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여진이 있었어 타이피스트 시인선 11
최필립 지음 / 타이피스트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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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파장이 조금씩 조금씩 외부로 퍼져나가다가
썰물의 끝처럼 밀려드는 감각이 있다.

잘 부서지고, 조심스럽게 조립된 시들.

조수 차가 크지 않은 잔잔한 바닷가의 따스한 오전 같은 안정감을 주지만, 그 안에 빼곡하게 해체되는 소립자들의 아우성이 있는 듯.

그런 균형과 불균형으로 약간은 흐려지는 불안감.

- 우리가 사는 세계에 견적을 낸다면
서로의 입술을 직각으로 꺾어도 된다면

분홍빛으로 물들어 플라밍고
비인지, 피인지 도통 모르겠어 그러나

내가 너의 잡음을 이해한다고 해도 괜찮아? - 천착하는 마음 중

- 우리는 경험적인 사랑을 했지요 너는 의자에 누워 있었고 나는 귀가 먼 것처럼 너의 숨소리를 상상했지요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 차라리가 있었을까 물에 들어가 상상해도 숨이 멎지 않는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경험은 늘 고통을 수반합니까 당신도 나도 아프길 바란 적은 없는데요 (...) 나는 숨이 하고 걷는 것도 멈추고 싶어져 예전엔 당신보다 빨리 걸었지만 이제는 아닌걸요 나는 퇴행하고 있는 걸요 - 석촌호수 중

- 극복할 수 없었던
미래에 대하여,
모래 상자가 엎어지는
속도에 관하여,
그러나 끝내
꺾이지 않는 곡면
에 대해
애쓰고 있었어 - 곁에서 표류하고 있었고 중

- 멀리 떠나기 전 감정들을 모두 네게 줄게 비애와, 사랑과, 미움과, 회의를 듬뿍 담아......

무던히 쏟아지고 있구나
붓은 공백을 이해하지 못한다

천장이 울렁이네 결심을 할 줄 안다는 듯이
우리는 태곳적에 판 구덩이에 얼굴을 묻었고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을 때
배후가 노려보고 있었다

얼굴 뒤로 얼버무리며 흩날리는
빗물에 지문처럼 번지는,

일별을 - 피상에서 중

- 다시 똑같은 천장
다른 얼굴이 초침에 부딪히고
우리는 직각으로 꺾여
솜사탕이 녹아내리는 걸 보고만 있어

퀼트를 짜는 밤
우리는 바늘처럼 사라질거야
애원의 꼬리표를 붙이는 동안
작은 낙타가 녹슨 철문을 열어 줄 거야

달리고 있지
속도를 느끼며
차창 밖으로
소금 결정이 나리고

사랑이 된 사람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고 - 흔들의자 위에 떠오른 별자리 중

- 흐르는 이미지
글씨는 유리 눈처럼 흩날린다
너는 이어 달리는데
잘린 팻말을 잘도 이해하는데

계단은 안개가 가득하다
새집에 심은 기밀처럼
불안의 좌표는
퀴퀴한 냄새를 풍기고
영원처럼 돌기 시작하면

유령이 훔친 속옷을 뒤집어쓴다

어지러워
어지러워
잔해를 비집고 벽을 노래해
열린 책에 시쳇말을 덧붙여
가지런히 놓인 찻잔
모르는 얼굴 뒤섞이고

눈을 떴다
빛을 망각한 천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오래전 받은 슬픈 부탁이 생각났다 - 차나무밭 중

- 이 세상에 없는 이에게 비로소 겨울로부터 살아남았다고 적습니다 나는 타인을 홀리는 세계에 살고 있었고 눈먼 형상으로 합창했다 - 변장술 중

- 요즘 어떠냐고 물으면
편안한 상태야
연민 없이 편안한 상태 - 편안한 상태 중

- 선생님 잠깐만요
외칠 때 나는 이미 죽은 뒤였고

부표만 떠다니는 호시절
모르는 척 다가오고 있었다 - 마루가 부러지고 희디흰 중

- 파형의 빗변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자
실패가 가능할 때까지

비현실에도 현실이 있다고 생각해

끝내 말하지 않음으로써
영원이 되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해 - 영원을 위한 맥거핀 중

- 꿈은 아주 작아서 주머니 안에서 잘 부서졌다. 나는 한번도 그걸 꺼내지 않았고 그래서 늘 새것이었고. 무언가 되려다 만 날들이 가만히 침대맡에 쌓였지. (...) 꿈은 아주 작았고 자주 생겨났다. 아주 작아서 잘 부서졌고, 그 꿈들이 부서져 응괴를 이뤘다. 마치 하나의 거대하고 지저분한 폐곡선처럼. 네가 좋아서 네 생각을 하려했고, 오래된 꿈이 좋아서 그 꿈을 좇았을 뿐이다. 나는 다시 저점으로 돌아오고 있다. 여기서부터 나는 검토되지 않은 또 다른 믿음을 실험해 볼 작정이다. - 최필립 산문, 노스탤지어와 몇 가지 장면 중

2025.nov.

#밤새여진이있었어 #최필립 #타이피스트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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