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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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만족스러움이 충만한 기분으로 읽었다.
벅차오르는, 흥분되는 감정이라기보단 조용하고 묵직하게 다가왔다.

처음 만난 작가이고 얼마 전 작가의 수전 손택 에세이 광고를 봤는데, 하필 근래 읽은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가 너무 사적인 영역을 침범한 기분을 들게 해서 마니아님임에도 시그리드 누네즈의 이 책은 ‘에이 사지 말자‘ 했던 것이다. 게다가 ‘어떻게 지내요‘도 딱히 내게 셀링포인트가 있는 책이 아니었는데 - 작가도 모르고 제목도 좀 밍밍하고 표지조차 밍밍하니- 안 읽었으면 어쩔뻔했나!!!!!!
추천!!! 추천!!!!! 왕추천 도서다!!!!
부랴부랴 출판된 다른 작가의 두권의 책도 주문했다.

신형철 평론가의 추천사를 읽고 고르길 정말 잘했다. 추천사를 믿는 편은 아니지만 몇몇 사람들의 추천은 눈여겨 보는데, 이 책에 있어서도 절대적으로 감사한 추천사다.


죽음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하는 편이지만 막상 그것이 나의 죽음이라면 좀처럼 실감하기 어렵다. 다만 책 속의 친구처럼 질서정연한 평온함이 있기를 바랄 뿐. 잘 죽는 것, 그 이전에 혼란스러운 이 세계에서 고요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랄 뿐.
막연하고 어쩌면 불가능한 희망을 품고 살고 있는 것이다.

시그리즈 누네즈의 이런 딱히 긴장감있는 사건이 없는 이야기를 읽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계속 툭툭 차였다.
지성이 번뜩이는 그러나 그것이 멀리 있는 것 같지 않는 멋진 문장들이다.
알게 되어 기쁜 작가다.

- 그렇게 채집한 이야기들 - ‘웰다잉‘에서 ‘기후위기‘에 이르는-을 분방한 구조와 리드미컬한 어조로 들려준다. 통찰과 공감이 어우러진 그의 이야기를 딴짓을 해가며 듣는 일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나는 근래 드문 집중력을 발휘해 이 소설을 두번 연달아 읽었고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아 이 작가가 쓴 수전 손택 회상기까지 내처 읽었다. 뉴욕 지식인 사회 한복판에서 성장은 작가다운 날카로운 지성이 내가 동경하는 미덕인 ‘다정한 예리함‘ 혹은 ‘관대한 명석함‘에 까지 도달해 있으니 이제 Sigrid Nunez가 쓴 모든 글이 나에게 중요해졌다. - 신형철

- 다 끝났다고 그가 다시 말했다. 수 세대를 거쳐 우리를 지탱해온 믿음과 위안도 이제 더는 없고, 개개인의 지상에서의 삶은 어김없이 끝난다 할지라도 우리가 사랑했던 것, 우리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은 계속 이어지며, 우리가 속한 세상은 지속되리라는 앎도 이제 더는 없습니다. 그런 시대는 끝났습니다. 우리의 세계와 우리의 문명은 지속되지 못할 겁니다. 이 새로운 앎을 지닌 채로 우리는 살아야하고 죽어야 합니다. - 15

-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 Quei est ton tourment? - 122

- 바에서 만나고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짐 싸기 시작해. 친구가 문자를 보냈다.
내가 기계적으로 여행가방에 옷을 넣고 있는데 다시 문자가 왔다.
고마워.
내가 그러겠다고 했을 때, 죽는데 도움이 되는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을 때. 안도감에 벅찬 친구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곧바로 다시 문자가 왔다. 가능한 한 재미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할게. - 140

-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적어도 둘이 있지만, 떠날 때는 오로지 혼자라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모든 인간 경험을 통틀어 가장 고독한 경험으로, 우리를 결속하기보다는 떼어놓는다. 타자화되다. 죽어가는 사람보다 더 그런 사람이 누가 있을까? - 149

-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헨리 제임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생각하는 사람과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생각하는 사람.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견디며 살고,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 166

- 포크너는 당대의 젊은 작가를 얼마나 심하게 꾸짖었는지. 마치 인간 사이에 서서 인간의 종말을 바라보듯이 글을 쓴다고. 가슴이 아니라 분비선에 대해 글을 쓴다고. 작가가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건 두려워서라고 포크너는 말했다. 지구상의 다른 모든 사람과 공유하는 두려움. 폭파된다는 두려움. 하지만 작가라면 그런 두려움에 굴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1950년, 그날, 스톡홀름에서 포크너가 요구했던 건 용맹함이었다. 그 다음에는, 오랜 보편적 진리 -사랑과 명예와 연민과 자부심과 공감과 희생으로 돌아가기. 그것이 없다면 당신의 이야기는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포크너는 경고했다. - 202

- 나는 애를 썼다. 사랑과 명예와 연민과 자부심과 공감과 희생. 실패한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 252

2021. nov.

#어떻게지내요 #시그리드누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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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5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hellas 2022-01-25 11:40   좋아요 1 | URL
진짜 좋은 책이예요 :)

북깨비 2022-01-27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헬라스님 별다섯개 흔치 않은데 게다가 추천추천왕추천이라니! 근래 책을 너무 많이 사서 당분간은 사지 말자 하고 다짐중인데 너무 궁금해요 😭

hellas 2022-01-27 06:13   좋아요 1 | URL
나중에라도 꼭 읽어보세요. 뭔가 여러 생각을 불러오는 글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