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이후 대한민국은 ‘입헌국’(立憲國)이 아니라 ‘무속국’(巫俗國)이었다.   - 조국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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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북노회 정기노회에서 목사고시후보생 공인식을 했습니다. 이번 8월에 목사후보생 고시에 응시한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 홀로 강단에 올라가 선서와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노회장 목사님께서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북노회는 김용민 씨를 목사고시후보생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말씀을 하시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배제, 퇴출, 추방에 익숙한 저같이 모난 사람을 받아주는 공조직이 아직 세상에 남아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같은 사랑을 갚는 길은 저 역시 정치 자본권력으로부터 배제, 퇴출, 추방을 당한 외로운 분들과 함께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0:24)        - 김용민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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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까지 우중충한데다 종일 최순실게이트건으로 기분이 무겁고 찜찜하다. 오후가 되자 자꾸 시계쪽으로 시선이 간다.  불길한 소식을 이토록 기다리다니... 저녁 9시 JTBC 뉴스룸을 기다리는 심정은 정말이지 애가 타들어간다. 이런 식의 긴장과 초조로 뉴스를 기다리기는 아마 IMF 이후 처음일 것이다.    

 

식탁을 거실로 옮기고 뉴스 시청하며 식사를 했다. 기다리던 손석희 앵커가 등장하자 시작도 하기 전에 가슴이 벌렁거린다. 과연 어떤 소식을 전해줄지 앵커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믿음직스럽다. 앵커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느닷없이 떨려온다. 왜 이러지? 마치 내가 큰죄를 진 기분이다.    

 

숟가락이 입에 들어가는지 마는지 테레비에만 온 시선을 집중했다. 드디어 뉴스가 끝나자 거의 맨붕 상태가 되었다. 아, 대체 이 나라는 어데로 흘러가는걸까. 우울한 기분에 하릴없이 컴퓨터만 들여다봤다. '다음' 포탈에서 가슴 찡한 댓글을 하나를  우연히 발견하고 여기에 옮긴다. 댓글은 그때그때의 심정을 간단히 쓰기 마련이라 정제된 글과 다르다. 하지만 이것저것 고려하지 않고 쓰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는 더욱 진솔할수도 있다.      

 

"자고일어나면 가슴아픈 사건 사고가 너무 많이 일어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아픕니다. 대한민국이 아프고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아픕니다.

아픈데 아프다고 말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 현실이 더욱더 아픕니다.

한 여자가 내가 사랑하는 대한민국을 조종하고 있었다, 라는 현실에 기가막힙니다.

대국민사과를 보면서 얼마 전까지 기고만장 배째라는 식으로 진실을 숨기려했던,

국가의 녹을 먹는 자들의 행동이 생각나서 더욱더 치가떨립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들과 더불어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게 지극히 정상이건만

10년을 설치류와 조류와 무당이 인간 세상을... 휴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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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나린 2016-10-25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봉건시대도 아니고..아바타 에게 내 나라를 맡겼다는 사실이 통탄스럽습니다.아이에게 부끄러울 노릇입니다.ㅜㅜ

조율연 2016-10-26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젯밤 JTBC 뉴스에 이어 오늘 아침 한겨레 기사를 보고 두 번 놀랍니다. 한 나라의 정치를 일개 강남아줌마, 가방장사, CF감독, 부동산업자 등 몇 명이서 들었나놨다 했다니.....더욱 놀라운건 그들을 지휘했던 강남아줌마의 식견이 전문성이 전혀 없는 보통 사람 수준에 불과했군요. 이쯤되면 절망적입니다.

조율연 2016-10-26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 이 지경이 되도록 이 나라의 잘난 지식인들, 종교지도자들, 언론, 정치인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테레비만 켜면 연일 뉴스를 쏟아내는데 왜 이제야 이런 소식이 한꺼번에....믿을 수 있는 정론이라는게 겨우 티브이 방송 하나, 일간신문 하나뿐이니....
 

1. 군산은 항구다

 

오늘 아침 명산동 군여고 근처에 다녀오다 한 아파트 벽에 눈길이 갔다. 한동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던 시인의 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고은의 <내 고향 군산>이라는 시가 알록달록 벽화와 함께 쓰여있었다. 비록 금년도 노벨문학상은 뜬금없이 한 팝송 가수에게 돌아갔지만 우리는 언젠가 위대한 고은 시인이 수상할것임을 굳게 믿고 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그것만으로 민족의 자긍심이 한껏 드높아진다. 국민모두가 일치단결 금메달을 염원하자 결국 한 개 두 개, 아니 수십 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까짓 노벨문학상이 대수랴, 민족 모두가 염원한다면 언젠가 우리의 호프 고은 시인은 기필코 수상하고야 말것이다. 더구나 그는 한때 민주투사로써 민족과 고향을 노래한 위대한 시인이 아니던가. 그의 시편 하나하나는 우리 모두에게 심금을 울리며 절절한 감동을 함께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파트 귀퉁이에 쓰인 '뱃고동 소리'라는 싯구를 보는 순간 얼마전에 벌어졌던 카뮈의 <이방인> 번역 논쟁이 문득 떠올랐다. 카뮈는 불과 20대 나이에 쓴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은, 아니 우리의 뱃고동과 프랑스제 카뮈의 뱃고동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궁금했다.  

 

그러기에 앞서 우선 우리고장의 자랑이며 국민의 희망인  위대한 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하니 모쪼록 깊은 감동을 느껴보시기 바란다.

 

내 고향 군산은

한밤중에도

뱃고동 소리가 들리는 곳

내 고향 군산은

뱃고동 소리에

아이들이 돛대처럼 자라는 곳

내 고향 군산은

오늘도 누가 떠나는 곳

안개 걷히우면

누가 돌아오는 곳       - 고은의 시 <내 고향 군산>

 

 

항구의 뱃고동 소리~ 순간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뭐라 표현 할 수 없는 떨림, 울림이 함께 전해지지 않는지. 뭔가 위대하고 숭고한 미적 감동이랄까, 모종의 인스피레이션이 휘리릭 스쳐가지 않는지. 좌우지간 우리것이 좋은 것이여~ 역시 고은! 이라는 찬탄이 절로 나오지 않는지.

 

그렇지 않다고? 그냥 맹물 마신것 맹키로 맨숭맨숭하다고? 그럴리가, 절대 그럴리 없다. 우리의 위대한 시인의 시인데 어찌 감동이 없을손가. 정말 그렇다면 외국 팝송가수에게 할말이 없어진다. 부탁한다. 수고스럽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감상해 보시기 바란다. '목포가 항구'면 기필코 내 고향 군산도 항구이므로........ 

 

 

2. 사이렌파와 뱃고동파  

 

연전에 카뮈의 <이방인>(새움)을 번역한 이정서(새움출판사 대표)가 카뮈를 전공한 불문학자 김화영 교수의 <이방인>(민음사, 책세상) 번역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지적한바 있다. 이를 두고 양측이 가세한 논쟁으로 한동안 지면을 뜨겁게 달군적이 있는데, 다음은 당시 오간 내용 일부이다 . (* 이하 글은 서평가 로쟈(이현우)의 블로그에서 옮긴것임. http://blog.aladin.co.kr/mramor/)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민음사판, 135쪽)

여기서 문제가 된 건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라는 문장이다. 불어 원문은 "À ce moment, et à la limite de la nuit, des sirènes ont hurlé."이다. 이에 대해 이정서는 이렇게 비판한다.

보다시피 김화영은 여기서 limite를 '끝'으로, sirènes를 '뱃고동'으로 보고 저렇게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 하여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린" 게 아니라, "한밤의 경계선에서 (감옥의) 사이렌 소리가 울린" 것이다. 여기서 김화영이 다시 이런 기본적인 단어를 오해한 것은 다음 문장, '한 세계로의 출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세계로 떠나가는 '배'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저 말은, 이제 날이 밝으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뫼르소가 자신이 죽은 다음의 이 세계는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앞에서 자신이 한 말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다.(새움판, 8-9쪽)

이런 판단에서 이정서는 문제의 대목을 이렇게 다시 옮겼다.

그때, 한밤의 경계선에서 사이렌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이제 영원히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새움판)

내가 갖고 있는 불어 실력은 빈약해서 sirène이란 단어가 어떤 뉘앙스의 의미들을 갖는지, 단수와 복수의 차이는 없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한데 이정서의 말처럼 그렇게 단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김화영이 '한 세계로의 출발'이라는 말과의 조응을 고려하여 '사이렌 소리'를 '뱃고동 소리'로 옮긴 것에 견주면 그냥 '사이렌'이라고 한 것은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는 말과의 연결고리를 과소평가했다는 인상을 준다. 한밤의 경계라면 12시를 가리키는가? 감옥에선 12시에 그런 사이렌이 울리는지도 확인해볼 문제이지만, 한밤중에 울리는(게다가 울부짖는!) 감옥의 사이렌 소리가 어째서 '세계로의 출발'과 이어지는지 불분명하다. 그 새로운 세계가 뫼르소가 죽은 다음의 세계를 가리킨다면, 더 적절한 건 한밤의 사이렌이 아니라 새로운 아침을 알리는 새벽 6시의 기상 사이렌 같은 것이다(군대에서처럼 감옥에서도 기상 사이렌이 울린다고 하면). 그리고 limite란 단어도 '경계'라는 뜻도 포함하지만 일차적인 의미는 '끝'이나 '가장자리' 아닌가?

 

 

 

 

 

다른 번역본들에서 어떻게 처리했는지 궁금해 찾아봤다. <이방인>의 번역본도 꽤 여러 종 갖고 있는 편인데 다 찾을 수는 없고 눈에 띄는 몇 권만 책장에서 빼왔다(시공사에서 나온 최수철본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주요 번역본을 망라하고 있는 듯한데, 먼저 '원조' 번역본이라고 할 이휘영본(문예출판사)은 이렇게 옮겼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에게는 영원히 관계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는 것이었다.(문예출판사판)

가장 먼저 이루어진 번역본이라 김화영본도 참고한 번역이다. 그러니까 이 대목에서 "그때 밤의 저 끝에서 사이렌이 울렸다"를 좀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한국어 '사이렌'에서는 '뱃고동 소리'를 떠올리기 어렵다. 뫼르소가 아무리 선박회사 직원이라 하더라도) 김화영은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라고 고쳐 옮겼던 것. 또 다른 번역으로 김예령본(열린책들)도 '사이렌파'에 속한다.

그 순간, 밤의 경계선을 타고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소리는 이제 나와는 영원히 무관한 세상을 향해 출발을 고하고 있었다.(열린책들판)

반면에 또다른 카뮈 전공자인 이기언은 <이인>(문학동네판)에서 이렇게 옮겼다(지나는 김에 말하자면 <이방인>이란 제목을 <이인>으로 옮긴 건 역자나 출판사의 패착이며, '二人'과 '異人', 두 가지를 뜻하는 의미에서 <이인>으로 고쳤다는 해명도 설득력 빈곤이다).

그 순간, 밤이 시작되려는 바로 그때, 고동소리들이 울려퍼졌다. 고동소리는 이제 나와는 영원히 무관해져버린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문학동네판)

'밤의 끝'이나 '밤의 경계'로 옮겨진 문구는 '밤이 시작되려는 바로 그때'라고 풀어서 옮겼다. 그리고 이기언은 sirènes가 복수형인 걸 고려해서 '고동소리들'이라고 옮겼다. 부두에서 출항하는 배가 연거푸 내는 소리다(내가 아는 상식으론 군대나 감옥에서 나오는 사이렌 소리는 길게 한번으로 그칠 것 같다). 아무튼 그래서 이기언본은 김화영본과 함께 '뱃고동파'로 분류될 수 있겠다(최수철본은 어디에 속하는지 미확인이다).

 

 

 

 

영역본들은 어떨까. 역자도 불분명하기에 제대로 된 번역본이라고 할 수 없지만, 영역본도 같이 묶인 베스트트랜스본(더클래식판)에서 찾아보니 이렇게 돼 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는데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는 소리였다.(더클래식판)

이것은 영역본 "Then, just on the edge of daybreak, I heard a steamer's siren."에 대응하는 것이다(이 영역본에 따르면 '막 동틀무렵' 뱃고동소리를 들은 게 된다). 펭귄에서 나온 모던클래식판에서는 "At that point, on the verge of daybreak, there was a scream of sirens. They were announcing a departure to a world towards which I would now be forever indifferent."라고 옮긴 대목이다. 영역본들은 la limite de la nuit를 '새벽' 혹은 '동틀녘'으로 옮기는 모양이다. '밤이 시작되려는 그때'라거나 '한밤의 경계선'과는 해석이 많이 다르다. 사실 limite는 시간적 의미뿐 아니라 공간적 의미도 갖는 단어다(아니 공간적 의미가 더 우선적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la limite de la nuit '어둠의 저 끝' 정도의 뜻으로 새길 수도 있다. 밤의 어둠 저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는 것으로.

 

정리하자. 새움판 새 번역 <이방인>에서 역자는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는 문장을 근거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라고 '탄핵'했지만, 나는 '사이렌 소리' 대신에 '뱃고동 소리'라고 옮길 만한 근거도 있으며 그렇게 옮긴 번역본도 적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다. 그리고 어느 편이냐를 묻는다면, 적어도 이 대목에서만큼은 '뱃고동파'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번역은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고 단언할 만큼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그런 번역이라면 구글이 더 잘할 수 있다). <이방인>의 인용 준거가 되려는 번역이라면, 좀더 많은 걸 살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로쟈 (이현우, 서평가)

 

3. 다시 뱃고동 소리

 

일전에 <이방인> 마지막 대목에서 사이렌 소리와 뱃고동 소리, 두 가지로 번역된 걸 제시하자(로쟈의 위의 글) 새움판 번역자인 이정서는 이렇게 반응했다.

김화영의 이 오역의 시발은 어디서부터일까? 사실 나는 알고 있다. 그건 로쟈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휘영 교수의 번역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소린가, 하면 김화영 교수 역시 자신의 스승인 이휘영 교수의 번역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나는 정말이지 보고 싶지 않았다. 언급하고 싶지도 않았다. 거기까지 가면, 정말이지 이 나라의 도제 시스템이 만들어낸 학문 체계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 밝히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듯  로쟈라는 젊은 후학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보고 싶지 않았던, 의식적으로 외면했던 이휘영 교수의 <이방인>을 끝내 보게 하고 말았다.

이런 반응에서 나는 역자가 얼마나 자기도취적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방인>의 최초 번역자인 이휘영본이 문제의 시발점이라면 애초에 김화영본이 아니라 이휘영본을 문제삼았어야 논리에 맞다. 도제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기에 김화영본도 이휘영본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게 하고 싶은 말 아닌가(지나는 김에 말하자면 나는 이정서라는 선학을 둔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전 페이퍼에서 내가 인용한 대로 사이렌 대목은 이휘영본과 김화영본이 다르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에게는 영원히 관계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는 것이었다.(이휘영본, 문예출판사)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김화영본, 민음사)

이정서의 근거 없는 예단에 어긋나게도 이 대목에서 김화영은 스승의 번역을 무시하고 감히 반역을 시도하고 있다. 내 식으로 분류하면 '사이렌파'와 '뱃고동파'가 그렇게 갈라졌던 것이다. 이정서가 이 대목의 '뱃고동 소리'를 '사이렌'으로 다시 번역한 건 사실 전혀 새롭지 않다. 맨 처음 번역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거기에 얹어 '밤의 경계'라는 어색한 말로 얼버무린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데, 이 문제 제기에 답하면서 이정서는 엉뚱하게도 거기에 이어지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김화영)는 문장에 대한 시비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내가 그 대목을 빼먹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서문(역자의 말)에 무얼 적어놓았는지도 확인하지 않은 걸까? 그가 8-9쪽에서 문제삼은 건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두 문장이다. 반복이지만,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보다시피 김화영은 여기서 limite를 '끝'으로, sirènes를 '뱃고동'으로 보고 저렇게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 하여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린" 게 아니라, "한밤의 경계선에서 (감옥의) 사이렌 소리가 울린"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다.(새움판, 8-9쪽)

이정서의 주장에 따르면 이 대목이 김화영 오역의 화룡점정이자 피날레다. 애초에 내가 이 대목을 문제삼은 건 그 때문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결정적인 오역이라고 서문에서부터 표나게 윽박지르고 있는 이 대목이 사실은 오역이 아니라는 것. 마무리에서 이렇게 적었다.

정리하자. 새움판 새 번역 <이방인>에서 역자는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는 문장을 근거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라고 '탄핵'했지만, 나는 '사이렌 소리' 대신에 '뱃고동 소리'라고 옮길 만한 근거도 있으며 그렇게 옮긴 번역본도 적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다. 그리고 어느 편이냐를 묻는다면, 적어도 이 대목에서만큼은 '뱃고동파'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번역은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고 단언할 만큼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그런 번역이라면 구글이 더 잘할 수 있다). <이방인>의 인용 준거가 되려는 번역이라면, 좀더 많은 걸 살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더러 불어와 전공인 러시아어판을 비교해보라고 충고까지 했지만, 그 페이퍼는 이미 러시아어판 외에 몇 개 국어판을 살펴본 다음에 쓴 것이다. 러시아어판에서도 '뱃고동 소리'(пароходные гудки)라고 옮기고 있어서 더 확신을 갖고 말한 것이다. 그렇게 옮긴 영어판이나 러시아어판 모두 엉터리이며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사례일까? 하긴 <이방인>을 유일무이하게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자임하는 역자에게 이런 식의 방증이 통할지는 의문이지만, 다른 이들이 그런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하하거나 모욕할 권리는 없다.  - 로쟈(이현우, 서평가)

 

4 뱃고동도 뱃고동 나름

 

인내심을 갖고 여기까지 글을 읽으신 분은 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글의 맥락이 어째 요상하다고 느끼실지 모르겠다. 대체 이 글을 쓴 이유가 무엇이냐, 고은의 뱃고동과 카뮈의 뱃고동이 어쨌단 말이냐, 대체 <이방인>번역 오류 논쟁을 왜 이렇게 길게 인용했냐고.

 

뭐 이미 눈치챘겠지만 나는 고은의 시를 아주 시시하게 여긴다. 대체 이런 시인에게 무슨 노벨문학상을....그렇다고 내가 노벨문학상 따위를 뭐 대단하게 여겨서 그런게 아니다. 단지 고은의 시세계가 세계적인 수준과 겨루기엔 좀 미흡한감이 없지않나 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글의 앞뒤 맥락이 맞지 않아 보인다면 아마 고은의 시를 언급한 처음 글과 카뮈의 <이방인> 번역 논쟁을 나란히 병치한 것, 그리고 번역 오류논쟁 관련 글을 길게 인용한 것 때문일텐데, 이유는 이렇다. / 작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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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계절에 열린 파주 북소리 축제      (파주=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국내 최대 책 축제인 '2016 파주북소리 축제' 마지막 날인 3일 행사가 열린 파주출판도시에서 시민들이 지혜의 숲 대형 책장 앞을 지나고 있다. 2016.10.3      jjaeck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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