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든 탓일게다. 그동안 추상적이고 막연하던 죽음의 문제가 점점 피부 가까이 다가온다. 여기저기서 부고장이 날라오고, 누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한국남성의 평균수명이 대략 70중반이라고하니 건강이 허락한다면 대략 15년쯤 더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내일은커녕 오늘도 알 수 없는게 인생살이라 평균수명을 누리는것도 어데까지나 희망사항이고 10년 살지, 5년 살지, 그보다 더 짧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관심이 관심인지라 근자 죽음과 관련한 책을 몇 권 읽었다. 로마시대 철학자인 세네카의 <인생이 왜 짧은가>,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비롯해서 예일대 명강의로 이름높은 철학자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박세연 옮김, 엘도라도) 등등.

 

로마시대 고전들은 죽음을 정면으로 언급하기보다 인생 전반에 관한 문제, 특히 노년기의 문제를 주로 취급한다. 게다가 행복론 내지는 처세론 성격의 책이어서 죽음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좀 미흡한 감이 있다. 반면에 케이건의 경우 저자가 현존하는 예일대 철학교수인데다 죽음이라는 단일한 주제를 일관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관심이 끌렸다. 

 

케이건은 번역서 520여쪽에 이르는 두툼한 분량 속에 죽음의 문제를 단계적으로 피력하는데, 책 제목이 <죽음이란 무엇인가>라고는 하지만 죽음에 대해 직접, 단정적으로 답을 내리진 않는다. 그 보다는 죽음을 주제로 한 철학적 개념들을 논리적으로 서술하기 때문에 자칫 인내심이 없으면 집어던지기 십상이다.

게다가 철학교수라는 저자의 이력에서 알 수 있듯, 철학적 개념어들을 꼼꼼하게 서술한다든가 일상적인 명제들까지 하나하나 따지고 분석하다보니 마치 수학 문제풀이를 하는 기분이 들어 좀 지루하고 난삽한 면도 있다.

 

퇴직하고나니 시간은 좀 널널한데 어느 한 가지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시간 여유있다고 뭐든 마구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어떻게 시간을 적절히 분배하고 활용하느냐 여부에 달려있는 것 같다. 

 

죽음이라는게 당장 눈앞의 일이 아니어서 그럴까. 키케로, 세네카와 함께 드문드문 읽다보니 책 펴든지 얼추 3개월여가 지났지만 겨우 중간쯤에서 헤매고 있다. 올 해가 가기 전에 케이건의 저서만큼은 꼭 읽어야하지 하는 심정으로 서두르다보니 어느덧 후반부인 13장에 이르렀고, 오늘 오후 그럭저럭 책을 끝낼 수 있었다.

 

이 책의 13죽음을 마주하고 산다는 것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죽음의 문제를 피력하고 있는데, 저자는 우리는 신중하게 삶을 살아가야 한다.”라고 강조하며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추구할 만한 가치 있는 목표가 매우 많이 있고, 그런 목표들을 달성하는 게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에 비해 우리의 수명이 너무 짧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전해야 할 목표가 너무 많은데, 그 모든 것을 이루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이것 조금 저것 조금 하는 식으로 인생을 허비할 여유가 우리에겐 없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위험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첫째, 가치가 별로 없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정말로 중요한 목표에 투자했어야 할 시간을 허비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즉 가치 있는 모든 목표들을 추구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인지 결정해야 하는 추가적인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뒤돌아 봤을 때 비로소 잘못된 목표를 세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위험으로부터 우리는 결코 자유롭지 않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에 직면해 삶을 신중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둘째, 어떤 목표를 세웠던지 간에 우리는 그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삶은 여러분에게 새로운 기회를 위한 어느 정도의 시간을 허락해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주많은 목표들에 계속해서 도전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시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삶을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한다.“

 

이제 잠시 후면 새로운 해가 시작된다. 2014년도 한 해 나는 과연 삶의 목표를 신중하게 설정했던가? 목표는 제대로 된 설정이었는가. 혹시 목표를 변경해야하는 건 아닌가. 아니, 목표가 있긴 했나?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진 않았는가?

 

칸투스 연주활동, 독서회, 독서실 운영, 그리고 한 해 동안 만나고 이야기 나눈 사람들, 그런 가운데 내 주변을 스쳐간 사람들.....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만약 내게 10년 혹은 15년정도 더 살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진다면, 살아가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할 것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내 인생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어떤 목표를 선택해야 할까?

 

다행히 목표를 잘 설정하고 열심히 살았는데도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면, 최선을 다한것으로 만족하고 죽는 순간 이런 기도문을 올리기만을 간절히 바랄따름이다. 

 

신은 진흙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신은 진흙 덩어리에게 말했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덕과 바다와 하늘과 별, 내가 빚은 모든 것을 보라.”

한때 진흙이었던 나는 이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봅니다.

운 좋은 나 그리고 운 좋은 진흙.

진흙인 나는 일어서서 신이 만든 멋진 풍경들을 바라봅니다.

위대한 신이시여!

오직 당신이기에 가능한 일, 결코 나는 할 수 없는 일.

당신 앞에서 나는 그저 초라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내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유일한 순간은,

아직 일어나 주변을 둘러볼 기회를 갖지 못한 다른 모든 진흙들 대부분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 영광에 감사드릴 뿐.

진흙은 이제 다시 누워 잠을 청합니다.

진흙에게 어떤 기억이 있을까요.

내가 만나봤던, 일어서 돌아다니던 다양한 진흙들은 얼마나 놀라운지.

나는 내가 만났던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합니다.      

 

                                    - 커트 보네커트 <고양이 요람>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 낭송할 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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