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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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적으로 시작해 침울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야기.

그럼에도 따뜻하고 아련한 이야기.

메타포가 뭔지도 모르던 청년 마리오가 시를 만나고, 사랑을 만나고, 자신의 시를 갖게 되는 성장기로만 끝났다면

이렇게 깊숙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 같다.

찬란한 삶 속에서 어느날 갑자기 끌어내려지는 암울함이 주는 여운이 확실히 있다.

전에 파블로 네루다의 시들을 읽었을 때는, 음.. 좋은 시네.. 정도의 감상을 가졌다면

이 소설을 본 후 다시 시를 읽는다면 무척 친밀하고 조금 더 깊은 감성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몇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이야기.:)

2015. Nov.

어머니는 일어나서 가슴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단두대 칼날 모양을 만들었다.
"더 이상 말할 것 없어. 우리는 아주 위험한 상황과 맞닥뜨렸어. 처음에 말로 집적대는 남자들은 다들 나중에 손으로 한술 더 뜨는 법이야."
"몇 마디 말이 해로울 게 뭐예요!"
베아트리스가 베개를 얼싸안으며 말했다.
"번드르르한 말처럼 사악한 마약은 없어. 촌구석 술집년을 베네치아 공주처럼 느끼게 만들지. 그리고 나중에 진실의 순간이 오면, 즉 현실로 되돌아오면 말이란 부도수표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지. 네 미소가 나비보다 더 높이 난다는 말보다 술주정꾼이 주점에서 네 엉덩짝을 치근덕거리는게 천만번 낫지."
베아트리스가 펄쩍 뛰었다.
"나비처럼 `번진다`고 했어요."
"난다고 하든 번진다고 하든 그게 그거야. 왠지 알아? 말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야. 허공에서 사라지는 불꽃 놀이일 뿐이라고."
"마리오가 해준 말은 허공에서 사라지지 않았어요. 저는 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할 때도 그 생각을 할 거예요." -p.63

정확히 백 년 전, 가련하지만 찬란한 시인, 처절하게 절망하던 한 시인이 이런 예언을 썼습니다.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하고 찬란한 도시로 입성하리라."
저는 예지자 랭보의 이 예언을 믿습니다. 저는 지리적으로 철저히 격리된 나라의 알려지지 않은 한 지방 출신입니다. 가장 버림 받은 시인이었고, 저의 시는 지방적이고 고통스럽고 비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결코 희망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도달했습니다. 시와 깃발을 가지고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미래는 랭보의 말대로라는 것을 노동자, 시인, 그리고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불타는 인내를 지녀야만 빛과 정의와 존엄성이 충만한 찬란한 도시를 정복할 것입니다.
이처럼 시는 헛되이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p. 131

마리오는 쪽지를 몇 센티미터 앞에 고정시켰다. 마치 독서대 위에 쪽지를 놓은 듯했다. 그러고는 예의 한 자씩 읽는 방식으로 읽어갔다. "친-애-하-는 마-리-오, 마-침-표, 가-운-데 단-추-를 눌-러-봐-라"
과부가 하품하는 척하며 말했다.
"내가 편지 읽는 것보다 자네가 쪽지 읽는 게 더 오래 걸리는군."
"장모님은 글을 읽는 게 아니라 삼켜버리잖아요. 글이란 음미해야 하는 거예요. 입 안에서 스르르 녹게 해야죠." -p. 106

네루다가 마리오를 길 쪽으로 슬며시 떠밀었을 때, 마리오의 뽀송뽀송한 턱수염이 화석처럼 굳어졌다. 마리오가 단단히 마음을 먹고 말했다.
"시인 동무, 당신이 저를 이 소동에 빠뜨렸으니 책임지고 저를 구해 주세요. 당신이 제게 시집을 선물했고, 우표를 붙이는 데에만 쓰던 혀를 다른 데 사용하는 걸 가르쳤어요. 사랑에 빠진 건 당신 때문이에요."
"천만에! 시집 두어 권 선물했다고 내 시를 표절하라고 허락해 준 줄 알아. 게다가 자네는 내가 마틸데를 위해 쓴 시를 베아트리스에게 선사했어."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에요!" -p.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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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6-08-14 0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말이란 부도수표일 뿐에 확 꽂혔습니다. 이거 간만에 질러야겠는걸요.

hellas 2016-08-14 10:55   좋아요 1 | URL
되게 아름다운 이야기라서 뱃속이 몽그르르? 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