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밤 10시 20분. 커피는 커피대로 술은 술 나름의 고유한 맛이 있다. 음악 감상에 앞서 감정을 살짝 고조시키는데는 역시 커피와 술이 제격이다. 조니워커 한 잔들고 음악감상실로 가다.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을 턴테이블에 올려놓다. 바리톤 헤르만 프라이가 노래하는 제 1곡 '아름다운 5월에'. 지인 K씨가 오래전 황학동에서 구입한 중고 LP음반이다.

<아름다운 5월에>

아름다운 5월에
꽃봉오리들이 모두 피어났을 때
나의 마음 속에도
사랑의 꽃이 피어났네

아름다운 5월에
새들이 모두 노래할 때
나도 그 사람에게 고백했네
초조한 마음과 소원을

<Im wunderschonen Monat Mai>

Im wunderschonen Monat Mai,
Als alle Knospen sprangen,
Da ist in meinem Herzen
Die Liebe aufgegangen

Im wunderschonen Monat Mai,
Als alle Vogel sangen,
Da hab' ich ihr gestanden
Mein Sehnen und Verla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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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은 어느 한 지점에 명확하게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간다. 즉 찰라적인 순간들이다. 쉼없이 흘러갈뿐이니 세상 그 어떤 것도 고정된게 없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라것도 환상일뿐다. 수많은 과거 중 하나에 불과하니까. 덧없는 삶, 의미없이 주어진 삶은 그렇게 하염없이, 하염없이 흘러간다.


어느 때, 과거의 어떤 한 순간이 지금 내 앞에서 오롯이 되살아날 때, 마치 지금 이 순간 경험하는 그 어떤 것처럼 생생하게, 명확하게 되살아난 그것이 오히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건 아닐까? 그러므로 과거란 이미 잊혀진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실재보다 더 실재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카뮈 혹은 사르트르와 또 다른 의미에서 실존의 의미를 말하는 소설이다. 그러니까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 프루스트,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는 동일하게 잃어버린 과거를 현재보다 더 뚜렷한 현재라고 증언한다. 

현실은 마냥 지루하고 덧없다. 반면 문학과 영화, 혹은 음악 속의 세계가 현실보다 더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이런 나를 누군가는 가까운 지인 대신 죽은 이를 더 경배하고, 가깝게 느낀다고 핀잔한다. 현재보다 과거가 더 낯익다는 것. 살아있는 사람보다 죽은 이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은 현실이 지루하기 때문이고, 이런 나는 또 한 명의 보바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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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요시네마

격주로 진행하는 '금요시네마' 첫 번째 상영작은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 참여자 2명.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와 같은 단순 로맨스물이지만 접근하기에 따라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까지 언급할 수 있다. 사실 상영작 선정은 소수인 참석자들의 형편이 첫 번째 고려사항이다. 

맘 같아서는 타르코프스키, 고다르, 베르히만, 브레송  등의 명작부터 감상하고싶지만 어쩔 것인가. 이 점은 독서회도 마찬가지인데, 제 아무리 단테,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에서부터 카프카, 조이스, 포크너, 나보코프라는 산해진미가 눈앞에 있다한들 당장 입에 넣을 수 없으니. 과연 누가 카뮈, 사르트르를 읽고자 할 것이며, 니체를 읽으려 할 것인가. 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태에 도스토예프스키를 과연 권유할 수 있을까? 요원하다. 비록 아쉬움투성이지만 프로젝터는 계속 돌아가야 하고, 독서회 역시 진행되어야 한다.   

2. 분주함

별 할일도 없는 사람이 실제 생활은 더 바쁘다.  그들은 놀기에 바빠 당최 시간을 낼 수 없다. 독서할 시간이 없다. 영화볼 시간도 없다. 글쓰기를 할 시간은 더욱 없다. 그러면서 그들은 말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어데어데 다녀왔다. 산책 하려고, 운동하느라, 해외여행 다녀오려고, 누구누구를 만나려고, 화장을 하느라 시간이 없다. 바쁘고 바쁘다. 술마시고, 커피 마시며 잡담할 시간은 있어도 사색할 시간, 독서할 시간은 없다.

3. 그림자 당신

나는 너에게, 당신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건네고 또 건넨다. 그러나 너는, 당신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다. 내 글을 읽고 속으로 짐작만 한다. 그러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군, 이 사람이 그런 생각을 했군. 좀 음흉한데? 거짓말 아냐? 내 생각과 살짝 다르군. 그럴듯하긴한데, 사실은 그게 아니지 등등.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말을 건넨다. 말하고 또 말한다. 급기야 하루 한 꼭지씩 말하기로 작정한다. 하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 아마 죽을 때까지도 응답없는 메아리.

그래도 쓰고 또 쓴다. 다시 말을 건넨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어떤가하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하고. 어느 때는 수줍게, 어느 때는 자만심으로 가득차서, 어느 때는 자신있게, 어느 때는 소심하게, 때로 현학적으로 어느 때는 솔직하게, 어느 때는 과장한 투로 말을 건넨다. 행여 한 마디 답을 하지 않겠냐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영원히 허공 속의 메아리는 아니잖겠냐고. 하지만 누구도 대답이 없다.

다시 말을 건넨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속으로만 가늠하며 읽고 또 읽는다. 가만 속으로 되뇌인다. 거짓말! 건 아닌데! 그럴듯하군! 인형 같은 당신, 너. 그림자 같은 당신, 나에게 의미없는 당신, 죽은 자와 다름없는 그대. 실제는 살아있지만 교통이 불가능한 죽은 그대.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전할 수 없는 그대. 당신. 그래도 나는 쓴다. 쓰고 또 쓴다. 말을 건넨다. 다시 말한다. 혼자 중얼거린다. 그러다 결국 나는 죽은 당신과 너 대신 나에게 말을 건넨다. 나를 향해 독백한다. 혼자 말하고 혼자 쓴다. 쓰고 읽고, 다시 쓰고 읽고.   -  오늘도 <딜레탕트>를 방문한 당신에게! ^^

4. 문화카페

최 작가가 방문했다. 홍차를 마시며 두어 시간 담소. 중학 동창생 P가 최 작가에게 맡긴 원고 교정에 대한 의견, '인문산책' 차기 토론주제인 이청준의 단편 <조만득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다. 

비록 회원 몇 안 되는 단촐한 문화 모임들이지만, 평소 원하던 모임을 내가 운영하는 독서실에서 하고 있으니 뭘 더바라랴. 모임의 수준이며 내용이야 차치하고, 오래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 같이 회원들 누구라도 오다가다 들러 차 한 잔 나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5. 세속화 시대의 종교

독서실에 인접한 골목길은 대략 200여미터. 작은 골목에 여러 건물이 들어서있다. 길 입구의 타일집, 자동차 수리센터, 빌딩 하나에 교회, 노래방, 중국집이 함께 세들어있고, 유치원, 독서실, 그리고 낡은 주택 몇 채, 마지막은 긴 대나무 끝에 붉은 깃발을 단 ** 보살 점집이다. 요즘 점집은 한창 성수기인데, 군산 경기가 크게 안 좋은 탓이다. 엊그제는 돈깨나 있는 손님이 들었는지 문 앞에 차린 음식이 푸짐하고, 짚신 몇 켤레, 촛불, 떡, 과일 등 평소와 달리 걸졌다.  하긴 절박할수록, 맘이 간절할 수록 음식도 많이 차리고 굿소리도 커야 귀신도 감동할거다.   

공교롭게도 한 빌딩 위 아래 층에 나란히 세든 노래방과 교회는 일요일 낮이든 밤이든 노래소리가 교대로 크게 들린다. 교회는 찬송가,  노래방은 대중가요. 마이크 소리 요란한 노래는 가사도 창법도 서로 다르지만, 노래하는 목소리만은 간절하다. 일상의 찌든 힘겨운 속내들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불경기 탓에 중국집은 지난 달 폐업했고, 임대라고 써붙인 건물이 여러 채다. 심야 노래방은 불빛만 환하지 손님이 없어 보인다. 반면 점집과 교회는 그럭저럭 현상 유지를 하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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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 '여.순항쟁'과 '4. 3 항쟁'에 대한 전문가들의 강연과 책자를 접하면서 역사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특히 한길사에서 간행한 <해방 전후사의 인식> 시리즈,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송남헌의 <해방 3년사> 등을 읽으면서 그동안 애매하게 알았던 해방 전후사에 대한 이해를 명확히 할 수 있었다. 

새롭게 안 사실인데, 해방 전후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 및 한국전쟁의 기원의 첫 번째 요인은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이다. 물론 한국전쟁의 기원과 '여.순항쟁', '제주 4. 3항쟁' 모두 그것이 촉발된 계기는 여러 복합적 요인일테지만, 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친일파 청산이 무산된 점을 꼽는다. 친일파 문제와 관련해서 김지석의 칼럼 <시대의 담론>(한겨레신문)중 일부를 인용한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좌우합작 운동은 1947년 초 결국 좌초한다. 의견 대립의 핵심 사안이 토지개혁과 친일파 처벌이었던 것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와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특히 친일파 문제는 이후에도 민주주의 발전에 최대 걸림돌 가운데 하나가 된다.

(...) 신탁통치 문제는 단독정부 수립으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게다가 친일 세력은 힘들 게 없는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민족주의자로 변신하는 기회를 얻는다. 그즈음 우리 의도와 무관하게 미-소 냉전이 시작될 조짐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남쪽 정치세력이 그 분위기를 활용하며 분단을 고착화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잘못이다. 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왜곡해 반탁운동을 벌인 것에 못잖게 외세 의존적이며, 이런 분단 고착화 추세의 연장선에서 한국전쟁이라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

(...)단정이라는 한계 속에서 법적인 형태로 분명한 민주공화국이 출범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행태는 애초부터 이에 어울리지 않는다. 194810월 여수·순천사건을 계기로 한 국가보안법 제정과 무리한 확대 적용, 소장파 의원들을 제압하기 위한 19495~8월 국회프락치사건, 19496월 친일 경찰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 습격, 19494월 국민보도연맹 결성과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한 연맹원 학살 등은 전형적인 독재정권의 모습이다."

'빨갱이'라는 단어의 기원 역시 배후에 민족 갈등을 의도한 일제의 농간으로 비롯되었고 - 당시 사회주의자는 일제에 항거한 지식인들이다 -  이 단어가 우리사회에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여순항쟁' 때부터다. 특히 여순항쟁은 오늘날의 '국가보안법'을 만들어낸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친일파 청산의 실패는 이승만 정권때부터 시작해서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은 친미, 반공을 기치로 내걸고 보수정권의 이데올로기, 혹은 권력 유지를 위해 '빨갱이'라는 단어를 우리사회에 고착화시키는데 골몰했다.

어제 문 대통령의 3. 1절 기념 경축사에서 관심을 끈 대목은 일제하 친일 청산의 무산과 그로인한 '빨갱이'라는 단어의 유래, 또 이것이 오늘날 어떻게 변형되어서 계속 판을 치고 있는지 언급한 점이었다. 

오늘자 한겨레신문 역시 이 점을 부각하고 있는데, 특히 조선일보 선대 사주 방응모와 동아일보 선대 사주인 김성수의 친일행적을 거론하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문제점을 지적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다음은 오늘자 한겨례신문의 사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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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3·1운동 100주년 경축사에서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하는 과정에서 빨갱이란 말이 생겨났다’며 ‘좌우의 적대와 이념의 낙인은 일제가 민족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금도 정치적 공격 도구로 빨갱이란 말이 사용되고 변형된 색깔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질타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분단 현실의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매우 적절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분단과 냉전은 친일파들이 활개칠 수 있는 음습한 토양을 제공해왔다. 최근의 ‘5·18 망언’은 물론 역대 선거 때마다 되풀이돼온 색깔론은 곳곳에 뿌리박은 친일 잔재의 또다른 몰골이다. 이런 색깔론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것은 친일 청산은커녕 친일파의 후예들이 정치·언론·군·학계 등 우리 사회 기득권 체제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도 한 요인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의미를 폄훼하는 뉴라이트적 건국 사관이 판쳤던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일부 보수언론이 여기에 중심적 구실을 하고 있는 사실은 허투루 넘길 수 없다. <조선일보>의 선대 사주 방응모와 <동아일보> 김성수는 정부가 공인한 친일반민족행위자다.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2009년 11월까지 4년여 조사 끝에 확정한 1006명에 포함됐고 후손들이 소송까지 걸었으나 대법원은 이들을 친일행위자로 확정 판결했다.

그럼에도 두 언론사는 1985년 서로의 친일행적을 둘러싸고 이전투구의 논쟁을 벌였을 뿐 한번도 국민과 독자 앞에 진지하게 사죄한 적이 없다. 오히려 계기마다 한때의 ‘항일’만 부각하고 홍보할 뿐 ‘친일’의 부끄러운 역사는 여전히 감추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최근 이종걸 민주당 의원이 섣불리 ‘김성수 재평가’ 운운한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선대의 ‘항일’ 공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발언에 신중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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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곳곳에 지뢰를 매설하자. 물론 지뢰는 위험한 폭발물이지만 내가 말하는 지뢰는 그렇지 않다. 흔히 지뢰는 당사자만 아는 은밀한 곳에 설치한다. 내가 설치하고자 하는 지뢰 역시 나만 아는 곳에 한다. 굳이 남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 미리 말하는데, 내가 묻으려는 지뢰는 밟는 즉시 사고와는 반대로 즐거움이 폭발한다. 그러니까 삶의 즐거움을 위한 지뢰매설이라고나 할까.

 

나는 앞에서 지뢰 매설은 당사자만 아는 은밀한 곳이어야한다고 했다. 왜 그런가. 기쁨도 함부로 발설하면 효과가 반감되는 법, 삶의 희열, 기쁨은 속으로 은밀히 간직해야 한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 알아도 안 된다. 시시콜콜하다고 냉소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기쁨이란 서로 나눌 때 배가되지만, 어떤 지뢰든 속성상 조심히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 

 

일상에 매설하는 즐거움이란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할 것 없다. 나만 좋으면 되니 굳이 남에게 자랑할 것도, 떠벌릴 것도 없다. 삶의 곳곳에 매설함으로써 즐거움을 유발하는 지뢰는 생각보다 폭발력이 크지 않다. 대체로 크기사 소형 지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량이 작은만큼 많이 설치하면 효과적이다.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할 것은 일상의 지뢰는 설치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고 철저한 사후 관리가 필수다. 하나더 부언하면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갯수만 매설해야지 과부하 걸릴정도면 오히려 효과는 반감된다. 그러면 그동안 나만 아는곳에 매설한 지뢰 몇 개를 소개하겠다.

 

우선 가장 큰 지뢰인 '문학'부터 시작할까? 문학은 내 평생하는 것. 좋은 소설, 좋은 시 한편을 읽는 것은 그 어떤것보다 큰 기쁨이다. 나는 콘테이너 에 몇 권의 서적, 독서실 사무실에 몇 권 싸놓고, 문학작품을 읽느다. 와중에 문학평론서도 보면서 작품 분석도 하고 글로 옮긴다. 이것은 무상의 희열이자 기쁨이다. 삶의 비좁은 공간, 이 창고같은 공간에서 내가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그것은 문학적 무한한 상상력을 가능할때, 나는 문하작품을 읽을 때 시공간, 역사를 초월해서 맘껏 하늘을 날아다닌다. 그렇게해서 거의 청춘시절 지옥같던 원양어선 새왈르 했고, 공무원 생활도 했다. 만약 이런 지뢰가 없었다면 나의 삶은 그냥 창살없는 감옥에 불과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지뢰는 음악

영화

사상, 철학

글쓰기

비교적 가벼운 지뢰는 커피의 즐거움, 사람과의 만남, 혹은 대화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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