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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평점 :
복숭아 농장에 애정을 가지고 강인하게 생을 헤쳐나가는 여성 빅토리아.
떠돌이 인디언 소년 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온 생을 그 사랑의 증거로 살아가는 이야기라니 오랜만에 로맨스가 넘치는 소설을 읽었다.
무지에서 비롯되는 혐오가 일상이고 상식이던 시절이라서 생기는 비극이 어떤 삶을 보여줄지 읽는 내내 궁금했다.
무지의 혐오의 희생자 중 한 명이었던 이웃 루비앨리스도 역시 흥미로운 캐릭터다. 외로운 두 명의 삶이 짧은 시간이지만 든든한 우정으로 변하는 시간도 소중했고. 후반부에서는 놓쳐버린 아들 루카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이 두 모자의 역사가 조금은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읽게 된다.
모든 일의 원흉인 동생 세스가 어느 순간 나타나 분탕질을 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는데, 의외로 싱겁게 미약하나마 개과천선을 했나? 싶은 모습으로 잠깐 등장한 점은 다행이랄까.
비극적이지만 착하고 자연주의적. 한여름에 읽기 좋았다.
- 어느 순간 숲에, 바다에, 산에, 그리고 세상에 외친다.
나는 이제 준비가 되었다고. - 애니 딜러드
- 한때 강이었으나 지금은 저수지가 된 물 밑에서 썩어가는 마을, 물속에서 조용히 잊힌 마을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불어난 물이 마을을 집어삼킬 때 이곳의 기쁨과 고통까지 모조리 앗아갔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린 시절의 풍경은 우리를 창조한다. 그 풍경이 내어주고 앗아간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되어 우리 가슴에 남고, 그렇게 우리라는 존재를 형성한다. - 14
- 어깨를 으쓱하고 방긋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모습은 소유에 관해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아는 사람 같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랬다. 그는 내게 본질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비운 삶이야 말로 참된 삶이라는 사실을, 그런 수준에 도달하면 삶을 지속하겠다는 마음 외에 그다지 중요한 게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그때 이런 말을 들었더라면 나는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를 엮은 끈을 점점 더 가까이 잡아 당겼다. - 32
- 그러나 이런 사소한 일, 마치 나를 부르는 듯한 석탄 수송 열차의 기적 소리, 사거리에서 마주쳐 길을 묻는 이방인, 흙길에 떨어진 갈색 술병처럼 별일 아닌 사건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어도 우리 존재는 탐스럽게 잘 익은 복숭아를 조심스럽게 수확하듯 신중하게 형성되는 게 아니다. 끝없이 발버둥 치다가 그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거둘 뿐이다. - 38
- 그녀는 푸르스름한 손을 가슴에 포개고, 어깨 옆에 웅크린 개 한 마리, 그녀의 몸에 딱 붙어 잠자는 개 네 마리와 함께 누구나 바라는 모습으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삶과 죽음이 반가웠다. 루비앨리스의 삶은 너무나 기이하고 독특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내 인생과 겹쳐져 있었고, 루비앨리스의 죽음은 내가 겪은 유일한 호상이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나는 윌을 대신해 루비앨리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직이 속삭였다. - 280
- 목사님이 기도하는 동안 나는 고개를 숙여 묘에 참배했고,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고했다. 새로운 삶이 내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지난날의 선택을 끊임없이 돌아보며 의심했다. 그러나 우리 삶은 지금을 지나야만 그다음이 펼쳐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도가 없고 초대장이 없더라도 눈앞에 펼쳐진 공간으로 걸어 나가야만 한다. 그건 윌이 가르쳐주고, 거니슨강이 가르쳐주고, 내가 생사의 갈림길을 수없이 마주했던 곳인 빅 블루가 끊임없이 가르쳐준 진리였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내가 나아가야 할 다음 단계가 내 앞에 펼쳐져 있었고, 나는 그걸 믿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이 장례식을 끝으로 아이올라와 나 사이 인연의 끈이 끊길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곧 내 길을 떠날 것이다. - 281
2024. aug.
#흐르는강물처럼 #셸리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