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칼 바르트
무신론자인 내가 왜 신학에 관심을 갖는가. 이유는 철학이나 역사처럼 신학도 인문학의 한 범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학을 좋아하고, 철학서를 읽듯이 단지 지적 관심사 가운데 하나인거다. 신학서를 가까이한 때문인지, 간혹 교회에 다니는 친척들, 이웃들은 나를 예배당으로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신론을 자처하는 터에 겨우 신학서 몇 권 읽는다고 교회에 나갈수 있을까?
무신론자인 내가 볼때, 칼 바르트의 하나님론(신론), 그리고 예수론(기독론), 교회론은 서구형이상학이 그렇듯 완벽한 픽션이다. 단지 오랜세월 공을 들인 정교한 허구적 체계, 지적체계의 산물이라는 것. 신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설사 칼 바르트가 제 아무리 방대한 조직신학 체계를 세웠더라도, 문학적 상상력과는 유형이 다른 허구적 언설체계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내가 조직신학, 즉 어떤 종교라는 이름아래 체계화된 논리들, 특히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등에 관심을 갖는건, 한 지식인의 진지하고 정교한 종교적 상상력의 세계를 엿보고싶고, 그 상상력의 결과가 어떤 글로 나타나는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지적 즐거움을 맛보고 싶어서다.
2.도그마적 신앙
오랜만에 얼굴이나 볼까하고 참가한 스터디 모임에서 어느 독실한 크리스천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를 보세요. <터미네이터>도 마찬가지인데, 그것들은 모두 요한계시록을 말하고 있거든요. 바로 지구의 종말인 거죠. 그렇습니다. 혹 시간이 되면 꼭 이 영화들을 보세요. 신이 세상을 심판하는 엄숙한, 이런 무서운 광경을! "
신앙은 그토록 진지하게 수행하는 세상의 모든 지적노력을 한순간에 유희 차원으로 전락시킨다. 대체 신앙 앞에서 무슨 토론이 가능할 것이며 지적 탐색이 이뤄지겠는가.
기이한 것은 한 인간에게 신앙과 인문적 지식이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인데, 이러한 도그마적 신앙에 따른 모순성은 일면 아마추어리즘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결국 내가 모든 형태의 신앙을 거부하는 것은 일순간에 판단정지케 하는 그 단순성, 맹목성 때문이다.
과장한다면, 절대적 믿음(신앙)에 의해 무오류, 무조건적인 안락을 기대하는 신앙은 어떤 의미에서 생활인의 아마추어리즘과 흡사하다. 일체의 회의가 배제된 일상의 쾌락! 상식, 관습, 안락, 보편적 평균성을 강요하는 일상!
종교는 그 성격상, 아울러 그 말의 어원이나 그 체제의 역사상, 워낙 자유가 없는 곳이다. 그곳은 자유의 반납으로 인해 가능해지는 특이한 종류의 쥬이상스를 체계의 맹점으로 지니는 곳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상의 권리는 사실상 종교와 종교 사이의 자유, 요컨대, 종교가 없는 빈 곳 속에서의 자유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는 게 낫다.
강군이 싸우는 문제는 미션계 대학들에서도 똑같이 재론되고 있다. 심지어 일부 교수들조차 그 강압에서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물론 한국의 종교사회와 그 엘리트 관료들은 이 10대의 소년이 성취한 정신적 자유와 결기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을 것이다. 2005년, 종교의 자유를 '내가 내 종교를 믿을 자유'로 해석하는 짓을 넘어설 때도 되었다. 우선적으로 그것은 '내 이웃들이 내 종교를 믿지 않을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 김영민(철학자)
*******
한국 사회를 살아가자면 온갖 유형무형의 폭력을 감수해야 한다. 가령, 강압적인 종교 권유도 그중 하나인데, 가까이는 가족, 친척, 이웃들로부터, 거리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까지 시도때도 없이 교회에 나가라고 성화다. 올해 일흔 나이인 고모님은 만났다하면 오만상 찌뿌리며 일갈한다.
"얼른 교회 나가야지, 집안을 구원해야 할 장남이 이게 무슨 짓이냐. 죽으면 지옥 갈텐데 두렵지도 않냐? 아이구, 너 통도 크다!" 그러고는 짐짓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마무리한다. "결국 큰 일을 당해야 교회 나갈거야. 요즘 네 얼굴빛이 평화롭지 않고 우울해보인다. 다 교회 안 나가는 탓이지".
아래 층 K 목사로부터 거의 석 달동안 교회 나오라 권유받다 이제 겨우 끝났다. 으~ 지겨운 인간! 어느 날 의료원에 문병다녀오다 황당한 일을 당했다. 문병을 끝내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에 막 도착할 무렵,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앞을 턱 가로막더니,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할렐루야!" 라며 귀에대고 속삭였다. 졸지에 당한 일이라 깜짝 놀랐다. 병원 문을 나서려니 나도모르게 볼맨소리가 나왔다. "별 미친놈 다봤네!"
사실 종교의 자유가 지켜지지 않는 곳은 바로 가정이다. 상당수 초등학생은 물론이고 고교생들까지 부모들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침해받고 있다. "교회 가봐야 어차피 졸다가 와요" "가기 싫은데 엄마가 강제로 떠다밀어요" " 엄마 몰래 피시방에 있다가 교회 끝나는 시간에 집에 가거든요" 등등. "그래, 조금만 참아라, 대학생이 되면 그때는 안 나가도 되니까?" 이쯤되면, 지금 우리 학생들은 입시지옥과 종교지옥이라는 두 개의 지옥(감옥) 속에 갇힌 형국이 아닐까. 짜샤! 내가 좋으면 너도 다 좋은거야,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나쁜짓 시키겠냐. 잔말말고 디립다 믿어, 믿고 천당가라구!
고대 그리스의 신의 대한 숭배는 '예술적 이야기하기'(비극 공연)를 통해 이뤄졌다. 가령 디오니소스 신의 숭배는 두 가지 방법으로 하는데, 하나는 먹고마시고 취하는 카니벌적 축제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적 이야기하기, 즉 비극공연이다.
오늘날 한국사회 역시 신의 숭배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금연, 금주 등 금욕적인 '극기훈련'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 등 '돈을 바치는 행위'를 통해서다 .
5.십일조
N은 나이롱 신자인데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반 강제로 교회에 나간다. N과 나는 이 말 저 말 끝에 십일조가 화제에 올랐다. 당신도 십일조를 내남? 하고 묻자 그는 소태씹은듯 상을 찌뿌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글쎄, 우리 형편에 무슨 십일조냐며 투덜대도 그의 아내는 끄덕도 하지 않는단다. 이유인즉, 자녀들의 안녕 때문이라는 것. 그러니까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하나님이 외면할게고, 결과적으로 자녀들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부부가 내는 십일조는 자녀를 위한 '생활안녕보험'쯤 될까? 월 납부액이 많은만큼 만기 환급금 역시 많을게고 따라서 천당까지 보장되는 보장성 생활안녕보험!
6. 샤머니즘과 한국종교
모든 형태의 고등종교는 사람을 좀 외롭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멀리 호메르스의 신화적 세계를 비롯해서 기독교든 불교든 보편적인 종교들은 불가피하게 합리적, 이지적이어서 그로부터 심정적 위로를 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보편적인 고등종교와 달리 샤머니즘은 사람들에게 심정적 위로와 공감을 쉽게 주는대신 인간들의 야수적인 탐욕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사회는 기독교, 불교, 천주교, 유교할것없이 그 어떤 종교든 샤머니즘이라는 블랙혹 앞에 완벽히 무릎을 끓고 말았다. 샤머니즘! 그것은 온갖 반동적인 것의 근저에 똬리를 틀고 있으며, 노예적 세계관에 기생하거나 연명한다.