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자 중앙일보에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번역에 관한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다. 다음은 기사 중 일부 내용.

 

문학평론가 정과리는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의 영어 번역이 한글 원작을 훼손한 작품 창작 수준이라는 주장했다. 일부 단어가 번역 생략되고, 원본에는 없는 영어 문장이 생기기도 했다는거다. 그로인해 작품의 의미가 작가의 원래 의도에서 변질됐다고 한다. 그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가능한가 ?’라는 제목의 글에서 채식주의자 의 첫 문단을 문제 삼았다 . 한글 원문과 2010 년 자넷 홍의 영어 번역 , 작가 한씨에게 맨부커인터내셔널상을 안긴 영국인 데버러 스미스 (29)2015 년 번역을 아래와 같이 비교했다 .

 

주인공 영혜의 외모를 묘사하는 대목에서 각질이 일어난 노르스름한 피부 라는 구절을 자넷 홍은 ‘She had chapped sallow skin’으로 , 스미스는 ‘jaundiced, sickly-looking skin’으로 각각 번역했다 . 자넷 홍이 ‘chapped’로 번역한 각질이 일어난 에 해당되는 영어 번역이 스미스의 번역본에는 없다는 얘기다 . 남편이 아내 영혜의 외모에서 평범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스미스는 원문에는 없는 두 문장 ‘told me all I needed to know’ ‘I couldn’t help but notice her shoes’를 차례로 집어넣었다 . 그 결과 평범하던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되고 나서 특별한 사람이 됐다 는 원작의 취지가 스미스 번역본에서는 영혜는 특별할 정도로 평범한 사람이었다 는 식으로 느낌이 달라졌다는 게 평론가 정과리의 주장이다.

 

한편 문학평론가 조재룡은 계간 문학동네 봄호에 발표할 글에서 한국어를 배운 지 3 년밖에 되지 않은 스미스의 한국어 실력 부족으로 인해 한글 원본에서 주어를 생략한 문장의 경우 이를 잘 살리지 못하는 등 오역으로 볼만한 대목들이 상당히 있다 고 주장한다 . 그는 거의 작품 리라이팅 수준인데 , 스미스의 영어 문장 자체는 뛰어나며 그렇기 때문에 상을 받은 것이어서 , 맨부커 수상은 한글 원본 채식주의자 의 승리가 아니라 영어판 Vegetarian 의 승리 라고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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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 시골길, 봉숭아 꽃무리 앞에 발길이 멎었다. 다른 꽃은 없고 붉은색, 분홍색, 하얀색 봉숭아 꽃잎으로 가득찬 쬐그만 화단이었다. "봉숭아 물을 들여보면 어떨까?" 아내 역시 좋겠다고 했다. 화단 주인의 허락을 얻고 빨간 봉숭아 꽃잎을 땄다.

"봉숭아 물을 들이다" 라는 표현이 예뻐 입 속으로 말해봤다. "봉숭아 꽃물 들이다". 봉숭아 꽃물이 손톱에 잘 배이기 하려면 꽃잎과 이파리를 함께 사용해야 하고, 약간의 백반이 필요하다고. 

예전에는 꽈리도 심심찮게 눈에 띠었는데 요즘은 시골에서도 꽈리를 보기 힘들다. 꽈리로도 물 들일 수 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꽈리....문득 대구 '물빛' 동인인 김세현의 시 한 편이 떠오른다.

그대를 보내고 나는 꽈리를 불고 싶었다

씨앗을 빼버린 둥근 허공을 가볍게 말아

앞니로 살짝 깨물면
뽀드득, 가슴 속에 굽이치는

사랑한다는 그 말
꽃잎처럼 날아가

그대 마른 입술에 샘물로 흐르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대도 나처럼 꽈리를 불고 싶어질 것이다

             

                   - 김세현의 시 <꽈리를 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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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두 2017-01-10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어렸을 때 꽃물을 들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잊고 사는 것이 많은데요.
시골길을 가다 부부가 함께 꽃물을 들이시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와 닿습니다.
부자는 추억이많아야 부자락 하는 말이 새삼 떠오릅니다.
새벽 일을 나가기 전 알라딘 서재에 들러봅니다.
마음의 글들을 써가시는 게 참 좋습니다.
올 한해도 꽈리를 불던 어린 시절처럼 좋은 추억으로 풍유로우시길 기원합니다^^

조율연 2017-01-10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뽀드득~ 꽈리를 비롯해서 일상의 크고작은 기억이거나 추억에 잠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은 단지 기억에 불과할뿐, 현실, 실제의 비중이 워낙에 압도적인 까닭에 과거의 편린들, 기억들은 단지 순간의 일이거나 별스럽지않은 에피소드로 치부되곤 하지요. 반면에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따르면, 이런 소소한 기억들조차 풍요로운 상상력으로 다시 태어나고, 현실과 과거의 경계가 희미해질뿐 아니라 나아가 무엇이 사실이고 사실이 아닌지조차 모호해집니다.

우리에게서 이미 흘러간 시간들, 사라져 버린 시간들, 잃어버렸다고 생각되는 시간들은 의미가 없는 죽은 시간이 아니라 생각하기에 따라 오히려 현재보다 더 현재같고 실재같은 시간으로 되살려질 수 있다는 것. 광대한 상상력의 바다에서 재탄생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상상력의 힘이자 문학작품의 신비며 위대함이라고 생각되는군요.
 

나이든 탓일게다. 그동안 추상적이고 막연하던 죽음의 문제가 점점 피부 가까이 다가온다. 여기저기서 부고장이 날라오고, 누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한국남성의 평균수명이 대략 70중반이라고하니 건강이 허락한다면 대략 15년쯤 더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내일은커녕 오늘도 알 수 없는게 인생살이라 평균수명을 누리는것도 어데까지나 희망사항이고 10년 살지, 5년 살지, 그보다 더 짧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관심이 관심인지라 근자 죽음과 관련한 책을 몇 권 읽었다. 로마시대 철학자인 세네카의 <인생이 왜 짧은가>,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비롯해서 예일대 명강의로 이름높은 철학자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박세연 옮김, 엘도라도) 등등.

 

로마시대 고전들은 죽음을 정면으로 언급하기보다 인생 전반에 관한 문제, 특히 노년기의 문제를 주로 취급한다. 게다가 행복론 내지는 처세론 성격의 책이어서 죽음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좀 미흡한 감이 있다. 반면에 케이건의 경우 저자가 현존하는 예일대 철학교수인데다 죽음이라는 단일한 주제를 일관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관심이 끌렸다. 

 

케이건은 번역서 520여쪽에 이르는 두툼한 분량 속에 죽음의 문제를 단계적으로 피력하는데, 책 제목이 <죽음이란 무엇인가>라고는 하지만 죽음에 대해 직접, 단정적으로 답을 내리진 않는다. 그 보다는 죽음을 주제로 한 철학적 개념들을 논리적으로 서술하기 때문에 자칫 인내심이 없으면 집어던지기 십상이다.

게다가 철학교수라는 저자의 이력에서 알 수 있듯, 철학적 개념어들을 꼼꼼하게 서술한다든가 일상적인 명제들까지 하나하나 따지고 분석하다보니 마치 수학 문제풀이를 하는 기분이 들어 좀 지루하고 난삽한 면도 있다.

 

퇴직하고나니 시간은 좀 널널한데 어느 한 가지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시간 여유있다고 뭐든 마구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어떻게 시간을 적절히 분배하고 활용하느냐 여부에 달려있는 것 같다. 

 

죽음이라는게 당장 눈앞의 일이 아니어서 그럴까. 키케로, 세네카와 함께 드문드문 읽다보니 책 펴든지 얼추 3개월여가 지났지만 겨우 중간쯤에서 헤매고 있다. 올 해가 가기 전에 케이건의 저서만큼은 꼭 읽어야하지 하는 심정으로 서두르다보니 어느덧 후반부인 13장에 이르렀고, 오늘 오후 그럭저럭 책을 끝낼 수 있었다.

 

이 책의 13죽음을 마주하고 산다는 것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죽음의 문제를 피력하고 있는데, 저자는 우리는 신중하게 삶을 살아가야 한다.”라고 강조하며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추구할 만한 가치 있는 목표가 매우 많이 있고, 그런 목표들을 달성하는 게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에 비해 우리의 수명이 너무 짧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전해야 할 목표가 너무 많은데, 그 모든 것을 이루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이것 조금 저것 조금 하는 식으로 인생을 허비할 여유가 우리에겐 없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위험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첫째, 가치가 별로 없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정말로 중요한 목표에 투자했어야 할 시간을 허비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즉 가치 있는 모든 목표들을 추구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인지 결정해야 하는 추가적인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뒤돌아 봤을 때 비로소 잘못된 목표를 세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위험으로부터 우리는 결코 자유롭지 않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에 직면해 삶을 신중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둘째, 어떤 목표를 세웠던지 간에 우리는 그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삶은 여러분에게 새로운 기회를 위한 어느 정도의 시간을 허락해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주많은 목표들에 계속해서 도전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시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삶을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한다.“

 

이제 잠시 후면 새로운 해가 시작된다. 2014년도 한 해 나는 과연 삶의 목표를 신중하게 설정했던가? 목표는 제대로 된 설정이었는가. 혹시 목표를 변경해야하는 건 아닌가. 아니, 목표가 있긴 했나?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진 않았는가?

 

칸투스 연주활동, 독서회, 독서실 운영, 그리고 한 해 동안 만나고 이야기 나눈 사람들, 그런 가운데 내 주변을 스쳐간 사람들.....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만약 내게 10년 혹은 15년정도 더 살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진다면, 살아가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할 것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내 인생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어떤 목표를 선택해야 할까?

 

다행히 목표를 잘 설정하고 열심히 살았는데도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면, 최선을 다한것으로 만족하고 죽는 순간 이런 기도문을 올리기만을 간절히 바랄따름이다. 

 

신은 진흙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신은 진흙 덩어리에게 말했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덕과 바다와 하늘과 별, 내가 빚은 모든 것을 보라.”

한때 진흙이었던 나는 이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봅니다.

운 좋은 나 그리고 운 좋은 진흙.

진흙인 나는 일어서서 신이 만든 멋진 풍경들을 바라봅니다.

위대한 신이시여!

오직 당신이기에 가능한 일, 결코 나는 할 수 없는 일.

당신 앞에서 나는 그저 초라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내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유일한 순간은,

아직 일어나 주변을 둘러볼 기회를 갖지 못한 다른 모든 진흙들 대부분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 영광에 감사드릴 뿐.

진흙은 이제 다시 누워 잠을 청합니다.

진흙에게 어떤 기억이 있을까요.

내가 만나봤던, 일어서 돌아다니던 다양한 진흙들은 얼마나 놀라운지.

나는 내가 만났던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합니다.      

 

                                    - 커트 보네커트 <고양이 요람>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 낭송할 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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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 있는 사람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길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누가복음 179)”

 

 

오늘 우리의 역사는 전대미문의 혹독한 시련을 맞고 있다. 사욕에 눈먼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순국선열과 민주열사들의 희생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뿌리 채 흔들고 민주공화국의 헌법을 철저히 유린하였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하신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살아내지 못한 우리의 크고 무거운 죄를 참회하며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길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박근혜 대통령은 즉각 퇴진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더 이상 국가의 통치를 감당할 능력이나 자질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남은 길은 국민의 분출하는 퇴진 요구에 겸손히 응답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2. 지금의 위기를 한국현대사의 대전환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지금의 위기는 미봉책으로 덮어질 수 없다. 이 깊은 위기의 진정한 극복은 정의 평화 생명의 가치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의 대전환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해방 이후 쌓여 온 온갖 역사적, 사회적 적폐들을 청산하고 새로운 국민주권시대를 열어 가야 할 것이다.

 

 

3. 한국교회는 불의한 권력에 기생하며 복음을 왜곡해 온 지난 역사를 철저히 반성해야한다.

 

우리는 박근혜정권의 탄생과 폭정에 관여했던 교회지도자들의 철저한 회개를 촉구한다. 저들의 영적 무지와 타락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상처투성이로 만들었다. 종교개혁 500주년, 한국교회는 다시 복음의 정신으로 돌아가 세상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거듭나야 한다.

 

 

우리는 이 선언이 이루어지도록 신앙의 양심으로 한 자루의 작은 촛불이 되어 어둠의 세력에 빛을 비출 것이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옵소서.   -2016112일. 국가와 교회를 염려하며 기도하는 1만 기독교인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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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두 2017-01-05 0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금의 위기를 한국현대사의 대전환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제안에 공감합니다.
인터넷에 등장한 건국혁명, 동학혁명의 완성이니 하는 말도 우리의 지난 역사의 적폐를 해소해가는 제대로 된 건국과 청산의 절차를 떠올리게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져 이루어내는 결실처럼, 지금의 기회가 이 나라를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되어 좋은 세상을 이루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팝, 가요 등을 연주하는 빅밴드 활동을 3년쯤 하다가 2011년 전주에 근거지를 둔 하나임오케스트라에 입단했습니다. 저로서는 처음으로 클래식음악을 연주를 하게된 셈인데, 평생 클래식을 좋아했지만 실제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연주까지 한다는건 언감생심 꿈 같은 일이었지요. 사람팔자 알수 없다고, 어찌어찌하다보니 정말 오케스트라 단원이 된것입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대체 그 기쁨을 뭐라 표현해야할지...그런데 벌써 6년여의 시간이 훌쩍 흘러갔네요.

 

오케스트라 활동을 한지 6년이나되지만 워낙 음악에 재능이 없다보니 예나 지금이나 딱히 연주실력이 나아진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오케스트라 생활이 즐겁고, 내 평생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울수 있는것도 오케스트라 활동이 유일해서 할수만 있으면 족보에라도 올리고싶은 심정이지요.

 

오늘 연습중 내년 정기연주회 연주곡으로 드보르작 <교향곡 제 9번 '신세계'>와 함께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 8번 '미완성'>이 후보작으로 언급되었는데, 첫 입단무렵 연주한 곡이 다름아닌 슈베르트의 <미완성>이어서 그때의 추억이 슬며시 떠올랐습니다. 마침 지휘도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백 지휘자님께서 하시니 저로서는 감회가 남다르군요. 

 

- 연주곡 : 슈베르트 <교향곡 제 8번 '미완성'>/ 1, 2악장

- 연주일 : 2012. 1. 14

- 연주장소 : 한국 소리문화의 전당

- 지휘 : 백성현/ 전주 하나임 오케스트라

 


 
 

 

백 지휘자 : 동영상 보니 새삼 옛날 생각나시죠?

 

나 : 그때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연주했어요. 그래서인지 이번엔 더욱 기대가 됩니다.

 

백 지휘자 : 하나임오케스트라 연주랑 비교하면서 연주하면 오케스트라 활동이 자기발전에 얼마나 큰 역활을 하는지 알수있을 거예요. 그러고보니 조 선생님이랑 오랫동안 오케스트라 활동을 했군요.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 그렇군요. 하나임, 라모니, 그리고 지금의 칸투스오케스트라.....어찌어찌하다보니 백 지휘자님만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저에겐 너무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지요.

 

백 지휘자 : 부족한데 믿고 따라와주셔서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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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두 2017-01-05 0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덕분에 좋은 음악을 듣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책만큼이나 연주 또한 동영상을 통해 기록되어 그 생생한 연주를 다시 듣게 되니 감회가 새로우시겠습니다.
슈베르트가 그의 동료들과 함께 했다는 슈베르티아데의 모임처럼 연주나 공연을 통해 하나게 된다는 기쁨 또한 남다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머리가 아프고 기억력도 나빠지는 가운데 병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혼신의 힘으로 작품을 만들던 슈베르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훌륭한 곡이라고 평가 받는 미완성 교향곡, 새삼 창작을 하게 되는 음악가의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31살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음악가 슈베르트의 들장미나 마왕 같은 곡도 참 좋았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 좋은 음악과 함께 미완성의 완성인 인생의 작품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슈베르트의 일생을 떠올리면서, 잘 들었습니다^^

나팔노인 2017-01-10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국인에게 대표적인 클래식 교향곡을 꼽으란다면 대부분 베토벤 5번 교향곡 <운명> 9번 <합창>,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드보르작 9번 <신세계>, 슈베르트 8번 <미완성> 등 표제 교향곡 등을 떠올리게되는데요, 막상 연주자 입장에서 연주를 하다보면 감상때와 달리 이 곡이 왜 위대하고 유명한지 실감을 못하겠더라구요.

아마 연주가 서툴어서 정신없이 연주하기에 바빠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중에도 워낙 볼륨감이 있고 그랜디한 베토벤의 교향곡만큼은 좀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5번경우가 대표적인데, 단순한 ‘운명 모티브‘가 계속해서 반복될뿐인데도 특별한 선율감, 화성감이 느껴지니까요.

슈베르트 <미완성>경우 멋진 제목이 풍기는 신비스런 아우라와 달리 1악장은 좀 단순하고 무덤덤한 분이기이고, 그다지 선율감도 없지요. 다만 2악장의 주제선율만큼은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풍요롭게 펼쳐져 아주 인상적입니다. 동요 ˝깊은 산속 옹달샘....˝ 중에서 ˝물만 먹고 가지요˝ 부분과 흡사한 주제 선율은 익숙한 선율인데다 목관 파트의 선율이 너무 아름다워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것은 베토벤의 교향곡과 달리 트럼펫의 역할이 별로여서 연주의 재미나 스릴감을 느끼진 못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