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방금 우리가 존재하는 현재의 양상과 과거의 우리 모습 모두가 문학 덕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만약 책이 사라진다면 역사도 사라지고, 인간 역시 사라질 것이라고 말이죠. 나는 그런 당신의 말이 옳다고 확신합니다. 책은 결코 우리의 꿈, 우리 기억의 자의적인 총합에 불과한 게 아니거든요. 

 

책은 또한 우리에게 자기 초월의 모델을 제공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독서를 일종의 도피로 생각하는데, 가령 현실의 일상적 세계에서 탈피해 상상의 세계, 책들의 세계로 도망가는 출구라고 말이죠. 하지만 책은 단연 그 이상입니다. 온전히 인간이 되는 길이니까요."   - 수전 손택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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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시절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했고, 서로 사랑하지 않았으며, 나를 사랑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야겠다. 소유, 공포, 센티멘털함, 욕망은 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없었다. 이것은 내게 특정한 면에서 결핍되거나 특별히 강하게끔 했다. 내게 결핍된 것은 가족애, 연대 의식, 소속감 같은 것이다. 강화된 것은 사랑에 대한 동경이다. 나는 사랑을 자유, 풍요, 관용, 열정처럼 끝없이 추구한다. 일찍이 단테가 <사랑이야말로 태양과 다른 별들을 움직이는 것이니>라고 말한 것처럼."     - 재닛 윈터슨의 소설 <하룻밤만의 자유>

 

 불행히도 윈터슨과 달리 나에게 강화된 것은 사랑이 아니라 끝없는 지식욕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 즉, 미적 황홀경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사랑 받지 못한 자가 어찌 남을 사랑 할 수 있을까. 기껏 관념속에서나 맴돌겠지. 어쨋거나 차라리 책이 좋았다.

최소한 책과 예술의 세계는 번잡함과 피로감이 없었다. 마치 애완견을 키우듯 나의 독자적인 세계, 내 기분만 염두에 두면 되었으니, 일체 누구 눈치 볼 필요 없는 세계였던 거다. 더구나 예술에의 몰입은 벅찬 황홀경으로 이끌었으니.   

책과 연애하기. 책과 사랑하기. 물론 나도 여느 남자들처럼 여자를 좋아하고 섹스를 좋아한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기쁨 보다 책이 주는 쾌락과 비교 할 수 없다. 책의 향연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은 거의 무한대라도 해도 좋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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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독일의 소설가 페터 바이스의<저항의 미학, 2016>(탁선미 외 역, 문학과지성사/ 전 3권)을 읽게된 계기부터 말해야겠다. 사실 페터 바이스는 최근 그의 대표작 <저항의 미학>을 읽으며 비로소 알았지만 작가 이름은 그리 낯설지 않다. 중앙일보사에서 '오늘의 세계문학 시리즈' 중 한 권으로 간행된 소설 <부모와의 이별>이 오랫동안 서가에 비치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희곡 <마라/사드>도 일찍이 국내 연극계에 잘 알려졌는데, 이 작품의 제목 역시 낯익었지만 원작자가 페터 바이스라는것은 <저항의 미학>을 읽으면서 알았다.  

 

두 달 전 어느 TV프로에서 한국인 남편과 사는 독일 여성 부부를 소개했다. 남편 이희원씨는 미학을 전공하고 현재 대학에 출강하고 있고 그의 독일인 아내는 한때 원주대학에서 독문학을 가르쳤던 전직 교수였다. 그렇잖아도 평소 미학에 관심이 많았던터라 이희원씨의 프로필이 궁금했다. 혹시 번역서나 저서가 있을까 검색해보니 <무감각은 범죄다, 2009>(이루)라는 저서가 출간되었다. 

 

그러니까 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은 다름아닌 이희원씨의 저서 프로필을 통해서 알게된 셈이다. 프로필에 따르면 이희원씨에게 <저항의 미학>은 상당한 영향을 끼쳤나보았다. 나는 처음에 이희원씨의 전공이 미학이고, 페터 바이스의 작품 제목이 <저항의 미학>이라고해서 당연히 미학서인줄 알았다. 그러다 뒤늦게 소설임을 알고 더욱 호기심이 끌렸다. 대체 어떤 소설이기에 미학자에게 그토록 큰 영향을 주었을까 궁금했다. 결과적으로 이희원씨의 저서보다 그가 소개한 책을 먼저 읽게된 셈인데, 말 꺼낸김에 <저항의 미학>이 언급되는 이희원씨의 프로필을 잠깐 소개한다. 

 

(<무감각은 범죄다>의 저자 이희원은)독일 유학 초기, 브레히트 문학을 중심으로 유물론 미학의 다양한 흐름에 관심을 기울이던 중 “『자본론』 이후 최고의 책” 혹은 “20세기의 책”이라고까지 칭송된 『저항의 미학』을 접하게 된다. 미학적 문제제기는 물론이거니와 철학, 사회학, 역사학 등에서 다루어지는 주요 문제들이 ‘변증법적 종합’을 이룬 채 논의되고 있는 이 책에 매료된 순간, 저자의 기나긴 유학 생활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저항의 미학』이 제기하고 있는 미학적 측면의 문제, 즉 ‘왜 예술(활동)은 저항(행위)일 수밖에 없는가?’라는 주제를 탐색해 2000년 브레멘 대학에서 『예술, 앎 그리고 해방―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에 대하여』로 박사 학위(미학 전공)를 받았다. 이 논문은 브레멘 대학의 학술총서 제35권으로 출간되었다.

 

귀국 후, 짧은 기간의 강사 경험을 뒤로하고 귀향했다. 현재는 미학과 관련된 저술 작업을 통해 독자와의 직접적 대화를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진행될 저술 작업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미학적 차원에 대한 성찰과 서구에서 ‘삶의 요소로서 저항’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인정받는 『저항의 미학』을 소개하는 일이 될 것이다.  - 이희원 <무감각은 범죄다> 저자 프로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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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기로 지인이 다니는 교회에 따라간 적이 있다. 교회를 그만둔지 얼추 20여년이 지났는데도 마치 고향을 찾은 듯 반가웠다. 분위기가 익숙해질무렵 순서에 따라 예배 의식이 진행되더니 이윽고 초청 목사의 설교가 이어졌다. 얼마쯤 지났을까, 설교에 열중하던 목사의 톤이 갑자기 높아졌다.

 

- 여러분! 이 교회 역사가 무려 100년에 이르렀고, 출석교인 수가 1,000여명에 육박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함께 한다면, 최소한 도지사 한 명쯤은 배출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자부심을 가지고 그날이 올 때까지 전심전력으로 기도합시다! 할렐루야~

이런 미친~ 탄식이 절로 나왔다. 더욱 놀라운건 그 많은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목사의 말을 당연한 양 받아들였고, 한 수 더 떠 도지사가 아니라 대통령을 배출시켜야 한다는 듯 결연한 표정이었다. 하나를 보면 족히 열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법. 말로만 듣던 교회 실상을 직접 목격하려니 경악할 노릇이었다. 아, 타락해도 너무 타락했구나!

물론 속으로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한 이도 있을 테지만, 은근한 속내를 어찌 드러낼 수 있으랴! 말이 민주화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무엇 하나 있던가?  일개 교인이 목사, 장로 앞에서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부하 직원이 감히 상사에게 대들 수 있을까? 자식이 부모에게, 학생이 교사에게 속내를 함부로 드러낼 수 있을까? 이쯤되면 감옥, 파쇼가 따로 없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알아서들 잘 한다. 시류에 따라 함께 흘러가야 한다고. 그러노라면 엔간한 충격쯤은 무감각해지고 그럭저럭 한 세상 끝난다고. 평소 잘 아는 어떤 교수라는 사람의 말이다.

 

- 고속도로에서는 남들 따라 과속을 해야 합니다. 물론 규정 속도대로 가는 게 안전하고 경제적이지만 건 혼자 생각일뿐이지요. 굳이 규정속도를 지킨다면 뒤따르는 차들에 피해를 주고 정체를 유발하게 됩니다. 급기야 자신도 위험할 수 있고요.

독회에 참석하려고 버스에 탔다. 버스에서 내려 수송동 서재 방향으로 얼마쯤 걷자 최근에 신축한 D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해외 돔 구장처럼  웅장할 뿐 아니라 모던하기까지 하다. 문득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의 본질>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신에 대한 의식은 인간의 자의식이며 신의 인식은 인간의 자기인식이다. 그대는 신으로부터 인간을 인식하며 그리고 다시 인간으로부터 신을 인식한다. 인간은 신과 동일하다. 인간에게 신인 것은 인간의 정신이고 영혼이며, 인간의 정신, 영혼, 마음은 인간의 신이다. 신은 인간의 내면이 나타난 것이며 인간 자체가 표현된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숨겨진 보물이 장엄하게 밝혀지는 것이며 인간의 가장 내적인 사상이 공언되는 것이며 사랑의 비밀이 공공연하게 고백되는 것이다.”  - 포이에르바하 <기독교의 본질> 66쪽(강대석 옮김, 한길사)

“인간이 집 안에서 살고 있듯이 그들의 신들 역시 신전에 가두어놓았다. 신전이란 인간이 아름다운 건물에 부여하는 가치의 표현에 불과하다. 종교의 명예를 위한 신전이 실제로는 건축술의 명예를 위한 전당인 것이다.”   - 같은 책,  76쪽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어느 한 사람 예외없이 욕망 - 가령 물량적 수치 - 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무엇이든 남 보다 많거나 커야 하고, 우수해야 하며 뛰어나야 한다. 죽음의 경쟁판에서는 태어남과 동시에 죽는 순간까지 전력 질주해야 한다. 경쟁에서 뒤지는 순간 천길 나락으로 떨어진다. 무작정 뛰어나야 하고, 웅장하고, 빠르고, 깨끗하며 우수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 역시 크고 쾌적 하며, 최신 설비를 갖춘, 이른바 구매력 있는 상품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단순히 크기만 해서는 안 되고, 개성이 있어야 하며 감히 흉내내지 못할 정도로 표나게 커야 한다. 그래서 돔구장 마냥 웅장하고 개성에 넘친 현대식 건물로 짓는 거다.   

 

단 한 명이라도 더 많아야 우수한 교회가 되고, 이런 교회의 목사래야 신앙 좋다는 소릴 듣는다. 여하튼 신자가 적으면 능력이 부족한 목사이며, 신앙까지 형편없다고 비난 받는다. 바야흐로 우리시대의 목회자는 경영자이자 개그맨이며, 버라이어티 쇼의 MC 이기도 하다. 어젯밤 CBS TV에 요즘 한창 줏가를 올리는 J목사가 출연했다.

 

한동안 설교인지 만담인지를 늘어놓더니, 종당에는 하얀 무대복 차림으로 찬송가까지 몇 곡 불렀다. 바이브레이션이 멋들어진 트롯트 풍의 찬송이었다. 살다 살다보니 별난 찬송도 다 듣겠다. 이러다 랩풍의 찬송가도 등장할 법 하다. 대중문화의 속성을 잘 파악하고 있는 우리시대의 개그맨이자 만담가인 J목사. 그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코미디와 대중문화를 목회에 도입함으로써 단순한 교회경영자로서 만족하지 않고, 한 템포 빠르게 교회 성장의 비결을 제시했다. 

오늘날 교회는 자본주의 욕망이, 지젝 식으로 말하면 비루하고 누추한 실재계의 진실이 영화라는 판타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출현하는 장소다. 그러니 실재계의 진실을 알고 싶다면, 굳이 극장을 찾을 게 아니라 주일날 교회로 가면 될 것이다.     

******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의 본질> 중 제6장 ‘고통받는 신의 비밀’을 읽다보니, 문득 포이에르바하는 경건한 신앙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해석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고통은 진지함을 넘어 그리스도에 대한 애정이 깊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사 경건한 신앙을 가졌을지라도 그는 제도적 교회를 철저히 외면했던 키엘켈고르 같았을 것이다. -  포이에르바하는 자신을 무신론자라 여기지 않았다 - 누가 그런다. “비록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그리스도라는 존재만큼은 감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군요” 라고. 그렇다. 이 점은 나 또한 마찬가지이니. 

흔히 유신론자들은 칸트가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신과의 실존적 만남을 배재했고, 포이에르바하는 신의 자리에 인간을 바꿔치기 했다고 비난 한다. 그러나 나는 칸트와 포이에르바하를 읽으면 읽을 수록 신에 대한 경건함과 종교성이 느껴지니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과연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포이에르바하를 무신론자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고통 그 자체, 고통 능력 일반의 표현인 한에서의 고통을 대표한다. 기독교는 결코 초인적인 종교가 아니며 기독교는 인간의 허약함을 신성화한다. 이교적인 철학자는 자기 아이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받았을 때조차도 '나는 내가 죽을 수밖에없는 인간을 낳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는 말을 한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 적어도 성서의 그리스도는 나사로의 죽음에 대하여 눈물을 흘린다. 소크라테스가 태연하게 독배를 마신 것에 반하여 그리스도는 '가능하다면 이 잔이 비켜가게 하소서' 라고 외친다. 그리스도는 이점에서 인간적 감수성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 같은 책 133쪽

“신 자신이 나를 위하여 고통을 받았다면 신이 고통받은 무대인 이 타락한 지상에서 내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으며 어떻게 나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는가? - 나의 신은 십자가에 달려 있는데 나는 쾌락을 즐겨도 좋을 것인가?(성 암브로시우스) - 내가 신보다도 더 좋은 상태에 있을 수 있는가? 신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가? 나의 주이신 신이 이루는 것을 본받지 않아도 되는가? 믿기만 하고 비용을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가? 나는 신이 나를 구원하였다는 것만을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신이 고통을 받아온 역사도 나의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가? 그것이 나에게 다만 차가운 회상의 대상으로 머물러도 되는가? 혹은 신의 고통이 나에게 축복을 주었기 때문에 기쁨의 대상이 되기만 하면 되는가?  기독교는 고통의 종교이다. 우리가 오늘날 아직도 모든 교회 안에서 만나게 되는 십자가상은 우리에게 구원자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사람, 고통받은 사람을 제시할 뿐이다. “ -  같은 책 133쪽

단언컨대, 위용에 넘치는 바티칸 교황청과 동양 최대라고 자랑하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곳'이 아니라 포이에르바하가 말하듯이 인간의 결핍감에 따른 소망의 투영물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교회는 정확히 자본주의라는 체계, 자본의적 욕망이 고스란히 재현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체계 속에서 개인의 자율적 의지는 철저히 봉쇄되기에 이르렀고, 체계와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거대 집단은 수동적으로 뒤따를 뿐이다.

 

나는 지금, 한국교회의 놀라운 양적 성장과 최신음향을 갖춘 첨단 설비, 주일마다 교회를 향하는 말쑥한 차림의 선남선녀를 보며, 또 그들의 얼굴에 넘친 행복하고 안락한 평화를 보며, 역설적이게도 묵시록적인 지구종말을, 나아가 그리스도의 어찌할 수 없는 장탄식만을 발견한다. 테오앙겔로풀로스의 <영원과 하루> 에 나오는 대사 한 토막이다. "늦었다!"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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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식으로 아는것과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어떤 책을 읽은 것만으로 마치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양 착각한다. 하긴 그 책을 쓴 저자조차도 이점에서 자유롭지 않으니 독자야 오죽하랴. 따라서 최종적으로 중요한 점은 알고 있는바를 실천했느냐 안 했느냐다. 살면서 누구나 괴리감을 느낀다. 가령 현실/이상, 지식/실천, 생각/실천 사이의 괴리감 등등. 중요한 것은 이런 괴리감, 간극을 좁히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 얼마나 좁혔는가가 최종 문제다.

2
거칠고 비논리적인 세상을 고상하게, 교양있게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 산속 절간의 중이 아닌담에야 어찌 매사에 초연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이 도도한 자본의 시대에....

3
당장 이해가 안 되는 책은 일단 덮자. 제아무리 위대한 명저라도 지금 이해 할 수 없다면 시도는 하되 미련두지 말고 유보하자. 내가 독서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않다. 잘해야 15년 정도? 이쯤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4
변덕스럽고 좁아터지고 소심하고 줏대가 없고 이기적이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없고 쉽게 화를 내고 다혈질적이고 호오가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깊이가 없고 쉽게 포기하고 원칙이 없고....이것이 나의 실제 모습이다. 어쩌랴! 이렇게 생겨먹은 것을...그나마 위로는 몽테뉴의 에세 한 대목이다. 그 역시 나와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

5
미리 죽음을 준비하기. 우선 일상 속에서 죽음을 자주 떠올리고, 배우기. 둘째, 내일은 없다.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것. 다음으로 죽음을 공부하기. 죽음에 따른 두려움과 공포 감정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기. 죽음을 당하지 말고 맞이하기. 오랜 세월 거친 세상에 살았는데, 떠나는 순간 어찌 아프지않고, 힘들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조차 견뎌야 하는게 인생살이다. 한 해를 보낼때마다 최대한 기록을 남길것.

죽음이 눈앞에 닥쳐왔다. 어떻게 할 것인가. 1)황당하고 두렵다 2)정신을 차리고 차분해진다 3)받아들이고 수용한다 4)통증 완화제를 쓰며 육체적 고통을 견딘다 5)가능한 한 병석에서라도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보낸다 6)단 한 문장이라도 책읽고, 명상하고, 이야기하기 7)의식이 있는 한 몸과 복장은 품위있게 단정하게 깨끗하게 8)가능한한 집에서 보낼것 9) 유머, 웃음을 잃지 않기 10)모두에게 감사하기.

6
마이클 레드포드 감독의 <일포스티노>. 황지우는 같은 제목의 시에서 "나도 가해자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가해자! 영화 후반부 장면에서 시인 지망생이자 네루다의 전담 우편배달부인 마리오는 네루다에 바치는 시를 낭독하기 위해 연단에 오르던 중 시위대 무리의 발에 밟혀 결국 압사당한다.

마리오의 경우 시는 사랑스런 아내와 어린 아기, 그리고 아름다운 섬의 풍경을 노래하는 행위 그 자체다. 반면에 네루다의 경우 시는 이른바 참여시, 정치적인 주제로 나아간다. 따라서 마리오의 죽음은 네루다의 시적행위가 민중으로 승화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황지우는 '가해자'를 떠올린다. 즉 시가 정치적으로 되는 순간 마리오의 죽음, 시의 죽음에 직면한다는 거다. 참여시와 순수시의 대립 속에서 시적 순수성이 깨지는 것. 그것이 곧 마리오의 죽음이고, 황지우는 "나도 한 사람의 가해자가 아닌가" 라며 회한에 잠긴다.

7
도올 김용옥의 박식함은 실로 엄청나다. 문사철은 물론이고, 종교, 정치, 사상을 가로지르며 음악, 미술 등 온갖 분야를 섭렵한다. 우리사회에서 흔치않은 르네상스적 지식인이 분명하다. 특히 대중을 상대로 한 고전 강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엔티테이너 기질은 물론이고, 매스미디어를 활용하는 테크닉은 가히 독보적이다. 뿐만인가. 그토록 복잡하고 심오한(?) 동양사상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안내한다. 그러나 학자,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은 좀 문제가 있다. 가령 독창성이 결여되었고, 잡다한 관심으로 인한 전문성 결여(학문적 깊이 결여). 동양학내지 국학에 대한 과잉집착 내지는 과장, 학자.학문으로서 객관성 결여 등등.

 

학자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대중계몽, 다른 하나는 자기 분야의 전문적 학자. 짐작컨대 도올은 이중에서 전자를 선택한 것 같다. 여하튼 그의 수많은 저서들은 대중에게 다양한 지식을 체득케하는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학문적 성과, 사상가, 독창적 저술로서는 함량미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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