각하다가도.
어쨌든 나는 아직도 괜찮지는 않은 기분이다.

관계 구축 방식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니 저자와 견해가 같았다. 먹는것을 나누는것 그게 나의 관계 구축 방식인 듯.

영화로도 나왔던 소설 <디 아워스>에서 클라리사는 아름다웠던 어느 날을 회상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그때 아 이게 행복의 시작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시작이 아니었어. 행복이었어. 순간이었다고.” 나는 지금 그 순간에 있다. 행복하다. - 102

‘이런 계속 투덜거렸네, 그게 폴란드인들이 관계를 구축하는 방식이란다. 이해해주렴.’ 그럼요 투덜거리는 거라면 저도 잘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헨릭에게 러시아의 관계 구축 방식은 뭐냐고 물으니, ‘함께 고통받는 것’이라고 했다. 헨릭은 한국 방식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 생각에는 같이 음식을 나누는게 아닐까 싶다. - 318

2018.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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