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현기증.감정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3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평점 :
너무나 경악한 나머지, 사물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말았노라... 눈에 들어온 실제의 인상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추상적 이해력이 무너져내린 것 같다는 것...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구절 중 하나.
스탕달의 찌질함에 대한 길고도 짧은 이야기.
제발트의 글을 읽으면 뭐가 이리 장황한가 싶다가, 장황한 묘사가 참 아름다워서 우습다가,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는 이야기에 홀린 듯 같이 흘러가게 되었다가 책을 다 읽어갈 무렵이 되면 그 인상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추상적 이해력은 무너져 내리고 제발트라는 감정만 남는 경험을 하게 된다.
뭔가 온전히 하나로 완결되는 서사 따위.
그런건 방랑하는 자에게서 기대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리고 기대를 배반한 작가를 존중한다. Respect.
하지만 너희는 배를 타고 즐거워하니, 돛을 올려 호수를 역겹게 만드는 구나. 나는 더욱더 깊은 곳으로 내려갈 것이다. 추락하고 용해되어, 눈먼 얼음으로 흐릿해질 것이다. - 에렌슈타인의 시 <자살자>의 한 구절.
인간이 실제로 미쳐버리는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그럴 만한 계기는 삶의 도처에 널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의 자기 자신에 아주 약간의 균열이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외국에서 중, 57
회한이라고는 전혀 스며 있지 않는, 담담한 투로 내뱉은 그 문장을 끝으로 암브로제 가족사를 종결지은 루카스는, 나에게 무슨 이유로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그것도 하필이면 11월에 다시 W를 찾을 생각이 들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매우 장황하면서도 군데군데 모순이 섞인 대답을 했는데, 놀랍게도 루카스는 그것을 금방 이해했다. 그는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일이 내 안에서 저절로 설명되고, 그럼에도 그 일들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더욱 수수께끼처럼 변해간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과거에서 끌어올린 그림들을 더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그것들이 과연 내가 기억한 대로 흘러갔던 것인지가 더욱 모호해질 뿐이라고, 왜냐하면 과거에 속한 그 무엇도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또한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최소한 경악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 귀향 중, 199
2016. Au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