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계기로 지인이 다니는 교회에 따라간 적이 있다. 교회를 그만둔지 얼추 20여년이 지났는데도 마치 고향을 찾은 듯 반가웠다. 분위기가 익숙해질무렵 순서에 따라 예배 의식이 진행되더니 이윽고 초청 목사의 설교가 이어졌다. 얼마쯤 지났을까, 설교에 열중하던 목사의 톤이 갑자기 높아졌다.

 

- 여러분! 이 교회 역사가 무려 100년에 이르렀고, 출석교인 수가 1,000여명에 육박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함께 한다면, 최소한 도지사 한 명쯤은 배출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자부심을 가지고 그날이 올 때까지 전심전력으로 기도합시다! 할렐루야~

이런 미친~ 탄식이 절로 나왔다. 더욱 놀라운건 그 많은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목사의 말을 당연한 양 받아들였고, 한 수 더 떠 도지사가 아니라 대통령을 배출시켜야 한다는 듯 결연한 표정이었다. 하나를 보면 족히 열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법. 말로만 듣던 교회 실상을 직접 목격하려니 경악할 노릇이었다. 아, 타락해도 너무 타락했구나!

물론 속으로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한 이도 있을 테지만, 은근한 속내를 어찌 드러낼 수 있으랴! 말이 민주화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무엇 하나 있던가?  일개 교인이 목사, 장로 앞에서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부하 직원이 감히 상사에게 대들 수 있을까? 자식이 부모에게, 학생이 교사에게 속내를 함부로 드러낼 수 있을까? 이쯤되면 감옥, 파쇼가 따로 없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알아서들 잘 한다. 시류에 따라 함께 흘러가야 한다고. 그러노라면 엔간한 충격쯤은 무감각해지고 그럭저럭 한 세상 끝난다고. 평소 잘 아는 어떤 교수라는 사람의 말이다.

 

- 고속도로에서는 남들 따라 과속을 해야 합니다. 물론 규정 속도대로 가는 게 안전하고 경제적이지만 건 혼자 생각일뿐이지요. 굳이 규정속도를 지킨다면 뒤따르는 차들에 피해를 주고 정체를 유발하게 됩니다. 급기야 자신도 위험할 수 있고요.

독회에 참석하려고 버스에 탔다. 버스에서 내려 수송동 서재 방향으로 얼마쯤 걷자 최근에 신축한 D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해외 돔 구장처럼  웅장할 뿐 아니라 모던하기까지 하다. 문득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의 본질>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신에 대한 의식은 인간의 자의식이며 신의 인식은 인간의 자기인식이다. 그대는 신으로부터 인간을 인식하며 그리고 다시 인간으로부터 신을 인식한다. 인간은 신과 동일하다. 인간에게 신인 것은 인간의 정신이고 영혼이며, 인간의 정신, 영혼, 마음은 인간의 신이다. 신은 인간의 내면이 나타난 것이며 인간 자체가 표현된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숨겨진 보물이 장엄하게 밝혀지는 것이며 인간의 가장 내적인 사상이 공언되는 것이며 사랑의 비밀이 공공연하게 고백되는 것이다.”  - 포이에르바하 <기독교의 본질> 66쪽(강대석 옮김, 한길사)

“인간이 집 안에서 살고 있듯이 그들의 신들 역시 신전에 가두어놓았다. 신전이란 인간이 아름다운 건물에 부여하는 가치의 표현에 불과하다. 종교의 명예를 위한 신전이 실제로는 건축술의 명예를 위한 전당인 것이다.”   - 같은 책,  76쪽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어느 한 사람 예외없이 욕망 - 가령 물량적 수치 - 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무엇이든 남 보다 많거나 커야 하고, 우수해야 하며 뛰어나야 한다. 죽음의 경쟁판에서는 태어남과 동시에 죽는 순간까지 전력 질주해야 한다. 경쟁에서 뒤지는 순간 천길 나락으로 떨어진다. 무작정 뛰어나야 하고, 웅장하고, 빠르고, 깨끗하며 우수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 역시 크고 쾌적 하며, 최신 설비를 갖춘, 이른바 구매력 있는 상품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단순히 크기만 해서는 안 되고, 개성이 있어야 하며 감히 흉내내지 못할 정도로 표나게 커야 한다. 그래서 돔구장 마냥 웅장하고 개성에 넘친 현대식 건물로 짓는 거다.   

 

단 한 명이라도 더 많아야 우수한 교회가 되고, 이런 교회의 목사래야 신앙 좋다는 소릴 듣는다. 여하튼 신자가 적으면 능력이 부족한 목사이며, 신앙까지 형편없다고 비난 받는다. 바야흐로 우리시대의 목회자는 경영자이자 개그맨이며, 버라이어티 쇼의 MC 이기도 하다. 어젯밤 CBS TV에 요즘 한창 줏가를 올리는 J목사가 출연했다.

 

한동안 설교인지 만담인지를 늘어놓더니, 종당에는 하얀 무대복 차림으로 찬송가까지 몇 곡 불렀다. 바이브레이션이 멋들어진 트롯트 풍의 찬송이었다. 살다 살다보니 별난 찬송도 다 듣겠다. 이러다 랩풍의 찬송가도 등장할 법 하다. 대중문화의 속성을 잘 파악하고 있는 우리시대의 개그맨이자 만담가인 J목사. 그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코미디와 대중문화를 목회에 도입함으로써 단순한 교회경영자로서 만족하지 않고, 한 템포 빠르게 교회 성장의 비결을 제시했다. 

오늘날 교회는 자본주의 욕망이, 지젝 식으로 말하면 비루하고 누추한 실재계의 진실이 영화라는 판타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출현하는 장소다. 그러니 실재계의 진실을 알고 싶다면, 굳이 극장을 찾을 게 아니라 주일날 교회로 가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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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의 본질> 중 제6장 ‘고통받는 신의 비밀’을 읽다보니, 문득 포이에르바하는 경건한 신앙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해석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고통은 진지함을 넘어 그리스도에 대한 애정이 깊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사 경건한 신앙을 가졌을지라도 그는 제도적 교회를 철저히 외면했던 키엘켈고르 같았을 것이다. -  포이에르바하는 자신을 무신론자라 여기지 않았다 - 누가 그런다. “비록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그리스도라는 존재만큼은 감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군요” 라고. 그렇다. 이 점은 나 또한 마찬가지이니. 

흔히 유신론자들은 칸트가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신과의 실존적 만남을 배재했고, 포이에르바하는 신의 자리에 인간을 바꿔치기 했다고 비난 한다. 그러나 나는 칸트와 포이에르바하를 읽으면 읽을 수록 신에 대한 경건함과 종교성이 느껴지니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과연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포이에르바하를 무신론자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고통 그 자체, 고통 능력 일반의 표현인 한에서의 고통을 대표한다. 기독교는 결코 초인적인 종교가 아니며 기독교는 인간의 허약함을 신성화한다. 이교적인 철학자는 자기 아이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받았을 때조차도 '나는 내가 죽을 수밖에없는 인간을 낳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는 말을 한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 적어도 성서의 그리스도는 나사로의 죽음에 대하여 눈물을 흘린다. 소크라테스가 태연하게 독배를 마신 것에 반하여 그리스도는 '가능하다면 이 잔이 비켜가게 하소서' 라고 외친다. 그리스도는 이점에서 인간적 감수성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 같은 책 133쪽

“신 자신이 나를 위하여 고통을 받았다면 신이 고통받은 무대인 이 타락한 지상에서 내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으며 어떻게 나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는가? - 나의 신은 십자가에 달려 있는데 나는 쾌락을 즐겨도 좋을 것인가?(성 암브로시우스) - 내가 신보다도 더 좋은 상태에 있을 수 있는가? 신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가? 나의 주이신 신이 이루는 것을 본받지 않아도 되는가? 믿기만 하고 비용을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가? 나는 신이 나를 구원하였다는 것만을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신이 고통을 받아온 역사도 나의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가? 그것이 나에게 다만 차가운 회상의 대상으로 머물러도 되는가? 혹은 신의 고통이 나에게 축복을 주었기 때문에 기쁨의 대상이 되기만 하면 되는가?  기독교는 고통의 종교이다. 우리가 오늘날 아직도 모든 교회 안에서 만나게 되는 십자가상은 우리에게 구원자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사람, 고통받은 사람을 제시할 뿐이다. “ -  같은 책 133쪽

단언컨대, 위용에 넘치는 바티칸 교황청과 동양 최대라고 자랑하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곳'이 아니라 포이에르바하가 말하듯이 인간의 결핍감에 따른 소망의 투영물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교회는 정확히 자본주의라는 체계, 자본의적 욕망이 고스란히 재현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체계 속에서 개인의 자율적 의지는 철저히 봉쇄되기에 이르렀고, 체계와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거대 집단은 수동적으로 뒤따를 뿐이다.

 

나는 지금, 한국교회의 놀라운 양적 성장과 최신음향을 갖춘 첨단 설비, 주일마다 교회를 향하는 말쑥한 차림의 선남선녀를 보며, 또 그들의 얼굴에 넘친 행복하고 안락한 평화를 보며, 역설적이게도 묵시록적인 지구종말을, 나아가 그리스도의 어찌할 수 없는 장탄식만을 발견한다. 테오앙겔로풀로스의 <영원과 하루> 에 나오는 대사 한 토막이다. "늦었다!"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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