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카알 힐티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나때만해도 중학교에 가려면 입학시험을 치뤄야했다. 뭐 소도시 중학교이니 시험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한데 시골에서 좀 한다는 축에 들었건만 나는 한심하게도 미역국을 먹고 말았으니 내 인생 최초의 쓴맛이었다.

어린시절, 백수기질에 한량기까지 농후하던 아버지는 방앗간일은 제쳐두고 밖으로만 돌았다. 그래도 장남인 아들이 입학시험에 미역국을 먹었으니 얼마나 상심이 컸을까. 어느날 아버지가 책을 한 권 사들고 왔다. 평생 학교문턱을 밟지 않았으니 책하고는 담을 쌓았을게 분명한데,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카알 힐티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일기 형태의 에세이집이었다. 힐티는 독일 태생의 변호사이자 철학자이고, 철학 교수를 한 이력의 문필가다. 어린나이라 당연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십대 후반쯤 돼서야 다시 손에 잡은 것 같다. 어지됐든 그후로 힐티의 책은 애독서 중 한 권이 되었다.

힐티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어서 책 도처에 신앙고백이 주를 이룬다. 한때 크리스천이던 나는 힐티의 책을 성경 대하듯 읽고, 숭앙하는 마음까지 일었다. 하지만 지금은 교회에 가지 않을뿐 아니라 저자의 보수성과 경건주의가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중용, 절제, 올곧음을 강조하는 그의 생활철학은 나의 취향이 맞는 부분이 있었다.

그후로 아버지가 사준 책은 낡아서 어덴가로 사라졌고, 20대인 70년대 초에 신조사에서 발행한 덤핑책을 다시 구입했다. 이 책 또한 어지간히 읽은탓에 책 커버에 손때가 묻었고, 자연 많이 낡았다. 최근에 새 번역판이 눈에 띄어 쇼펜하우어의 <인생론>과 힐티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를 다시 구입했다. 워낙 젊은시절부터 가까이 할 탓에 두 책 모두 맘 속에 간직되었기 때문이다.

2.우게쓰 이야기

늘푸른도서관 <소설 120권 영화 120편 읽고보기> 다음 시간은 우에다 아키나리와 미조구치 겐지의 <우게쓰 이야기>다. 그런데 아키나리의 원작이나 미조구치 겐지 영화 모두 토론할만한 내용이 빈약해 걱정이다. 일본의 고대문학을 전공한 이들이거나 영화학도라면 몰라도 이정도 작품을 토론작으로 삼기엔 마땅찮은 것이다. 대개 고대 민담이나 설화는 '권선징악'이 주류를 이루기 때에 국학, 문학적 가치를 따지면 몰라도 특별히 할말이 없는 것이다.

더욱 문제는 미조구치 겐지의 <우게쓰 이야기>다. 온통 영화사에서 최고로 추겨세우고, 실제 유럽영화인들을 몰아갔지만 이 정도 영화가 롱테이크 패닝인 이른바 두루마리 쇼트, 시퀀스쇼트가 특징인것은 틀림없으나 대체 이 영화가 왜 영화사적으로 유명해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 보기엔 전형적인 익조티즘이다. 물론 <오하루의 일생>은 그만한 명성에 그리 차이가 나진 않는다, 하지만 <우게쓰 이야기>만큼은 도무지 알수 없다, 일본판 전설의 고향에서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을지.

3.독서회

늘푸른도서관 <문학과 영화>- 소설 120편 영화 120편 읽고보기- 목록은 5년분이다. 언젠가 회원인 H씨가 "뭐를 하든 3년은 해야 성과를 알 수 있잖겠어요?" 라고 했다. 그래서 아예 5년치 목록을 짠거다.

예상은 했지만 참석률이 너무 저조하다. 많아야 다섯 명, 그렇잖으면 세 명, 이번 주는 한 명. 이래도 해야하나, 괜스레 시간 낭비하는게 아닐까. 열정도 지적호기심도 그리 뜨겁지않은 참석자들, 평소 책을 가까이 하지 않은 주부들이다보니 목록짜는데 신경 써야한다. 조금만 난해하면 머리에 쥐가난다고하니...어쩔수 없이 쉽고, 흥미있고 여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책들이다.

< 러브 레터> <휴먼 스테인> <리스본행 야간열차> <세월>따위를 읽고 뭣을 얻을 수 있단말인가. 가능하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영화나 베스트셀러는 외면하는게 상책이다. 세상에 읽을 책이 얼마나 많은가.

진즉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를 구입했지만 짬을 낼수가 없다.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윌리엄 포크너,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도 마찬가지. 책을 손에서 놓진 않는데, 막상 읽고싶은 책을 못 읽고 있다. 3년째 소설책만 붙들고있는것도 불만이다. 소설읽는 와중에 <서양철학사>, 쇼펜하우어의 <부록과 성찰> 카알 힐티의 <잠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같은 인생론집이나 기웃거리고 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몰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점점 나이 들고, 몸은 약해지고, 그렇다고 항상 건강하라는 법도 없잖은가. 앞으로 독서 할 수 있는 시간이래야 기껏 10년? 잘 해야 15년이다.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귀중하게 써야하는데, 허투루 시간을 허비하면 안 되는데....

한 주에 한 번하는 오케스트라만 참여하고, 사무실 틀어박혀 원하는 책만 읽을까? 그러면 사람관계가 끊어질까? 진지한 대화가 사라진 세상, 누구도 책을 읽지 않는 세태, 맛집, 운동, 연애, 돈벌기에 바쁜 세상이니 까짓 관계 끊어지면 어때? 일단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자.

4.이승우의 소설들

잔뜩 기대하고 한꺼번에 작품집을 여러 권 구입했다. 우선 읽은 장편 <식물들의 사생활> <지상의 노래>에만 한정하면 솔직히 실망이다. 한국문학에서 보기드문 종교, 신을 주제로 한 관념투 서사는 좀 희귀하는 점에서 꼽을 수 있지만 그래서? 그것말고 뭐가 있는데? 하면 뭐라 대답해야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이야기 흐름, 연결이 부자연스럽다. 인위적으로 연출한다는 느낌, 즉 작위적이라는거다.

물론 밀란 쿤데라가 그러듯이 여러 에피소드를 뒤섞어 하나의 주제로 통합하는 이승우 식 소설 구성, 전략을 모르는바는 아니다 .하지만 <지상의 노래> 경우 후와 연희의 에피소드는 너무 속이 보이고 억지스럽다. 이야기 진행 방식이 유치하다고나할까, 사촌 연희를 사랑한다는 관계설정 때문이겠지만 헤라헤어숍 사모님과의 관계는 참 뜬금없는 삽화다. 그렇다보니 이 소설의 가장 밀도있고, 흥미를 일으키는 천산의 벽서를 중심으로 한 한정효, 장의 에피소드가 긴장이 떨어지고, 마치 양복에 갓쓴 꼴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하나의 주제를 의도하는것까진 좋은데, 에피소드가 유기적으로 연결이 안 되는 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취약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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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 바르트

무신론자인 내가 왜 신학에 관심을 갖는가. 이유는 철학이나 역사처럼 신학도 인문학의 한 범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학을 좋아하고, 철학서를 읽듯이 단지 지적 관심사 가운데 하나인거다. 신학서를 가까이한 때문인지, 간혹 교회에 다니는 친척들, 이웃들은 나를 예배당으로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신론을 자처하는 터에 겨우 신학서 몇 권 읽는다고 교회에 나갈수 있을까?

무신론자인 내가 볼때, 칼 바르트의 하나님론(신론), 그리고 예수론(기독론), 교회론은 서구형이상학이 그렇듯 완벽한 픽션이다. 단지 오랜세월 공을 들인 정교한 허구적 체계, 지적체계의 산물이라는 것. 신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설사 칼 바르트가 제 아무리 방대한 조직신학 체계를 세웠더라도, 문학적 상상력과는 유형이 다른 허구적 언설체계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내가 조직신학, 즉 어떤 종교라는 이름아래 체계화된 논리들, 특히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등에 관심을 갖는건, 한 지식인의 진지하고 정교한 종교적 상상력의 세계를 엿보고싶고, 그 상상력의 결과가 어떤 글로 나타나는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지적 즐거움을 맛보고 싶어서다.

2.도그마적 신앙

오랜만에 얼굴이나 볼까하고 참가한 스터디 모임에서 어느 독실한 크리스천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를 보세요. <터미네이터>도 마찬가지인데, 그것들은 모두 요한계시록을 말하고 있거든요. 바로 지구의 종말인 거죠. 그렇습니다. 혹 시간이 되면 꼭 이 영화들을 보세요. 신이 세상을 심판하는 엄숙한, 이런 무서운 광경을! "
신앙은 그토록 진지하게 수행하는 세상의 모든 지적노력을 한순간에 유희 차원으로 전락시킨다. 대체 신앙 앞에서 무슨 토론이 가능할 것이며 지적 탐색이 이뤄지겠는가.

기이한 것은 한 인간에게 신앙과 인문적 지식이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인데, 이러한 도그마적 신앙에 따른 모순성은 일면 아마추어리즘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결국 내가 모든 형태의 신앙을 거부하는 것은 일순간에 판단정지케 하는 그 단순성, 맹목성 때문이다.

과장한다면, 절대적 믿음(신앙)에 의해 무오류, 무조건적인 안락을 기대하는 신앙은 어떤 의미에서 생활인의 아마추어리즘과 흡사하다. 일체의 회의가 배제된 일상의 쾌락! 상식, 관습, 안락, 보편적 평균성을 강요하는 일상!  


3. 종교의 자유


종교는 그 성격상, 아울러 그 말의 어원이나 그 체제의 역사상, 워낙 자유가 없는 곳이다. 그곳은 자유의 반납으로 인해 가능해지는 특이한 종류의 쥬이상스를 체계의 맹점으로 지니는 곳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상의 권리는 사실상 종교와 종교 사이의 자유, 요컨대, 종교가 없는 빈 곳 속에서의 자유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는 게 낫다.

강군이 싸우는 문제는 미션계 대학들에서도 똑같이 재론되고 있다. 심지어 일부 교수들조차 그 강압에서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물론 한국의 종교사회와 그 엘리트 관료들은 이 10대의 소년이 성취한 정신적 자유와 결기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을 것이다. 2005년, 종교의 자유를 '내가 내 종교를 믿을 자유'로 해석하는 짓을 넘어설 때도 되었다. 우선적으로 그것은 '내 이웃들이 내 종교를 믿지 않을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 김영민(철학자)

*******
한국 사회를 살아가자면 온갖 유형무형의 폭력을 감수해야 한다. 가령, 강압적인 종교 권유도 그중 하나인데, 가까이는 가족, 친척, 이웃들로부터, 거리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까지 시도때도 없이 교회에 나가라고 성화다. 올해 일흔 나이인 고모님은 만났다하면 오만상 찌뿌리며 일갈한다.

"얼른 교회 나가야지, 집안을 구원해야 할 장남이 이게 무슨 짓이냐. 죽으면 지옥 갈텐데 두렵지도 않냐? 아이구, 너 통도 크다!" 그러고는 짐짓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마무리한다. "결국 큰 일을 당해야 교회 나갈거야. 요즘 네 얼굴빛이 평화롭지 않고 우울해보인다. 다 교회 안 나가는 탓이지".

아래 층 K 목사로부터 거의 석 달동안 교회 나오라 권유받다 이제 겨우 끝났다. 으~ 지겨운 인간! 어느 날 의료원에 문병다녀오다 황당한 일을 당했다. 문병을 끝내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에 막 도착할 무렵,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앞을 턱 가로막더니,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할렐루야!" 라며 귀에대고 속삭였다. 졸지에 당한 일이라 깜짝 놀랐다. 병원 문을 나서려니 나도모르게 볼맨소리가 나왔다. "별 미친놈 다봤네!"

사실 종교의 자유가 지켜지지 않는 곳은 바로 가정이다. 상당수 초등학생은 물론이고 고교생들까지 부모들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침해받고 있다. "교회 가봐야 어차피 졸다가 와요" "가기 싫은데 엄마가 강제로 떠다밀어요" " 엄마 몰래 피시방에 있다가 교회 끝나는 시간에 집에 가거든요" 등등. "그래, 조금만 참아라, 대학생이 되면 그때는 안 나가도 되니까?" 이쯤되면, 지금 우리 학생들은 입시지옥과 종교지옥이라는 두 개의 지옥(감옥) 속에 갇힌 형국이 아닐까. 짜샤! 내가 좋으면 너도 다 좋은거야,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나쁜짓 시키겠냐. 잔말말고 디립다 믿어, 믿고 천당가라구! 


4.신의 숭배형식  


고대 그리스의 신의 대한 숭배는 '예술적 이야기하기'(비극 공연)를 통해 이뤄졌다. 가령 디오니소스 신의 숭배는 두 가지 방법으로 하는데, 하나는 먹고마시고 취하는 카니벌적 축제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적 이야기하기, 즉 비극공연이다.

오늘날 한국사회 역시 신의 숭배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금연, 금주 등 금욕적인 '극기훈련'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 등 '돈을 바치는 행위'를 통해서다 .


5.십일조


N은 나이롱 신자인데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반 강제로 교회에 나간다. N과 나는 이 말 저 말 끝에 십일조가 화제에 올랐다. 당신도 십일조를 내남? 하고 묻자 그는 소태씹은듯 상을 찌뿌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글쎄, 우리 형편에 무슨 십일조냐며 투덜대도 그의 아내는 끄덕도 하지 않는단다. 이유인즉, 자녀들의 안녕 때문이라는 것. 그러니까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하나님이 외면할게고, 결과적으로 자녀들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부부가 내는 십일조는 자녀를 위한 '생활안녕보험'쯤 될까? 월 납부액이 많은만큼 만기 환급금 역시 많을게고 따라서 천당까지 보장되는 보장성 생활안녕보험!

6. 샤머니즘과 한국종교

모든 형태의 고등종교는 사람을 좀 외롭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멀리 호메르스의 신화적 세계를 비롯해서 기독교든 불교든 보편적인 종교들은 불가피하게 합리적, 이지적이어서 그로부터 심정적 위로를 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보편적인 고등종교와 달리 샤머니즘은 사람들에게 심정적 위로와 공감을 쉽게 주는대신 인간들의 야수적인 탐욕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사회는 기독교, 불교, 천주교, 유교할것없이 그 어떤 종교든 샤머니즘이라는 블랙혹 앞에 완벽히 무릎을 끓고 말았다. 샤머니즘! 그것은 온갖 반동적인 것의 근저에 똬리를 틀고 있으며, 노예적 세계관에 기생하거나 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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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승우의 소설집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문학과지성사)의 제목대로 정말이지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고 사는 것 같다. 나 역시 마찬가지인데, 사소한 물건에서부터 필수품에 이르기까지 집에 무엇이 있는지 의외로 모르는 게 많다.

오래 전 일인데 아내에게 점수 좀 따볼까 하고 동네 마트에서 커피잔 셑트를 구입한 적이 있다. 왜 하필 커피 잔이냐고? 우리 세대가 대부분 그렇듯 나 또한 부엌살림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는지라 그저 아내가 주는 밥먹고 왔다 갔다 하는 터였지만, 그날따라 마트에 진열된 멋진 커피 잔 하나가 눈에 띄었던 거다. 워낙 커피를 좋아한 탓이다. 한데 내가 마음먹고 산 똑같은 커피 잔이 집에 또 있잖은가. 글쎄, 늘 사용하는 커피 잔인데도 같은 게 있는지 몰랐다니.

내가 가끔 사용하는 운동모자는 원래 아들녀석 것인데도 내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뭐 모자야 별 것 아니니 그렇다치더라도 애지중지 하는 책까지 이럴 때가 있다. 가끔 서점에 들러 읽을만한 책이 눈에 띄면 얼른 사들고 오는데, 집에 와서야 비로소 예전에 산 책인 것을 알고 교환하러 가는 일이 있다. 물건도 이럴진대 하물며 정신에 관해서랴! 아무튼 누구랄 것 없이 우리는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고 지낸다.

주인공은 결혼한지 얼마 안되는 새댁으로, 남편의 근무지가 워낙 먼 곳이라 신혼초인데도 불구하고 떨어져 지낸다. 한데,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은 새댁에게 이상한 증세가 찾아온다. 환상? 아니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넓은 주택에 그녀 혼자뿐인데도 마치 누군가 있는 것 같다. 처음엔 그냥 느낌으로 그랬는데, 날이 갈수록 실제 같다.

헛것을 봤나? 처음엔 긴가만가 했는데, 반복되다 보니 이게 장난이 아닌 거다. 남편에게 말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환상일 거라는 거다. 신혼인데 떨어져 지내다 보니 외로워서 그럴 거라는 거다. 그러니 아무리 남편이 그립더라도 좀 참고 지내라고 그런다.

어렵쇼! 그런데 날이 갈수록 증세가 심해진다. 그녀는 분명 집에 누군가 있다고 확신할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남편은 여전히 관심이 없는 터라, 부득이 결혼 전 가까이 지냈던 친정 오빠에게 하소연 한다. 그러나 오빠 역시 마찬가지다.

"애야! 눈앞에 어떤 물건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들은 그 물건이 실제 눈에 보이기 때문에 정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물건에 대한 느낌이나 생각, 혹은 감각 따위는 믿을 게 못되는 거란다. 물건에 대한 나중의 생각이란, 길이와 색깔, 모양에 이르기까지 사람에 따라 달리 생각될 수 있으니 틀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동생은 지금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가 집에 있다고 하잖은가. 그러니 이런 그녀의 생각이란 오빠의 말을 따르면, 얼마나 터무니 없는 일이 겠는가. 따라서 분명 헛것을 봤거나 환상일 거라는 게 오빠의 말이다.

자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는 오빠까지 이 지경이니 그녀의 답답함은 더욱 커간다. 착각이라는 것. 자신의 욕망을 현실에 투사해서 실제 있을 거라 착각하는데, 그건 잘못이라는 거다. 실제 눈에 보이는 것. 구체적인 현실만이 진짜라는 거다. 뭔가가 있을 거라고 믿는 머릿속 생각이란 환상이며 비현실이니 절대 믿지 말라는 거다. 이런 답답할데가 있나. 적어도 그녀에겐 허상이 아니라 실제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정신병원에 가보길 권한다. 그녀가 말한다. 내가 정신병자라구요? 이거 왜 이래요. 왜 쌩사람 잡느냐구요.

결국 부부는 집을 팔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동네 복덕방 아저씨가 왠 중년의 남자를 데리고 온다. 예전에 이 남자의 어머니가 어렵게 이 집을 작만했는데, 가난한 살림에 자식키우느라 고생고생하다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남자는 어머니를 그리워한 나머지 다시 집을 사들이려고 한다는 거다. 그동안 온갖 고생을 마다하고 돈을 마련했다고 한다.

남자는 집을 보자 마치 어머니를 대한 듯 당장 팔라고 통사정한다. 그러자 여자가 그런다. 어머니 키가 어느 정도였냐고. 어떤 모습이었냐고. 워낙 진지한 여자의 말에 남자가 구체적으로 말해준다. 1미터 50센티에 갸름한 몸매였고 이마에 점이 있었다고. 순간 여자가 깜짝 놀란다. 그동안 그녀가 봤던 사람의 모습과 같지 않은가. 환상과 착각이었다고 생각했던 누군가가 바로 이 남자의 어머니였다고?

하지만 남자의 어머닌 이미 죽었다고 했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살아있단 말인가? 남자에게 그런다. 당신은 정말 어머니가 살아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습니다. 물론 실제로야 돌아가셨지만 내 마음 속으로는 지금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분명 우리 어머니는 살아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어머니는 이 집에서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그런다. 맞습니다. 나도 당신의 어머니를 봤어요. 그것도 매일 말이지요. 여기까지가 이 소설의 줄거리다.

글쓰기를 하는 당신. 소설과 시를 쓰는 당신. 당신은 자신의 글에 나타난 사실들이 평소 마음 속에 내재되었던 욕망이 투사된 결과라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그것은 실제가 아니라 욕망이 만들어낸 상상력의 소산이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니 글쓰기로 드러난 모든 것들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이며 상상에 불과한, 허구적 산물이라고 단정하는가? 하지만 당신이 비록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인물이라 하더라도 실제인 양 느껴질 때가 있지 않는가? 아니, 단순히 느끼는 게 아니라 실제로 확신될 때는 없었는가?

옛날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가 있었다. 솜씨가 뛰어났던 그는 어느 날 정말로 아름다운 조각을 만들어냈다.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는 자신이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아름다운 자태에 반해, 그는 더 이상 다른 여인을 사랑할 수 없었다. 그의 사랑은 날로 뜨거워갔지만, 조각상은 언제나 차갑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비너스 여신에게 빌기로 했다. 이 조각상과 똑같이 생긴 여인을 내려달라고. 그의 뜨거운 사랑에 감동한 비너스는 마친내 그 차가운 대리석을 생명이 있는 따뜻한 육체로 변신시켜주었다고 한다.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다.

나는 별스럽지 않은 글을 쓰는 아마추어 문사지만, 가끔 내가 써논 글을 읽으며 나르시즘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쓴 글이 허구적, 상상력이 빚어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실제인 양 착각을 하곤 한다. 내가 이럴정도니, 뼈를 깍고 피말리는 듯한 사투를 벌이며 소설과 시를 창작하는 사람이야 오죽할까.

마치 피그말리온처럼. 당신이 비록 가짜로 만들어낸 허구적 인물이지만 실제로 느낄 때가 있지 않은가? 아마 이런 식의 느낌은 너무 리얼하게, 전심전력을 다해 쓴 창조적인 작품일 경우 더 현저할 것이다.

현실주의자들은 말한다. 그거 말짱 가짜고 엉터리라고. 절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라고 말한다. 당신 눈 앞에 있는 그 생생하게 실제하는 것.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그말을 듣는 순간 당신은 그동안 확고하게 지녔던 신념이 스르르 무너지며 혼란에 시작된다. 급기야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창조한 인물과 실제를 가짜라고 믿기에 이른다. 그러다 종당에는 글쓰기에 대한 회의마저 따른다. 이거 씰데없는 짓 아닌가? 이거 말짱 장난 아닐까?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면 차라리 신을 믿든지. 그런데 내가 만든 것을 믿는다? 그게 말이 되나? 내가 신인가? 아서라 그만두자. 글쓰기라니,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물론 처음은 이랬을 것이다. 심심해서. 할 일 없고, 무료해서. 그냥 글쓰기가 좋아 소설 흉내내고, 일기쓰듯 부담없는 글쓰기를 했던 거라고. 그거 심심풀이 땅콩이었다고. 그냥 할 일 없어 해 본 거라고.

때로 그것들은 허구일 수 있고, 소박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또는 착각이나 환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피그말리온처럼 당신의 소망이 절실하다면 그건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변한다. 비록 환상과 상상 속의 인물이지만 그것이 절실하고 리얼하면 실제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사실에 대해 바이블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라고.

당신은 지금 마음 속으로 뭔가를 절실히 바라고 있는가?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당장 글쓰기로 드러내 보시기 바란다. 내 장담하거니와 그 바라는 것들이 분명 현실에서 실제화 될 수 있다고. 다만 유념할 게 하나 있다. 치열해야 한다는 것.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 보다 처절하게, 오로지 죽기살기로 그것에 매달려야 한다는 것.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믿음 하나로 뚝심있게 버텨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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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11. 토

늘 그렇지만 일차적인 관심은 자식들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로 향했다. 내 삶을 우선시했던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 자식에 대한 관심은 항상 떠나지 않았다. 사실 장남인 나는 학교 졸업 후 스무살때부터 원양어선 생활을 하면서 생활비를 몽땅 가족들에게 송금했다. 자식, 부모님을 비롯해서 가족 돌보기는 평생 했으니 이만하면 할만큼 한게 아닌가? 물론 그것이 사람 도리이고 내가 좋아서 그런게지만 이젠 그만 중지하자. 나는 살면서 무엇을 하려고했던가. 어떤 인생을 살려고 했던가. 무엇을 꿈꾸었던가. 무엇을 이루려했던가. 지금부터 진지하게 다시 생각할 것.

7.19. 일

독서실 시작해서 두 해까지는 한나절 근무하는 총무를 두었습니다. 그러다 3년째들어 학생수가 급감하는바람에 아내와 내가 교대 근무를 했죠. 당연히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자유시간이 없다보니 짜증이 나더군요. 어느덧 5년째인데 더이상 이럴수 없잖은가. 돈 더벌어 무엇하겠나. 무슨 사는 의미가 있겠는가, 연이어 회의가 밀려왔습니다. 결정적으로는 아내가 너무 힘들어하고, 서로 갈등까지 생기더군요. 나야 책읽고, 트럼펫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아내는 그게 아니니까요. 사람사는 재미가 무어겠어요. 모임도 갖고, 사람도 만나고 해야하는데 줄창 독서실에 얽매여있으니 왜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생각다못해 총무를 다시 두기로 했죠. 지인의 자녀인 솔이가 총무로 근무합니다. 솔이가 여기 온지 일주일째인데, 아직은 업무가 서툴기 때문에 이것저것 알려줘야 합니다. 차차 자리잡으면 오후시간만큼은 개인시간에 활용해야겠습니다. 우선 하고싶은 것은 독서와 트럼펫 연습이지요. 무엇보다 독서가 지지부진한데 이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계획이야 이렇게저렇게 세워보지만 막상 실천이 잘 안되는군요. 문학은 잠시 유보하고, 철학쪽에 치중하려고 합니다. 요즘 니체를 읽고있는데, 어느정도 니체읽기가 끝나면 고/중세, 근 현대 할것없이 좌충우돌 식이라도 철학서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지금 생각은 니체, 소크라테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 하이데거, 사르트르 순서로 훑어볼 예정이지요.

어차피 전공을 하지 않은바에야 체계적인 연구나 읽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철학자 하나를 깊이 읽는다든가, 철학사 순서대로 읽기보다, 닥치는대로, 관심가는대로 읽는 예전의 방식 그대로 하려고 합니다. 이 나이에 깊이가 생기면 얼마나 생기겠어요, 그냥 즐거움과 재미가 전부아닐까요. 트럼펫도 그래요. 이젠 부담 던져버리고 그냥 가볍게 즐겨야겠습니다. 지적활동은 앞으로 잘해야 15년, 그렇잖으면 10년남짓이 한계일거예요. 그러니 욕심을 내면 얼마나 내겠습니까. 할수있는만큼만 하고, 그정도만 즐기면 족할뿐이지요.

- 연주활동 : 트럼펫 연주, 오케스트라 활동, 교향곡, 협주곡, 서곡 연주, 클래식 감상
- 지적활동 : 문학, 철학, 역사서 읽기, 글쓰기, 영화감상
- 독서 : 세계문학, 철학해설서, 개론서, 에세이, 철학 일차서, 원전번역서, 고전읽기.

퇴직한 직장동료 L이 그랬다. 퇴직한 사람들 뭣하고 사나 봤더니 결국 젊은시절 하던 방식 그대로더라는 것. 일리있다. 사람은 자신이 지닌, 성향, 취향, 기질대로 살아가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젊은시절에 지닌 인생관, 가치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어느쪽인가?

평소 교제를 좋아하지 않으니 대인관계가 거의 없고, 책 좋아하고, 예술취향이 강해서 제반 예술 장르를 가까이한다. 사회적 교제가 없으니 자연 고독하고, 개인적인 생활을 좋아했다. 또한 워낙 젊은시절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절약, 검소, 근면이 몸에 배었다. 그래서 비록 현실감은 떨어져도 돈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았기에 부자는 아니라도 저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차근차근 준비를 해왔으니 궁핍할 일은 없다. 약간의 돈은 품위를 지켜주고,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게 한다. 그런 실리적인 현실태도에 지적 생활이 더해졌다.

그렇다면 현실과 정신적 생활 중에서 어느 쪽 비중이 클까? 당연히 정신 쪽이다. 그것만이 가장 큰 즐거움이자 행복감을 느끼게 하니까. 안락한 생활, 돈의 여유는 순간에 불과하다.

7. 26. 일

어떤 것이 진리인 것은 그것이 옳고 그르거나 논리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살아가는데 실용성이 있느냐 없느냐 여부(실용주의)에 달려있다. 그런 점에서 그동안 인류가 2,000여년간 신봉한 종교, 진리, 도덕, 나아가 민족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은 영구불변한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가설체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삶인가 하는 것도 단지 각자가 만들어나가면 되는 것이지 딱히 어떤 한 방식만이 기준이거나 옳은게 아니다.

내가 사는 삶, 하루하루가 창조적이어야겠다는 것. 마치 무대 위에 벌어지는 드라마틱한 연극이 되어야겠다는 것. 열정에 찬 뜨거운 삶이어야겠다는 것. 그렇다면 어떤 삶이어야할까.

학교에 안 나간지 1년째. 하지만 여전히 하루하루가 지지부진하다. 아직은 총무 일을 하는 솔이가 충분히 업무파악이 안 된 탓이지만, 독서실 업무 자체가 분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독서실탓만해야 하나. 일거리가 아예 없거나 다른 일을 한다면 달라질까?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정도 환경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설사 또다른 환경이 주어져도 달라질게 없다. 일단 주어진 환경 속에서 방법을 찾도록 하자.

휴식, 업무 틈틈이 독서(인문학). 글쓰기. 트럼펫 연습. 요가. 여기서 즐거움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독서와 연주다. 그렇다면 트럼펫 연습과 독서에 더 몰입할 것. 독서실 업무에서 비중을 약간만 취미생활쪽으로 선회할 것. 당분간 니체읽기에 치중한다. 기존에 보유한 책을 미처 읽기도 전에 도서구입을 하면 되레 있는 책도 읽을 수 없다. 그러니 도서구입은 중지하도록 하자.

7.27. 목

비록 하루 단 한 문장이라도 글쓰기를 거르지말 것. 잡문, 사소한 기록, 단상, 스케치 등 그 무엇이라도 쓸 것. 또한 글쓸 수 있는 환경을 의식적으로 만들 것. 가령 노트북은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곁에 가까이 놓고, 머리에 떠오르는 글감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즉시 노트북에 입력할 것. 다음으로 음악, 문학, 사상, 종교, 일상 등 모든 주제를 글쓰기로 택할 것.

아울러 영화감상,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을것. 당분간 글쓰기 대상은 문학으로 국한할것. 올 한 해 목표는 문학비평을 한 편 쓰는 일이다. 12월 석조동인지 발표를 목표로 비평, 소설집을 부지런히 읽고, 습작을 하자. 병행해서 에세이, 문학단평, 음악이나 영화를 대상으로 한 에세이도 염두에 둘 것.

지난 몇 년 독서실 업무가 나의 일상을 지배하는 우선 순위였지만 자나깨나 바라고, 실제 기쁨을 느끼는 것은 가족도 아니고, 돈도 아니며 글쓰기와 독서, 영화, 음악과 트럼펫 연주였다. 아마 이것들은 내 평생 동반자이면서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멈추지 않을게 분명하다. 이쯤되면 거의 운명적이라도해도 과언이 아니니 나이들어도 여전히 꿈만 꾸고 있을건가? 라거나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다.

바라기는 내 맘에 든 한 곡을 트럼펫으로 멋지게 연주하고싶고, 어데 내놓아도 부끄럼없는 훌륭한 글 한 편 쓰고싶다. 예나지금이나 나는 어느 한순간도 아마추어, 예술애호가임을 잊은적 없다. 겸손을 떠는게 아니고, 일찍이 내 능력이 그정도 밖에 안 됨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직업 예술가가 아니건만 예술을 떠나 살수도 없는게 또한 나의 운명이니 이런 나를 예술가들이 알면 코웃음치겠지만 팔자가 이런걸 어쩌겠나.

누구는 이렇게 말한다. 프로 아마추어가 따로있나. 뭐든 치열하게 하면 프로지. 하지만 착각하지 말자. 최소한 어느 분야의 프로로 자부하려면 자나깨나 그것만을 생각하고 실제 그 분야에 뛰어난 실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만약 지금 당장 실력이 안 되더라도 갖출 수 있을때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반면에 아마추어, 딜레탕트는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 어느 순간 생활로 돌아갈 수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수준에서 만족하면 그만이다. 바로 이런 차이 때문에 프로와 아마추어는 절대 다르고, 수준 자체에서도 비교가 될 수 없다.

7. 28. 금

어제 주문했던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 DVD 네 장, 황정은의 소설 2권 도착하다. 오늘도 트럼펫 연습 1시간. 오후에 필로무지카 회원인 K씨와 팬브레드에서 커피 한 잔 하며 이런 저런 주변 소식을 들었다.

어느듯 독서실 운영 7년째, 이젠 이곳 생활이 최적화된 느낌이다. 분주하게 돌아가는 일상이 거의 톱니바퀴처럼 반복되지만 크게 불편하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다. 오히려 편안하다고해야할까. 건강만 허락한다면 앞으로 몇 년이라도 더 할 수 있을것같다. 꼭 돈때문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고 편안해서 그렇다. 사실 바쁘게 뛰어다니다보면 좀 피곤하고, 왜 사서 이 고생인가 하는 생각이들지만, 쓸데없는 잡념 생길 일이 없는데다 원체 바깥 활동을 좋아하지 않다보니 그럭저럭 지낼만한거다. 더구나 책읽고, 글쓰고, 영화보고, 트럼펫 연습하는것만으로도 충분히 현재의 생활이 만족스럽기 때문에 더욱 독서실 생활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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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C의 소설 속 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소시민이거나 하층 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생활인인 우리가 그렇듯 열심히 일하고, 일터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소설의 내용을 이룬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리얼리즘 방식인데, 기이하게도 나는 그의 소설에서 현실감, 혹은 생동감을 느낄수가 없다. 이른바 지식인소설이거나 형이상학적 관념투의 소설이 아닌데도 왜 그럴까.

그의 소설 속 인물은 공통적으로 정직하고 올곧으며 신실하다. 마치 TV드라마 ‘전원일기’의 등장인물마냥 인정이 넘치며, 설사 약간 모가 난 성정을 지녔더라도 크게 험이 될 정도는 아니다. 원래 심성이 고운 C처럼 소설 인물들도 모두 그를 닮았다. 하지만 우리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면 심성 고운 사람만 있는게 아니고 별의별 인간군상이 모여 살아가는게 우리네 삶의 현주소다. 따라서 그의 소설이 비현실적이거나 생동감이 결여된 착한 사람 일변도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이중적이거나 모순투성이고, 속물적이며 위악적인 면을 함께 갖고 있다. 따라서 일견 휴머니즘이 느껴지는 인물들임에도 불구하고 자동인형처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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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낚시를 업으로 삼는 어느 낚시꾼의 한마디. “ 붕어낚시는 정말 알 수 없단 말야”. 낚시하기에 최상의 조건들, 즉 대물붕어가 자주 출몰한다는 유명한 낚시터, 적당히 흐린날씨, 해질무렵, 주변 여건은 마치 안성맞춤이다. 그런데 문제는 찌가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거다. 하지만 이런 일이 어데 낚시뿐일까. 우리네 인생살이가 바로 그렇지 않던가. 평생 경험한 익숙한 세상일이건만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다. 모호한 인생살이, 그러기에 더욱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9. 5. 화

비록 짧고 별스럽지 않은 내용이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얼굴이 다 화끈거릴 시시껄렁한 농담에 K는 이런 문자를 보냈다. “꿈 깨고 뭔가 열정을 갖고 대쉬할 것을 찾아봐라.”

일상의 덫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않고 출몰한다. 하니 바로 살기 위해서는 긴장의 끈을 놓지말고, 좌고우면하며 끊임없이 노력해야한다. 자칫 한눈팔다간 헛된 열정 엉뚱한데 쏟아붇거나 나잇값 못한채 괴물 되기십상이다. 영화 <생활의 발견> 속 대사마냥 “사람은 바로 못되어도 괴물은 되지말자.”

이즈음 트럼펫 연습에 몰두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마땅히 열정을 쏟을만한게 없다는 것. 그럼 음악과 트럼펫은 열정의 대상이 아니던가? 그렇다, 적어도 나에게 음악은 열정이 아니라 많은 취미 가운데 하나이며, 열정의 배설구에 불과하다. 결국은 책읽기와 글쓰기 혹은 영화인데, 그 어느쪽도 맘을 두지 못하고 어영부영 지나간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깊이 반성할 것. 그나저나 언제쯤 불꽃이 다시 점화되려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가 나를 알수 없다.

- 오후

문득 문득 드는 불안감 하나. 내가 헛 사는건 아닐까? 헛 책, 헛 글을 읽고 있는건 아닐까? “생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글을 읽는”(황현산)건 아닐까. 분명한건 “내가 인간과 세상에 대한 근심을 담은 글을 읽고 쓴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증하진 않는다.”(허문영)는 점이다.

9. 6. 목

독서 패턴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문제. 가령 지금까지 독서는 한마디로 무거운, 의미찾기 중심이었다. 그걸 재미 쪽으로 돌려본다는거다. 쾌락으로의 독서.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성격상 가볍게 흘러가진 않을거다. 여전히 무거움을 버리지 못할거라는 것. 그러니 의미니 무거움은 좀 유보하고 가볍게 가보자. 요즘 <헌 책방 헤이온와이>라든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알베로트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 등을 읽는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잊지 말 것. 내게 남은 생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15년 남짓이다. 그러니 하루하루를 소중하고 즐겁게,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야한다. 어느 날 불현듯 죽음을 맞이할거고, 그 순간 모두 종료될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 내가 좋아하는 책들조차 모두 한순간 잊혀질것이니. 그런 연유로 쾌락으로서의 독서를 떠올리는거다. 의미만 찾아 헤메다, 깊이만 찾다 결국 사라질지 모를테니.

11. 12. 일

거의 2개월만에 다시 일기를 쓴다. 요즘은 당최 한 줄 쓰기조차 쉽지않다. 매사가 분주하고 산만하다. 글, 글, 오매불망 글쓰기를 소망하면서도 왜 쓰지 못하는가. 뭐 이 핑계 저 핑계 댈것없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한 탓이다. 진정으로 글쓰기가 중요했다면 이랬을까? 그러니까 내 삶에서 글쓰기는 뒷전이라는 것. 두루 반성해야 한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그나마 독서를 중지하지 않은 점인데, 궁극적으로는 책읽기가 글쓰기로 전환되어야 한다. 글쓰기를 위해 지켜야 할 몇 가지. 일기쓰기, 단 한 줄이라도 독후감쓰기, 블로그 관리, 노트북 가까이 하기 등.

11. 13. 월

독서실
종종 힘든 일이 생길을 때 혹은 몸이 좀 불편할 때 독서실을 언제까지해야하나 의문이 들곤한다. 그러다가도 이내 이제 익숙할대로 익숙하고 그리 힘겨운 일도 없잖은가. 뭣보다 약간의 경제적 여유가 가능하고 생활에 활력이 생긴다. 게다가 이 일 저 일 분주해서 당최 지루할 시간이 없다. 건강만 문제없다면 견딜만 하지 않은가? 뭐 아직 팔팔한데 70까지는 해야지? 욕심이 생긴다. 주의할것 몇 가지. 독서실 사람없다고 걱정말고 욕심 부리지 말자. 최선을 다해 운영하고 오는 사람 친절히 대하자. 가능하면 지출 줄이고 매사 검소하자.

독서, 글쓰기
내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물을때마다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인 관심은 변함없이 두 가지의 문제, 즉 경제여건과 독서(글쓰기)로 요약되었다. 그런데 경제여건이야 각자 만족여부에 달렸으니 – 나는 지금의 경제적 상황이 만족스럽다 - 어느정도 답이 주어지지만 독서(글쓰기)만큼은 늘 충족이 안 되니 이쯤되면 독서와 글쓰기는 내게 실존의 가장 큰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자 그렇다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지는 독서와 글쓰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

11. 20. 월

오랜만에 한길문고에 들르다. 이곳저곳 발길이 닿지만 역시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문학코너. 예나 지금이나 문학에 대한 관심이 가장 큰 탓이다. 민용태 교수가 번역한 창비판 <돈키호테>와 김화영 교수가 번역한 장 그르니에와 카뮈의 왕복 서간집을 만지작거리다 포기하고 대신 대만 출신의 문화비평가이자 독서가인 탕누이의 <마르케스의 서재>만 구입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이미 시공사판과 열린책 등 두 종의 번역본을 갖고 있지만 워낙 비중있는 고전이라 창비판까지 욕심이 생긴거다. 하지만 과연 새 번역본까지 읽어낼 여력이 있을 것 같지 않아 유보하기로 했다. 생각 같아서는 어떤 책이라도 읽어낼듯 싶지만 내 나이 60중반 아닌가. 현실적으로 독서 할 수 있는 시간도 부족하고, 이제는 체력, 지력의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 읽지도 않을 책을 괜히 욕심껏 사는 일은 되도록 자제하자.

11. 21. 화

글쓰기, 독서가 안 되는 이유가 뭘까. 우선 열정 부족, 상상력 고갈, 시간 부족 등을 꼽을 수 있지만 소소한 주변 여건도 문제다. 첫째, TV시청 시간을 줄일 것. 리모컨을 서랍에 넣어놓고, 오후 8시 뉴스룸 하나로 제한한다. 둘째, 독한 마음자세를 가질 것. 독서에 더욱 몰입하고 글쓰기에 대한 의무감을 가질 것. 셋째, 어떤 형태든 상관없이 가볍게 쓸 것. 넷째, 환경 탓을 하지 말 것. 과연 지금보다 좋은 환경이 어데 있을까. 독서실 특성상 뭔가에 오랫동안 몰입할 수 없다는 험은 있지만 오전 시간, 특히 겨울 한철은 한가롭다. 잡담 제하고, 더욱 매진하자.

오후

Y씨 가족이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다. 오늘 오후 마침 Y씨 부부와 점심식사를 하게됐다. 모처럼의 외국 나들이 때문인지 식사 전부터 시작된 Y씨의 여행담은 자리를 옮긴 커피 타임까지 꽤 긴 시간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지극히 단출해서 ‘어데 어데를 다녀왔다’ ‘뭣을 봤다.’ 등 몇 마디로 요약되었다. 그나마 좌중의 흥미를 가장 끈 것은 여행 가방 분실사건이었다.

비단 Y씨뿐이 아니다. 대다수 사람들의 여행기는 누구랄것없이 공통적으로 ‘다녀왔다’ ‘봤다’ ‘먹었다’ 등으로 정리된다. 아마 요즘 카톡에서 흔히 볼수 있는 보여주기 식 인증샷과도 같을 것이다. 피상적인 관찰, 피상적인 이야기. 대체 단순히 본것만이 주된 내용이라면 어데를 다녀온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 TV를 통해 보든 실제 현장에서 보든 직접 가서 봤다는것 말고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긴 열흘 남짓한 짧은 시간으로 세세한 것을 관찰할 수는 없지만 이런 식의 여행이라면 단지 해외에서 시간보내기, 구경하기에 불과할지 모른다.

저녁
평소 독서가입네 자부하는 터지만 막상 이탈리아에 대해 아는게 없다. 몇몇 그리스 고전은 알겠는데 로마 고전은 문학, 예술사, 철학, 역사 모두 백지상태다. 만시지탄의 감은 있지만 스케치라도 해보자는 심정에서 두 권의 책을 골랐다. 하나는 진즉 사두긴 했지만 아직 읽지 않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다른 하나는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문화>다. 다행히 시간과 열정이 허락하면 단테의 <신곡>,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축쇄본까지 욕심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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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의 소설 <나귀 가죽>(이철의 역, 문학동네)을 읽다보니 1830년 7월 혁명 전후의 사회, 시대적 배경 지식을 알지 않고는 안 되겠다. 하기야 19세기 프랑스문학은 발자크에서 시작된 리얼리즘에서부터 졸라의 자연주의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사회'라는 문제가 주 테마이니 당대 사회의 시대적 배경, 사회적 배경을 알지 않으면 소설을 제대로 이해 할 수 없다.

발자크에 이어 스탕달, 졸라, 플로오벨을 계속해서 읽어갈 예정이니 일단 공부는 하고볼 일이다. 적당한 책이 없을까? 오래 전에 구입한 노명식 교수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콤뮨까지>(까치)를 참고하기로 했다.

얄팍한 부피에 비해 1789년 대혁명에서부터 1848년 2월혁명까지 프랑스 혁명 전체를 언급하고 있고, 소략한 내용이지만 시대적 배경을 파악하기엔 그만이다. 일단 이 책과 랑송의 <불문학사>를 참고삼아 프랑스 근대문학 작품을 대강 스케치해야겠다. 그간 영문학, 러시아문학을 읽었으니 지금부터 불문학, 독문학을 좀더 읽어둔다면 근대 유럽문학의 지형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
채만식의 <탁류>와 <태평천하>를 재독하다. 가능하면 식민지 시대의 우리 문학을 폭넓게 읽고싶다. 책 읽기의 욕망이야 샘물솟듯 그치지 않겠지만, 그때그때마다 관심사는 달라지는것이어서 어떤 특정한 책을 읽을 기회란 아무때나 주어지지 않는다. 채만식을 끝내면 염상섭의 <삼대>와 <만세전>을 계속해서 읽을 예정. 중고서적 사이트인 북코아에 이기영의 <고향>을 주문했다.

식민지시대의 한국문학(1910년~1945년)

염상섭 <삼대><만세전>, 채만식 <탁류> <태평천하> 기타 단편, 이기영 <고향>, 김남천<대하><맥>, 박태원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식민지 시대의 문학과 방향성

- 이광수의 시대(1919. 3. 1운동 이전) : 방향성이 가능, 개인과 민족의 통합의지가 뚜렷, 결과적으로 장편 <무정> 출현.
- 3.1운동 이후 :수년동안 사회의 나아갈 지형이 보이지 않음. 서정적 양식이 선택됨.
- 1920년대 초반 : 카프, 계급사상의 등장으로 인해 단편 정도가 가능.
- 1930년대 초반 : 방향성이 소설속에 구조화됨/ 염상섭<3대>, 이기영 <고향>
- 1940년대 군국주의 : 방향성 상실/ <탁류> <대하>

3
민음사에서 출간된 피츠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김욱동 역, 민음사) 는 가독성이 뛰어나다. 원작이 훌륭해서일까, 아니면 번역이 잘 돼서일까. 아마 두 가지 모두 해당될 것이다. 유려한 문체는 물론이고, 주인공 개츠비의 면모에 대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미스터리하게 끌어가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다. 무엇보다 경제공황 시대를 배경으로 한 모럴 헤저드 국면의 미국사회를 개츠비와 데이지라는 남녀관계를 통해 그러낸 것은 왜 이 작품이 현대미국소설의 으뜸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여실히 증명해준다.

나는 이 소설을 10여전에 처음 읽었고, 다시 1년전에 재독, 그리고 지금 세 번째 읽고있는데 지금에야 비로서 작품의 진수를 제대로 만끽하고 있다. 역시 어떤 책이든 그 진가를 파악하려면 재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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