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2019년에 읽은 책 중 최고로 꼽은 한국문학은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이고 외국문학은 애나 번스의 <밀크맨>이었다. 생각보다 되게 쉽게 두권의 책을 꼽았는데, 서사도 서사지만, 나는 아무래도 문장이 내 멱살을 쥐고 끌고가면 맥없이 항복 항복을 외쳐대는 스타일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막 엄청 멋진 비유, 끝내주는 명문장이라서가 아닌 현실의 입말과도 거리를 두지 않고 너무 속되지도 않은 어느 지점에 존재하는 문장인데, 그 문장을 끌고가는 화자가 이렇게 말하기로 했다 라고 결정하는 그 모든 순간, 화자가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에 완벽하게 몰입하게 하는 힘에 휩쓸리기 때문이다.

걸으면서 책을 읽는 (자신을 주변과 격리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한) 여자 애에게 ‘웃고 다정하고 친절한 ‘행동은 경계심을 품게 하는 행위인 것이 현실인 1970년대 아일랜드의 이야기다. 이 시대와 그 공간의 이야기에 이토록 공감하게 되는 것은 여성을 구조적으로 비하하고 쉽게 여기는 분위기 때문이다.

주인공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온갖 억측과 소문이 퍼져나가고, 그를 고립시키려는 악의적인 행동들로 인해 고립무원의 상태가 지속될 때, 그렇지만 사회 규범에 근거해 이상한 사람들로 치부되는 조력자들이 그의 주변에서 멀어지지 않을 때, 뭐라 말할 수 없는 강력한 감정이 강타하는데, 속절없이 그 슬픔과 안도에 무너지게 되고 만다.

파렴치하고 피해망상적 고대의 신들 조차 너끈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주인공의 배경은 그렇게 만들어 진다. 누구의 이름도 존재하지 않는 설정은 이 모든 고난에 몰입하는데 엄청난 도움을 주고, 이상하고, 요란하고, 과시적이고, 음흉한 주변인들 속에서 조용히 한발씩 어디론가 걸어가는 주인공의 무사를 읽는 내내 기원했다. 대신 망명신청이라도 해주고 싶다고 최소 서른번쯤 생각한 듯 하다.

- 그 때, 열 여덟 살 때, 나는 일촉즉발인이 사회에서 자랐고 이곳에서는 신체 폭력이 없는 한, 명백한 언어적 모욕이 가해지지 않는 한, 눈 앞에서 조롱당하지 않는 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게 기본 원칙이었으니, 그러니 일어나지 않은 일에 피해를 당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열 여덟살 때 나는 개인 공간 침해라는게 뭔지 몰랐다. 불편한 느낌은 있었다. 직감이나 어떤 상황 또는 사람에 대한 반감은 있었지만 직감과 반감이 중요하다는 것은 몰랐고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을 꺼리거나 거부할 권리가 나에게 있다는 것도 몰랐다. - 17

- ‘건너‘ 상징인 자동차의 부품이 걸린 뽑기에 참가하다니 무슨 짓이냐, 하는 말이었다. 역사적 부당함 말이야, 그가 말했다. 압제적 법령 말이야, 그가 말했다. 실행과 조약 말이야, 그가 말했다. 인위적 경계 말이야, 그가 말했다. 부정부패 지원 말이야, 그가 말했다. 긴급체포 말이야, 그가 말했다. 통금 선포 말이야, 그가 말했다. 재판없는 구금 말이야, 그가 말했다. 집회 금지 말이야, 그가 말했다. 사인 규명 금지 말이야, 그가 말했다. 또 주권과 영토의 제도적 침해 말이야, 그가 말했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처분 말이야, 그가 말했다. 뭐든지 말이야, 그가 말했다. - 45

- 나는 수치를 몰랐다. 그러니까 ‘수치‘라는 단어를 몰랐다. 그 단어가 우리 공동체의 어휘에 아직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치의 감정은 확연히 느꼈고 나 말고 주변 다른 사람들도 그런 감정을 알았다. 약한 감정도 아니었고 분노 보다도, 증오보다도, 심지어 감정 중에 가장 많이 은폐되는 공포보다도 더 강력한 것 같았다. 그 때는 수치를 해소할 방법도 극복할 방법도 없었다. 수치가 공적인 감정일 때가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수치의 효과를 증폭하려면 수치를 주는 사람이건 수치를 목격하는 사람이건 수치를 당하는 사람이건 간에 사람이 많아야 했다. 이렇듯 수치는 복잡하고 복합적이고 고도로 발달된 감정이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수치를 피하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했다. 사람을 죽이고, 말로 상처를 주고, 정신적 상처를 주고, 게다가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 84

- ˝알았어요. 그러니까 내가 책 읽으면서 걷는 것을 관두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조그만 독서등을 달고 다니는 것도 관두고 위험하고 무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오른쪽을 보고 왼쪽을 보고 오른쪽을 다시 보면 행복해질 거라는 말이죠?˝ ˝행복하고는 상관없어.˝ 셋째 형부가 말했는데 그 말은 그때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내가 들어본 가운데 가장 슬픈 말이었다. - 99

- 선생님이 날마다 일몰이 있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데 관에 들어가 땅에 묻힐 필요는 없다. 어둠이 아무리 크더라도 극복할 수 없는 어둠은 없다.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있을 수 있다. 구습을 떨쳐버려야 한다. 상징과 뜻밖의 해석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또 가슴속에 감추어 둔 것,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꺼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을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선택을 하세요, 여러분.˝ 선생님은 말했다. ˝그곳에서 나오세요. 지렛목이라고 할까 회전축이라고 할까 전환점이라고 할까 뭐가 됐든 모든 것의 의미가 나타나는 순간이 있을거예요.˝ 이상한 소리였다. - 122

- 나는 고대인에 관심이 많다. 절제되지 않은 감정, 파렴치한 인물들, 신화, 의식, 섬뜩하고 기이하고 피해망상적인 계략, 살인. 신들도 변덕스러운데다, 평범한 사람들은 신에게 탄원해서 적에게 저주를 내리는데 이 적이라는 사람이 사실 가까운 이웃이다. 오만한 황제들이 사과나무와 결혼하고 말을 집정관으로 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같은 세계다. 뭔가 흥미로우면서 미친 것 같고 비정상적인 구석이 있어서, 용인 가능한 정도로 이상한 정상인만 이해할 수 있다. - 153

- 네가 잊지 않게하기 위해 네가 두려워 하는 것을 열거할 수밖에 없구나. 궁핍함, 매달림, 기이함, 보이지 않음, 보임, 수치를 당함, 기피됨, 기만당함, 괴롭힘 당함, 버려짐, 얻어맞음, 입에 오르내림, 동정받음, 조롱당함, ‘애‘이면서 동시에 ‘늙은이‘로 여겨짐, 분노, 타인, 실수로 저지름, 본능적으로 앎, 슬픔, 외로움, 실패, 상실, 사랑, 죽은에 대해. 죽음이 아니라면 삶 - 육신, 필요, 일부, 대담한 일부, 버려진 일부에 대해. 또 떨림, 진동 떨림과 진동 때문에 다리가 허물어지는 것에 대해. 1부터 10까지 중에서 우리의 9와 10분의 9는 힘의 상실을 믿고 나약함 앞의 굴복을 빋고 다른 사람의 교활함을 믿어. 우리는 불안정성도 믿어. 9와 10분의 9는 우리가 감시를 당하고 있고 오래된 상처를 되풀이하고 있고 얼굴 표정이 경직되고 불행하고 둔하다고 믿어. 이게 우리의 두려움이야. - 373

2019. O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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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1-06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크맨. 이제 정말 들고 읽어야 할 듯요..

hellas 2020-01-06 19:12   좋아요 0 | URL
정말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