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D.H.로렌스

 

어제 저녁 D.H.로렌스의 초기 중편 <목사의 딸들>(2013, <패니와 애니>, 창작과비평)을 감명깊게 읽었다. 훌륭한 원작도 원작이려니와 공들인 품이 역력한 백낙청 교수의 번역솜씨도 원작 못지않게 일품이었다. 소설을 읽고 감동을 받다니, 이런류의 감동은 실로 오랜만이다. 나에게 로렌스는 <체털리부인의 연인>을 위시로 성문학의 대가정도로만 알고있었는데, 이번 중편을 계기로 그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달라질것같다. 로렌스의 작품은 편견없이 대해야한다고 하는 어떤 영문학자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이번 기회에 로렌스의 작품을 모조리 읽어봐야겠다. <체털리 부인의 연인> <무지개> <아들과 연인> <사랑에 빠진 여인들> <날개 돋친 뱀> 등등.

 

2. <미국의 묵시록>

 

<교수신문>을 검색하다가 서보명 시카고대 신학대 교수의 <미국의 묵시록>(아카넷) 소개글을 읽었다. 신학자답게 묵시록적 관점으로 미국사회를 분석한 문명비판서인듯싶은데, 묵시록이라고 하니 얼른 떠오른게 프란시드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현대묵시록>과 인류(독일민족)가 최종적으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역사를 일직선으로 곧장 전진하는 헤겔의 직선사관이다. 아닌게 아니라 저자가 참조한 텍스트 중에 <현대묵시록>과 헤겔이 함께 나열되어 있었다. 다음은 본문중 핵심적인 대목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무조건적인 지지만큼이나 미국 정치의 메시아주의를 잘 드러내는 것은 없다. 세상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복귀해야만 계시록의 마지막 예언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은 미국 보수 개신교 종말론의 중요한 부분에 속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 때문에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아도 동요하지 않는 미국의 정책은 정치적 상식에서 벗어난 종말론의 차원에서 설명할 수밖에 없다.”

 

3. 독서회  

 

독서회 '칸투스문학살롱'이 새 해 들어 첫 번째 모임을 가졌다. 감기로 두 명 불참하고 나를 포함 네 명 참석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단편집 <녹턴>에 이어 오늘 토론작은 제인 오스틴의 <에마>였다. 연말 분위기라 누가 책을 읽었을까, 예상했던대로 읽은 이가 거의 없었다. 문제는 오스틴의 소설을 택한점이었다.

차라리 대프니 뒤 모리에의<레베카>로 할걸. 일단 <에마> 경우는 두툼한 분량에 질려버렸을테고, 오스틴 특유의 자질구레하리만치 디테일한 묘사, 빅토리아 시대의 결혼과 연애플롯이 나이든 세대에게 먹혀들리 만무했던거다. 역시 오스틴 소설 중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에 비해 <에마>는 흥미면에서 좀 떨어진다. 그래도 <레베카>를 택하지 않은것은 아무려면 대중소설까지 동원해야하나,라는 오기 때문이었다.

그냥 가볍게 하지뭐, 하면서도 여러모로 저울질을 하지않을수 없다. 난이도가 낮으면 어느정도? 본격소설인가 대중소설인가? 문학인가 에세이류인가? 흥미본위인가 양서중심인가? 등등. 그렇다고 회원들의 반응을 지나치게 살피는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닐듯싶다. 당분간 내 생각대로 나가는거다. 항상 변함없이 꾸준히 하다보면 서서히 괘도에 들어서지 않을까? 가장 중요한건 지구력이다. 지치지말고 뚜벅뚜벅 걸을것!

4. 이청준

이청준은 나에겐 특별한 소설가이다. 스무살 시작된 원양어선 시절내내 나는 학생때와 마찬가지로 독서가 유일한 취미였다. 그렇다고 원하는 책은 마땅히 없었지만 조악하나마 이 배 저 배에서 구한 책들이 좀 있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이청준의 단편 <이어도>를 발견했다. 아마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을 읽은것도 그 무렵이었을거다. 이청준의 <이어도>는 나에게 소설읽기의 재미를 처음 알게한 단편이었다. 내가 평생 문학비평을 좋아하게된 것도 바로 이청준 때문이었으니 나로서는 특별한 작가가 아닐 수 없는거다.

<이어도>를 읽는 순간 본능적으로 이 소설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거라 생각했다. <이어도>라는 제목부터 뭔가를 상징하는듯 예사롭지않게 보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작품 분석을 흉내낸 독후감을 일기장에 썼던 기억이 난다. 그후 귀국해서 본격적으로 이청준의 소설집 <소문의 벽> <별을 보여드립니다> 등을 읽었고, 아마 장편 <당신들의 천국>도 이 시기에 접했지않나 생각된다.

독서회 다음 작품으로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기로 했다. 아마 이 책을 다시 대하는건 거의 20여년만인듯싶다. 하긴 어데 이청준뿐일까. 최인훈의 <광장>을 비롯해서 황석영, 조해일, 박태순, 김승옥, 서정인 등 한국의 현대소설 작품을 읽은것이 지난 70년대~80년대였으니 멀리는 30년, 가까이는 20여년 전이다. 어쨌거나 한시절 소설에서 받은 감동으로 잠 못이루던 날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60중반에 이르러 다시 이 책들을 읽자니 감회가 새롭다.

5. <당신들의 천국>

지난주 금요일부터 읽기시작한 <당신들의 천국>을 어제까지 한 주에 걸쳐 통독했다.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읽은건 지난 80년대 초반경으로 기억되는데, 당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것 같다. 20대부터 숱한 소설을 읽었고, 10여년간 원양어선 승선시절도 꽤 많은 작품을 읽은듯한데 어째서 이 소설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그런데 돌아보면 이청준뿐 아니라 최인훈, 김승옥, 서정인, 이인성, 최수철 등 대부분의 작품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사르트르, 카뮈, 카프카는 물론이려니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세계문학 작품인들 제대로 알았을리 만무하다. 평생 책을 가까이하고 글을 썼건만 대체 왜 그랬을까.

짐작하건대 정신적, 지적으로 기초가 다져져야할 20대 10년간을 황량한 바닷생활하느라 허비한 탓이 크고, 그밖에 평생 독학으로 일관한점, 지적으로 전혀 자극을 받을 수 없는 소도시에 산것, 지적 이해력이 뒤떨어지는 개인적인 한계 등을 꼽을 수 있을것 같다. 그나마 위안인것은 비록 뒤늦긴 했지만 이제야 겨우 작품들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난이도가 높은 실험적인 현대소설까지 약간씩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된 점이다.- 그래서 더욱 조급하다. 나이는 자꾸 들어가고 읽어야 할 책, 탐구해야 할 지식은 저토록 많은데 시간은 점점 줄어가고 있으니- 이렇게된데는 다행히 책을 놓지 않고 줄기차게 탐구한 탓이다.

이제부터는 지식과 정보를 백과사전 식으로 축적하는데 만족할게 아니고, 단 한 가지라도 확실하게 파악하고, 그 의미를 깊이있게 이해하는데 중점을 둬야한다. 또한 공부는 평생 죽을때까지 해야하는것이니 단 한 시도 나태해서는 안 되고, 지속적으로, 전방위적으로 공부하고 탐색해야한다. 죽는 그 순간까지....

6. 세계문학 읽기

막상 비평 습작을 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중요한 텍스트 읽기에 소홀했지않았나 반성된다. 사실상 트럼펫 연주에 푹 빠진 50대 중반 이후는 거의 작품 읽기를 못했으니 50대 이전까지의 독서경험이 전부이고, 그때까지 읽은 목록을 적어본다면 허접한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소설로 한정해도 한국문학이든 외국문학이든 실제 작품을 읽은 내력은 일천하다. 가령 한국근대문학 100년사동안 내가 읽은 작가라고해봐야 고작 이광수, 김동인, 채만식, 황순원을 비롯한 일부 납북작가정도고 비교적 왕성하게 읽은 편인 60~80년대 작가 역시 이청준, 최인훈, 황석영, 윤대녕, 최수철, 임철우 등 몇몇 작가인데다 이조차 현재로서는 정확히 기억이 안 된다.

세계문학으로 방향을 돌리면 사정은 더욱 형편없다. 몇 년전 독서회에서 세계문학 읽기를 한 덕분에 그나마 미국, 러시아 작품 몇 권 읽은것이 전부이니 뭐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도 없다. 결국 작품 자체를 제대로 접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달리 도리가 없다. 이제부터라도 우선 작품읽기를 시도할밖에.

일단 올 한 해는 작년말 시작한 칸투스독서회를 통해 19세기 영문학부터 살펴볼 작정이다. 예컨대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찰스 디킨스, 브론테자매, 토머스 하디, D.H 로렌스의 대표작을 읽은 후 만약 시간이 허락한다면 불문학까지 범위를 넓혀볼 것이다. 독문학, 중남미문학, 일문학 등은 추후 시간을 봐가면서 다시 계획을 세우기로 하자.

*한국문학은 짬짬이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작가의 작품만 읽기로 한다. 가령 채만식, 염상섭, 이상, 손창섭, 최인훈, 이청준, 윤흥길, 황석영, 김승옥, 서정인 등.

- 2018년 독서계획

제인 오스틴 <설득>, 조지 엘리엇 <플로스강의 물방앗간> <미들 마치>, 브론테 자매, 찰스 디킨스 <어려운 시절> <위대한 유산>, T. 하디 <테스>, D.H로렌스 <사랑에 빠진 여인들> <무지개>, 단편집 <패니와 애니>, 헨리 제임스 <아메리카> <한 여인의 초상>,채만식 <탁류>, 염상섭 <삼대>, 이기영 <고향>, 이태준 단편선집,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최인훈 <광장>, 김승옥 단편선집, 황석영 단편선집, 발자크, 플로오벨, 졸라, 스탕달, 지드, 사르트르, 카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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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어쨌든 다시 제자리로 온 기분이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실제가 그렇다. 문학비평을 시작한다. 평생 독서를 하면서 유독 문학을 가까이했고, 그중에서도 문학비평은 더욱 그랬다. 비록 인상비평이지만 상당수 습작까지 했으니 그럴만도 하지 않은가? 

 

지난 몇 년 독서회를 하면서  주로 세계문학을 읽었다. 그러던게 최근 젊은 시절 동인활동 했던 석조에 참가하면서 글을 쓰지 않은면 안 될 처지가 되었다. 그렇담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예나 지금이나 에세이 아니면 문학평론류다. 

 

희미해진 감도 잡고 최근 문학경향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2000년대 이후 출간된 평론집을 드문드문 읽으면서 정찬의 소설읽기를 병행하고 있다. 왜 정찬인가?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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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TV방송에서 소설가 헤밍웨이를 소개하고 있었다. 평생 광적으로 낚시와 사냥을 즐긴 헤밍웨이. 그가 한때 살았다는 쿠바의 한적한 어촌풍경이 나오자 문득 대서양 원양어선 시절이 떠올랐다.

 

천 길 심해, 가도가도 끝없는 수평선, 광대무변의 바다, 적막! 대양 위 반짝이는 별들. 그런 장엄한 바다를 배경으로 헤밍웨이의 위대한 작품이 탄생했으리라. 그러나 내가 경험한 대서양은 지루하고 힘겨운 노동현장에 불과했다.

 

망망대해 수평선은 반복되는 일상과 무엇이 다를까. 간혹 우리 배 곁을 지나던 거대한 화물선조차 그저 그런 풍경 중 하나였다. 특징없는 모래 절벽,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아프리카 사막은 동해의 포구와 다를바 없었다. 세네갈 항구는 포항의 장기곶이거나 스무 살, 노가리 잡느라 소금기 비린내 풍기는 작업복을 입고 정신없이 드나들던 강구 항이나 모로코 다카르 항이나 그게 그거였던거다. 푹풍과 거친 파도, 어로작업 틈틈이 헤밍웨이의 소설을 읽으며 심오한 그 무엇을 기대했지만 고기잡느라 지친 몸은 몇 십 분 토막잠만이 유일한 휴식이요 낙이었다.

 

평생 낚시, 사냥을 광적으로 즐겼던 헤밍웨이는 쿠바의 평범한 코이마르 어촌 생활을 바탕으로 불후의 단편 <노인과 바다>를 썼다. 코이마르는 우리의 해망동, 남해 어데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어촌이다. 작가들은 흔히 보통사람이 겪을 수 없는 기이한 체험, 기이한 곳으로의 여행 가령 인도, 중국, 아프리카 등 특별한 체험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나에게 빗자루를 주라, 당장 소설을 써낼 수 있으니라고 말한 빅토르 위고 경우 소설을 쓰는데 특별한 경험과 소재는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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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독서보다 테레비 뉴스에 더 몰입했습니다. 저에게 책읽기는 삼시세끼나 다름없는 일상이지만 요즘 뉴스는 책 보다 훨 드릴넘치고 재미지다보니 어쩔 수 없군요. 아마 여러분도 그러지싶은데 요즘 우리사회는 영화,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합니다. 자고나면 깜짝놀랄 기상천외한 사건으로 차고넘치니 이거 도저히 테레비를 안보고는 살수 없을지경이네요.   

 

대체 우리시대 정치, 사회 주변을 관통하는 인간군상의 모습이 이보다 더 흥미로울수 있을까요. 시쳇말로 머리좋고 많이 배우고, 또 일류 대학 출신이거나 권력깨나있다고 다 사람되는게 아니라는 평범한 진실을 똑똑히 목도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누가 기본마저 결여한 저질의 인간인지, 반면에 진정한 품격과 실력이 어떤것인지.....


세상 살면서 그 어떤것도 공짜로 얻을수 없듯, 아무리 열심히 따라하고 교과서를 착실히 배워도 민주주의는 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절절히 알겠습니다. 비록 더디지만 민주주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제도로 정착되어가는지도. 


글쎄 소시민의 심정이 이럴정도이니 이즈음 재판정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일들, 권력자들의 주변에서 기생하는 무리들의 적나라한 모습은 필경 소설쓰는 분들에게 최상의 소설꺼리거나 공부가 되리라 짐작됩니다. 


어젯밤 트럼펫 레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한길문고에 잠깐 들렀습니다. 근자 이런저런 일로 분주하다보니 서점 나들이도 쉽지가 않은 형편이네요. 

 

퇴직하면 꼭 읽어보려한 했던 책이 몇 권 있었습니다. 이른바 중국의 4대奇書니 6대奇書니 하는 책도 그중 하나인데, 우선 <삼국지연의><금병매><홍루몽>만큼은 꼭 읽어보려 했지만 그동안  사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금병매>는 몇 종의 기존 번역서가 있습니다만, 원전 번역이 아니어서 믿을만하지 못한 형편이지요. 그나마 원전을 완역한 강태권 교수의 솔출판사본이 낫다해서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절판 중이라 구할수 없다는군요. 어쩔수 없이 과거 60년대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된 김동성 번역본을 찾아봐야겠는데 이마저도 구하기가 쉽지 않다니 원~  


<삼국지연의>와 <홍루몽>은 그나마 형편이 좀 나은 편입니다. <삼국지연의>야 워낙 유명해서 이문열, 황석영 등 소설가들도 번역을 한터라 비교적 종수가 많은 편인데, 명번역은 재야학자인 김구용 선생의 솔출판사본을 최고로 치고 있군요. 문제는 분량이 워낙 많아 잠시 미루고 우선 호기심을 끄는 <홍루몽>쪽으루다가...

                      

 

              

 

 

 오랫동안 <홍루몽>을 연구했던 고려대 중문과의 최용출 교수의 번역서가 나남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전 6권으로 구성된 <홍루몽> 중 우선 1, 2권과 나쓰메 소세키와 함께 일본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칭해지는 구니기타 돗포의 단편집 <무사시노>을 사들고 보무도 당당하게 한길문고를 나섰습니다. 뭐 그렇다고 당장 뉴스를 안볼수 없겠습니다만, 한동안 테레비 뉴스와 병행해서 <홍루몽>의 재미를 만끽해야겠군요.


"<홍루몽>은 중국어로 씌어진 소설 중 가장 위대한 작품"   - 클리프턴 패디먼, 존 메이저 공저 <평생의 독서계획>

 

"<홍루몽>은 18세기 중반에 나온 중국 최고의 명작소설 (...) 인간의 감성세계를 정교하게 그려낸 소설로서 인생의 교과서와 같은 책이다. 이 작품은 인간에게 사랑의 세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찬란한 봄날의 환희로부터 시작하여 활짝 피어난 모란꽃 같은 찬란한 여름이 지나고 낙엽지고 비 내리는 늦은 가을로 접어드는 삶의 행로가 작품 속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홍루몽>은 아마도 우리에게 영혼의 안식처를 마련해주는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미로들을 따라가다보면 인생의 진리를 배우게 될 것이고 인간관계의 이치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될것이다."   - 나남판 최용철 역자 해제

 

* 우연히 파워블로거이자 서평가로 유명한 이현우의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생전의 마오쩌둥은 <홍루몽> 을 애독하고 높이 평가했다는데, 다음은 <마오의 독서생활>(꿍위즈 외 저, 글항아리)을 소개한 로쟈의 글 일부입니다.  


마오는 <홍루몽>을 ‘역사’로 읽었다. 봉건사회의 계급투쟁을 묘사한 소설로 간주하며 호평했다. 그는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이 살던 시대는 “소설 속 가보옥처럼 봉건제도에 불만을 가진 인물들의 시대”라며 <홍루몽>에서 묘사된 4대 가족의 쇠망을 통해 봉건통치계급의 쇠망을 이해하려 했다. 마오는 <금병매>도 높이 평가했지만 “다소 희망을 보여주고 있”는 <홍루몽>과는 달리 “주로 암흑을 폭로하기만 했”다고 비교한다. 그는 조카손녀에게 “네가 <홍루몽>을 읽고자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봉건사회를 알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마오의 이론서나 역사서 탐독은 당연했겠지만 문학작품에까지 애착을 보인 건 왜일까. <홍루몽>처럼 봉건사회의 구체적 생활상을 묘사한 문학작품을 읽어야 봉건사회에 대해 세밀하고 생동적인 이해를 할 수 있게 되며, 이는 이론서 같은 것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다고 <마오의 독서생활>의 저자는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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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이문 선집' 발간사

 

박이문 <남기고 싶은 말>

 

1. 나의 근황

눈에 덮인 들
학 한 마리
혼자
황혼에 서 있다
한 다리만으로

나는 지금 환자복을 입고 영원한 부재를 눈앞에 두고 있다. 흰 시트가 깔린 일산의 한 노인요양원 병실 침대에 주로 누워 있다. 창문을 통해 바다같이 넓고 차고 푸른 하늘 그 위로 떠가는 뭉게구름을 자주 쳐다보곤 한다. 해가 지고 밤이 오거나 밤이 가고 낮이 오면, 낮과 밤의 사잇길을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과거도 돌이켜본다. 기억의 상처 속의 피의 뜨거운 바램도 생각해본다. 인생은 시인 천상병의 말대로 ‘잠깐 온 소풍’이다. 병원은 인생이 잠깐 쉬어가는 소풍지다.


나는 한평생 온 세계를 방랑했다. 철이 들 무렵부터 지성의 참모총장이 되겠다는 지적인 욕구로 프랑스며 미국이며 독일이며 전 세계를 헤매고 또 헤맸다. 여기, 그리고 저기를. 마치 저기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처럼 계속, 또 계속. 때로는 마치 보이지 않는 별처럼.

학과 같은 내 아내 유영숙은 1주일에 두 번 정도 요양원을 방문한다. 아내는 원래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이었다. 하지만 작년에 내가 병이 급격히 악화되어 오히려 아내의 병수발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화요일과 목요일에 요양원을 찾아오는 아내는 올 때마다 간식을 가져와 내게 먹여준다. 그리곤 내 손을 잡아 주고 볼을 부벼주기도 하며, 여러 가지 소식도 전해준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가장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와 가장 평범한 방식으로 아내와 사랑을 나누고 있다. 지금 내 의식 속에는 아내만이 뚜렷하고 아내 외의 사람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 가물가물해지고 있다. 나는 지금 노인장기요양등급 2급 판정을 받고 24시간 간호를 받고 있다. 아픈 아내 역시 지난 11월에 다행스럽게도 장기요양등급 4급 판정을 받아 요양사가 1주일에 2회씩 내가 없는 집을 방문하여 홀로 있는 아내를 보살펴주고 있다.

철학자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빌린 수탉 한 마리 값을 갚아달라는 것이었다. 칸트는 죽기 직전에 늙은 하인에게 포도주 한 잔을 청해 마시고 “좋다!”는 말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니체는 정신병원에서 극심한 치매 증상을 보이다 죽었다. 내가 좋아했던 비트겐슈타인이나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내 지도교수였던 자끄 데리다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 은사 데리다의 특강에서 자주 거론하던 들뢰즈는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이렇게 조용히 지내다가 삶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려 한다. 하나뿐인 나의 아내, 맑고 깊고 시원한 큰 두 눈을 가진 희고 가냘픈 한 마리 학과 같은 아내와 함께. 병상에 누워 있는 지금도 별과 구름, 산과 바다, 새와 꽃을 노래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 나는 자주 사무친다.

2. 다음 세대를 위하여

죽은 나뭇가지에서 터질 것 같은 초록빛 잎이 난다
죽은 잔디밭에서 처녀 같은 풀잎이 난다
어느덧 사방에 꽃이 피고
어느덧 가로수는 짙은 잎으로 무겁게 흔들린다
산으로 가 누워계신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다

인생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많은 종류의 할 일과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인생의 보배를 모두 다 동시에 소유할 수는 없다. 애국자가 되는 동시에 모리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일생을 두고 나는 ‘목숨을 걸고 살 수 있는 어떤 이상, 어떤 가치’를 찾아내고자 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화두가 나에겐 언제나 가장 절실했기 때문이다.


싫건 좋건 우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차피 당장 죽지 않고 살아야 한다면, 죽는 날까지 어떤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가장 보람있게 살 것인가?


그러나 슬프게도 어떠한 인생이 참다운 인생이며, 뜻있는 삶인가를 결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사람의 운명의 주인은 오로지 그 자신이며 자신의 운명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 있다. 한 인간의 운명은 이미 밖으로부터 결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스스로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비록 모든 꽃나무가 언젠가는 시들거나 늙고 죽어 썪게 마련이지만, 꽃을 한 번이라도 피우고 죽는 나무와 그렇지 않은 나무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가 있다. 꽃은 다 같이 지는 꽃이라도 그 중에 더 아름답게 피었다 지는 꽃과 그렇지 못한 꽃 사이에는 자로 측량할 수 없는 간격이 있다. 때가 되어 죽기는 마찬가지지만 꽃을 피우고 죽은 나무는 그렇지 않은 나무에 비해서 한결 아름답다. 때가 되면 다 같이 시들어 없어지기는 매일반이지만, 눈부시게 피어난 꽃은 그렇지 못한 꽃에 비해 훨씬 더 아름답다.


한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인생이 꽃나무에 비할 수 있다면 이왕이면 꽃을 피우는 나무가 되고, 우리의 인생을 꽃에 비할 수 있다면 같은 값이면 보다 아름다운 꽃으로 피었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좋다.

죽는 순간 가슴에 손을 얹고, 누가 무엇이라든 간에 ‘나는 내 힘껏 내 뜻대로 옳게 살았다’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의 삶은 꽃이고, 성공한 삶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 곳은 저기가 아니고 오직 여기일 뿐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시간은 영원이 아니라 현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믿음직한 나무뿌리처럼 우리의 뿌리를 묻고 현재란 비바람을 맞을 때 비로소 우리들의 삶은 봉오리를 맺고 꽃으로 정화된다.


우리가 여기를 떠나 현재를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연못을 나와 둑에서 날뛰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록 서리가 내리면 시들어버리고 말 꽃이지만 한 떨기의 장미꽃은 아름답고 한 줄기 난초꽃은 향기롭다.

나는 젊은 사람들이 저기 동네 어귀에 서 있는 전나무를 닮았으면 좋겠다. 삶이, 그 하루하루가, 아니 그 한순간 한순간이 자유와 그것이 동반하는 불안 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의식하면 할수록 살아 있으면서 모든 정신적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초연하게 존재하는 전나무의 기개를 닮았으면 좋겠다.


썩고 병든 과거의 역사를 갈아엎고 미래를 개척할 젊은 세대들이 언제고 변함없이 푸르고, 어떠한 계절의 요란스러운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항상 떠들썩하고 부산스럽게 돌아가는 인간사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에 딱 버티고 당당한 모습으로 우뚝 서서 마을에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는 묵은 전나무의 자신감과 지조를 배웠으면 좋겠다. 하늘로 곧장 높이 뻗어 뛰어나 보이면서도 단순하지만 전체적으로 어디 한 곳에서도 흩어짐 없이 잘 균형 잡힌 동네 한복판에 선 전나무처럼 황제와 같은 권위로 아주 당당하면서도 극히 겸손하고, 점잖으면서도 고귀한 품위를 갖추었으면 좋겠다.

꽃이 진다고 해서 그 꽃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조만간 죽어 흙이 되고 벌레의 밥이 되게 마련이라고 해도 삶 일반, 특히 인간의 삶은 아름답고 귀하다. 우리 모두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우리들의 삶은 보람을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삶의 존엄성과 절대적 가치를 의식하고 삶에 대한 경외, 삶의 성스러움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시들시들한 꽃보다 생생한 꽃이 더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로 적극적 삶, 인텐스한 삶은 그만큼 더 귀중하다. 인생의 의미의 문제는 도대체 삶 자체가 보람 있는가의 문제이며 어떻게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3. 끝으로 남기는 말

소나무는
외솔길 숲속 소나무는
의젓하기만 하네
이유도 없이
뜻도 묻지 않고
그저 의젓하기만 하네

이럴 수가 있나! 정말 이럴 수가 있는가! 이제 내게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나에게 죽음이 언제고 닥쳐올지 모른다는 사실은 아주 객관적인 자명한 일이다. 최근 들어 시력, 청력 그리고 특히 기억력도 나빠지고 있다. 그럴수록 나는 언제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나머지 삶의 하루하루를 좀 덜 부끄럽게, 그리고 좀 더 뜻있게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도 해보곤 한다. 나는 금년이, 아니 이 달이, 아니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해, 마지막 달,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는 것이 객관적 사실임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때로 나는 나의 소원대로, 신조대로 살지 못한 채 허탈한 심정으로 지금 나의 과거를 돌아보기도 한다.


나는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았던가? 내가 정말 찾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나는 한 인간으로서 큰 부끄러움 없이 살았던가? 어쩌면 무슨 변명을 다 대도 결국 나는 이기적인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닌가? 살아가면서 나는 무엇을 어쩌자는 것이었던가? 나는 가짜가 아닌 진짜로 살았는가? 나는 어쩌면 가짜가 아니었던가? 나는 정말 진짜인가? 대답은 한결같이 불확실하다.


궁극적으로 의미가 없는데도 삶에 악착같이 매달려왔던 자신이 치사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번밖에 못 사는 삶을 위해 더 잘 살고, 더 정당당당하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 부단히 애써왔다. 나는 직업으로부터, 철학으로부터, 모든 물질적·사회적·관념적 속박과 구속으로부터는 물론 애착으로부터도 해방되어 자유분방하면서 충만한 생명체로서 흰 구름처럼, 끊임없이 떠도는 바람처럼 존재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철학적 사유처럼 투명하고, 예술작품처럼 아름답고, 종교적 삶처럼 열정적으로 살고자 했다. 이제 삶의 마침표를 준비하는 지금 확실한 것은 위와 같은 모든 물음들에 대해서 마음 편히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건 내가 평생에 걸쳐 바로 ‘마음의 둥지’를 트는 작업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둥지를 당신의 눈앞에 그대로 보여줄 수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러한 둥지는 어디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각자가 스스로 자기 나름대로 지어야만 하는 각자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을 몸과 영혼과 정신을 바쳐 해온 작업은 철학적 둥지를 짓는 일이었다. 그것은 존재일반을 주제로 한 한편의 거대한 ‘철학적 시’이기도 했고, ‘시적 철학’이기도 했다.


세상을 사물들과 사건들, 그리고 그것들 간의 물리적 정신적 관계의 총칭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한편으로는 한없이 복잡하고 혼란스럽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의 경이로운 질서가 우리를 황홀케 한다. 나는 일찍부터 이런 상반된 감동을 시인으로서 언어에 담아두고 싶어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자로서 그러한 질서를 논리적으로 밝혀내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나는 10대 후반부터 시작한 시작(詩作)을 평생을 계속했고, 30대 후반부터 시작한 철학적 집필생활 또한 평생을 계속했다. ‘둥지의 철학’은 모순되어 보이는 위와 같은 나의 양면적 정신의 충동이자, 소망을 조화로운 세계관이자 동시에 인생관으로 통일된 하나의 시적 철학이자 철학적 서사시로 묶어낸 것이다. 인간의 시야는 0도에서 1도까지로 되어 있는 ‘존재-의미 매트릭스’의 눈금 사이에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육신의 존재가 비록 죽음 저 너머로 사라져 버린다 해도 ‘둥지의 철학’은 인간과 모든 생명이 사라지는 우주의 역사를 상상해서 풀어낸 내 필생의 시도였다는 사실만은 기억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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