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D.H.로렌스
어제 저녁 D.H.로렌스의 초기 중편 <목사의 딸들>(2013, <패니와 애니>, 창작과비평)을 감명깊게 읽었다. 훌륭한 원작도 원작이려니와 공들인 품이 역력한 백낙청 교수의 번역솜씨도 원작 못지않게 일품이었다. 소설을 읽고 감동을 받다니, 이런류의 감동은 실로 오랜만이다. 나에게 로렌스는 <체털리부인의 연인>을 위시로 성문학의 대가정도로만 알고있었는데, 이번 중편을 계기로 그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달라질것같다. 로렌스의 작품은 편견없이 대해야한다고 하는 어떤 영문학자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이번 기회에 로렌스의 작품을 모조리 읽어봐야겠다. <체털리 부인의 연인> <무지개> <아들과 연인> <사랑에 빠진 여인들> <날개 돋친 뱀> 등등.
2. <미국의 묵시록>
<교수신문>을 검색하다가 서보명 시카고대 신학대 교수의 <미국의 묵시록>(아카넷) 소개글을 읽었다. 신학자답게 묵시록적 관점으로 미국사회를 분석한 문명비판서인듯싶은데, 묵시록이라고 하니 얼른 떠오른게 프란시드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현대묵시록>과 인류(독일민족)가 최종적으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역사를 일직선으로 곧장 전진하는 헤겔의 직선사관이다. 아닌게 아니라 저자가 참조한 텍스트 중에 <현대묵시록>과 헤겔이 함께 나열되어 있었다. 다음은 본문중 핵심적인 대목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무조건적인 지지만큼이나 미국 정치의 메시아주의를 잘 드러내는 것은 없다. 세상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복귀해야만 계시록의 마지막 예언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은 미국 보수 개신교 종말론의 중요한 부분에 속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 때문에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아도 동요하지 않는 미국의 정책은 정치적 상식에서 벗어난 종말론의 차원에서 설명할 수밖에 없다.”
3. 독서회
독서회 '칸투스문학살롱'이 새 해 들어 첫 번째 모임을 가졌다. 감기로 두 명 불참하고 나를 포함 네 명 참석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단편집 <녹턴>에 이어 오늘 토론작은 제인 오스틴의 <에마>였다. 연말 분위기라 누가 책을 읽었을까, 예상했던대로 읽은 이가 거의 없었다. 문제는 오스틴의 소설을 택한점이었다.
차라리 대프니 뒤 모리에의<레베카>로 할걸. 일단 <에마> 경우는 두툼한 분량에 질려버렸을테고, 오스틴 특유의 자질구레하리만치 디테일한 묘사, 빅토리아 시대의 결혼과 연애플롯이 나이든 세대에게 먹혀들리 만무했던거다. 역시 오스틴 소설 중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에 비해 <에마>는 흥미면에서 좀 떨어진다. 그래도 <레베카>를 택하지 않은것은 아무려면 대중소설까지 동원해야하나,라는 오기 때문이었다.
그냥 가볍게 하지뭐, 하면서도 여러모로 저울질을 하지않을수 없다. 난이도가 낮으면 어느정도? 본격소설인가 대중소설인가? 문학인가 에세이류인가? 흥미본위인가 양서중심인가? 등등. 그렇다고 회원들의 반응을 지나치게 살피는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닐듯싶다. 당분간 내 생각대로 나가는거다. 항상 변함없이 꾸준히 하다보면 서서히 괘도에 들어서지 않을까? 가장 중요한건 지구력이다. 지치지말고 뚜벅뚜벅 걸을것!
4. 이청준
이청준은 나에겐 특별한 소설가이다. 스무살 시작된 원양어선 시절내내 나는 학생때와 마찬가지로 독서가 유일한 취미였다. 그렇다고 원하는 책은 마땅히 없었지만 조악하나마 이 배 저 배에서 구한 책들이 좀 있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이청준의 단편 <이어도>를 발견했다. 아마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을 읽은것도 그 무렵이었을거다. 이청준의 <이어도>는 나에게 소설읽기의 재미를 처음 알게한 단편이었다. 내가 평생 문학비평을 좋아하게된 것도 바로 이청준 때문이었으니 나로서는 특별한 작가가 아닐 수 없는거다.
<이어도>를 읽는 순간 본능적으로 이 소설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거라 생각했다. <이어도>라는 제목부터 뭔가를 상징하는듯 예사롭지않게 보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작품 분석을 흉내낸 독후감을 일기장에 썼던 기억이 난다. 그후 귀국해서 본격적으로 이청준의 소설집 <소문의 벽> <별을 보여드립니다> 등을 읽었고, 아마 장편 <당신들의 천국>도 이 시기에 접했지않나 생각된다.
독서회 다음 작품으로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기로 했다. 아마 이 책을 다시 대하는건 거의 20여년만인듯싶다. 하긴 어데 이청준뿐일까. 최인훈의 <광장>을 비롯해서 황석영, 조해일, 박태순, 김승옥, 서정인 등 한국의 현대소설 작품을 읽은것이 지난 70년대~80년대였으니 멀리는 30년, 가까이는 20여년 전이다. 어쨌거나 한시절 소설에서 받은 감동으로 잠 못이루던 날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60중반에 이르러 다시 이 책들을 읽자니 감회가 새롭다.
5. <당신들의 천국>
지난주 금요일부터 읽기시작한 <당신들의 천국>을 어제까지 한 주에 걸쳐 통독했다.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읽은건 지난 80년대 초반경으로 기억되는데, 당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것 같다. 20대부터 숱한 소설을 읽었고, 10여년간 원양어선 승선시절도 꽤 많은 작품을 읽은듯한데 어째서 이 소설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그런데 돌아보면 이청준뿐 아니라 최인훈, 김승옥, 서정인, 이인성, 최수철 등 대부분의 작품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사르트르, 카뮈, 카프카는 물론이려니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세계문학 작품인들 제대로 알았을리 만무하다. 평생 책을 가까이하고 글을 썼건만 대체 왜 그랬을까.
짐작하건대 정신적, 지적으로 기초가 다져져야할 20대 10년간을 황량한 바닷생활하느라 허비한 탓이 크고, 그밖에 평생 독학으로 일관한점, 지적으로 전혀 자극을 받을 수 없는 소도시에 산것, 지적 이해력이 뒤떨어지는 개인적인 한계 등을 꼽을 수 있을것 같다. 그나마 위안인것은 비록 뒤늦긴 했지만 이제야 겨우 작품들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난이도가 높은 실험적인 현대소설까지 약간씩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된 점이다.- 그래서 더욱 조급하다. 나이는 자꾸 들어가고 읽어야 할 책, 탐구해야 할 지식은 저토록 많은데 시간은 점점 줄어가고 있으니- 이렇게된데는 다행히 책을 놓지 않고 줄기차게 탐구한 탓이다.
이제부터는 지식과 정보를 백과사전 식으로 축적하는데 만족할게 아니고, 단 한 가지라도 확실하게 파악하고, 그 의미를 깊이있게 이해하는데 중점을 둬야한다. 또한 공부는 평생 죽을때까지 해야하는것이니 단 한 시도 나태해서는 안 되고, 지속적으로, 전방위적으로 공부하고 탐색해야한다. 죽는 그 순간까지....
6. 세계문학 읽기
막상 비평 습작을 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중요한 텍스트 읽기에 소홀했지않았나 반성된다. 사실상 트럼펫 연주에 푹 빠진 50대 중반 이후는 거의 작품 읽기를 못했으니 50대 이전까지의 독서경험이 전부이고, 그때까지 읽은 목록을 적어본다면 허접한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소설로 한정해도 한국문학이든 외국문학이든 실제 작품을 읽은 내력은 일천하다. 가령 한국근대문학 100년사동안 내가 읽은 작가라고해봐야 고작 이광수, 김동인, 채만식, 황순원을 비롯한 일부 납북작가정도고 비교적 왕성하게 읽은 편인 60~80년대 작가 역시 이청준, 최인훈, 황석영, 윤대녕, 최수철, 임철우 등 몇몇 작가인데다 이조차 현재로서는 정확히 기억이 안 된다.
세계문학으로 방향을 돌리면 사정은 더욱 형편없다. 몇 년전 독서회에서 세계문학 읽기를 한 덕분에 그나마 미국, 러시아 작품 몇 권 읽은것이 전부이니 뭐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도 없다. 결국 작품 자체를 제대로 접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달리 도리가 없다. 이제부터라도 우선 작품읽기를 시도할밖에.
일단 올 한 해는 작년말 시작한 칸투스독서회를 통해 19세기 영문학부터 살펴볼 작정이다. 예컨대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찰스 디킨스, 브론테자매, 토머스 하디, D.H 로렌스의 대표작을 읽은 후 만약 시간이 허락한다면 불문학까지 범위를 넓혀볼 것이다. 독문학, 중남미문학, 일문학 등은 추후 시간을 봐가면서 다시 계획을 세우기로 하자.
*한국문학은 짬짬이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작가의 작품만 읽기로 한다. 가령 채만식, 염상섭, 이상, 손창섭, 최인훈, 이청준, 윤흥길, 황석영, 김승옥, 서정인 등.
- 2018년 독서계획
제인 오스틴 <설득>, 조지 엘리엇 <플로스강의 물방앗간> <미들 마치>, 브론테 자매, 찰스 디킨스 <어려운 시절> <위대한 유산>, T. 하디 <테스>, D.H로렌스 <사랑에 빠진 여인들> <무지개>, 단편집 <패니와 애니>, 헨리 제임스 <아메리카> <한 여인의 초상>,채만식 <탁류>, 염상섭 <삼대>, 이기영 <고향>, 이태준 단편선집,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최인훈 <광장>, 김승옥 단편선집, 황석영 단편선집, 발자크, 플로오벨, 졸라, 스탕달, 지드, 사르트르, 카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