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11. 토
늘 그렇지만 일차적인 관심은 자식들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로 향했다. 내 삶을 우선시했던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 자식에 대한 관심은 항상 떠나지 않았다. 사실 장남인 나는 학교 졸업 후 스무살때부터 원양어선 생활을 하면서 생활비를 몽땅 가족들에게 송금했다. 자식, 부모님을 비롯해서 가족 돌보기는 평생 했으니 이만하면 할만큼 한게 아닌가? 물론 그것이 사람 도리이고 내가 좋아서 그런게지만 이젠 그만 중지하자. 나는 살면서 무엇을 하려고했던가. 어떤 인생을 살려고 했던가. 무엇을 꿈꾸었던가. 무엇을 이루려했던가. 지금부터 진지하게 다시 생각할 것.
7.19. 일
독서실 시작해서 두 해까지는 한나절 근무하는 총무를 두었습니다. 그러다 3년째들어 학생수가 급감하는바람에 아내와 내가 교대 근무를 했죠. 당연히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자유시간이 없다보니 짜증이 나더군요. 어느덧 5년째인데 더이상 이럴수 없잖은가. 돈 더벌어 무엇하겠나. 무슨 사는 의미가 있겠는가, 연이어 회의가 밀려왔습니다. 결정적으로는 아내가 너무 힘들어하고, 서로 갈등까지 생기더군요. 나야 책읽고, 트럼펫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아내는 그게 아니니까요. 사람사는 재미가 무어겠어요. 모임도 갖고, 사람도 만나고 해야하는데 줄창 독서실에 얽매여있으니 왜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생각다못해 총무를 다시 두기로 했죠. 지인의 자녀인 솔이가 총무로 근무합니다. 솔이가 여기 온지 일주일째인데, 아직은 업무가 서툴기 때문에 이것저것 알려줘야 합니다. 차차 자리잡으면 오후시간만큼은 개인시간에 활용해야겠습니다. 우선 하고싶은 것은 독서와 트럼펫 연습이지요. 무엇보다 독서가 지지부진한데 이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계획이야 이렇게저렇게 세워보지만 막상 실천이 잘 안되는군요. 문학은 잠시 유보하고, 철학쪽에 치중하려고 합니다. 요즘 니체를 읽고있는데, 어느정도 니체읽기가 끝나면 고/중세, 근 현대 할것없이 좌충우돌 식이라도 철학서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지금 생각은 니체, 소크라테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 하이데거, 사르트르 순서로 훑어볼 예정이지요.
어차피 전공을 하지 않은바에야 체계적인 연구나 읽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철학자 하나를 깊이 읽는다든가, 철학사 순서대로 읽기보다, 닥치는대로, 관심가는대로 읽는 예전의 방식 그대로 하려고 합니다. 이 나이에 깊이가 생기면 얼마나 생기겠어요, 그냥 즐거움과 재미가 전부아닐까요. 트럼펫도 그래요. 이젠 부담 던져버리고 그냥 가볍게 즐겨야겠습니다. 지적활동은 앞으로 잘해야 15년, 그렇잖으면 10년남짓이 한계일거예요. 그러니 욕심을 내면 얼마나 내겠습니까. 할수있는만큼만 하고, 그정도만 즐기면 족할뿐이지요.
- 연주활동 : 트럼펫 연주, 오케스트라 활동, 교향곡, 협주곡, 서곡 연주, 클래식 감상
- 지적활동 : 문학, 철학, 역사서 읽기, 글쓰기, 영화감상
- 독서 : 세계문학, 철학해설서, 개론서, 에세이, 철학 일차서, 원전번역서, 고전읽기.
퇴직한 직장동료 L이 그랬다. 퇴직한 사람들 뭣하고 사나 봤더니 결국 젊은시절 하던 방식 그대로더라는 것. 일리있다. 사람은 자신이 지닌, 성향, 취향, 기질대로 살아가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젊은시절에 지닌 인생관, 가치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어느쪽인가?
평소 교제를 좋아하지 않으니 대인관계가 거의 없고, 책 좋아하고, 예술취향이 강해서 제반 예술 장르를 가까이한다. 사회적 교제가 없으니 자연 고독하고, 개인적인 생활을 좋아했다. 또한 워낙 젊은시절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절약, 검소, 근면이 몸에 배었다. 그래서 비록 현실감은 떨어져도 돈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았기에 부자는 아니라도 저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차근차근 준비를 해왔으니 궁핍할 일은 없다. 약간의 돈은 품위를 지켜주고,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게 한다. 그런 실리적인 현실태도에 지적 생활이 더해졌다.
그렇다면 현실과 정신적 생활 중에서 어느 쪽 비중이 클까? 당연히 정신 쪽이다. 그것만이 가장 큰 즐거움이자 행복감을 느끼게 하니까. 안락한 생활, 돈의 여유는 순간에 불과하다.
7. 26. 일
어떤 것이 진리인 것은 그것이 옳고 그르거나 논리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살아가는데 실용성이 있느냐 없느냐 여부(실용주의)에 달려있다. 그런 점에서 그동안 인류가 2,000여년간 신봉한 종교, 진리, 도덕, 나아가 민족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은 영구불변한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가설체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삶인가 하는 것도 단지 각자가 만들어나가면 되는 것이지 딱히 어떤 한 방식만이 기준이거나 옳은게 아니다.
내가 사는 삶, 하루하루가 창조적이어야겠다는 것. 마치 무대 위에 벌어지는 드라마틱한 연극이 되어야겠다는 것. 열정에 찬 뜨거운 삶이어야겠다는 것. 그렇다면 어떤 삶이어야할까.
학교에 안 나간지 1년째. 하지만 여전히 하루하루가 지지부진하다. 아직은 총무 일을 하는 솔이가 충분히 업무파악이 안 된 탓이지만, 독서실 업무 자체가 분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독서실탓만해야 하나. 일거리가 아예 없거나 다른 일을 한다면 달라질까?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정도 환경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설사 또다른 환경이 주어져도 달라질게 없다. 일단 주어진 환경 속에서 방법을 찾도록 하자.
휴식, 업무 틈틈이 독서(인문학). 글쓰기. 트럼펫 연습. 요가. 여기서 즐거움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독서와 연주다. 그렇다면 트럼펫 연습과 독서에 더 몰입할 것. 독서실 업무에서 비중을 약간만 취미생활쪽으로 선회할 것. 당분간 니체읽기에 치중한다. 기존에 보유한 책을 미처 읽기도 전에 도서구입을 하면 되레 있는 책도 읽을 수 없다. 그러니 도서구입은 중지하도록 하자.
7.27. 목
비록 하루 단 한 문장이라도 글쓰기를 거르지말 것. 잡문, 사소한 기록, 단상, 스케치 등 그 무엇이라도 쓸 것. 또한 글쓸 수 있는 환경을 의식적으로 만들 것. 가령 노트북은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곁에 가까이 놓고, 머리에 떠오르는 글감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즉시 노트북에 입력할 것. 다음으로 음악, 문학, 사상, 종교, 일상 등 모든 주제를 글쓰기로 택할 것.
아울러 영화감상,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을것. 당분간 글쓰기 대상은 문학으로 국한할것. 올 한 해 목표는 문학비평을 한 편 쓰는 일이다. 12월 석조동인지 발표를 목표로 비평, 소설집을 부지런히 읽고, 습작을 하자. 병행해서 에세이, 문학단평, 음악이나 영화를 대상으로 한 에세이도 염두에 둘 것.
지난 몇 년 독서실 업무가 나의 일상을 지배하는 우선 순위였지만 자나깨나 바라고, 실제 기쁨을 느끼는 것은 가족도 아니고, 돈도 아니며 글쓰기와 독서, 영화, 음악과 트럼펫 연주였다. 아마 이것들은 내 평생 동반자이면서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멈추지 않을게 분명하다. 이쯤되면 거의 운명적이라도해도 과언이 아니니 나이들어도 여전히 꿈만 꾸고 있을건가? 라거나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다.
바라기는 내 맘에 든 한 곡을 트럼펫으로 멋지게 연주하고싶고, 어데 내놓아도 부끄럼없는 훌륭한 글 한 편 쓰고싶다. 예나지금이나 나는 어느 한순간도 아마추어, 예술애호가임을 잊은적 없다. 겸손을 떠는게 아니고, 일찍이 내 능력이 그정도 밖에 안 됨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직업 예술가가 아니건만 예술을 떠나 살수도 없는게 또한 나의 운명이니 이런 나를 예술가들이 알면 코웃음치겠지만 팔자가 이런걸 어쩌겠나.
누구는 이렇게 말한다. 프로 아마추어가 따로있나. 뭐든 치열하게 하면 프로지. 하지만 착각하지 말자. 최소한 어느 분야의 프로로 자부하려면 자나깨나 그것만을 생각하고 실제 그 분야에 뛰어난 실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만약 지금 당장 실력이 안 되더라도 갖출 수 있을때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반면에 아마추어, 딜레탕트는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 어느 순간 생활로 돌아갈 수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수준에서 만족하면 그만이다. 바로 이런 차이 때문에 프로와 아마추어는 절대 다르고, 수준 자체에서도 비교가 될 수 없다.
7. 28. 금
어제 주문했던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 DVD 네 장, 황정은의 소설 2권 도착하다. 오늘도 트럼펫 연습 1시간. 오후에 필로무지카 회원인 K씨와 팬브레드에서 커피 한 잔 하며 이런 저런 주변 소식을 들었다.
어느듯 독서실 운영 7년째, 이젠 이곳 생활이 최적화된 느낌이다. 분주하게 돌아가는 일상이 거의 톱니바퀴처럼 반복되지만 크게 불편하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다. 오히려 편안하다고해야할까. 건강만 허락한다면 앞으로 몇 년이라도 더 할 수 있을것같다. 꼭 돈때문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고 편안해서 그렇다. 사실 바쁘게 뛰어다니다보면 좀 피곤하고, 왜 사서 이 고생인가 하는 생각이들지만, 쓸데없는 잡념 생길 일이 없는데다 원체 바깥 활동을 좋아하지 않다보니 그럭저럭 지낼만한거다. 더구나 책읽고, 글쓰고, 영화보고, 트럼펫 연습하는것만으로도 충분히 현재의 생활이 만족스럽기 때문에 더욱 독서실 생활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거다.
*****************
소설가 C의 소설 속 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소시민이거나 하층 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생활인인 우리가 그렇듯 열심히 일하고, 일터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소설의 내용을 이룬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리얼리즘 방식인데, 기이하게도 나는 그의 소설에서 현실감, 혹은 생동감을 느낄수가 없다. 이른바 지식인소설이거나 형이상학적 관념투의 소설이 아닌데도 왜 그럴까.
그의 소설 속 인물은 공통적으로 정직하고 올곧으며 신실하다. 마치 TV드라마 ‘전원일기’의 등장인물마냥 인정이 넘치며, 설사 약간 모가 난 성정을 지녔더라도 크게 험이 될 정도는 아니다. 원래 심성이 고운 C처럼 소설 인물들도 모두 그를 닮았다. 하지만 우리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면 심성 고운 사람만 있는게 아니고 별의별 인간군상이 모여 살아가는게 우리네 삶의 현주소다. 따라서 그의 소설이 비현실적이거나 생동감이 결여된 착한 사람 일변도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이중적이거나 모순투성이고, 속물적이며 위악적인 면을 함께 갖고 있다. 따라서 일견 휴머니즘이 느껴지는 인물들임에도 불구하고 자동인형처럼 생각된다.
********************
평생 낚시를 업으로 삼는 어느 낚시꾼의 한마디. “ 붕어낚시는 정말 알 수 없단 말야”. 낚시하기에 최상의 조건들, 즉 대물붕어가 자주 출몰한다는 유명한 낚시터, 적당히 흐린날씨, 해질무렵, 주변 여건은 마치 안성맞춤이다. 그런데 문제는 찌가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거다. 하지만 이런 일이 어데 낚시뿐일까. 우리네 인생살이가 바로 그렇지 않던가. 평생 경험한 익숙한 세상일이건만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다. 모호한 인생살이, 그러기에 더욱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9. 5. 화
비록 짧고 별스럽지 않은 내용이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얼굴이 다 화끈거릴 시시껄렁한 농담에 K는 이런 문자를 보냈다. “꿈 깨고 뭔가 열정을 갖고 대쉬할 것을 찾아봐라.”
일상의 덫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않고 출몰한다. 하니 바로 살기 위해서는 긴장의 끈을 놓지말고, 좌고우면하며 끊임없이 노력해야한다. 자칫 한눈팔다간 헛된 열정 엉뚱한데 쏟아붇거나 나잇값 못한채 괴물 되기십상이다. 영화 <생활의 발견> 속 대사마냥 “사람은 바로 못되어도 괴물은 되지말자.”
이즈음 트럼펫 연습에 몰두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마땅히 열정을 쏟을만한게 없다는 것. 그럼 음악과 트럼펫은 열정의 대상이 아니던가? 그렇다, 적어도 나에게 음악은 열정이 아니라 많은 취미 가운데 하나이며, 열정의 배설구에 불과하다. 결국은 책읽기와 글쓰기 혹은 영화인데, 그 어느쪽도 맘을 두지 못하고 어영부영 지나간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깊이 반성할 것. 그나저나 언제쯤 불꽃이 다시 점화되려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가 나를 알수 없다.
- 오후
문득 문득 드는 불안감 하나. 내가 헛 사는건 아닐까? 헛 책, 헛 글을 읽고 있는건 아닐까? “생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글을 읽는”(황현산)건 아닐까. 분명한건 “내가 인간과 세상에 대한 근심을 담은 글을 읽고 쓴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증하진 않는다.”(허문영)는 점이다.
9. 6. 목
독서 패턴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문제. 가령 지금까지 독서는 한마디로 무거운, 의미찾기 중심이었다. 그걸 재미 쪽으로 돌려본다는거다. 쾌락으로의 독서.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성격상 가볍게 흘러가진 않을거다. 여전히 무거움을 버리지 못할거라는 것. 그러니 의미니 무거움은 좀 유보하고 가볍게 가보자. 요즘 <헌 책방 헤이온와이>라든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알베로트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 등을 읽는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잊지 말 것. 내게 남은 생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15년 남짓이다. 그러니 하루하루를 소중하고 즐겁게,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야한다. 어느 날 불현듯 죽음을 맞이할거고, 그 순간 모두 종료될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 내가 좋아하는 책들조차 모두 한순간 잊혀질것이니. 그런 연유로 쾌락으로서의 독서를 떠올리는거다. 의미만 찾아 헤메다, 깊이만 찾다 결국 사라질지 모를테니.
11. 12. 일
거의 2개월만에 다시 일기를 쓴다. 요즘은 당최 한 줄 쓰기조차 쉽지않다. 매사가 분주하고 산만하다. 글, 글, 오매불망 글쓰기를 소망하면서도 왜 쓰지 못하는가. 뭐 이 핑계 저 핑계 댈것없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한 탓이다. 진정으로 글쓰기가 중요했다면 이랬을까? 그러니까 내 삶에서 글쓰기는 뒷전이라는 것. 두루 반성해야 한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그나마 독서를 중지하지 않은 점인데, 궁극적으로는 책읽기가 글쓰기로 전환되어야 한다. 글쓰기를 위해 지켜야 할 몇 가지. 일기쓰기, 단 한 줄이라도 독후감쓰기, 블로그 관리, 노트북 가까이 하기 등.
11. 13. 월
독서실
종종 힘든 일이 생길을 때 혹은 몸이 좀 불편할 때 독서실을 언제까지해야하나 의문이 들곤한다. 그러다가도 이내 이제 익숙할대로 익숙하고 그리 힘겨운 일도 없잖은가. 뭣보다 약간의 경제적 여유가 가능하고 생활에 활력이 생긴다. 게다가 이 일 저 일 분주해서 당최 지루할 시간이 없다. 건강만 문제없다면 견딜만 하지 않은가? 뭐 아직 팔팔한데 70까지는 해야지? 욕심이 생긴다. 주의할것 몇 가지. 독서실 사람없다고 걱정말고 욕심 부리지 말자. 최선을 다해 운영하고 오는 사람 친절히 대하자. 가능하면 지출 줄이고 매사 검소하자.
독서, 글쓰기
내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물을때마다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인 관심은 변함없이 두 가지의 문제, 즉 경제여건과 독서(글쓰기)로 요약되었다. 그런데 경제여건이야 각자 만족여부에 달렸으니 – 나는 지금의 경제적 상황이 만족스럽다 - 어느정도 답이 주어지지만 독서(글쓰기)만큼은 늘 충족이 안 되니 이쯤되면 독서와 글쓰기는 내게 실존의 가장 큰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자 그렇다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지는 독서와 글쓰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
11. 20. 월
오랜만에 한길문고에 들르다. 이곳저곳 발길이 닿지만 역시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문학코너. 예나 지금이나 문학에 대한 관심이 가장 큰 탓이다. 민용태 교수가 번역한 창비판 <돈키호테>와 김화영 교수가 번역한 장 그르니에와 카뮈의 왕복 서간집을 만지작거리다 포기하고 대신 대만 출신의 문화비평가이자 독서가인 탕누이의 <마르케스의 서재>만 구입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이미 시공사판과 열린책 등 두 종의 번역본을 갖고 있지만 워낙 비중있는 고전이라 창비판까지 욕심이 생긴거다. 하지만 과연 새 번역본까지 읽어낼 여력이 있을 것 같지 않아 유보하기로 했다. 생각 같아서는 어떤 책이라도 읽어낼듯 싶지만 내 나이 60중반 아닌가. 현실적으로 독서 할 수 있는 시간도 부족하고, 이제는 체력, 지력의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 읽지도 않을 책을 괜히 욕심껏 사는 일은 되도록 자제하자.
11. 21. 화
글쓰기, 독서가 안 되는 이유가 뭘까. 우선 열정 부족, 상상력 고갈, 시간 부족 등을 꼽을 수 있지만 소소한 주변 여건도 문제다. 첫째, TV시청 시간을 줄일 것. 리모컨을 서랍에 넣어놓고, 오후 8시 뉴스룸 하나로 제한한다. 둘째, 독한 마음자세를 가질 것. 독서에 더욱 몰입하고 글쓰기에 대한 의무감을 가질 것. 셋째, 어떤 형태든 상관없이 가볍게 쓸 것. 넷째, 환경 탓을 하지 말 것. 과연 지금보다 좋은 환경이 어데 있을까. 독서실 특성상 뭔가에 오랫동안 몰입할 수 없다는 험은 있지만 오전 시간, 특히 겨울 한철은 한가롭다. 잡담 제하고, 더욱 매진하자.
오후
Y씨 가족이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다. 오늘 오후 마침 Y씨 부부와 점심식사를 하게됐다. 모처럼의 외국 나들이 때문인지 식사 전부터 시작된 Y씨의 여행담은 자리를 옮긴 커피 타임까지 꽤 긴 시간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지극히 단출해서 ‘어데 어데를 다녀왔다’ ‘뭣을 봤다.’ 등 몇 마디로 요약되었다. 그나마 좌중의 흥미를 가장 끈 것은 여행 가방 분실사건이었다.
비단 Y씨뿐이 아니다. 대다수 사람들의 여행기는 누구랄것없이 공통적으로 ‘다녀왔다’ ‘봤다’ ‘먹었다’ 등으로 정리된다. 아마 요즘 카톡에서 흔히 볼수 있는 보여주기 식 인증샷과도 같을 것이다. 피상적인 관찰, 피상적인 이야기. 대체 단순히 본것만이 주된 내용이라면 어데를 다녀온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 TV를 통해 보든 실제 현장에서 보든 직접 가서 봤다는것 말고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긴 열흘 남짓한 짧은 시간으로 세세한 것을 관찰할 수는 없지만 이런 식의 여행이라면 단지 해외에서 시간보내기, 구경하기에 불과할지 모른다.
저녁
평소 독서가입네 자부하는 터지만 막상 이탈리아에 대해 아는게 없다. 몇몇 그리스 고전은 알겠는데 로마 고전은 문학, 예술사, 철학, 역사 모두 백지상태다. 만시지탄의 감은 있지만 스케치라도 해보자는 심정에서 두 권의 책을 골랐다. 하나는 진즉 사두긴 했지만 아직 읽지 않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다른 하나는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문화>다. 다행히 시간과 열정이 허락하면 단테의 <신곡>,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축쇄본까지 욕심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