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 시골길, 봉숭아 꽃무리 앞에 발길이 멎었다. 다른 꽃은 없고 붉은색, 분홍색, 하얀색 봉숭아 꽃잎으로 가득찬 쬐그만 화단이었다. "봉숭아 물을 들여보면 어떨까?" 아내 역시 좋겠다고 했다. 화단 주인의 허락을 얻고 빨간 봉숭아 꽃잎을 땄다.

"봉숭아 물을 들이다" 라는 표현이 예뻐 입 속으로 말해봤다. "봉숭아 꽃물 들이다". 봉숭아 꽃물이 손톱에 잘 배이기 하려면 꽃잎과 이파리를 함께 사용해야 하고, 약간의 백반이 필요하다고. 

예전에는 꽈리도 심심찮게 눈에 띠었는데 요즘은 시골에서도 꽈리를 보기 힘들다. 꽈리로도 물 들일 수 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꽈리....문득 대구 '물빛' 동인인 김세현의 시 한 편이 떠오른다.

그대를 보내고 나는 꽈리를 불고 싶었다

씨앗을 빼버린 둥근 허공을 가볍게 말아

앞니로 살짝 깨물면
뽀드득, 가슴 속에 굽이치는

사랑한다는 그 말
꽃잎처럼 날아가

그대 마른 입술에 샘물로 흐르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대도 나처럼 꽈리를 불고 싶어질 것이다

             

                   - 김세현의 시 <꽈리를 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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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두 2017-01-10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어렸을 때 꽃물을 들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잊고 사는 것이 많은데요.
시골길을 가다 부부가 함께 꽃물을 들이시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와 닿습니다.
부자는 추억이많아야 부자락 하는 말이 새삼 떠오릅니다.
새벽 일을 나가기 전 알라딘 서재에 들러봅니다.
마음의 글들을 써가시는 게 참 좋습니다.
올 한해도 꽈리를 불던 어린 시절처럼 좋은 추억으로 풍유로우시길 기원합니다^^

조율연 2017-01-10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뽀드득~ 꽈리를 비롯해서 일상의 크고작은 기억이거나 추억에 잠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은 단지 기억에 불과할뿐, 현실, 실제의 비중이 워낙에 압도적인 까닭에 과거의 편린들, 기억들은 단지 순간의 일이거나 별스럽지않은 에피소드로 치부되곤 하지요. 반면에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따르면, 이런 소소한 기억들조차 풍요로운 상상력으로 다시 태어나고, 현실과 과거의 경계가 희미해질뿐 아니라 나아가 무엇이 사실이고 사실이 아닌지조차 모호해집니다.

우리에게서 이미 흘러간 시간들, 사라져 버린 시간들, 잃어버렸다고 생각되는 시간들은 의미가 없는 죽은 시간이 아니라 생각하기에 따라 오히려 현재보다 더 현재같고 실재같은 시간으로 되살려질 수 있다는 것. 광대한 상상력의 바다에서 재탄생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상상력의 힘이자 문학작품의 신비며 위대함이라고 생각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